글씨 21

글씨와 놀다. 매거진 '글씨 21'

서예·캘리그라피

[Interview]

2017-06-05
이 작가의 思생활, 황석봉

전통서예와 현대서예의 경계를 넘나드는 서예가 시몽 황석봉


그저 서예가 생각나고또 생각났다너무나 좋고 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서예가 시몽 황석봉 선생에게는 물질적 사회에 부딪혀 몇 차례 붓과의 관계가 소홀 할 수밖에 없었던 시절이 있었다하지만 그저 서예가 생각나고또 생각나서 좋고 계속하고 싶었을 뿐이었다시대의 변화에 따라 서예계의 극한 위기의식을 느낀 그는 서예인들 뿐 아니라 일반인들까지도 공감 할 수 있는 작품들을 시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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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몽 선생과의 인터뷰를 앞두고 그에 대해 많은 자료를 찾아보았다이미 서예계나 매스컴에서도 노출이 되었던 분에 대해 조사를 해 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다만 다양한 활동들 안에서 그가 진정 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인지추구하는 것은 무엇인지가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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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선생님의 서예입문에 대해 궁금합니다초등학교 3학년 한문공부를 배우기 시작한 것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생각되는데요자세한 이야기 부탁드립니다.


서산에서 태어난 저는 초등학교 3학년 때 다리에 병이 생기게 됩니다골수염이라는 병을 앓게 되었는데이 병 때문에 학교 다니는 것을 중단하게 되고 집에서만 지내게 되었습니다그때 동네 아이들 몇 명과 함께 서당 선생님들 집으로 모셔 한문공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대학(大學), 논어(論語), 맹자(孟子), 중용(中庸), 시경(詩經), 서경(書痙), 주역(周易등 사서삼경(四書三經)을 전부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3년간 병을 앓게 되고이후 서울로 올라가게 되었습니다대학교에 입학 하면서 서지학 전공을 선택하게 되었는데대학생활을 하던 중 문득 마음속에 무언가에 대한 불꽃같은 열정이 막연히 솟구쳤습니다. ‘그것이 바로 서예다.’ 라는 것을 깨우치고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서예가가 누구인지 수소문을 하여 학남 정환섭 선생님을 찾아뵙게 되었지요그 후 10년 뒤에 학남 선생님과 친구분이셨던 산정 서세옥 선생님에게 서예뿐아니라 전각그림까지 배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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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포헌(浦軒), 시몽(是夢)이라는 두 개의 호를 사용하고 계십니다. 90년대 이전에 포헌이라는 호를 사용하시다가 90년대 이후부터 시몽이라는 호를 사용하시는데 담고 있는 뜻이 궁금합니다.


우선 포헌(浦軒)’은 물가라는 뜻을 가진 포()와 집이라는 뜻의 헌()을 썼는데고향인 서산이 바닷가와 가까워서 첫 번째 호를 포헌이라 짓게 되었습니다. 1990년대에 들어서 특별한 분야를 공부하게 되는데 그곳에서 꿈에 대한 깨달은 바가 있었습니다그래서 이 모든 것이 다 꿈이다.’ ‘꿈도 꿈이고생시도 꿈이다.’라는 뜻으로 시몽(是夢)이라 짓게 되었고 사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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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봉 作 나와함께 / 80x53cm

 

Q. 선생님께서는 젊은 나이에 국전입선미술대전개인전 등 경력이 화려하십니다지금도 청춘이시지만지금보다 더 젊은 나이였던 시절에 서예는 어떤 의미였습니까?


1972년 처음 국전 입상을 하게 되었습니다그때 당시 최연소 입선이라는 말도 듣곤 했죠대학 생활을 하면서부터 서예에 입문했지만지금까지 서예에 대한 생각이 변함없습니다.

