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씨 21

글씨와 놀다. 매거진 '글씨 21'

서예·캘리그라피

[Column]

2017-05-08
박선영의 <캘리그래피 천일야화> 01

캘리그라피? 캘리그래피디자인?

멋글씨? 손멋글씨?


지금까지 별다른 의심없이 써왔던 '캘리그래피(calligraphy)'라는 용어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 한다. (외래어 표기법에 의하면 많은 사람이 사용하는 '캘리그라피'가 아닌 '캘리그래피'로 표기해야 한다)


캘리그래피에 대한 개념은 어떤 시각에서 보느냐에 따라 조금의 차이가 있으나, 일반적으로 인간이 사회를 이룩한 이래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고안된 형상을 손으로 쓰는 행위를 지칭하며, 문자를 가진 모든 문명권에서 공통된 예술로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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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느낌의 손글씨 표현들)        

                                                                        

최근 한국의 디자인계와 문화산업 여러 방면에서 일어나고 있는 캘리그래피적 표현의 양상은 이성적이고 기하학적인 기능주의 디자인과는 그 표현이나 접근방식이 다르며, 우리의 미적 정서와 일정 부분 합치된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우리 민족의 멋과 미가 자연과의 조화라고 생각해 볼 때 캘리그래피의 자연스러운 표현과 일맥상통해 있으며, 기계적이고 기하학적인 서양의 모더니즘과 달리 친근하고 부드럽다는 점과 어딘지 불규칙한 형태를 취한다는 데에 그 매력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일반대중에게도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친근감을 준다.


서구에서 이식된 디자인표현의 한계성을 극복하고 한국적 디자인을 창출해 내기 위한 한 분야로서 캘리그래피적 표현은 좋은 시도가 될 만하다. 캘리그래피적 표현은 영화와 TV 타이틀, 광고, 편집물, 패키지, 서체, 간판, 각종 로고타입 등 우리의 생활과 시각문화 전반에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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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픽테토스의 경구에 따라 그리스어로 쓴 클로드 메디아 빌라의 캘리그래피 작품(프랑스)


여기서 국내 디자인에 나타나는 캘리그래피적인 손글씨의 개념과 범주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 캘리그래피적인 손글씨라고 하면 손으로 쓰는 필기체를 떠올리거나 붓글씨를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현재로써는 그 개념을 엄밀하게 구분해서 사용하지 않고 있다.


캘리그래피의 개념을 좀 더 명확히 정리하자면 컴퓨터에서 개발한 일반 서체에 상대되는 개념으로서 손으로 직접 만들고 디자인한 모든 형태의 글씨를 포함한다. 덧붙여서 현존하는 글꼴을 만지고, 다듬어서 새로운 인상을 나타내는 방식까지도 포괄할 수 있다.


이규복 작가는 <캘리그라피(2008)>라는 책에서 calligraphy의 정의를 "캘리그라피는 문자를 매개로 받아들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적극적 해석을 유도케 함으로써 단지 읽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이미지화하여 보여질 수 있도록 하는 현대 조형 예술의 하나"라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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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터 길더 달의 캘리그래피 작품(뉴질랜드)


- 캘리그래피적인 표현의 우리식 용어 정립이 필요한가?


한글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쓰임새의 확장성에 기여한다는 캘리그래피적인 작업이 우리식의 용어 없이 서양의 비슷한 단어를 무비판적으로 쓰는 것을 두고 과연 적정한 것인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하지만 캘리그래피적인 작업이 한글에만 적용되는 사안도 아닌데 과연 한국적인 용어로 바꾸어 불러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도 생긴다


한글 타이포그래피로 유명한 안상수교수가 제안한 디자인의 우리식 용어 제안인 멋지음으로 일시에 바꾸기는 어렵듯이 캘리그래피라는 용어가 퍼진 상태에서 어떤 특정한 단어로 바꾸기는 어려울지도 모른다. 다만 이런 논의를 통해 점점 확대되는 캘리그래피의 외연에 대한 경계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며, 캘리그래피가 유행을 넘어 스스로의 자리매김을 모색하는 상황에서 우리안에서 존재를 규명하고 용어를 정리해 보는 것은 유용해 보인다.


