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씨 21

글씨와 놀다. 매거진 '글씨 21'

서예·캘리그라피

[Interview]

2019-08-21
<특집>


대륙을 이끈 서법가들

引领大陆的书法家们

 - 상해 · 항주


| 5편 한천형(韩天衡) |



지난 <대륙을 이끈 서법가들(북경)>에서 중국의 수도이자 전통서법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북경을 찾아가 뚜렷한 자기 색깔을 지닌 네 분의 중견작가(석개(石開)/후캉메이(胡抗美)/증래덕(曾來德)/이강전(李刚田)들을 만나 그들이 걸어온 길과 예술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이 일궈낸 현대서법계의 역정과 진화의 모습을 육성을 통해 들어볼 수 있는 시간이었고, 우리는 이 기획인터뷰를 통해 우리 서예계에 반추해보고자 한다. 

 

이번 <대륙을 이끈 서법가들(상해항주)>은 중국 남방의 서화예술에서 큰 줄기를 이루는 상해와 항주를 찾았다. 서예 전방의 영역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3인의 서법가들을 만나 그들의 예술세계에 대해 들어보았다. 그 첫 번째 순서로 상해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천형 선생을 찾았다.

 

인터뷰는 글씨21의 성인근 편집주간이 이어갔으며, 통역은 신현경 중국미술학원 서예학박사가 맡아주었다.

 

2019. 8. 21
글씨21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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鐵有痕



Q. 한천형미술관을 개관하게 된 계기와 사업에 대해

 

우리 미술관(한천형 미술관)2011년 당시, 저와 제 아내는 일생동안 가지고 있던 미술품을 국가에 기증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2011년의 일입니다. 그러자 상해시 정부에서는 2년의 시간을 들여서 이 한티엔헝(韩天衡)미술관을 지었습니다. 2013년에 개관하여 지금까지 6년이 흘렀습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이 미술품들을 국가에 기증함으로써 사회나 대중으로 하여금 이 미술관(한천형 미술관)에서 유구한 중화민족의 우수한 전통문화 및 예술품들을 볼 수 있도록 하고자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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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太平


Q. 강택민 주석이 미술관 현판을 쓰게 된 계기는?

 

나와 내 아내가 우수한 전통예술 작품들을 기증함으로써 대중들로 하여금 와서 감상할 수 있도록 하였고, 지도자 역시 이러한 문화적 활동에 대해서 지지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내가 알기로 강택민 주석이 세 개의 현판을 쓴 적이 있는데 류하이수(刘海粟)미술관, 그리고 하나는 남방의 꽌산웨(关山月)미술관, 그리고 우리는 그가 쓴 세 번째로 쓴 한티엔헝미술관(韓天衡美術館) 입니다. 이로 인해 우리들이 알 수 있는 것은, 우리들의 국가의 지도자가 문학, 예술을 중시한다는 것입니다.

앞서 우리가 얘기한 이 미술관의 역할 중 첫 째는 우리 미술관이 전시한 예술품이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의 유구한 문학, 예술을 이해하는데 하나의 큰 작용을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우리미술관이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 과거의 문화예술에 관하여 앞으로 어떻게 선양(宣揚)하고 어떻게 발전시킬까 하는 공능(功能)이 있습니다. 이점으로 말하면 우리가 개관이후 6년간 몇 십 개의 예술전람회를 개최하였는데 그 중 몇 번의 전시가 전국 및 상해시의 전람회 방면에서 큰 칭찬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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氣息宜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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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年月夜蘆鴨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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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年 草篆美均《山中雜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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郁文山館


Q. 현재 1층에서는 중국현대전각가들의 전시가 이어지고 있는데, 한국전각가들과의 교류전이 이뤄지면 어떨까 생각됩니다.

 

그것은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지난 몇 년 동안 일본의 전각가들의 개인전 및 단체전시회를 가진 적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자기의 문화예술 촉진뿐만 아니라 동방민족 전체적인, 서법도 좋고 전각도 좋습니다. 서예 전각은 모국인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일본이나 한국에서도 매우 유행하는 예술입니다. 일본의 서법 및 전각전시회를 개최한 것이 적어도 네 번이나 됩니다.

