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씨 21

글씨와 놀다. 매거진 '글씨 21'

서예·캘리그라피

[Column]

2017-05-08
박선영의 <캘리그래피 천일야화>03

이 캘리그래피는 어디에서 왔는가?


오늘은 놓치기 쉬운 캘리그래피의 저작권 인식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온라인에 게시물을 작성할 때 흔히 하는 실수 중의 하나가 출처를 빠뜨리거나 부정확하게 쓰는 것이다. 저작권자에게 허락을 받고 사용한다고 해도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창작자의 성명을 넣어줘야 하는데 이를 저작권자(창작자)의 성명표시권이라고 한다. 성명표시권은 저작자 자신이 그 저작물의 창작자임을 주장할 수 있는 권리로 우리가 현재 온라인 공간에서 볼 수 있는 캘리그래피 작품들은 저작권자의 성명표시권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은 경우가 많다.


온라인상의 재인용과 성명표시권뿐 아니라 더욱 심각한 것은 캘리그래피의 저작권이 보호받지 못한 채 불법적 사용과 도용이 심심치 않게 발생하고 있는 현상일 것이다. 일부 캘리그래퍼들은 불법 도용을 우려해 자신의 블로그나 홈페이지에 고해상도의 대용량 파일은 올리지 않거나, 워터마크를 표시해 올리기도 한다. 이런 방책이 나온 것은 그들의 피해 경험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저작권은 저작물의 창작과 동시에 발생하며, 온라인을 포함해서 발표 시점을 증명할 수만 있다면 원작자가 저작권을 가진다. 작가뿐 아니라 어린아이가 그린 그림이라 하더라도 저작권에 의해 보호받을 수 있다. 그것은 창작물에 대해 창작자가 취할 수 있는 당연한 권리다. 하물며 전문 작가의 노고가 담긴 작품이 합당한 저작권을 통해 보호받아야 함은 물론이다.


필자는 캘리그래피 뿐만 아니라 창작물에 대한 사회 전반의 인식 변화가 필요하다고 본다. 캘리그래피는 작가의 고뇌가 담긴 엄연한 개인의 창작물이고, 디자인의 부요소가 아닌 회화나 문학, 음악 작품처럼 하나의 독립된 예술 장르라는 인식의 변화가 필요하다. 아울러, 작가도 저작권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여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글자꼴 저작권 소송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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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영화 <축제>(1996) 포스터 _캘리그래피 여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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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여태명 작 '춘향전' 일부(동아일보 1997)


 1996년 개봉작인 영화 <축제> 포스터는 글자꼴 도용의 대표적인 사례이며 최초의 글자꼴 저작권 소송을 일으키기도 했다. 개인의 글자꼴에 대한 지적 재산권을 처음으로 인정받은 판례로 사법연수원 판례집에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당시 영화 <축제>의 제작사인 태흥영화사가 여태명 교수의 작품을 포스터 제목에 무단으로 도용했는데, 결국 법원으로부터 무단 도용한 글자당 1천만 원씩, 총 2천만 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받았다. 또 법원은 소설책 <축제>의 제목에 여태명 교수의 서체를 도용한 출판사에도 500만 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문제의 서체는 여태명 교수가 1994년 5월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한국청년작가초대전에 출품한 ‘춘향가’ 속에 들어 있던 창작 서체 중 일부였다.


사건의 시초가 된 연원은 이렇다. 태흥영화사 측이 영화 <축제>의 포스터 제작을 디자인 회사에 의뢰했고, 이 디자인 회사는 한국청년작가초대전 도록에 실린 여태명 교수의 서체를 무단 도용해 포스터의 타이틀을 제작한 것이다. 지적 재산권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일이라 할 수 있겠다. 여태명 교수는 도용 사실을 확인한 뒤, 영화사에 시정을 요구했음에도 조치가 취해지지 않자 소송을 냈다고 한다. 당시 법원 판결을 살펴보면, 글씨체는 작가의 독창적 노력의 산물로 지적 재산권을 가지는 엄연한 창작물이며 영화사 측이 이를 무단 도용함으로써 작가의 저작인격권을 침해했다고 밝히고 있다.


