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씨 21

글씨와 놀다. 매거진 '글씨 21'

서예·캘리그라피

[inteview]

2019-10-17
<특집>

대륙을 이끈 서법가들

引领大陆的书法家们

 - 상해 · 항주


| 6편 왕동령(王冬龄) |





지난 <대륙을 이끈 서법가들(북경)>에서 중국의 수도이자 전통서법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북경을 찾아가 뚜렷한 자기 색깔을 지닌 네 분의 중견작가(석개(石開)/후캉메이(胡抗美)/증래덕(曾來德)/이강전(李刚田)들을 만나 그들이 걸어온 길과 예술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이 일궈낸 현대서법계의 역정과 진화의 모습을 육성을 통해 들어볼 수 있는 시간이었고, 우리는 이 기획인터뷰를 통해 우리 서예계에 반추해보고자 한다.

이번 <대륙을 이끈 서법가들(상해항주)>은 중국 남방의 서화예술에서 큰 줄기를 이루는 상해와 항주를 찾았다. 서예 전방의 영역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3인의 서법가들을 만나 그들의 예술세계에 대해 들어보았다. 그 두 번째 순서로 왕동령 선생을 찾았다.

인터뷰는 글씨21의 성인근 편집주간이 이어갔으며, 통역은 김건표 중국미술학원 서예학박사가 맡아주었다.

 

2019. 10. 17
글씨21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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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티셔츠부터 양말, 신발 등 붉은색을 즐겨입는 이유는?

 

십여 년 전에 제가 매우 큰 종이에 글씨를 쓸 때부터 빨간 양말을 신었는데 주위에서 양말이 마치 글씨 위에 인장을 찍는 듯하다하여 즐겨 신었습니다. 사실 붉은색은 열정을 나타내는 색으로 저의 마음을 대변하는듯하여 지금도 빨간 티셔츠, 빨간 양말, 빨간 신발을 신고 있습니다.

 

Q. 서예에 입문하게 된 계기는?


제가 어렸을 때 저희 집이 잡화점을 한 까닭에 저는 매우 일찍이 붓과 접촉하였습니다. 그때는 모든 장부를 다 붓으로 기록하였지요.. 대여섯 살 되었을 때죠. 저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는데 저의 집 맞은편에 있던 돌로 만든 패방(牌坊)을 그렸더니 집에서 그런 저를 보고 개자원(芥子園) 화보를 구해주었습니다. 저는 그때부터 개자원(芥子園) 화보를 베꼈는데 주위의 어떤 노선생이 그림을 잘 그리려면 글씨를 잘 써야 한다하였죠. 그때부터 저는 서예를 연습하기 시작하였습니다. , 사학년 때는 사각의 넓은 벽돌(方磚)을 구해다 붓에다 물을 찍어 현완(懸腕)을 연습했습니다. 나중에는 유공권, 안진경 등을 썼는데 전문적으로 공부를 시작한 것은 1961년 남경사범대학 미술과에 입학하면서 부터였습니다. 그 학교는 장래 중·고등학교의 교사를 배양하는 학교여서 수채, 과슈(水粉), 유화, 서예를 다 배웠죠. 선즈산(沈子善), 웨이티엔츠(尉天池) 선생이 서법과의 교수님이셨고 저는 당시 서법과의 대표였는데 실제로 웨이() 선생이 저희들을 가르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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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1966~1981, 남경사범대학과 중국미술학원에서 학사와 석사과정을 공부했는데, 이때의 공부와 생활에 대해

 

그 당시 서예 공부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것이 세 가지가 있는데 첫째로 문화대혁명 시기라 안휘(安徽)에서 생산되는 요즘 말하는 전각에 사용하는 연사지(連史紙) , 선지(宣紙)에다 대자보를 많이 썼지요. 이게 제게는 서법을 단련하는 큰 기회가 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1968년 가을, 웨이티엔츠(尉天池) 선생이 처음으로 저를 데리고 린싼즈(林散之) 선생을 배견(拜見)하게 됩니다. 세 번째로 저는 현()의 문화관에서 일을 하게 되는데... ... , 그 먼저 인쇄소에서 흑백 그림을 그렸군요 그 후 저는 마오()주석의 초상을 그렸습니다. 당시에는 어디서나 마오 주석의 대형 초상이 많이 있었지요. 그런 뒤 문화관에 가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문화관 시기에 주로 임첩(臨帖)을 하며 서법을 연마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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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90년대부터 해외 주요 전시에 초대되어 작품발표를 했는데, 서법을 바라보는 세계인의 다양한 시각은 어땠는지?