우리는 고대예술 뿐만 아니라 당대예술도 전시합니다. 개인적인 사승관계의 전시도 합니다. 나와 내 학생들, 즉 미국 캐나다 일본 홍콩 마카오 말레이시아 등 해외에 있는 저희 학생들과 같이 전시를 한 적도 있습니다.


Q. 처음 서예와 전각을 접하게 된 계기와 사승관계에 대해

 

저는 예술 공부를 일찍 시작했습니다. 네 살에 글씨를 배웠고 여섯 살이 되어 전각을 배웠으며 그 이후에 이론 문장들을 쓰다가 서른다섯 살에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가정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것인데, 저의 부친 역시 문화인이었습니다. 거기에다 저는 천성적으로 예술을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아주 어릴 적부터 붓 또는 전각도를 들고 학습했습니다. 비교적 긴 과정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부친이 저를 지도했고 나중에 15-16세가 되어서, 예술적 표현 능력이 다소 생기게 되자 중국의 유명한 스승이 저를 지도해주기 시작했습니다. 예를 들면 (아마 이런 이름들을 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지만) 쩡주요우(郑竹友)선생, 고궁박물원의 전문가에게 배웠고 후에는 전각가이신 팡지에칸(方介堪)선생, 팡취지(方去疾)선생, 대학자이며 대화가인 시에쯔류(谢稚柳)선생, 미술학원의 루웨이자오(陆维钊) 선생, 사멍하이(沙孟海)선생, 북경의 리커란(李可染)선생 이런 분들이 저에게 많은 지도와 도움을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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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한국에서도 많이 알려져 있는 사맹해(사멍하이:沙孟海) 선생님께 배운 전각의 방식이나 이론, 에피소드에 대해

 

(책을 펼쳐 보이며) 여기에 사멍하이(沙孟海)선생과 관련된 소개가 있습니다. 1975년 당시 절강미술학원 쪼우창궈(周昌谷)선생이 계셨는데 이미 오래 전 타계하셨지만 그분이 나에게 여러 방의 인장을 부탁해서 새겨 드렸는데 주꽌티엔(朱关田)선생이 그 인장을 찍어서 사멍하이선생에게 보여 드렸습니다. 사멍하이(沙孟海) 선생이 이를 보시고 저의 인장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내렸습니다..

주꽌티엔(朱关田)으로 부터 전해 받은 상해 한티엔헝(韓天衡)선생의 인고를 보니 기초가 심후하고 도법이 정통한데다 새로운 창조가 보태어져 여러 자태로 변화하니 현대 인학에 새로운 경지를 열었다.” 반복해서 완상하며 칭찬이 끝이 없었다. 라고 씌어져 있습니다.

이 인장은 내가 사멍하이(沙孟海)선생에게 새겨준 것이 아니라 조우창꿔선생에게 새겨준 것인데 사맹해 선생이 보시고 그렇게 좋은 평가를 하며 저를 당대 인학에 새로운 경지를 열었다고... 따라서 쪼우창꿔(周昌谷)선생이 보기에 사멍하이(沙孟海)선생이 나에게 내린 평가가 이렇게 높은 나머지 그 편지를 저에게 보내 왔습니다. 그때 저의 나이 서른 남짓이고 지금은 이미 팔십이 되었습니다

75년에는 상해 청년서법가와 절강의 청년서법가들이 항주에서 연합전을 하였는데 전시가 끝나고 나니 절강의 많은 친구들이 상해로 와서 나에게 글씨를 부탁하였습니다. 저는 아마도 사멍하이(沙孟海)선생이 연합전에 출품된 나의 글씨를 보고 높게 평가한 것이 아닌가하여 그 뒤 그 존중의 보답으로 주꽌티엔(朱关田)선생과 같이 예방(禮訪)하였습니다. 그전에는 서로 아는 사이가 아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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雲山無盡