캘리그래피라는 서양식 용어를 빌려 오기 전에 디자인 전반에 나타나고 있는 캘리그래피적인 표현을 우리나라 중심에서 우리의 시각 문화로 논의하고 용어를 살펴보는 것은 의미가 크다 하겠다. 용어나 말을 정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어떤 생각을 포괄하고 있으므로, 관념과 의식의 표현이며 존재를 규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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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 라드의 이슬람 캘리그래피를 사용한 포스터


문자 조형과 창제에 있어 자주적 의도를 가진 한글이기에 오늘날 디자인에서 나타나는 캘리그래피란 서구식 용어를 우리식으로 표현한다면 그 차이는 꽤 크게 느껴질 것이다. 현재 캘리그라피’, ‘캘리그래피’, ‘캘리그래피디자인’, ‘캘리디자인’ ‘손글씨등으로 제각각 부르고 있는 현실이다. 이런 현상을 이론적으로 규정해 제대로 표현한 용어는 아직 없다.


손으로 써서 글자에 멋을 의도적으로 더했다는 의미로 작고하신 김진평 교수는 『한글의 글자표현』(1983, 미진사)에서 '손멋글씨'라 정리하기도 했고, 월간 디자인넷이 2003년에 주최한 좌담회에서는 한글 타이포그래피에 대한 새로운 경향을 '솜씨체'라 제안한 바도 있다.


여기서 말하는 솜씨체란 손으로 직접 쓴 글씨체이면서 글자에 표정을 부여하고 목소리를 끌어내는 등 감성적인 측면을 강조하며, 기계적인 것의 상대적인 개념까지 내포하고 있다. 그 외의 의견으로는 멋글씨’, ‘멋짓글씨’, ‘감성글씨’, ‘마음글씨’, ‘표정체’, ‘상업서예’, ‘상업글씨등이 있다. 가까운 일본에서는 상업서도’, ‘디자인서도등으로 불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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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의 디자이너 칸타이킁의 포스터


좀 더 문헌을 살펴보면 세종대왕기념사업회 한국글꼴개발연구원의 한글글꼴용어사전(2011)에서는 '손 멋 글씨'<기계적 도구를 쓰지 않고 손으로 자유롭게 맵시를 나타낸 글자 표현. 손글씨의 개념보다 더 적극적인 조형 또는 디자인 개념을 강조한 글씨>라고 정의했다.


한국타이포그라피학회에서 편찬한 타이포그래피사전(2012, 안그라픽스)에서는 '손멋글씨(캘리그래피)' 옆 괄호에 캘리그래피를 넣어 동의어로 정리했다.


『한글디자인교과서』(2009, 안그라픽스)에서는 글씨(書)는 글자를 쓴 것으로 손멋글씨라고도 한다. 서예의 현대화 또는 실용서예 등 서예의 관점에서 다룬 것을 이야기하며, 한글디자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글씨를 그리는 것(레터링)이 아닌 쓰는 방법으로 한글을 디자인하는 것이라 했다.


필자 또한 고 김진평 교수가 제안한 '손멋글씨' 용어사용에 동의하는 바이며 캘리그래피라는 단어가 현재 한국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의 특수성을 설명하기에 충분치 않다고 생각되어 논문명에도 캘리그래피(손멋글씨)의 조형적 표현과 활용에 관한 연구(2005, 건국대디자인대학원, 박선영)라고 두 용어를 병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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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먹의 번짐과 공간미가 돋보이는 중국의 현대서예 작품


국립국어원 말다듬기위원회에서는 '캘리그래피(Calligraphy)'의 다듬은 말고 '멋글씨' 또는 '멋글씨 예술'을 선정하였다.(2012.07) 국립국어원은 의미의 적합성조어 방식간결성 등을 검토해 만든 것이라 하지만, ‘모두가 함께하는 우리말다듬기’ 홈페이지에서는 누리꾼의 추천을 받아 '이모티콘'을 '그림말', '웹진'을 '누리잡지', '세꼬시'를 '뼈째회', '젠트리피케이션'은 '둥지내몰림'처럼 다듬고 싶은 말을 한글로 순화해 추천하는 곳이라선정과정에서 어색한 표현도 있고 어감상 적합하다고 볼 수 없는 순화어 추천일 때도 있다.