서예가 제 인생에 전부였고서예 말고는 다른 것이 제 인생에 끼어들 틈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제 전공은 서지학이라고 말씀드렸었는데전공은 거의 제쳐놓다 시피 할 정도로 서예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좋아서 뛰어들었고미쳐서 하다 보니 서예를 할 때 가장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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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공직과 대기업에 근무했던 시절이 있으셨다고 들었습니다직장생활에서 예술가의 길로 들어서게 되셨는데어떠한 계기가 있었습니까?


제 인생에 있어 굉장히 극적인 대목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대학시절 창경궁 안에 장서각에 구분 없이 보관하고 있던 책들을 구분하고 정리하는 프로젝트에 교수님과 함께 참여했었습니다거의 제 손은 안 거친 고문서가 없을 정도로 모두 보고또 정리하게 되었는데당시 학생신분이었던 저는 졸업 후 문화재관리국 장서각 사무소에 정식 사서직 특채로 입사를 하여 근무를 하게 되었습니다.

 

3년 정도 근무를 하며 일에만 열중하다보니 또 서예공부를 더욱 많이 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그래서 서예에 올인 해야겠다는 욕심에 사표를 내던지고 나오게 되었습니다그 후 1년 반 정도를 서예만 하면서 생활하다보니 시간이 많아졌는데시간이 많다고 해서 서예공부가 더욱 잘 되는 것도 아니고 별다른 돈벌이가 없어 춥고 배고픈 시절을 보낼 수밖에 없었어요그래서 할 수 없이 다시 직장을 구하게 된 것이 기아자동차에 인사과였습니다대기업이라는 것이 아무래도 밤샘이 많고 시간 낼 수 있는 여건이 전혀 되지 않아서 이어지는 갈등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갈등 속에서 몇 년 근무를 하다가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결혼 후 3개월 만에 사표를 내게 되었지요그래서 지금까지도 우스갯소리로 사기 결혼했다고 이야기하곤 합니다.

 

내일이 보장되지 않는 삶을 살아야 했던 지난 시간들이 비록 불안했고집사람도 많은 고생과 희생이 있었지요뒤돌아보면 낭떠러지 같지만 다 살아지더라구요,, 힘들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두 번의 사표는 제 인생에서 최고로 잘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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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현대서예에 많은 애정을 쏟아 오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서예와 전각 뿐 아니라 문인화유화에 이어 입체의 장르까지 모두 섭렵하신 후 그것들을 선생님만의 것으로 표현해 내십니다여러 장르가 있겠지만 근래에 가장 관심 있는 작업은 어떤 것이 있는지 소개 부탁드립니다.


저는 한 가지를 오래하는 성격은 아닙니다이러한 부분이 장점이 될 수도 있고 단점이 될 수도 있겠지만보통 작가들을 보면 한 가지 아이템을 정하면 평생을 하는 작가가 있고 또 많은 변신을 하는 작가가 있는데 두 가지를 놓고 어떤 것이 좋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하지만 저는 한 가지에만 몰두하는 것은 안주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어서 매번 채찍질한다는 느낌으로 변신을 시도하고 또 변화를 추구합니다.

 

또 지금 어떤 작업을 하고 있다고 설명 드리기 어려운 것은저는 모든 작업을 즉흥적으로 하려고 합니다다양한 생활과 관찰을 통해 새로운 소재를 발견하게 되면 느닷없이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내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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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대한민국 서예의 발전에 있어 현대서예를 빼놓고 말할 순 없을 것 같습니다현대서예가 걸어온 길과 동향에 대해 선생님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전통서예로 국전의 초대작가가 된 다음문득 든 생각이 서예에 대한 위기의식입니다. “서예가 이러다가는 박물관으로 들어가고 말겠구나뭔가 서예가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겠다.” 생각했습니다.

