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씨 21

글씨와 놀다. 매거진 '글씨 21'

서예·캘리그라피

[Interview]

2021-01-27
학정 이돈흥 선생 1주기 추모전 인영갤러리 문웅 인터뷰


학정 이돈흥 선생님 1주기를 맞아 '쓸수록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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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 전경


어느 학문을 하면서 수십 년을 지도받은 분야가 있으랴? 우리나라의 교육제도 중 대학에서는 한 학기 수업만으로도 사제지간이 된다. 그러나 한 과목에 대해 몇십 년 동안 가르침을 받고 배워가는 과정은 예술의 세계일 것이다. 더구나 서예는 스승으로부터 체본을 받고, 또 수없이 습작하여 검수를 받는 과정을 거치면서 성장해 나간다. 실로 줄탁동시(啐啄同時)의 시간이 쌓이면서 배움은 이어진다. 서예는 붓 한 자루, 먹 하나, 벼루 한 개, 종이 몇 장이면 입문이 가능하고 누구나 붓에 먹을 묻혀 종이 위에 점을 찍고 획을 그으면 글씨가 된다. 그리고 얼마 동안 습작을 한 다음, 한자나 한글을 서체에 따라 공들여 써놓으면 서예작품이 된다. 언뜻 생각하면 서예란 참 간단하고 손쉬운 작업인 듯하다. 그러나 서예는 그렇게 손쉽고 간단한 것만은 아니다. 스승에게서 열심히 법첩(法帖)이나 서사 이전의 정신적·철학적 내면성을 꾸준히 수련해야 하는 예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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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 전경


실로 기술이 아닌 심성의 표현이고 형이상학적 추상 세계이기에, 작가는 쟁이가 아니라 선비라야 하고, 선비란 학문과 인격을 갖춘 지성인인 것이다. 옛사람의 명문(銘 文)이나 뛰어난 사람의 필적을 자주 본다. 그것을 쓴 사람의 심혼이 담겨 있는 필적인 만큼 보는 사람의 마음도 절로 높고 아름다워질 수 있을 것이다. 여러 취미생활 중에 꼭 상대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고, 혼자서 즐길 수 있고, 때와 장소가 정해져 있지 않은 것이 장점이다. 나이가 들면 못 하는 것이 아니고, 더 원숙한 경지에 이르게 되어 무르익은 작품이 나온다. 그리고 이보다 더 경제적인 취미생활은 없을 것이다. 먹과 종이 만 준비하면, 최소의 비용으로 오래도록 많이 즐길 수 있다. 무엇보다도 내가 가장 매료된 것은 그 어떤 취미생활도 학문적인 공부까지 겸하는 것은 없는데, 서예작품을 쓰기 위해서는 사서삼경(四書三經)을 공부하는 것은 물론 5(, , , , 篆書)를 두루 익히면서 이 세상의 언어들을 고루 섭렵하게 된다. 선생님은 내 아호를 한 편의 시로 작명해주셨다. 인 영=인장고 영춘풍(그 어떤 어려움도 고통스러운 것들도 오래 참고 이겨내면, 마침내 따스한 봄바람처럼 좋은 일을 맞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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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장고 영춘풍 · 201×70cm / 일편심 · 137×35cm / 입처개진 · 133×33cm 