+2002 한일 월드컵, 붉은악마, 그리고 캘리그래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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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붉은악마 티셔츠 'Be the Reds'(2002) _캘리그래피 박용철


“대~한민국!” 짝짝짝~짝짝!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누구나 2002년 월드컵의 함성을 기억할 것이다. 당시 유행했던 붉은색 티셔츠 역시 저작권 분쟁에 휘말렸다. 티셔츠에 새겨진 ‘Be the Reds’라는 문구 때문이다. 응원 열기와 더불어 우리나라 축구팀 응원단 붉은악마가 제작한 ‘Be the Reds’ 티셔츠는 월드컵 기간 동안 2,500만 장이 판매되며 그해 최대 히트 상품이 되었다. 일명 ‘짝퉁’ 티셔츠도 길거리 좌판에서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월드컵 막바지에는 이 옷을 입지 않고 응원하는 것이 어색하게 보일 정도였다. 티셔츠 판매가 절정으로 치솟았던 2002년 6월, ‘Be the Reds’ 문구를 쓴 디자이너 박용철은 한국저작권위원회에 이 문구의 글씨체 디자인을 등록했다. 이와 함께 붉은악마의 광고 대행사였던 (주)토피안을 저작권법 위반 혐의로 고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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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2002년 붉은악마의 ‘Be the Reds’ 로고 _캘리그래피 박용철


(주)토피안은 시안료 200만 원으로 저작권을 샀다고 주장했으나, 법원은 이 돈이 양도의 대가로 판단할 만한 증거가 없다며 박용철의 손을 들어주었다. 붉은악마가 비상업적 단체이기에 상표권 출원자를 자신들이 아닌 (주)토피안으로 했음에도, 디자인의 저작권은 디자이너 본인에게 있다고 판결한 것이다. 당시 법원은 “문구의 글자 중 ‘R’은 ‘12번째 선수가 되자’는 뜻에서 숫자 12를 본 떠 만들었고 첫 글자인 ‘R’자와 마지막 글자인 ‘S’의 끝이 만나도록 디자인한 것도 성적과 상관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응원하자는 뜻으로 했다”는 박용철의 주장을 받아들여 글씨체나 색상 등에 저작권이 인정된다고 판결했다.


이 사례에서 보듯이 저작권을 양도한다는 계약이 없는 한, 소액의 시안료를 받았다 할지라도 디자인에 대한 권리는 창작자에게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은 월드컵이 폐막하고 한참 뒤에 나온 판결이다. 공식 제작업체인 붉은악마 못지않게 짭짤한 수입을 거뒀던 짝퉁 제작업체와 길거리 좌판은 자취를 감춘 이후였다. 이들로부터 보상을 받을 길은 요원해진 것이다.

 

+거침없는 캘리그래피 짜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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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영화 <각설탕>(2006) _제작 싸이더스FN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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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드라마 <뉴하트>(2007) _제작 JS픽쳐스, 편성 MBC


영화 <각설탕>과 의학 드라마 <뉴하트>의 제목을 비교해보면 어딘가 닮았다는 걸 알 수 있다. <뉴하트>의 제목이 <각설탕>의 제목에 사용된 캘리그래피를 이용하여 짜깁기한 것으로 보인다. 제작연도도 <각설탕>이 앞서고, <뉴하트>에서 '뉴'의 ‘ㅠ’ 와 '트'의 ‘ㅡ’ 가로선은 같은 선으로 두 번 반복되어 나오니 짜깁기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 두 작품의 디자이너가 전혀 다른 사람일 수도 있으나, 동일 디자이너가 이전의 자료를 가지고 다시 작업한 것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자신이 썼다면 다시 쓸 일이지 짜깁기를 하지는 않았을 터이고, 답은 <뉴하트>의 드라마타이틀을 만든 사람이 쥐고 있을 것이다.