많은 고뇌 끝에 현대서예라는 장르를 시도하였습니다. 90년도에 뜻을 함께 하는 사람 몇 명을 모아서 함께 전시를 하게 되었습니다. “서화의 동행이라는 타이틀로 전통을 넘어 현대성 있는 전시를 해보자라는 것이 시발점이 되어, 91년도에 더욱 변화하고자 하는 작가들을 찾아내어 현대서예협회를 창립하였습니다초대, 2대 이사장을 역임하면서 당시 3가지 캐치프레이즈가 있었는데, 1. 서예의 현대화 2. 서예의 대중화 3. 서예의 세계화였습니다. ‘서예의 현대화는 서예가 지금같이 한자교육이 끊긴 시대에 작품에 한자만 수십자를 써놓으면 젊은 사람들이 어떻게 읽을 것이며접근해 올 수 있겠는가 생각하여 현대적으로 작품을 풀어놓지 않으면 젊은 세대들과는 단절이 되겠다 싶어서 현대화를 추구했습니다. ‘서예의 대중화는 서예를 어려워하는 대중이 많다는 것을 우리가 인식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예를 들자면글을 너무 길게 쓰지 말고 4글자를 쓴다거나컬러를 사용하거나종이재료를 화선지에만 국한되지 않는 등의 다양한 변화를 통해 대중에게 다가갈 것을 이야기했고마지막 서예의 세계화는 동양에서만 통하는 예술이 아니라 그 문턱을 낮춰서 세계미술시장으로까지 나아가는 목표를 정하자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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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나름의 노력을 들여 91년도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여 지금까지 거의 30년 가까이 이어져 왔습니다처음 시작했을 당시에는 새 바람을 일으키며 많은 서예가들의 기대와 응원을 받았지만지금까지도 현대서예를 하는 작가들이 큰 빛을 보지 못한 상황이라서 아쉬움이 많이 남았습니다그래서 지금은 다시 한 번 환기를 시켜 제2의 부흥을 꾀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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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봉 作 실중삼관 / 133x166cm

 

Q. 그렇다면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현대서예와 전통서예가 가진 매력은 무엇입니까?


전통서예는 신언서판(身言書判), 사람이 갖춰야할 4가지 중에 하나인 글씨문자향서권기(文字香書卷氣), 단순히 글씨를 잘 쓰는 것을 떠나 학문적 깊이는 인간의 내면세계가 묻어나오는 것이라 여기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예부터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입니다또한 아름다운 시문장언어 등을 가독성 있게 표현하는 것이 장점이자 매력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만이것을 시각예술로서의 욕구를 충족하기가 부족합니다. ‘현대서예는 현대성의 장점으로 요즘 시대의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으며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매력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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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봉 作 판치생모 / 133x166cm

 

Q. 현대인들이 서예를 어려워하기 때문에 비교적 접근이 쉬운 캘리그라피가 각광을 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선생님께서 현대인들에게 현대서예의 감상법을 알려주신다면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글쎄요작품 감상이라는 것은 현대서예뿐 아니라 다른 예술도 마찬가지로 관람객이 해석하여 보는 재미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물론 작가가 의도하고 작품을 하겠지만그 의도한 데로 설명을 하고 보면 오히려 관람객이 더 재미가 없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상상할 수 있는 여지를 줘야 하는데 상상의 재미를 뺏어버리게 되는 것 같습니다캘리그라피나 현대서예를 감상할 때 저는 전통서예를 공부한 후 현대서예를 했기 때문에 기본기를 강조하는 편인데현대서예를 기본기가 없이 하게 되면 펜글씨나 다름이 없어서 그것은 서예라고 할 수 없다고 봅니다기본기가 있는 상태에서 현대서예나 캘리그라피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감상법을 말하기 전에 우선 현대서예작가들이 작품을 할 때 관람자의 입장에서 관람자가 쉽게 이해할 수 있게 작품을 하는 것이 먼저 인 것 같아요현대서예는 어떻게 보면 전통서예보다도 감상법이 더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일반인들이 봤을 때 못 알아보더라도 보고 즐길 수 있는호감이 가는 작품을 하는 것이 먼저다.” 라고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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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시몽 황석봉이라고 하면 <서산창작예술촌>에 대한 이야기가 빠질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서산창작예술촌>이 생기게 된 계기와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이 궁금합니다또 이런 노력들은 일반인들에게 어떠한 메시지를 남기기 위함인가요?