 

1979년 저는 절강중국미술학원의 전국 제 일기 서법과 석사생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원래 저의 스승이신 린싼쯔(林散之)선생 외에도 사멍하이(沙孟海), 루웨이자오(陸維釗), 쭈러산(諸樂三)선생을 지도교수(導士)로 모셨습니다. 류장(劉江), 짱주안(章祖安) 선생은 조교수로 모셨으며... 지도 교수님은 세분이셨죠. 그때는 문화부에서 중국서법을 배우러 온 구미(毆美)쪽 학생들을 모두 절강미술학원으로 보냈습니다. 저는 처음 이 유학생들을 가르치는 책무를 맡았는데 새로운 과제였으며 도전이었습니다. 그들은 동방문화에 대한 기초가 별로 없었지만 서방의 철학, 음악, 회화의 수양이 있었죠. 이 과정 속에서 저는 서방 학우들의 경험들을 이해하고 집적할 수 있었습니다. 그 후 1989년부터 1992년까지 미국의 미네소타대학의 요청을 받고 미국에 가서 약 사 년간 중국의 서법을 가르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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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미국에서 서법을 가르칠 때 두 부류의 학생들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동아시아과 학생들로 그들은 중국어나 일본어 및 역사를 공부하였는데 이들은 동아시아 전통의 방법으로 해서 및 행서를 익혔습니다. 또 한 부류의 학생들은 예술과의 학생들인데 그들은 석고 데생이나 인물 같은 것을 공부하는 게 아니라 주로 추상 아니면 비추상들을 하는 학생들이었습니다. 이들은 한자를 모르므로 이들에겐 서법을 회화의 언어로 가르쳤습니다. 이들에겐 주로 전서(大篆)와 초서를 가르쳤습니다. 전서는 도안성과 회화성이 강하여 비교적 간단한 중봉 필법으로 하게 하였고, 초서는 그 필선의 리듬감과 허실 및 추상적 공간 감각을 파악하도록 하였지요. 저는 이들을 가르치는 한편 중국서법의 창작 상황을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서방인들의 관점으로 중국의 해서나 행서들을 보았을 때 결국 글자를 이해하지 못하는 바람에 중국 서법을 이해하고 좋아하는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적습니다.

 

그러나 소수의 회화사 등에 연구를 하는 사람들은 중국의 서법이 서방의 추상미술에 끼친 영향이 크다는 것을 알게 되고 많은 관심을 가지기도 합니다. 이때부터 저는 서법의 경계를 넘는 실험적 작품을 하기 시작하는 데, 예를 들면 서법적 감각으로 추상 수묵을 한다거나 화보 위에 글씨들을 썼습니다. 이런 작품들은 서방의 예술적 소양이 있는 사람들로부터 더 많은 이해와 감상을 얻게 되었습니다. 서방 예술은 일찍이 일본의 전위 서법에 크게 영향을 주었고 한국에는 백남준작가도 나오게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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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만 아니라 지금 출현한 중국의 우수한 작가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지금 이런 현상이 우리에게 던지는 문제는 동방의 서법 즉, 중국 한국 일본의 서법도 21세기에 들어와서는 반드시 새로운 표현과 돌파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의 세계 예술의 본원지에서 찬란해지려면 반드시 전진과 돌파가 있어야 합니다.

 

지금에서야 이를 주시하게 된 서방세계는 큰 박물관인 미국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영국의 대영박물관, 그리고 스위스의 박물관 등에서 당대 수묵 및 서법의 전시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한국에도 많은 우수한 작가들이 경계를 넘나드는 작품을 하고 있지만 이런 창신과 돌파를 진행하는 작품들은 보수적 관념을 지닌 사람들에 의해 질의나 비평이 뒤따릅니다. 그래서 이런 작품을 하려면 반드시 용기와 정력(定力)이 필요합니다. 만일 진정 어린 예술의 심지를 안고 현대인의 더 풍부한 정신적 자산을 창조해내려 한다면 반드시 끝까지 견지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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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초서에 빠지게 된 계기와 선생님의 초서작품 변천사에 대해


초서는 중국 서법의 다섯 가지 서체 중에서 가장 자유스러우며 규칙성이 없습니다. 가장 높은 경지라 할 수 있으며 그래서 청대의 유희재(劉熙載)는 전서의 성인(篆聖)이나 예서의 성인(隷聖)은 없으며 오직 초서의 성인(草聖)만 있다 하였습니다. 초서는 그전에 반드시 다른 서체의 기초가 있은 뒤에 수심소욕(隨心所欲), 그 정취를 발휘하되 반드시 초법에 맞아야 합니다. 초서는 사람의 정서와 정감, 그리고 정신을 더욱더 표현할 수 있어 규거가 많은 해서와 달리 필묵을 표현하는데 더욱 분방하고 자유롭습니다. 좋은 초서는 네 가지 변화가 있는데 필법의 변화, 묵법의 변화, 포백의 변화 그리고 정감과 정신의 변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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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난서(亂書)작업과 서단의 방향

 