더 자세히 살펴보자. <각설탕>의 ‘ㄱ’은 <뉴하트>의 ‘ㄴ’으로 바뀌었고,

‘각’의 ‘ㅏ’는 ‘하’의 ‘ㅏ’ 로, ‘설’의 ‘ㅓ’는 ‘뉴’의 ‘ㅠ’ 일부로,

‘설’의 ‘ㅓ’는 ‘트’의 ‘ㅡ’로, ‘탕’의 ‘ㅌ’은 ‘트’의 ‘ㅌ’으로,

‘탕’의 ‘ㅏ’는 ‘하’의 ‘ㅎ’일부로, ‘탕’의 ‘ㅇ’은 ‘하’의 ‘ㅎ’ 일부로 쓰였다.

 

<각설탕>의 제목 글꼴이 지닌 입에 닿으면 금방 녹아버릴 듯한 질감 표현과 자연스러운 공간 배분은 영화의 내용과 제목을 고려해 디자인된 것이다. 말과 기수의 따뜻한 사랑 이야기인 <각설탕>의 글씨를, 압도적 긴장감을 유발하는 의학 드라마의 타이틀로 조합해 쓴다는 것은 원작이 가진 감성과 목적에 맞지도 않는다. 이처럼 원작과 무관하게 짜깁기된 <뉴하트>의 네모꼴 글자를 보고 있자니 씁쓸한 생각이 든다. 사실 <뉴하트>의 짜깁기 타이틀은 일견 이상해 보이지도 않는다. 캘리그래피의 자소를 분해하고 조합해서 쓰는 일은 드물지 않게 벌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르바이트 직원을 고용해 캘리그래피 파일을 모아 일러스트 파일로 전환하도록 시킨다는 회사도 있다고 하니 참으로 위험하고 심각한 행동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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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2006) _제작 초록뱀미디어, 편성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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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거침없이 갈아타자!'(2007) _수도권 통합 환승할인제 표어


2007년부터 시행된 수도권 통합 환승할인제의 표어는 ‘거침없이 갈아타자!’이다. 누가 봐도 당시 인기 시트콤이었던 MBC <거침없이 하이킥!>의 타이틀을 패러디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과연 원작자에게 허락을 받았는지는 궁금할 따름이다. 공공성을 내세워 은근슬쩍 넘어가지 않았기를 바란다. 사실 대놓고 따라 했으니, 이것은 차라리 귀엽다고 해야 할까?


연속성을 중요시하는 TV 시리즈물에서는 똑같은 글꼴을 약간만 수정해 ‘하이킥’ 시리즈의 제목에 사용할 수도 있다고 본다. 하지만 문제는 ‘거침없이 갈아타자!’의 경우처럼 전혀 상관없는 곳에서 불법으로 자소를 분리해 쓰는 상황일 것이다. ‘거침없이 갈아타자!’의 ‘갈’자에서는 ‘ㄹ’의 획이 완벽하지 않아 ‘ㅈ’으로 보이는 문제를 안고 있다. 애초에 없는 자소를 만들다 생기는, 짜깁기의 여파라 할 수 있겠다. 짜깁기의 흔적은 ‘ㄱ’과 ‘ㅈ’, ‘ㅏ’의 반복에서도 계속 나타난다.