붓글씨는 중국에서는 서법(書法), 일본에서는 서도(書道), 한국에서는 서예(書藝)라 일컫는다. 이 말은 그 정신과 심오함이 다른 도나 법 예술에 못지않은 엄격함과 아름다움이 있음을 뜻하는 증좌(證左)이다. 다른 예술도 그렇지만 서()는 교()를 엄격히 배제하고 있다. 잘 쓰는 글씨는 힘이 있고, 소박하여 매우 자연스럽다. 사람의 인격이 꾸며서는 되지 않는 것처럼, 글씨도 꾸며서는 좋은 글씨가 되지 못한다. 그래서 사람과 글씨는 격()을 따진다. 사람에게는 인격이 있고, 서예는 서격(書格)이 있다. 서격이 좀 나은 글씨라도 쓴 사람의 인격이 떨어지면, 서격(書格)마저 떨어지게 마련이다. 그러기에 서예를 하는 사람은 스스로 자신의 인격이 손상되는 마음가짐과 언행을 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문명이 발달한 컴퓨터 시대일수록, 온 고이지신(溫故而知新)과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을 기본으로 해야 하는 까닭이다. 이런 모 든 것들을 내게 알게 해주신 분이 있으니 그분이 바로 학정 이돈흥(鶴亭 李敦興) 선생님이시다. 모든 학문은 계보가 있다. 나의 스승님의 계보는 이러하다. 여기서 우리나라의 고유 서체가 된 동국진체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하석 선생의 글에서, ‘학정체’, ‘신동국진체라 하였으니 동국진체의 계보를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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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진체는 윤순의 서법을 계승한 원교 이광사(員嶠 李匡師,17051777)에 의해 완성되었다. 그는 윤순에게 서예를 배우면서 그 능력을 칭찬 받았다. 이광사는 왕희지의 서첩들이 모두 오래되고 변모를 거듭하여 왕희지 본색을 알아보기 어렵다고 생각하여, 전서·예서를 통해 심획을 얻은 후, 다시 왕희지의 서법으로 바르게 나갈 수 있다고 깨닫는다. 여기에서 조선 고 유의 동국진체가 완성되었던 것이다. 조선의 고유한 색을 드러내며 문화가 발전을 이룬 18세 기에 서예 분야에서 옥동 이서가 서법을 정립한 것이 원교 이광사에 이르러 완성된 것으로, 조선 고유의 서체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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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하 윤순(1680~1741)의 문하에서 동국진체(東國眞體)로 유명한 원 교 이광사(1705~1777)가 나오는데, 원교의 서예 세계는 중국서예의 관념론적 굴레를 벗어나, 조선 혼()이 담긴 진경산수화 시대의 선두주자라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를 지닌다 (최한선 박사). 원교의 문하에서 조선의 3대 명필로 추앙되는 창암 이삼만(1770~1845) 이 나오고, 영재 이건창(1852~1898), 설주 송운회(1874~1965), 송곡 안규동(1907~1987), 학정 이돈흥(1947~2020.1.18.)선생을 사사하면서 서예에 입문하는 나(인영 문 웅, 1952~ )는 이런 어른들의 축에는 감히 들지 못하지만, 내 평생에 이런 훌륭하신 스승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사실은 큰 영광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이 어른들의 작품들을 차례로 소장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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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대에 좋은 스승을 만날 수 있는 행운을 얻다.

 

내가 나의 스승님을 논할 수는 없기 때문에 그 스승님과 書論을 나눈 이 시대의 대가 이신 하석 박원규(何石 朴元圭) 선생의 신문기사를 먼저 싣고 나의 얘기를 쓰고자 한다.

 

해서와 초서 가장 흐드러지게 쓰던 한국 서단의 거목


현대 한국 서단에서 해서와 초서를 가장 흐드러지게 쓰는 명필가가 1873세를 일기로 세 상을 떠났다. 학정(鶴亭)이돈흥 선생. 동갑으로 20대 초반에 만나 함께 보낸 세월이 50여 년, 나와 생일도 딱 일주일 차이인데 그가 세상을 먼저 등졌다.

 

서예가 이돈흥 동국진체계승 학정체개척 호남 서예 명가들의 맥 이어

 