卷氣), 서산창작예술촌은 2011년 개관을 했습니다서산시에서 운영하는 문화예술공간으로 원래는 분교자리인데 폐교가 되면서 폐교를 매입하여 창작예술촌으로 만들었습니다서산시에서 출향 작가중 저를 초빙하여 입주작가 겸 운영자로 와있게 되었습니다고향에서 불러주셔서 기분 좋은 마음으로 오게 되었고이완섭 서산시장님의 배려로 창작작업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었습니다창작품은 상설전으로 운영하고초대전과 기획전을 열어 서산시민들에게 문화향수권을 줄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또한 남녀노소 모두 즐길 수 있는 도자서예체험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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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봉 作 - 마조원상 / 133x166cm

 

Q. 굉장히 독보적인 작품을 하시는 것으로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그 때문인지 앞으로의 작업 활동도 더욱 기대가 되는데요계획하고 있는 작업이 있다면 살짝 들려(보여)주실 수 있을까요?


앞서 관심 있는 장르에 대해 질문에서도 답했지만 저는 항상 새로운 작업을 하고 싶습니다굉장히 즉흥적인 편이에요여담을 말씀드리자면여기는 서산시에 소속된 공간이기 때문에 서산시 공무원 분들이 항상 작품이나 전시를 할 때 미리 계획하고 정보를 알려달라고 귀가 닳도록 말씀하시는데그러겠다고 대답도 하고 그러려고 해도 늘 즉흥적으로 일을 벌이게 돼서 저를 많이 힘들어 하시죠,^^ 계획도 중요하겠지만 작가는 즉흥적으로 작업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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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개개인마다 자신만의 작업 스타일이 다 있을 텐데요선생님만의 작업스타일 또는 작업에 집중할 수 있는 방법이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주로 전각 작품을 할 때는 고요한 밤에 작업하는 것을 좋아합니다붓 작업 같은 경우는 끌릴 때 하게 되는데보통 글씨를 쓸 때 주변에 사람이 많으면 좀 부담스러워 할 수도 있는데 저는 오히려 관객이 많으면 단번에 끝내는 작업을 잘합니다작년 연말에 방송국에서 요청이 와서 퍼포먼스를 하게 되었는데 단번에 끝낸 작업들이 의외로 좋은 작품들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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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봉 作 () / 133x166cm

 

Q. 앞으로 함께 서예를 이끌어 나아갈 젊은 청년들에게 전할 당부의 말씀이나 응원의 메시지를 남겨주세요.


제가 당부하면 따라할까요? ^^ 굳이 한마디 한다면 동양 고유의 예술 양식인 서예를 어떻게 재해석하여 표현해 내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새롭게 재창출하려는 실험정신이 필요 됩니다마지막으로 서예를 하는 젊은 청년들에게 즐기고 미쳐라라는 한마디를 하고 싶습니다미치고 즐기는 사람은 못 따라오는 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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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봉 作 서산창작예술촌 상설전시작품

 

소통(疏通), 대한민국을 들썩이게 했던 불통(不通)의 아이콘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 뇌리 속에 소통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새겼을 것이다이미 전통서예에서 인정받은 실력 있는 서예가인 시몽 선생은 관객과의 소통을 가장 우선시 했다다소 진부한 관객과의 소통이라는 표현은 어쩌면 도태(淘汰)되고 있는 서예계에서 간과해서는 안 될 부분 중 하나일 것이다현대서예를 통한 서예의 재도약을 꿈꾸는 시몽 황석봉’ 의 에 대해 깊이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인터뷰 김지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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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봉 作 臥禪(와선) / 62x35cm

 

 

시몽 황석봉

<약력>

 

-대한민국미술대전 연3회 특선등 초대작가

-국립현대미술관 초대작가

-1회 광주비엔날레-문인화와 동양정신전

-개인전30회이상(서울,파리,학고재,초대전 등)

-現 서산창작예술촌 디렉터

 