물론 '리플''댓글', ‘피싱전자금융사기로 추천한 것처럼 비교적 널리 쓰이는 용어도 있다.


마뜩잖은 것은 멋글씨냐? 손멋글씨냐?의 적합성 문제가 아니라, 기존에 유사한 대체용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장에서 사용하는 전문가들과 업계의 의견이 빠진 채 타자에 의해 정해지고 발표되어 혼란을 준다는 점이다. 일부 작가들 또한 국립국어원이라는 권위에 기대어 표준국어대사전에 수록되지도 않은 이벤트 형식의 순화용어 권장사항을 마치 금과옥조처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서 사용하는 것도 아쉬운 부분이다. 문헌과 역사적인 맥락을 살피지 않은 것에 기인한다고 본다.

국립국어원 홈페이지 게시판의 순화어 설명 아래에는 자가 빠지면서 기계로 찍은 인쇄 활자체도 멋지면 멋글씨라고 할 수 있지않냐는 반론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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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의 처음처럼 서화


캘리그래피를 서예 쪽에서는 동북아 한, 중, 일(서예(書藝), 서법(書法), 서도(書道))의 통합적인 용어로 書를 이야기하며 큰 틀에서 書의 범주에 넣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고, '서예'의 영문표기가 'Calligraphy'이기 때문에 구분을 요구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속한 것을 이야기하는 것과 현상 그 자체를 지칭하는 용어는 세분화가 필요하고 달라야 할 것이다.


'서예'를 서양의 캘리그래피나 현재 한국에서 유행하고 있는 캘리그래피 성황과 구분하기 위해 'East Asian Calligraphy'나 'Chinese Calligraphy'로 번역하기도 하며, 더 나아가 우리만의 'Seoye(서예)'로 표기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듯이 말이다.


또한, 서예과의 이름이나 서예 행위를 '서예문자예술', '문자조형예술'이라 하기도 하듯이 특정 분야와 현상을 지칭하는 용어는 구분해 사용할 필요가 있다.


캘리그래피는 새로운 글씨체를 고안해서 다양한 도구를 사용해 자유롭고 창의적으로 글자를 표현하고 콘셉트에 의한 표현을 한다는 점에서 동양의 전통서예와는 구분된다 할 것이다.


가끔 일각에서 서예의 순수성만을 강조하기도 하는데 현대의 캘리그래피는 분명 응용예술과 실용의 성격이 더 강한 것 아닌가?

 

) 한국시각정보디자인협회에서는 시각디자인의 한 분야로 캘리그래피분과를 두고 있다.


또한, 서예단체와 디자인단체 공모전에서 캘리그래()피 분야를 포함해 진행하고 시상하며, 일반인 대상의 가벼운 손글씨 공모전도 심심치 않게 개최되고 있다.


근래에는 서예와 디자인계뿐만 아니라 생활예술의 범주로 들어가기도 해서 백화점과 구청의 문화센터나 사설 문화예술단체에서도 캘리그라피 강좌와 분과를 운영하고 있다. 유행처럼 각 단체의 성격(서예, POP, 펜글씨)에 맞게 캘리그래()피 용어를 넣어 조어해 사용하고 있는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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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의 처음처럼을 활용한 소주잔


) 한국캘리그라피디자인협회에서는 우리식 표현에 대해 장기과제로 논의 중이며 캘리그라피, 캘리그라피디자인 등으로 사용하고 있다.


현재 캘리그래피디자인 교육기관에서는 '캘리그라피', '캘리그래피디자인', '손글씨', '멋글씨', '손멋글씨', '감성 캘리그라피', '감성글씨' 등의 용어를 각자 혼용해서 사용한다.


