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씨 21

글씨와 놀다. 매거진 '글씨 21'

서예·캘리그라피

[Column]

2017-04-24
성인근의 글씨를 읽다 ㆍ 팔대산인 - 1

그곳의 소나무는 나처럼 기괴하고 늙었다.


명말청초(明末淸初)를 살다 간 한 남자가 있다그는 왕족이었다는 소문도 있고어떤 사람은 승려혹은 도사였다고도 한다또 어떤 이들은 벙어리였다고 하고심지어 미치광이였다는 풍문도 있다그가 남긴 글씨와 그림이 많으므로 서화가였음은 분명한데남겨진 작품의 전반에선 철저한 저항감과 고독감이 묻어난다그는 자신의 서화에 팔대산인(八大山人)’이라 썼는데사람들은 곡지(哭之)’ 혹은 소지(笑之)’처럼 보인다고 한다혹자는 마음 놓고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는 자신의 처지를 나타낸 장치라고 이야기한다그는 만년에 입버릇처럼 이런 얘기를 하고 다녔다고 하는데, “나는 허공에 우뚝 솟은 산과 절벽으로 가고 싶다그곳의 소나무는 나처럼 기괴하고 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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朱耷소나무


이야기의 주인공은 17세기 중국 예원(藝苑)의 개성파 서화가를 대표하는 주답(朱耷; 1627~1705)이다우리에게 익숙한 팔대산인이란 호는 60세 이후 팔대인각경(八大人覺經)이란 경전을 늘 소지하고 있다는 의미로 지은 그의 자호(自號)이다.

한 사람의 생을 몇 줄의 글로써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마는여기서는 그를 둘러싼 여러 소문들을 풀어보며 삶의 괘적을 따라가 보기로 하자우선 왕족이었다는 소문에 대해서기록에 의하면 그는 명나라를 개국한 명태조(明太祖주원장(朱元璋)의 16번째 아들 영헌왕(寧獻王주권(朱權)의 9대손이다주권은 명태조에 의해 남창(南昌)에 왕으로 봉해졌는데그의 후손들은 대대로 이곳에 자리 잡고 살았으며주답 또한 이곳에서 태어나 자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그는 이른바 태어나 보니 입에 금수저를 물고 있었다는 왕족이었다유년기의 그는 매우 똑똑했고특히 서화에 재능이 많았다고 한다


noname02.jpg朱耷의 서명과 인장


둘째승려였다는 소문에 대해서, 1645년 그의 나이 스무 살이 되던 해에 명나라가 망하고 대대로 살아온 남창이 점령되었다명나라의 왕족이었던 그에게는 불행의 신호탄이었다또한 같은 해 부친이 사망하는 불운을 겪으면서 평탄했던 삶은 고난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그는 무력이나 완력으로 적군에 대항할 수 없는 처지에 이르자 명나라 종실의 후손들이 그랬듯이 신분을 숨기고 산속에 은거했고, 1648년 삭발하여 승려가 되었다소장형(邵長蘅)이 쓴 팔대산인전(八大山人傳)에는 약관(弱冠)에 변()을 만나 집을 버리고 봉신산중(奉新山中)으로 피하여 머리를 깎고 승()이 되었다몇 년이 되지 않아 종사(宗師)라 칭해졌고 산에서 거주한지 20년 후 학문을 따르는 문인(文人)이 이미 백여 명이었다.”고 적었다그는 스무 살부터 대략 마흔 이전까지 승려 신분이었음이 확인된다.


셋째도사였다는 소문에 대해그는 약 20년 동안의 승려생활 이후 환속하여 도교(道敎)로 개종했다부인을 얻고 아이도 낳고 살았는데이 무렵의 생활은 주로 그림을 팔아 연명하였다고 한다고향 남창에 청운보도원(靑雲譜道院)을 건립하여 도가사상에 심취하기도 했는데 이 무렵부터 본격적인 서화가로서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했다따라서 왕족이었다거나 승려혹은 도사였다는 소문은 모두 소문이 아닌 사실인 셈이다.


넷째벙어리혹은 미치광이였다는 소문에 대해, 1679년 54세의 그는 임천(臨川)의 현령(縣令호역당(胡亦堂)의 초청으로 1년간 임천에 머무른 적이 있었다이때 청나라 조정에서는 명사(明史)를 편찬하고자 국내의 저명한 학자와 선비들을 불러 임용하고 각지에 흩어져 있던 명나라 유민 사대부들을 동참시키고자 하였다이는 청나라의 조정이 한족 문인들에게 취한 일종의 회유책이었다호역당은 본래 명나라 문인이었으나 청나라 조정을 위해 사대부들을 동참시키는 일에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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朱耷()


이때 주답은 호역당의 주선으로 임천 관사에 모인 벗들과 함께 시도 짓고 술도 마시고 노래를 부르는 등 흥을 즐겼다그러나 이러한 모든 호의가 호역당이 꾸며낸 술수의 함정에 빠져든 사실을 깨닫고 참을 수 없는 치욕과 모욕감을 느꼈다그는 입고 있던 자신의 옷을 발기발기 찢어 불에 던져버린 이후 임천을 떠나 남창으로 돌아왔다창랑의 물이 탁하면 발이나 씻으면 될 일이지만 그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그가 미치광이였다는 소문은 당시부터 심해진 광기 짙은 정신병세 때문이었다그는 이후 함구하고 사람들과 대화를 끊어버렸다누군가 그에게 말을 건네도 벙어리아()’자를 써서 보여주곤 했다벙어리였다는 소문은 여기에서 기인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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朱耷조석(鳥石)


그는 노년기에 남창의 몇몇 한림을 중심으로 활동했으며가난과 병마로 고독한 삶을 살다가 1705년 10월 15일 향년 80으로 남창에서 세상을 떠났다그는 시대가 안겨준 침통한 고뇌를 은일(隱逸)의 삶으로 저항하였고스스로 가시밭길을 걷는 체험을 통해 창조적 예술가로서 이름을 남겼다.

 

성인근(본지 편집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