Q. 1975, 중국전각예술(中國篆刻藝術)출판 당시 전각 분야의 출판 분위기와 이 책을 집필하게 되신 동기에 대해

 

해방이후 얼마동안 서화 전각예술에 대한 풍조가 저조했었지만 그 와중에서도 서, , 인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많았고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당시에는 공부할 만한 서적이 별로 없었어요. 75년이 되자 상해의 출판사가 저를 출판사로 불러 반 년 동안 중국전각예술(中國篆刻藝術)이란 작은 책을 쓰게 했습니다. 당시 출판은 지금처럼 성행하지는 않았지만 첫 번째 6만 부를 출판하여 비교적 환영을 받았고 일본에서도 번역본을 내놓았습니다.

이것이 제가 학술 이론으로 보자면 가장 먼저 쓴 첫 번째 책입니다. 당시는 중국의 문화대혁명기간이라 그 당시 무슨 책을 쓰더라도 단체로 토론을 하게 하였는데...... 당시 한 사람의 개인 이름으로 책을 내는 것을 허가(許可)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책은 집체로 토론하고 제가 대표로 집필한 것으로 해서 출판하였습니다. 이것이 제가 인학 연구에 쓴 첫 번째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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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善若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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味外心結


Q. 1980년대 초반 명대류파인장초고(明代流派印章初考)》、《오백년인장변관예술초탐(五百年印章邊款藝術初探)》、《구백년인보사고략(九百年印譜史考略)등 이러한 주제에 관심을 갖게 된 배경

 

중국의 전각예술은 삼천년의 역사가 있습니다. 아주 긴 시간동안 중국고대 새인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어요. 최초로 우리가 아는 것은 인보 같은 보록이 출판되었는데 새인이 있은 뒤 1700년 후의 당나라 때입니다. 하지만 이 책은 아무도 보지 못했고 이미 오래전에 소실되었습니다.

송대부터 일부의 사람들이 인학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고 인보 같은 것이 출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북송의 말기부터 원대 명대를 거치며 인보가 나왔는데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으로는 십여 종이 있습니다. 이때부터 학자와 문인들이 이 인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지요. 그러나 당시 출토되는 물건도 적고 소장에 대한 개념도 명확치 않고 더군다나 인보 출판의 조건도 좋지 못했습니다. 지금처럼 출토된 원인(原印)을 바로 찍지 못하고 목판 위에 새긴 뒤 그 목판을 다시 찍어 인쇄하는 바람에 인장은 진한의 원래 도장이 갖고 있던 예술성이 매우 크게 깎여 버렸습니다.

따라서 전각예술은 중국 모든 전통예술 속에서 유일하게 두 번의 절정을 맞이하게 되는 하나의 예술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 서법은 한나라, 위나라, 그리고 진나라에 와서 왕희지가 그 절정입니다. ()라고 한다면 당나라, ()라면 송나라, ()이라면 원나라가 그 절정입니다. 그 후 역사상 두 번 다시 이 같은 절정은 오지 않습니다. 당나라 때와 같은 시의 절정기는 두 번 다시없었듯이, 위진 시대보다 더 높은 서법의 절정기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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百樂齋


그러나 전각은 두 번의 역사상 절정기가 있는데 주진양한(周秦兩漢)의 절정이 있고 두 번째는 명대(明代) 말기, 여기서 두 번째 절정기가 되는 전환점이 출현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전각은 예전부터 금속으로 되어있어 공예가들이 새겼고 문인들은 새길 수가 없었던 것인데 명대(明代)에 들어와 청전석(靑田石) 위에다 전각을 하게 되면서 많은 문인들을 이 전각영역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청전석(靑田石)은 문인들도 새길 수 있는 재료들인데 바로 이 재료의 혁명이 새로운 절정을 맞이하는 그 첫 번째입니다.