자신의 특성에 맞게 각자 사용하는 것은 좋으나 용어가 길다는 이유로 '캘리'라는 정체불명의 약어로는 안 불렸으면 좋겠다. 최소한 글자로 표기할 때는 전체용어를 써줘야 하지 않을까? 아래의 캘리그래피 정의에서도 나오듯이 '캘리(Calli)''아름다운'이라는 접두사이기 때문이다.

 

서양의 경우는 간단하고도 명확하다. 캘리그래피(Calligraphy)아름다움을 뜻하는 그리스어 칼로스(κάλλος, kállos)’글쓰기를 뜻하는 그리스어 그라페(γραφή graphẽ)’에서 비롯된 합성어로서, 아름다운 필적(筆跡), 달필(達筆), 능서(能書, Beautiful handwriting, Finepenmanship)를 의미한다. 우리말로 다시 해석하면 서법(書法)이나 서예(書藝)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캘리그래피를 곧 서예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이를 위한 영어 표현은 펜맨쉽(Penmanship)이라고 따로 있다. Penmanship(서예)은 글자를 쓰는데 작가가 법칙을 가지고 문자를 예술화시킨 글씨를 뜻한다.


또한, 서양에서 손으로 쓴 글씨체는 장식적 흘림체인 캘리그래피나 스크립트(script) 이외에도 거칠게 휘갈겨 쓴 Scrawl, 긁어내고 끌로 파낸 것 같은 Scratch, 장식적이고 디지털 타입을 손으로 모사한 Simulate, 글자에 입체감과 생명감을 넣어주는 Shadow 글씨체 등 다양한 기법에 따라 세분화해 불리기도 한다.


서양과 동양의 캘리그래피는 필기구를 포함한 문자의 여건이 다르므로 서양의 캘리그래피를 라틴(영문)캘리그래피라 구분해 부르기도 한다.


이슬람 캘리그래피를 터키에서는 자신들의 언어인 하트(Hat)’라고 부르듯이 범용으로 사용하는 캘리그래피라는 단어와는 별개로 우리의 생각이 들어간 우리만의 용어를 정의하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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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수서예와 상업서예의 차이, 캘리그래피디자인은 무엇인가?

 

서예는 글씨로 표현하는 시각예술이자 문자를 소재로 하는 순수 조형예술이다. 자신의 사상이나 감정 또는 이상을 서예로 표현하기에 주관적인 성격이 강하다. 본래 서예의 역사는 한자를 대상으로 하던 시대부터 시작되었고, 그 당시 글 쓰는 도구가 붓이었으므로 붓글씨라고 별칭을 가지게 되었다. 한자는 기본적으로 상형문자의 원형을 그대로 지녀왔고 붓과 먹, 종이를 통해서 나타나는 글씨는 그 자체가 조형적인 요소를 함유하고 있다. 그러므로 한자문화권에서는 일찍이 한자를 예술적 감상의 대상으로 삼아왔다.

 

우리의 고유 문자인 한글이 탄생한 것은 15세기에 들어서이고, 당시로는 그것이 심미의 대상으로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에 서예 하면 먼저 한자를 떠올리게 되고 붓글씨를 대표적으로 인식하는 것도 당연하다. 분명한 것은 현재 디자인 현장에서 활발하게 작업 되는 글씨들은 서예나 붓글씨의 개념과 범주와는 엄연히 다르게 구분되어야 한다. 캘리그래피디자인은 단지 글자를 쓰는 그 자체를 일컫는 것이 아니라 명확한 디자인 의도에 따라 콘셉트에 맞는 글자를 얻기 위해 다양한 필기구를 이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캘리그래피디자인을 붓글씨 또는 서예의 개념으로 인식하면 범주와 미학적 측면에서 오류를 범하게 된다.