작품소장


서울시립미술관,예술의전당,경기도미술관,광주시립미술관,

독일 베링거 잉겔하임 컬렉션(2012)


개인전

 

⦁ 2012 14회 초대전(MULPA SPACE,서울)

⦁ 2008 13회 초대전(서산문화회관)

⦁ 2007 12회 초대전(MULPA SPACE,서울)

⦁ 2006 11회 초대전(청담미술제,청화랑)

⦁ 2003 10회 초대전(학고재)

⦁ 2002 9회 초대전(서산문화회관)

⦁ 2001 8회 초대전(청화랑)

⦁ 1998 7회 개인전(서초갤러리)

⦁ 1994 6회 개인전(금호문화재단개인전(갤러리 홍)

⦁ 1988 4호 개인전(파리 한국문화원)

⦁ 1987 3회 개인전(신세계백화점 신세계화랑)

⦁ 1984 2회 개인전(경인미술관/동경문화원초대전)

⦁ 1978 1회 개인전(학산도서관)

 

단체전


⦁ 2016 Made in Asia Festival(프랑스뚤루즈까노페)

⦁ 2016 KOREAN Passion Meets India Korean Cultural Centre India

⦁ 2016 한글서X라틴타이포그라피(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 2015 전통이 미래다(태광그룹 선화갤러리)

⦁ 2015 수상작가 특별전(대한민국미술대전 회고 한국서예박물관)

⦁ 2015 항주국제현대서예법예술전(중국미숙학원전시장)

⦁ 2014 문자문명전(창원성산아트홀)

⦁ 2014 서로로 서예박물관 기금마련 아트옥션

⦁ 2013 세계서예 전북비엔날레(한국소리문화의전당)

⦁ 1996 한글서예의 오늘과 내일전(예술의전당 기획)

⦁ 1995 세계의 문자전(예술의전당 기획)

⦁ 1995 ARTE CONTEMPORANED 90 EXPOSICION/Galeria Neptuno(스페인 마드리드)

⦁ 1995 1회 국제현대서법 비엔날레(중국 항주)

⦁ 1992 "92 서울국제현대서예전(현대서예협회기획 예술의전당)

⦁ 1991 한국서예40대작가전(예술의전당 기획)

⦁ 1991 한국현대서예협회 창립전(예술의전당/초대이사장)

⦁ 1989 서울국제회화제(동덕미술관)

⦁ 1987 현대미술초대전(국립현대미술관)

⦁ 1985 미국Licolin Center 전시 Workshop(문공부 주관)



법고창신(法古創新) - 서예그 전통과 현대화의 사이에서 황석봉의 작업을 중심으로

 

정준모 미술행정미술사


새로운 미술로서의 서예와 황석봉


오늘 날의 서예는 21세기라는 새로운 시간에 적응하고 관객과 독자들과 소통하기 위해서도 고매한 인품을 지녔으나 고루하지 않고 신선하고 창조적 비전을 가졌으되 경망되지 않은 그런 모습을 갖춘 선비 같은 서예가즉 법고창신하는 자세를 갖춘 서예인을 기다리는지도 모른다황석봉의 현대서예를 위한 간단없는 실험이나 행위가 주를 이루는 퍼포먼스들은 서예의 현대화 또는 현대서예를 위한 그의 몸짓이자 행동이었고 실천이자 실현이었다.


그는 1949년 충청남도 서산시 성연면 예덕리 357에서 태어났다부유하지는 않지만 어려울 것 없었던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불행하게도 몹쓸 병을 얻어 평생을 불편한 다리로 살아갈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그러나 그는 이런 역경을 이겨내고 오늘날 서예가예술가로서 나름의 몫을 다하는 서단의 중견으로 그리고 새로운 서법의 전통을 세워나갈 재목으로 각광을 한 몸에 받는 위치에 이르고 있다.


