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씨 21

글씨와 놀다. 매거진 '글씨 21'

서예·캘리그라피

[Column]

2017-05-08
박선영의 <캘리그래피 천일야화>02

꼬리에 꼬리를 무는 캘리그래피이야기

 

몇 년 전에 기억을 잃어가는 한 여자와 그 여자를 지켜주는 남자의 지고지순한 사랑 이야기로 안방극장을 수애앓이에 빠지게 한 드라마가 있었다. ‘천일의 약속은 두 주인공 지형(김래원)과 서연(수애)의 슬픈 사랑 이야기는 물론 매회 드라마가 시작할 때 등장하는 타이틀에도 눈길이 갔다. 캘리그래피를 사용한 타이틀 중 약속이라는 단어가 어딘지 모르게 묘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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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 천일의 약속(2011) _ 캘리그래피 강병인

 

드라마 천일의 약속타이틀에 사용된 캘리그래피를 쓴 강병인 작가는 드라마 엄마가 뿔났다의 타이틀을 소의 뿔 모양을 빌어 뿔난 형상을 시각화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번 타이틀에서는 약속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형상화해서 글씨로 표현했다.

 

하나하나 살펴보면 을 뚫고 이어져 있는데, 이는 새끼손가락을 걸고 영원히 함께하자던 약속을 형상화했다고 한다. 어찌 보면 무리하게 보일 정도로 강하게 결합되어 있지만, 가독성에 큰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 덕분에 약속이라는 의미의 상징성을 함축적으로 보여줌으로써 단순한 글자가 아닌 하나의 이미지로 다가가게 한다.

 

좀 더 자세히 보면 약속이라는 단어의 자소가 가능한 한 모두 붙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에 붙어 있어 결합, 즉 약속이라는 의미를 상징적으로 이어가는 것으로 보이지만 의 얇고 허약함은 주인공의 불안한 상태를 보여주는 듯 위태롭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처럼 드라마의 콘셉트와 의도에 맞춰 전략적으로 만들어진 캘리그래피 타이틀은 시청자들의 시각을 자극했고, 이는 드라마 속 이야기로 감정을 이입하게 하는 효과를 주었다. , ‘약속과 슬픈 스토리의 의미를 상기시키며 시청자가 슬픈 이야기에 몰입하도록 힘을 실어주었다고 할 수 있다.

 

꼬리 1. , 어떻게 쓸 것인가?

 

2-1불꽃처럼나비처럼2009-1.jpg[그림2-1] 불꽃처럼 나비처럼(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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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2-2] 불꽃처럼 나비처럼(2009)

 

영화 불꽃처럼 나비처럼의 첫 번째 포스터(그림2-1)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이다. ‘에 똑바로 연결되지 못한 채 사이의 허획과 두께가 같아 자칫 로 읽힐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지나치게 흘려 쓰기에만 중점을 두고 실획을 제대로 쓰지 않은 탓인데, 실제로 이 포스터는 홍보 포스터로 사용되다가 지적을 받고 정식 포스터에서는 획의 세로획 두께를 두껍게 해 가독성 문제를 해결했다고 한다(포스터 2).

 

하지만 에서 의 세로획이 불안정하게 처리돼 전체적인 자형의 완성도 면에서는 여전히 의문을 품게 하는 작품이다. 게다가 복사하여 두 번 연속으로 사용한 처럼이라는 글자는 캘리그래피의 유일성을 깨뜨려 인위적으로 보인다. 조형적으로는 이 칼날방향과 같은 방향으로 배치되거나 가 무사의 칼날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이야기의 상징성을 함축적으로 형상화해 내기에는 버거웠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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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3] 아름답다(2007)


또 다른 영화 아름답다에서 의 연결 부분이 허획이 아닌 실획처럼 너무 두껍게 처리되어있고 의 모양도 완전한 형태가 아니라 '처럼 보이기도 한다. 또한 에서 의 상단 획을 아예 생략함으로써 가독성을 지나치게 해치며 읽기 곤란하게 만든다. 그런데도 우리가 이것을 읽을 수 있는 이유는 한글을 글자 한 자 한 자의 정보가 아닌 익숙한 단어의 형태로 받아들이는 우리말의 특성 때문일 것이다.

캘리그래피를 사용해 타이틀에 독창성과 차별성을 주고 싶다면 우선 한글의 자형과 획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필요하다. 또한, 허획과 실획의 구분을 명확하게 둬 가독성을 해치는 일이 없어야 한다. , 흘려 쓰더라도 한글의 기본적인 구조는 염두에 둬야 한다.