 

순수서예와 상업서예의 차이는 예술성이나 조형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목적에 있다 하겠다. 순수서예도 상업적인 목적에 의해 변형되거나 응용되어 쓰였다면 상업서예로 불리기도 한다. 다만 상업서예는 가독성에 더 방점을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현대의 캘리그래피디자인은 서예가 아닌 손글씨와 활자 이외의 글씨 작업을 포함하게 되어 더 범위가 넓어졌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캘리그래피적인 표현의 손글씨들을 캘리그래피로 뭉뚱그려 부르다 보니 서예의 영문명 Calligraphy와 같아 혼동이 올 수 있다. 그나마 뒤에 디자인을 붙여 캘리그래피디자인이라고 명명함으로써 혼동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실생활에서는 캘리그래피 혹은 캘리로 줄여 부르기 때문에 전통 서예의 영문명인 Calligraphy와 구분이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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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시대 이후 새롭게 주목받은 캘리그래피는 활자가 기계의 한계를 넘어 다시 손의 세계로 회복되었고, 그 결과 촉각성까지 획득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캘리그래피디자인을 영향력 있는 새로운 스타일로 볼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리는 측면도 있다. 그에 대한 견해나 입장보다는 이런 작업이 가능하게 된 정황적 근거를 살펴보자면, 디지털 기술이 우리에게 던져준 중요한 인식의 변화 중 하나는 활자의 이미지성을 파악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활자는 전달의 기능이 가장 중요한 임무였다. 그러므로 활자 한 자 한 자 낱자가 지닌 조형성이나 미학적인 가능성에 관해서는 관심을 두지 못했다. 그러나 컴퓨터 기술은 활자 낱자에도 이미지성을 부여할 수 있게 해주었다. 전달에만 전념했던 언어 본래의 목적에 대한 새로운 각성이 일어난 것이다.

 

지금 우리 문화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캘리그래피디자인은 바로 이런 활자에 대한 이미지성의 표현이라는 맥락에서도 파악될 수 있다. 글자 하나하나가 지니고 있는 표정과 목소리를 조절하고 만드는 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므로 캘리그래피 디자인을 단지 기계 미학에 저항하는 손의 촉각성 회복이라는 대립적인 입장으로 파악할 것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디지털 기술 덕분에 새롭게 인식하게 된 활자의 이미지성에 대한 탐색과 실험의 한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디지털 이전의 아날로그에 대한 향수와 함께 이 둘의 장점을 합쳐 표현의 범위를 더욱 새롭게 확장하려는 움직임일 수 있다.

 

 


여태명의 작품 쉼(한국)

 

 

우리나라의 캘리그래피적인 손글씨는 서예에 기반을 두고 출발하긴 했으나 디자인과 문화로 범위를 넓혀 활자 이외의 손으로 직접 만들고 디자인한 모든 형태의 글씨를 포함하고 있다.


그 배경에는 문자의 시각적인 이미지의 역할 확대, 실험적인 타이포그래피의 발달, 기계 미학에 저항하는 손의 촉각성 회복, 동양적 감성과 미적 정서에 맞는 표현, 모필 문화의 전통, 한글에 대한 조형의 발견이라는 측면에서 배경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파주타이포그래피학교의 날개 안상수는 말은 하나의 이데올로기이며, 말은 그 자체로 이미 어떤 생각을 포괄하고 있고, 우리의 존재를 규명하는 것 또한 언어라 했다.


현시대에 캘리그래피라는 단어 또한 어떤 생각과 뜻이 들어가 있는지 우리만의 해석으로 정의 할 때가 온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던 용어와 그 정의를 작가와 사용자들의 생각과 존재가 들어가 있는 우리만의 용어로 의논하고 재정리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시도가 될 것이다.

앞으로 다양하고 활발한 논의가 이어지길 기대해본다.

 

 

박선영(야림) 그래픽디자이너, 캘리그래퍼

996크리에이티브랩 소장, ) 한국캘리그라피디자인협회 이사, 전 한국시각정보디자인협회 이사로 활동했다. 동양적인 문화요소와 조형을 현대적인 디자인 언어로 융화시키는 작업에 관심이 많은 그는 독립적인 프로젝트 활동 및 출판과 한글 관련 프로젝트와 전시에 참여하고 있으며, 서울예술대학교에서 우리 문자의 조형을 강의한다. 논문 <캘리그래피(손멋글씨)의 조형적 표현과 활용에 관한 연구>(2005)를 발표했고이탈리아 Utilita Manifesta/ Design for Social 2010에서 작품이 선정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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