위의 두 사례는 작가의 저작인격권 중 하나인 동일성유지권을 위반한 것이다. 동일성유지권은 저작물의 내용 및 형식을 그대로 유지하고, 허락 없이 변경과 삭제 등에 의해서 손상되지 않도록 할 권리를 의미한다. 물론 저작권자의 특별한 의사표시가 있다면 변경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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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드라마 <태양의 후예>(2016) _캘리그래피 전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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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드라마 <태양의 후예>(2016) _드라마 타이틀 패러디 모음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의 패러디처럼 작년에 방영했던 드라마 ‘태양의 후예’의 숱한 패러디물의 양산은 원작자의 승낙 여부와 상관없이 유행에 편승해 온라인에서의 유희로 항상 벌어지고 있는 일이기도 하다. ‘태양의 후예’의 경우에는 주인공의 말투, 군복, 영상 이미지, 드라마 타이틀 등 드라마의 인기에 힘입어 다양한 분야에서 패러디와 무단사용이 있었다. 때마침 있었던 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군복 이미지와 주인공의 말투, 드라마 타이틀 등이 군과 의사 출신 국회의원 후보자의 안보이슈와 홍보 이미지로 패러디되어 활용되었다. 어쩌면 인기나 매출에 나쁜 영향을 미치지 않는 한도 내에서는 방송의 인기 확산을 위해 패러디와 복제를 묵인하거나 권장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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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살펴본 저작권 위반 사례들은, 한번 당기면 계속 나오는 칡넝쿨처럼 무궁무진할 것이다. 인터넷을 통해 확산되는 대량복제로 인한 원본의 불확실성과 표절의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웹을 떠다니는 출처 불분명의 이미지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런 현상은 통제가 거의 불가능하다. 미리 대처하려 해도 방도를 모르고 손해를 봐도 명확한 근거를 찾기 난해하다. 그러므로 어떤 법적인 규제나 제도적 장치 마련을 기다리기에 앞서 디자이너가 자발적으로 자기 작품의 저작권을 지키려는 노력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저작권에 대한 사회 일반 사용자들의 의식과 자정 노력은 아직 부족한 상태이기 때문에 더 현실적인 도움을 얻고자 한다면 한국저작권위원회의 문을 두드려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캘리그래피는 디자이너에 의해 전혀 새로운 작품으로 탄생할 수도 있고 망가질 수도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일차적 소비자이자 재생산자인 디자이너들이 파트너쉽을 가지고 관심과 이해를 가질 때 캘리그래피와 디자인이 함께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계약 시 캘리그래피를 한 매체에만 사용하겠다고 했다가 나중에 여러 매체에 게재하는 경우도 왕왕 있다. 작품을 도용하거나 변형하는 것뿐만 아니라 애초 계약서에 명시되지 않은 용도로 쓰는 것도 모두 저작권에 어긋나는 것이니 꼼꼼하게 확인해야 한다. 캘리그래피도 사진이나 일러스트처럼 용도에 맞는 계약을 따로 해야 하기 때문이다.


복제와 전송, 배포, 2차적 저작물 작성권이 있는 저작재산권은 직접적인 부가가치가 높은 권리이기 때문에 저작재산권의 일부 또는 전부를 양도하는 경우에는 주의가 필요하다. 계약 대상의 전체적인 디자인 범위에 포함된 금액이 아니라, 캘리그래피만을 따로 분리한 별도 항목이 책정되어야 하고, 매체와 규모에 따라 용도를 정확히 지켜야 한다. 이 부분은 일차적 소비자인 디자이너뿐 아니라 최종 클라이언트의 이해와 관심이 필요한 문제이기도 하다.


아무쪼록 캘리그래피와 창작물의 저작권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확산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박선영(야림) 그래픽디자이너, 캘리그래퍼

현 996크리에이티브랩 소장, 사) 한국캘리그라피디자인협회 이사, 전 한국시각정보디자인협회 이사로 활동했다. 동양적인 문화요소와 조형을 현대적인 디자인 언어로 융화시키는 작업에 관심이 많은 그는 독립적인 프로젝트 활동 및 출판과 한글 관련 프로젝트와 전시에 참여하고 있으며, 서울예술대학교에서 우리 문자의 조형을 강의한다. 논문 <캘리그래피(손멋글씨)의 조형적 표현과 활용에 관한 연구>(2005)를 발표했고, 이탈리아 Utilita Manifesta/ Design for Social 2010에서 작품이 선정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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