1947년 담양 태생인 학정은 전남대 섬유공학과 1학년 당시 교장이었던 부친의 권유로 송곡(松 谷) 안규동 선생을 찾아가 서예에 입문했다. 그는 전남에, 나는 전북에 살았고, 대학도, 전공도 달랐지만 서로 친했던 송곡 선생과 강암 송성룡의 제자로 처음 만났다. 학정은 호남의 명가 들, 즉 송설주 선생-소전 손재형 선생으로 이어지는 서예의 맥을 정통으로 이은 한국 서단의 거목이었다. 원교(圓嶠) 이광사(17051777)와 추사(秋史) 김정희의 전통을 계승, 자유분방한 필치에 해학과 여유까지 담아낸 조선 고유의 서체동국진체(東國眞體)’의 전통을 이어온 주역이다. 학정은 전통 계승에 만족하지 않았다. 동국진체를 바탕으로 중국 명가들의 서풍을 섭렵해 독자적 서체를 개척했다. 이른바 학정체. ‘신동국진체라 불리기도 하는 학정체는 자유분방하면서도 정감 있고, 또 흐드러진 꽃처럼 무르익은 그의 솜씨를 보여준다. 학정 형이 27세에 만든 학정서예연구원에서 후학 3만여 명을 배출했고, 이 중 상당수가 중견 서예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와 의기투합해 20051월 서울 인사동 공평아트센터에서 마련한 삼문전은 잊을 수 없다. 학정과 나, 그리고 소헌 정도준 셋이 서로 왕래 가 없는 문하생 45명의 전시를 함께 연 자리였다. 폐쇄적인 한국 현대 서단에 충격을 던진 자리였다. 글씨에 대한 자부심뿐만 아니라 선의의 경쟁에 대한 열린 마음이 있어야 가능했던 일이다. 이 의기투합은 2012서예삼협파주대전(書藝三俠坡州大戰)’으로 확대됐다. 한길사에서 학정과 나, 그리고 소헌이 함께 작품집을 내고 기념전시를 크게 연 것 이다. 20세기 한국 서단의 거장인 강암과 송곡, 일중(김충현) 문하에서 잔뼈가 굵은 우리 세 사람 이 칼이 아닌 붓을 들고 벌인진필 승부의 자리였다. 국립 5·18 민주묘지는 물론, 화엄사, 해인사, 송광사, 대흥사, 불국사, 범어사 등 전국 유명 사찰에서도 그의 작품을 볼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학정은 더는 한국에서, 그리고 중국에서 글씨 얘기를 할 친구가 없어서 서둘러 이승을 떠났나 보다. 저세상에서 추사도 만나고, 명의 왕탁도 만나고, 송의 황산곡도 만나 글씨를 쓰고 있지 않을까. 천국에도 명필이 간절히 필요했나 보다.

 

하석(何石) 박원규 서예가·한국전각협회 회장 [출처: 중앙일보] [삶과 추억]

 

일속 오명섭 · 쓸수록는다 / 학정 이돈흥 · 수강


나는 다른 제자들처럼 전념으로 서예를 하는 게 아니고 내가 하는 일들이 따로 있으니, 필력이 늘지 않아 늘 선생님께는 죄송할 따름이었다. 그럴 때마다 인영, 눈으로도 는단다. 항상 서예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마라. 한 눈만 팔지 마라.” 하셨다. 서예는 독습이 안 된다. 선생님의 붓놀림을 보고 있노라면. ‘, 그 획은 이래야만 나오는구나.’ 했다. 체본을 받으면서 저는 왜 선생님처럼 획이 잘 안 될까요?” 했더니, “그러면 나는 그동안 뭐 했냐?” 어찌 무슨 말이 필요하랴. 내가 선생님을 찾아뵐 때마다 붓을 손에서 놓으신 적이 없이 글씨를 쓰셨다. 조금 나와 대화를 나누시다가 바로 또 붓을 잡으신다.

 

선생님, 또 쓰시게요?”

쓰면 쓸수록 느는데 어떻게 안 쓰겠냐?”

 

세상에! 나는 무얼 하고 지냈는가? 눈으로도 는다니까 붓은 안 잡고 눈으로만 쓰고 있었다니……. 그래도 44(2020)까지 이어온 연우회전에, 2011년에 연 30회를 출품했다고 선생님이 이렇게 내게 상으로 작품을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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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국전에 작품을 출품하기 위해 200여 장을 습작하면서 좀 자신감이 붙고 재미가 있었다. 5년 뒤에는 기어코 스승님을 따라붙겠다고 다짐했는데, 5년이 지나고 나니 이젠 10년 후에나 따라붙을까? 그때 선생님께 말씀을 드렸더니 그럼 나는 그동안 쉬고 있을 것 같으냐?” 하신다. 또다시 20년이 흘러도 스승님의 흉내도 못 내겠더라. 아니 20년이 아니라 한 세기가 바뀌어도 스승님의 한일()자 하나도 따라갈 수가 없다. 내가 국전에서 특선을 하고 나서는 더 더 선생님이 큰 바위처럼 느껴졌다.