이후 전통문화에 대한 애정과 적지 않은 한문 실력으로 내공을 다져가던 그는 1969년 학남(鶴南정환섭(鄭桓燮)을 사사하기 시작하면서 서예의 아름다움에 빠져들기보다는 삶의 원리와 자연의 이치를 담고 있는 서예의 본령을 공부하면서 그는 더욱 더 서예의 깊은 맛에 빠져들 수 있었고 성균관대학교에서 서지학을 전공하면서 보다 깊은 한학의 세계로 빠져들게 되었다그 계기는 학부시절 녹록찮은 한문 실력을 눈여겨본 지도교수의 추천으로 30만권의 고서가 있는 창경궁 장서각에서 고서들을 활자와 연도별로 분류하는 작업을 하면서 말로만 듣던 책을 직접 읽어 보게 되면서부터다이때의 경험으로 그는 필사본에 나타나는 서예와 활자본에서 주는 정통활자체의 변화 그리고 연대에 따른 각각의 특성을 구분하는 안목을 얻을 수 있었다.


사실 그는 학남을 사사하면서 전통서예의 새로운 가능성을 고민하기 시작한 듯하다왜냐하면 학남은 바로 한국근대서단의 거목인 소전(小田 또는 小筌손재형(孫在馨, 1903~1981)의 애제자로 소전이 행하고자 했던 전통과 현대의 접목과 전통을 바탕으로한 서예의 현대화라는 명제를 실천했던 이다이러한 학남의 예술관은 포헌 황석봉에게 이어진다따라서 포헌은 전통필법을 제대로 이해하고 습득할 수 있었다그리고 그의 새로운 실험의 바탕에는 언제나 전통이라는 기초가 튼실한 오행서체를 익힌 후의 일이다따라서 그의 스승과 스승의 스승인 소전의 맥을 잇는 동시에 지금껏 새로운 서예현대적인 서예를 구현하고 실천하는 일에 몰두하게 하였다.

 

그의 초기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서예부문에 출품하여 예닐곱번 입상하는 작품들은 이런 전통서체를 습득하기 위한 연습과정이었다면 1982년 대한민국미술대전으로 개칭한 후 출품하여 연 3회 계속해서 특선의 영예를 안게 되는 작품들은 갑골문이었다그는 수련과정을 통해서 서예의 원류이자 모본은 갑골문이라는 것을 깨달았으며 그 갑골문은 절대불변의 동양예술의 이상이자 원형인 동시에 현대서예의 파격에도 불구하고 원칙이라는 사실을 인식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그리고 1981년부터는 마지막 문인화가라고 불리는 산정(山丁서세옥(徐世鈺)을 사사하면서 끝없는 문인화의 깊이와 절제미를 공부할 수 있었다이렇게 당대를 풍미한 두 걸출한 스승을 모실 수 있었던 포헌의 행운은 그를 더욱더 현대서예의 정립과 발전이라는 명제로 자신을 몰아가는 동력이기도 했지만한편으로는 스승을 넘어서야한다는 강박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사실 수묵화나 서예는 모두 애초에 추상적이다자연이나 대상의 색체를 거부하고 먹색하나에 의존해서 삼라만상의 내면을 그려낸다는 것이 그러하거니와 한편으로는 작가의 심오한 사상이나 자연관을 그대로 담아낸다는 점에서 그렇다는 것이다그리고 서예의 최고 원형은 갑골문이라는 사실이다그러나 한자의 원리를 알지 못하면 갑골문의 해독은 거의 불가하다따라서 서체의 원형서에도 불구하고 가장 추상적인 것이다따라서 소전이후 학남을 잇는 포헌에게는 전통적인 읽는 서예에서 보는 서예로 전환하는 토대를 갑골문에서 찾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그래서 그는 갑골에서 회화성을 그리고 초서에서는 음악성과 신체성을 구현하는 폭넓은 관심을 보여준다그리고 한편으로는 새로운 재료 즉 서예에서는 금기시하는 재료들을 과감하게 도입해서 새로운 서예의 가능성을 실험하기도 한다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커다란 화폭에 몸을 던져 그 궤적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퍼포먼스를 갖기도 한다그의 이러한 열정은 서예의 현대화와 현대인들과의 교통하는 서예를 꿈꾸기 때문이다.