두 번째로 청전석(靑田石)에는 문인들도 새길 수 있게 되어 예전에는 그런 생각(전각을 할 생각)만 있던 문인들이 명나라 말기부터는 직접 새기게 됩니다. 이때부터 전각의 주체들이 공예가에서 문인들로 바뀌게 됩니다. 즉 주체의 대열이 바뀐 것이죠. 이 대오(隊伍:주체)가 변한 것이 매우 중요한데 원래 문인은 문화가 있으므로 사량(思量)을 잘 하고 상상력과 변통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명대 말기는 아까 말했듯이 예전에는 목판 위에 번각하여서 다시 인쇄 했으나 이때부터는 출토된 진한의 원인, 원작을 바로 찍을 수 있게 되었고 전각을 배우고자하는 문인들이 목판으로 변형되어버린 것이 아닌 상고시대 진한인의 원래 면목을 직접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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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인소(因素:원인)들이 조합되면서 중국 인학사의 두 번째 절정을 맞이하게 되었으니 바로 명청전각 유파인장의 절정입니다. 그래서 중국 전통 문화 예술의 절정에 관해서 전각이 두 번의 절정을 맞게 되는 것입니다. , 재료의 혁명, 대오주체의 변화, 진정으로 우수한 전통예술을 참고할 수 있어서입니다. 당시(唐詩)나 송사(宋詞), 원곡(元曲) 등은 이런 두 번째의 절정이 있을 수 없습니다. 80년대 초 내가 논문에서 중국 전각은 기묘하게도 두 번의 절정이 있다고 제기 하였습니다.

이 일문의 예술은 내가 아주 긴 시간동안 탐구와 연구를 하였는데 60년대 말, 천구백 오십 몇 년도부터 저는 인보를 수집하기 시작하여 이 연구를 시작하였고 팔십 년대 초 중기가 되자 내가 이미 읽고 연구한 고대 인보가 이천 종을 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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心是手非


옛날 사람들은 저만큼의 조건들이 되지 않습니다. 저는 도서관이며 박물관이며 개인 소장품 등과 일본이나 싱가폴의 소장자들로부터 인보를 빌려 필기하고 기록한 끝에 연구의 기초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1980년부터 시작하여 이리저리 책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저는 중국 인학사의 한 공백을 메우게 될 수 있었다고 봅니다. 그 후에 또 역대인학논문선(歷代印學論文選)을 편찬하였고 또 여러 다른 것들도 쓰게 되었는데... 요즘도 비교적 긴 문장인 명대 말기부터 오백년간의 전각 창신 배후의 동력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새로운 각도에서 쓰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대략, 만여 자의 글자로 된 이론 문장을 쓰는데 빛나는 이념에 관해서입니다. 즉 사람의 사상, 사람이면 이념이 생기는데 이 이념이 새롭게 생기면서 새로운 유파와 풍격이 탄생합니다. 이것은 새로운 각도에서 오백년의 전각유파 탄생의 역사를 총결하는 문장인데 이제 막 탈고를 하여 곧 발표를 할 예정입니다. 따라서 방금 사회자선생이 말씀하신 책은, 먼저 많은 기초가 배경이 되었다는 것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기초란 곧 재료이며 진적인데 그런 많은 재료와 진적이 있으면 당신도 당신의 견해를 밝힐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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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1979년 서령인사(西泠印社)의 분위기와 개인적인 활동양상에 대해

 

우리는 때마침 10년 동안 문화대혁명의 시기를 맞았었고 1976년 가을에 이 대혁명이 끝나는데 이때부터 우리 문화 예술이 다시 회복되고 발전되는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문혁기간 즉 63년 이후 서령인사는 당시의 정치상황으로 인하여, 계속 대외적 활동이 없었습니다. 79년에 서령인사는 해방이후 가장 영향이 큰 대외적 활동이 있었는데 이때 많은 사원들의 영입이 있었습니다. 그 중 연배가 많은 노인들 중에는 천쥐라이(陈巨来), 주푸칸(朱复戡)이 들어왔고 젊은 층에는 들어온 두 명은 쭈관티엔(朱关田) 그리고 저입니다. 79년 행사는 문혁이후 예술가들의 활동 중에서 매우 큰 공개적인 회합이었습니다. 그래서 항주에서는 이를 매우 성대히 개최하게 되었습니다