 

201911월의 연우회 43회전 작품 <일편심 一片心>을 우리 집 인영헌에서 쓰셨다. 그리고는 나에게는 <立處皆眞 隨處作主 立處皆眞 己亥晩秋 紅葉飛天時 於 忍迎軒 鶴丁 病中 作입처개진 수처작주 입처개진 기해만추 홍엽비천시 어 인영헌 학정 병중 작> [머무는 곳이 어디든 주인이 되라. 지금 있는 그곳이 참된 세계니라]임제록(臨濟錄) : 중국 불교 臨濟宗의 개조 義玄의 법어를 수록한 책과 <일편심>을 써주셨다. 2019년 늦은 가을 붉은 잎사귀가 하늘에 날리는 때에, 인영 문웅집에서 학정이 병중에 쓰다.- 라고 마치 추사가 봉은사 판전(板殿)을 쓴 지 3일 후에 작고하신 것처럼, 선생님은 이 작품의 붓을 마지막으로 잡으시고 다시는 붓을 잡지 못하시고 하늘나라에 가셨다. 나에게는 얼마나 소중한 작품을 남겨주셨는가? 지금은 그 얼마나 붓을 잡고 글씨를 쓰고 싶으실까? 아니면 그곳에서는 아픔도 없이 더 많은 작품을 쓰고 계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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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여 동안 식도암으로 투병하시다가 마지막 4개월을 서울의 요양병원에서 치료하고 계실 때 이틀이 멀다 하고 문안을 드렸을 때 선생님께 보낸 문자 메시지다.

 

선생님 저는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어머님이 46세에 저를 낳으시고 아버님은 5살 때 돌아가셨습니다. 두 형님이 계셨는데 두 분 다 60을 못 넘기시고 단명하셨습니다. 그러니 세 누님이 항상 막동아! 이제 너 하나만 남았다.’ 하셨어요. 그런데 저에게는 둘째 형님의 나이와 선생님이 동갑이셔서 스승님으로, 또 형님같이 저를 지켜주시고 가르쳐주고 계신 유일한 분이십니다. 미력하나마 지금의 제가 있기까지 우리 선생님의 든든한 후원과 버팀목은 저를 더 강인하게 만들어주고 계십니다.

저에게는 다른 제자 분들과는 다른 나만의 애정법이 있습니다.

제발, 제발 어서 나으셔서 예전처럼 저를 지켜봐 주셔야 합니다.”

나도 눈물 나~

 

장례를 쭉 지켜보면서 인생의 허무를 또다시 느끼게 한다. 화장을 하고 담양 선산에 40센티도 안 되는 사각 구덩이를 파고 그곳에 유골을 담은 도자기 하나 넣고 평분(平墳)으로 잔디를 덮으니, 한 시대를 살면서 그토록 치열하게 예술혼을 불태우시던 위대한 서예가이며 학자이신 스승님의 일생이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셨다.

우리 남은 자들에게 남기신 교훈이 무엇인가를 성찰하게 만드셨다. 부모님을 여읜 후 자식이 부모에게 하는 참 효도는 부모님이 기뻐하시도록 잘 되는 것이다. 우리 후학들이 선생님의 유훈대로 더 정진하여 학정의 제자답다.’라는 말을 듣도록 해야 할 것이다.

다행히 담양군에서 <학정서예관>을 지어서 선생님의 작품800여 점과 유품, 아카이브 등 1,000여 점을 보관하여 기리게 되었으니 감사한 일이다. 이에 더하여 일생서예와 학문에 매진하신 공을 인정받아 20191019일 정부로부터 은관문화훈장을 추서 받으셨다.

선생님 손에 의해 묻힌 유묵 한 점 한 점이 모두가 소중하다. 이에 오늘 나는 그동안 내 개인적으로 곳곳에서 모아온 60여점의 선생님 작품들만을 모아서, 선생님 1주기를 맞아 조촐한 전시를 마련하게 된 것이다. ‘한 노인이 세상을 떠나신 것은 도서관 하나가 없어진 것과 같다더니 학정의 육신은 갔지만, 그분의 작품들과 정신만은 영원히 남으리라.



2021. 1. 18
忍迎 文 熊 (.敎授·藝術學博士)



<전시 정보>

학정 이돈흥 선생 1주기 추모전 '쓸수록는다'

전시기간 : 2021. 1. 18(월) ~ 1. 30(토)

전시장소 : 인영아트센터 3층 인영갤러리

(서울시 종로구 인사동 10길 23-4)

전시문의 : 02-722-88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