 

반면 영화 불꽃처럼 나비처럼이나 영화 아름답다의 타이틀과 달리 흘려 쓰거나 힘찬 표현을 할 때도 획을 놓치지 않고 정확하게 표현한 작품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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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4] 상어(2013) _ 캘리그래피 전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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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5] 타짜(2006) _ 캘리그래피 이상현

 

드라마 상어의 타이틀에 사용된 캘리그래피는 어딘지 모르게 상어의 지느러미나 이미지를 닮은 것을 볼 수 있다. 전체적인 구도와 세부적인 표현이 하나의 덩어리로 상어의 이미지를 느낄 수 있게 표현됐다.

이상현 작가가 쓴 영화 타짜의 캘리그래피는 거친 칡뿌리를 사용해 타짜들의 거친 삶을 강력하게 표현했다. 매우 거친 칡뿌리로 만든 붓을 쥐고 약간 두꺼운 종이에 먹이 팍 튀도록 써서 패를 자신 있게 내리치는 느낌을 주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글자들이 한 방향으로 일정하게 향해 있음을 볼 수 있다.

 

꼬리 2. 캘리그래피 재료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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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6]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2000) _ 캘리그래피 꽃봄 김혜진

 

영화 타짜의 타이틀 제작에 칡뿌리가 사용된 것처럼 영화 타이틀 중에는 붓이 아닌 다양한 재료로 상징성을 강하게 표현한 캘리그래피가 많다. 그중 하나가 영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인데, 2000년대 초반 영화 타이틀 제작에 한글 캘리그래피 열풍을 불러일으킨 작품이기도 하다.

나무젓가락을 사용해 거칠고 역동적으로 표현한 영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타이틀은 먹이 번지고 튀는 느낌이 주인공 류승범이 피를 토하는 장면과 조화를 이뤄 마치 혈서에 피가 튄 것 같은 효과를 준다. , 타이틀에 사용된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라는 캘리그래피는 핏덩어리를 형상화한 글꼴로, 영화의 치열하고 잔인한 폭력성을 그대로 보여준다. 결국, 상징성과 주목성이 두드러진 글자(캘리그래피) 자체가 디자인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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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7] 다양한 캘리그래피 도구

 

이처럼 타이틀의 캘리그래피를 통해 영화나 드라마의 느낌을 함축적이고 상징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데, 꼭 붓이 아니더라도 각종 펜과 나뭇가지, 롤러, 면봉, 휴지 등 여러 가지 재료와 다양한 재질의 종이를 이용해 콘셉트에 맞는 캘리그래피 작업을 진행할 수 있다. 물론 같은 재료를 사용하더라도 작가의 개성과 물의 농도 등에 따라 표현의 폭은 매우 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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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8] 파이란(2001) _ 캘리그래피 박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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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9]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2008) _ 캘리그래피 조원준

 

먹물이 튀거나 번지는 표현임에도 영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와 전혀 다른 느낌을 주는 작품이 있다. 영화 파이란지금, 이대로가 좋아요의 타이틀인데, 영화 파이란은 번지는 효과를 위해 휴지를 길게 뭉쳐서 썼다고 한다. 언제나 불안정한 하류계층의 거친 일상과 내면을 담아내는 영화에서 역동적이지만 불완전한 구도를 하고 있는 타이틀은 그러한 면목을 단번에 담아내고 있다. 또한, 서술형 카피로 사용된 보조 카피 역시 불완전한 구도와 필체로 인해 보는 이로 하여금 강한 애수를 불러일으켜 주목성과 상징성이 강조되고 있다.

영화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의 타이틀은 눈물이 번지는 듯한 어눌하고 순박한 글자들을 통해 영화의 감성을 표현했다. 특히 글자의 배치가 주인공 공효진의 시선 방향과 어우러져 하나의 시각적인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

 

흔히 영화나 드라마 타이틀에 사용된 캘리그래피를 그냥 잘 쓴 글씨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캘리그래피는 단순히 잘 쓴 글씨가 아니라 작품의 콘셉트와 줄거리에 따라 달리 쓰일 뿐 아니라 그 작품에서만 볼 수 있는 고유의 글꼴이다. 문자도 하나의 시각물로 볼 때, 개개의 글자와 연결된 문구들은 모양과 색, 레이아웃 등을 통해 여러 가지 감정을 표현할 수가 있을것이며, 이처럼 캘리그래피는 글자의 이미지화를 통해 감성적이고 상징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박선영(야림) 그래픽디자이너, 캘리그래퍼

996크리에이티브랩 소장, ) 한국캘리그라피디자인협회 이사, 전 한국시각정보디자인협회 이사로 활동했다. 동양적인 문화요소와 조형을 현대적인 디자인 언어로 융화시키는 작업에 관심이 많은 그는 독립적인 프로젝트 활동 및 출판과 한글 관련 프로젝트와 전시에 참여하고 있으며, 서울예술대학교에서 우리 문자의 조형을 강의한다. 논문 <캘리그래피(손멋글씨)의 조형적 표현과 활용에 관한 연구>(2005)를 발표했고, 이탈리아 Utilita Manifesta/ Design for Social 2010에서 작품이 선정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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