국내의 많은 대예술가들이 기본적으로 모두 다 왔습니다. 필회도 하고 학술연구도 하고 시끌벅적했습니다. 이 때 선거를 하여 사멍하이(沙孟海)선생을 서령인사의 사장으로 선출하였지요. 치꿍(啓功)선생도 왔었는데 당시에 그는 고문이었습니다. 저의 스승이던 시에쯔리유(謝稚柳)선생, 루웨이자오(陸維釗)선생, 쉬방다(徐邦达) 선생 등등 매우 많은 서화 전각가들이 참여하였습니다. 저는 치꿍(啓功)선생과 함께 같이 방을 썼는데, 당시는 두 사람에게 방 하나를 사용하게 하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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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에는 회의를 하고 밤에는 잠을 자는데 등을 끄고 난 두 사람은 침대위에서 많은 예술방면의 얘기들을 나누었습니다. 연배이신 계공선생은 겸손하여 저더러 인학 방면에 상황들을 소개해 달라 하였습니다. 당시 서령인사 사원들이 몇 십 명밖에 안될 때인데 지금은 발전하여 오백여명이 되었습니다.

재미있었던 것은 치꿍(啓功)선생이 밤에 치바이스(齐白石)의 전각을 물어보기에 저도 당연히 치바이스(齐白石)에 대한 저의 관점을 얘기하였습니다. 그 전각의 특징과 우수한 점 그리고 부족한 점도 얘기하였죠. 그랬더니 치꿍(啓功)선생이 티엔헝(天衡)! 너 반드시 글을 한 편 써라.” 하셨고 나는 오백년전각유파인장(五百年篆刻流派印章)중 이를 쓰게 되었는데 이는 치바이스(齐白石)에 관하여 해방이후 최초로 그를 비평하는 문장이 되어버렸습니다.

치바이스(齐白石)의 장점도 말했지만 그의 부족함도 말했으니 그를 비평한 최초의 문장이 되었죠. 그 후 치바이스(齐白石)의 제자들이 서신으로 나를 질책하기도 하였으나…… 전체적으로는 우리 학술이 그렇듯이 공정과 순결성이 있는 것이죠. 그 후 다시 치꿍(啓功)선생을 만났을 때 치 선생님.. 당신이 나보고 그 글을 쓰라 해서 썼더니 누가 나를 질책 합니다.”고 농담으로 제가 선생님에게 당했습니다.” 했지요. 그랬더니 치꿍(啓功)선생은 저를 돌아보며 혀를 길게 내 빼어 귀신얼굴을 지어 보였는데 너무 재미가 있었지요. 이게 모두 79년 서령인사 75주년 활동의 상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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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年 嘉興南湖煙雨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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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年 草篆毛澤東《十六字令》


Q. 현재 중국전각의 제작 양상과 거래 현황에 대해

 

현재의 중국 전각예술시장이 발전하는 매우 좋은 시기입니다. 만일 사십 년 전에 우리의 전각을 얘기한다면 많은 대학생들도 전각의 ()’자를 몰랐을 겁니다. 현재는 소학생(초등학생)들도 전각의 ()’자를 다 압니다. 이로써 알 수 있는 것은 전각이 그만큼 보급되었다는 얘기입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전각예술을 사랑하고 있고 특히 개혁개방 사십 년 만에 예술도 시장화 되어가는 과정에 있습니다