처음 글씨를 접하면서 특히 남경에서 대학을 다닐 때부터는 거의 매일을 견지하여 첩을 임서하였습니다. 용장사비(龍藏寺碑)로부터 시작하여 한비(漢碑) 등을 섭렵하면서 계속 현대서예에 대한 모색과 탐색을 쉬지 않았습니다. 서체의 급진적인 난서(亂書)의 창작에 관해서 말씀드리면 과거에도 이런 예가 없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성적으로나 예술적 관념으로나 이 난서를 긍정적으로 보지는 않았습니다. 이를 긍정적으로 보게 된 것은 대략 5-6년 전부터였습니다. 저는 처음 가로세로 2미터 정도의 난서(亂書) 작품을 제작하면서 거기서 저는 저의 예술적 언어를 발견하였습니다. 원래 저는 전통적인 서법가를 추구하였으나 중국미술학원에 들어오고 또 미국을 다녀오고 나서는 서법가가 아닌 예술가가 되고자 했습니다. 서법에서 나온 우리 시대의 예술가, 즉 난서(亂書)는 이런 저에게 하나의 접합점이 되었습니다. 난서(亂書)는 사실상 중국 전통서법의 이천 년 넘게 내려온 엄격한 규칙에 대하여 진행된 타파(打破)이며 도전입니다. 알다시피 예전의 우리 전통서법은 좌우 결구에서 서로가 교차하거나 부딪혀서는 안됩니다. 지금 저는 교차하는 것뿐만 아니라 중첩시키기도 하는데, 제가 글씨를 쓸 때는 여전히 60여 년에 걸친 임지(臨池)의 경험과 공력을 바탕으로 진지하게 작업합니다. 글씨를 중첩시키지 않았으면 그저 초서가가 쓰는 초서일 뿐이나 난서(亂書)로 형성된 뒤에는 한자로서의 식별은 어렵지만 그러나 그 가운데 선조의 질감이나 정신 그리고 기()는 여전히 구현되어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저는 난서(亂書)가 광초(狂草)의 정신을 더욱 체현하고 있다고 봅니다. 명나라 서위(徐渭) 같은 이도 작품 중에 행간을 타파하는 경우가 있었고 정판교(鄭板橋) 역시 '길에 어지러이 돌을 깐다(亂石鋪街)‘는 경우도 있었지만 아직 서로 중첩이나 교차하지는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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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지금으로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 것이다는 것은 따로 없습니다. 모두가 다 자연스럽게 생겨났지요.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난서(亂書)에 관한 비평들인데 저는 중국 및 한국의 동인들 속에서도 비평하는 의견이 있을 줄 믿습니다. 그러나 괜찮습니다. 저는 반드시 해나갈 것입니다. 이를 위해 저는 스스로에게 엄격한 요구를 하고 있는데 지금도 계속하여 첩을 임서하고 있습니다. 저는 저를 굳게 믿고 특히 예술에 강한 의지력과 정력(定力)으로 임하고 있으며, 최종에 가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작품을 보고 정말 좋은가, 순수한가를 판단하고 이해할 것이라 봅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 나가야 한다는 계획은 없지만 예전에 제가 인체 사진 위에 글씨를 쓰곤 했는데 여기에 난서(亂書)가 보태지면서 더 조화롭고 전체적인 것이 되어가지 않을까 생각을 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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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난서(亂書)라는 용어에 대해

 

'()' 이 글자는 고한어의 해석에 '()'라는 뜻이 있습니다. 난세를 다스리는 관원 같은 뜻입니다. 그리고 백거이(白居易)의 시 중에 '난화점욕미인안(亂花漸欲迷人眼)'라는 구절이 있죠. 꽃이 어지럽다, 꽃이 흩날린다는 이 말은 매우 아름다운 경지를 말하는 것이며 구름이 어지럽다(亂雲), 돌이 어지럽다(亂石), 산이 어지럽다(亂山)라고도 씁니다. 만일 그저 한 봉우리의 산이라면 난산(亂山)이라 하지를 않죠, 많은 산들이 중첩되어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난() 이 글자는 본래 한어(漢語)에서 대부분 폄의 또는 비평의 뜻이 있지만 시어로서의 난()자는 매우 풍부하며 낭만적인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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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항주에 있는 애플사와 함께 공동작업을 하게 된 계기와 현장휘호를 하며 느낀 점에 대해

 

그들은 인터넷으로 저의 작품을 보고 찾아왔습니다. (현장휘호는) 두 가지가 있는데 어떤 내용들은 제가 꼼꼼히 외워서 휘호를 하는 것이고 둘째는 한 번에 완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패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기본기를 시험하는 것과 같습니다.

 

Q. 한국 작가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

 

오늘 한국의 서법21 여러분들의 탐방을 대단히 기쁘게 생각합니다. 저는 이 매체를 빌어 한국의 서법가 동인들에게 안부의 말씀을 전합니다. 한국에 많은 분들이 저에 대한 지지와 사랑을 보내주신대 늘 고맙게 생각합니다. 특히 잊지 못할 것은 제가 제1회 전주비엔날레에서 대상을 받은 적이 있는데 당시 제가 얘기한 것은 상을 제 개인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모든 중국 예술가들에게 주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때 받은 큰 격려로부터 저는 부단히 노력하여왔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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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冬龄(왕동령 wángdōnglíng)

1945(74) 출생. 서법가.

 

약력: 中國美術學院敎授博士生導師中國書協理事浙江省書協副主席中國書法進修學院副院長美國明尼蘇達(미세노타)大學客座敎授

전시: 中國香港(홍콩)台灣(대만)澳門(마카오)等地 日本新加坡馬來西亞德國等國家多次舉辦個人書畫印系列展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