 

그의 이러한 열정은 한편으로는 뜻을 같이 하는 서단의 선후배들을 규합해서 그룹활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물파나 한국현대서예협회등이 그것이다그러나 그는 이런 집단적인 운동을 주도할 뿐 어느 사이엔가 슬그머니 혼자로 돌아와 스스로를 갈고 닦는데 여념이 없는 나 홀로형의 작가이기도 하다아마도 이는 자신의 내부로 파고들어가는 스스로의 공부 방법 때문이다.


그간의 그의 작업을 살펴보면서 느끼는 것은 많은 방황과 실험에도 불구하고 이거다라고 누구도 답을 줄 수 없는 화두인지도 모른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렇게 집요하게 답을 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그것은 바로 현대서예란 무엇일까라는 실체를 얻고자 하는 몸부림의 결과이다그는 그 원형을 전서에서 찾고자 했다그리고 이를 토대로 초서의 행위성을 간파하면서 그림이면서 서예인 추상 충동적 작품을 완성하기에 이른다이러한 류의 작품들은 현대라는 의미를 추상이라는 의미와 행위라는 추상충동으로 이해함으로써 나타난 작품들이다따라서 외형적으로는 먹으로 그린 서양의 추상 표현주의 작품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러나 그들의 추상표현주의는 사실적인 묘사위주의 그림경향이나 개념적인 작품들에 대한 반발과 실존주의 등에 경도되어 나타난 화풍으로 서체추상의 포헌서예와는 외형상 흡사하나 그 출발이 다르다그리고 재료에서도 서양회화의 억센 붓과 캔버스라는 굵은 표현은 동양 재료들이 갖는 섬세하고 고운 표면과는 질적으로 달라 둘을 비교해 보면 매우 심약해 보이기 마련이다그래서 그의 이러한 실험은 다시 재료의 탐구로 이어졌으며 전통적인 재료들을 버리고 글자의 지지체인 종이를 버리고 다양한 질감을 갖는 마분지나 포장지골판지 등을 이용하면서 새로운 가능성을 실험한다재료의 물성을 극대화하면서 행위에 실린 몸짓의 크기와 무게는 보는 이들을 압도한다.

 

또 퍼포먼스의 경우도 그 스케일이나 관객들의 관심에는 매우 근접하게 접근할 수 있었지만 일회성과 현장이라는 한계로 인한 작업이 끝나고 나면 한바탕 춤을 추고난 무용가의 허탈함 같은 것이 밀어 닥치기도 하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현대미술이라는 움직이는 물체를 붙잡아 매려는 시도 때문이다오늘은 내일의 과거일 뿐이다오늘에 최선을 다하는 것만이 해답일 것이다그리고 또 다른 해법을 생각해 본다면 포헌의 지금까지의 작업을 정리하는 일이다즉 새로운 포헌의 예술을 정립시켜야 할 때가 온 것이다.

 

그 해답으로 많은 실험의 성과들을 스스로가 정리하고 다듬어 이제는 버리는 것이다.그 버림을 통해 얻는 여백과 정갈함은 마치 조선시대의 선비들이 거처했던 사랑방처럼 간결하고 정갈한 허허로운 여유를 담아 낼 것을 권하고 싶다행위가 많아질수록 화면은 복잡해지고 산만해지기 십상이다특히 매재의 실험에서 얻은 선염이나 발묵을 거부하는 재료에 대한 실질적인 접근과 함께 전통문인화의 정신을 이어 필획 한둘만으로 화면을 비움으로서 채워진꾸미지 않고 덧대지 않은 작품들로 현대서예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볼 수 있기를 희망한다그리하여 그의 작품에서 말은 마음의 소리이며 글씨는 마음의 그림이다(言心聲也書心畵也)라는 법언의 말씀을 볼 수 있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