전각예술품 역시 많은 소장자들이 좋아라하는 한 분야입니다. 저의 인장으로 말하자면 일찍이 7-80년대 리커란, 류하이수 등 전국의 많은 대가들이 저의 인장을 사랑하고 좋아했으며 그들이 사용 하는 것에 힘입어 인장의 가격 면에서 남들보다 높은 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요새 전각의 가격이 매우 높아져 저를 보고 감사하다고 하는데 사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전체적으로 다 좋아진 것이죠. 저로 말하자면 저도 이 예술의 성취를 위해 많은 심혈을 기울였고 열심히 연구하였고 지금도 열심히 창작 중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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緣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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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고전과 창신의 경계에 대한 선생님의 생각은?

 

중국의 유구한 전각의 역사, 출현했던 많은 전각 대가들, 이것들은 우리들이 전각을 학습하기 위해서 매우 중요한 것들입니다. 중국의 전통예술은 만약 당신이 우수한 전통 기초를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당신은 새롭게 무엇을 창조해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중국 사람들이 퇴이천추신(推陳出新)’이라 말하는데 주로 문화유산 따위의 계승을 가리켜 옛것 중에서 쓸모없는 것은 버리고 좋은 것은 찾아내 새로운 방향으로 발전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는 무엇을 뒤집는 가 아니라 밀고 나아가는 이며 학계를 촉진시키고 우수한 것을 비추어 보자는 것입니다. 고대에는 얼마나 많은 종류의 풍격이 있었는지 알고 계십니까? 고인들은 어떤 것들을 홀시(忽視) 하였고 어떤 것들을 타파(打破)하지 못했던 것들인지 알고 계십니까?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돌파구가 됩니다. 따라서 저의 전각에 대한 추구는 첫 째, 전통에 대한 학습입니다. 전통에서도 좋은 것을 골라내어 열심히 학습하고 비추어 보고 또 자기의 창작에 발현시켜야 합니다. 제가 70년대에 창작과 창신을 할 때 제기한 것이 있는데…… 원래 중국의 전각은 평적인 가운데 기이함을 구합니다. 즉 평온하고 점잖은 가운데 기이함을 추구하고(平中求奇), 정적인 가운데 동적인 것을 구한다고(靜中求動) 하였습니다. 평정하고, 점잖으며, 편안한 것이 중국 인장의 몇 백년간 있어온 주류 풍격이며 정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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劉印海粟


당시 저는 일부러 이 여덟 자를 바꾸었는데 즉, “평온한 가운데 기이함을 보고 고요한 가운데 움직임을 본다.”하였죠. 원래 평중견기, 정중견동(平中見奇, 靜中見動)이던 것을 저는 거꾸로 기이한 가운데 평온함을 보며 움직이는 가운데 고요함을 본다.”(奇中見平, 動中見靜)는 것으로 바꾸었습니다. 창작은 곧 다른 사람이 당신의 작품을 보는 순간 먼저 남을 감동시키는 격정적인 그 무엇이 있어야 합니다

무엇을 진동시키는 힘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저 그 기이함()이나 무엇을 진동시키는 것만 있고 기이함()과 평정함()이 내재적이며 변증법적(辨證法的)으로 얽혀 전달해주는 어떤 요소가 결핍되어 있다면 그것은 기괴하고 허황된 곳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즉 너무 지나쳐 버린 것이죠. 만약 내가 움직임()을 추구한다하여 내재적으로 고요한() 것과의 변증법적인 조율이 없이 그저 움직임()만 가득하다면 그 인장 역시 기괴하고 허황된 곳으로 흘러가고 맙니다. 그래서 저는 그 당시 저의 사상을 늘 이렇게 훈련시켰습니다. 많은 책을 읽은 가운데서 얻은 결론이며 맹목적으로 한 것이 아닙니다. 저는 저의 평중견기, 정중견동(平中見奇, 靜中見動)의 이론적 추구와 다시 세 글자(, , )를 제기하여 뒷받침이 되게 하였습니다. 첫 째로 내 인장의 추구는 웅장하다’, ‘크고 넓다는 웅()자인데 매우 조심스럽거나 쩨쩨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도록 한 것입니다. 두 째는 변한다()’자입니다. 즉 고인들과 달라야 하며 동시대 사람들과 달라야 하며 옛날의 나와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한 번 보세요. 삼십 년대, 사십 년대, 오십 년대, 육십 년대 그리고 지금까지, 저의 인장은 계속 변하여 왔습니다. 제가 고요하게 있도록 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변해야만 자기의 생명력이 충만해지고 새로운 세계가 출현하는 기상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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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心文膽


