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씨 21

글씨와 놀다. 매거진 '글씨 21'

서예·캘리그라피

[Column]

2017-07-18
성인근의 글씨를 읽다-5

 

아름답다는 것의 발견

 


영화이야기로부터 시작해 보자. 이창동 감독이 각본을 쓰고 연출한 라는 작품이다. 20105월에 개봉한 이 보석 같은 영화는 흥행에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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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동 감독, 포스터, 2010


영화에서 종욱이 할머니(윤정희)는 동네 문화원에서 우연히 '' 강좌를 수강하며 난생 처음 시와 마주하게 된다. 문화원에서 시를 가르치는 강사는 김용택 시인으로 김용탁이라는 이름으로 영화에 등장한다. 그는 동네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첫 강좌에서 본다라는 주제를 말하며 주머니 속에서 사과 하나를 쓱 꺼내며 말한다. 강의하러 오면서 사과를 준비할 정도로 준비성이 많은 강사가 어디 있겠냐며 너스레를 떨면서.

 

여러분은 지금까지 사과를 몇 번이나 봤어요?

천 번? 만 번? 십만 번?

아니요, 여러분은 지금까지 사과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사과를 알고 싶어서, 관심을 갖고, 이해하고 싶어서, 대화하고 싶어서 본 적이 없어요.

무엇이든 진짜로 보게 되면 뭔가 느껴지는 게 있어요. 샘에 물이 고이듯이, 종이와 연필을 들고 그 순간을 기다리는 거예요. 흰 종이의 여백, 순수한 가능성의 세계, 창조 이전의 세계, 시인에게는 그 순간이 좋아요.”

 

문화원의 두 번째 강좌에서 종욱이 할머니와 김용탁 시인 사이에는 또 이런 문답이 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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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틸컷-1


시를 쓴다는 것은 아름다움을 찾는 일이예요.”

선생님, 시상(詩想)은 언제 찾아와요?”

시상이 언제 찾아 오냐구요?”

, 아무리 시상을 얻으려고 해도 도무지 오지 않아요.”

시상은 찾아오지 않아요. 내가 찾아가서 빌어야 해요. 그래도 줄똥 말똥 해요. 그게 얼마나 귀한 건데 함부로 주겠어요? 그러니까 내가 찾아가서 사정을 해야 돼요.”

어디로 찾아가요?”

그거... 그거는... 어디를 정해놓고 찾는 게 아니고, 그냥 찾는 거예요, 돌아다니면서. 시상이 나 여기 있소라고 문패 걸어놓고 기다리고 있겠어요? 분명한 건 내 주변에 있다는 거예요. 멀리 있지 않고. 지금 내가 있는 자리, 거기서 얻는 거예요. 설거지통 속에도 시가 있어요.”

 

서예를 한다는 일도 시상을 찾는 일처럼 아름다움에 대한 찾아 헤맴의 시간이 필요하다. 문학을 포함한 모든 예술에서 작가는 항상 무엇을’ ‘어떻게라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여기서 무엇을이 표현의 대상이나 목적이라면 어떻게는 그 방법에 해당한다. 무엇보다 창작에 있어 첫 번째 직면과제는 바로 무엇을이며 시로 말하면 시상에 해당한다. 서예가들도 창작의 목적과 방법을 수천 년 고민해 왔다. 하나의 사례로, 지금부터 1,300년도 더 이전 사람인 손과정(孫過庭)은 붓을 들기 전 선결과제로 다섯 가지 조건을 들었다.

 

1. 마음이 편안하고 세태에 간여하는 바가 없을 때.

2. 지기(知己)로부터 은혜를 입어 감사하고자 하는 

     마음이 들 때.

3. 날씨가 청명하고 기후가 더 없이 편안할 때.

4. 양질의 지필묵이 있어 나의 흥취를 유발할 때.

5. 홀연히 영감이 동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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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과정(孫過庭, 646~691), 서보(書譜)상권


중요한 고전일수록 화자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맨 뒤에 있는 경우가 많다. 다섯 가지 조건 가운데 앞의 네 가지는 일상에서 어쩌면 흔히 만날 수 있지만, ‘홀연히 영감이 동할 때는 매우 관념적이지 않은가. 여기서 영감이 동할 때는 시로 말하자면 시상이 올 때와 흡사한 지점일 것이다. 그러면 종욱이 할머니의 질문처럼 그 영감이나 시상은 언제 찾아오는가? 해답은 역시 본다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다. 김용택 시인은 본다라는 시각만을 대표적으로 언급했지만 어떤 대상을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져보면서 느끼는 과정에서 이전과는 다른 세계를 만나는 체험, 그 지점에서 영감과 시상은 다가오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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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틸컷-2

 

샘에 물이 고이듯이, 종이와 연필을 들고 그 순간을 기다리는 거예요. 흰 종이의 여백, 순수한 가능성의 세계, 창조 이전의 세계, 시인에게는 그 순간이 좋아요.”

 

성인근 본지 편집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