그래서 두 번째 강조한 것이 이 ()’자 이지요. 그런데 이 자의 본질은 ()’자입니다. 만약 당신이 새롭지 않으면(不新) 어떻게 고인과 다를 것이며 새롭지 않고서 어떻게 고인들의 뒤에 당신이 서있게 할 것입니까? 세 번째로 추구하는 것은 ()’입니다. 왜 운을 추구하느냐…… 만약 우리가 한 송이의 꽃을 보노라면 그 꽃으로부터 향기를 맡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화가라도 꽃을 그릴 때 이 향기를 그림으로부터 나오게 그릴 수는 없죠. 그 냄새는 그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인장을 새기는 것 역시 그렇습니다. 기교도 좋고 풍격도 좋지만.. 그 맛, 예를 들어 닭고기 탕은 맛이 좋은데 그 맛을 느낄 수는 있어도 정확히 표현해 내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제 인장 속의 추구는 그 독특한 운미(韻味)를 나타내는 것인데 마치 화가가 꽃을 그리면 관객들이 그 향기를 맡지는 못하나 느낄 수 있는 것처럼 운()을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만일 이 운()이 없다면 해놓은 창작품이 비록 개성이 매우 강하고 풍격이 강렬하다 할지라도 깊고도 내재적인 문화의 함량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후에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전각을 하더라도 다음의 네 가지를 스스로에게 요구하였습니다


시심문담(詩心文膽)’인데 즉 시적인 마음과 고대 경전적 문장 같은 담량(脊梁) 입니다. 이것이 있어야만 당신의 작품은 표면적으로 고인과 다를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좋은 풍격과도 다르게 됩니다. 귀납적으로 독특한 개인 풍격이라 말할 수 있는데 이 풍격의 이면에는 반드시 심후한 문화적 집적이 있어야 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당신의 작품은 당당히 신풍격의 작품이라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추구하는 서, , 전각 예술의 풍격입니다. 기중견평(奇中見平) 동중견정(動中見靜), 그리고 웅(), (), () 의 세 글자,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시심문담(詩心文膽)과 같은 마음이 받치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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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年 我有藤_三十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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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年穿雲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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晴耕雨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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韩天衡(hántiānhéng)

1940(79) 상해 출생. 서화전각가.


: 豆廬, 近墨者, 味閑, 別署: 百樂齋, 味閑草堂, 三百芙蓉齋


작가영역: 書法, 國畫, 篆刻, 美術理論及書畫印鑒賞.


약력: 中國藝術研究院中國篆刻藝術院名譽院長, 國家一級美術師, 上海市書法家協會首席顧問, 西泠印社副社長, 上海吳昌碩藝術研究會會長, 吳昌碩紀念館館長, 中國社會科學院研究生院教授, 上海交通大學教授, 華東政法大學教授, 溫州大學教授, 華東師範大學藝術研究所特聘教授, 複旦大學哲學學院特聘教授.


수상: 作品曾獲上海文學藝術獎上海文藝家榮譽獎等, 2010年被專業媒體評爲“ 2009年度中國書法十大人物” 2014年榮獲中國書法最高獎蘭亭獎藝術獎榜首.


전시: 曾獲日本國文部大臣獎, 先後在中國香港, 台灣, 澳門等地區及日本, 新加坡, 馬來西亞, 德國等國家多次舉辦個人書畫印系列展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