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성인근의 글씨를 읽다-5
아름답다는 것의 발견 영화이야기로부터 시작해 보자. 이창동 감독이 각본을 쓰고 연출한 《시》라는 작품이다. 2010년 5월에 개봉한 이 보석 같은 영화는 흥행에 실패했다. 이창동 감독, 《시》 포스터, 2010년영화에서 종욱이 할머니(윤정희)는 동네 문화원에서 우연히 \'시\' 강좌를 수강하며 난생 처음 시와 마주하게 된다. 문화원에서 시를 가르치는 강사는 김용택 시인으로 ‘김용탁’이라는 이름으로 영화에 등장한다. 그는 동네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첫 강좌에서 ‘본다’라는 주제를 말하며 주머니 속에서 사과 하나를 쓱 꺼내며 말한다. 강의하러 오면서 사과를 준비할 정도로 준비성이 많은 강사가 어디 있겠냐며 너스레를 떨면서. “여러분은 지금까지 사과를 몇 번이나 봤어요?천 번? 만 번? 십만 번? 아니요, 여러분은 지금까지 사과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사과를 알고 싶어서, 관심을 갖고, 이해하고 싶어서, 대화하고 싶어서 본 적이 없어요. 무엇이든 진짜로 보게 되면 뭔가 느껴지는 게 있어요. 샘에 물이 고이듯이, 종이와 연필을 들고 그 순간을 기다리는 거예요. 흰 종이의 여백, 순수한 가능성의 세계, 창조 이전의 세계, 시인에게는 그 순간이 좋아요.” 문화원의 두 번째 강좌에서 종욱이 할머니와 김용탁 시인 사이에는 또 이런 문답이 오간다. 《시》 스틸컷-1“시를 쓴다는 것은 아름다움을 찾는 일이예요.” “선생님, 시상(詩想)은 언제 찾아와요?” “시상이 언제 찾아 오냐구요?”“네, 아무리 시상을 얻으려고 해도 도무지 오지 않아요.” “시상은 찾아오지 않아요. 내가 찾아가서 빌어야 해요. 그래도 줄똥 말똥 해요. 그게 얼마나 귀한 건데 함부로 주겠어요? 그러니까 내가 찾아가서 사정을 해야 돼요.” “어디로 찾아가요?”“그거... 그거는... 어디를 정해놓고 찾는 게 아니고, 그냥 찾는 거예요, 돌아다니면서. 시상이 ‘나 여기 있소’라고 문패 걸어놓고 기다리고 있겠어요? 분명한 건 내 주변에 있다는 거예요. 멀리 있지 않고. 지금 내가 있는 자리, 거기서 얻는 거예요. 설거지통 속에도 시가 있어요.” 서예를 한다는 일도 시상을 찾는 일처럼 ‘아름다움에 대한 찾아 헤맴’의 시간이 필요하다. 문학을 포함한 모든 예술에서 작가는 항상 ‘무엇을’ ‘어떻게’라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여기서 ‘무엇을’이 표현의 대상이나 목적이라면 ‘어떻게’는 그 방법에 해당한다. 무엇보다 창작에 있어 첫 번째 직면과제는 바로 ‘무엇을’이며 시로 말하면 시상에 해당한다. 서예가들도 창작의 목적과 방법을 수천 년 고민해 왔다. 하나의 사례로, 지금부터 1,300년도 더 이전 사람인 손과정(孫過庭)은 붓을 들기 전 선결과제로 다섯 가지 조건을 들었다. 1. 마음이 편안하고 세태에 간여하는 바가 없을 때. 2. 지기(知己)로부터 은혜를 입어 감사하고자 하는 마음이 들 때. 3. 날씨가 청명하고 기후가 더 없이 편안할 때. 4. 양질의 지필묵이 있어 나의 흥취를 유발할 때. 5. 홀연히 영감이 동할 때. 손과정(孫過庭, 646~691), 『서보(書譜)』 상권. 중요한 고전일수록 화자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맨 뒤에 있는 경우가 많다. 다섯 가지 조건 가운데 앞의 네 가지는 일상에서 어쩌면 흔히 만날 수 있지만, ‘홀연히 영감이 동할 때’는 매우 관념적이지 않은가. 여기서 ‘영감이 동할 때’는 시로 말하자면 ‘시상이 올 때’와 흡사한 지점일 것이다. 그러면 종욱이 할머니의 질문처럼 그 영감이나 시상은 언제 찾아오는가? 해답은 역시 ‘본다’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다. 김용택 시인은 ‘본다’라는 시각만을 대표적으로 언급했지만 어떤 대상을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져보면서 느끼는 과정에서 이전과는 다른 세계를 만나는 체험, 그 지점에서 영감과 시상은 다가오는 것이리라. 《시》 스틸컷-2 “샘에 물이 고이듯이, 종이와 연필을 들고 그 순간을 기다리는 거예요. 흰 종이의 여백, 순수한 가능성의 세계, 창조 이전의 세계, 시인에게는 그 순간이 좋아요.” 성인근 ․ 본지 편집주간
[Column]
성인근의 글씨를 읽다 - 4
예술가의 현실인식 노무현 정부 초기인 2003년.덕수궁미술관에서는 당대 한국과 중국 문인서화가의 거장 장우성(張遇聖)과 리커란(李可染)의 2인전이 열렸다. 당시 리커란은 이미 돌아가신 후였고, 장우성은 92세의 노경이었다. 그러나 두 분 모두 한국과 중국이 겪었던 격동의 현대사를 교수이자 화가의 신분으로 살았다는 점과, 세상에 시서화 삼절의 거장으로 칭해진다는 공통점이 있다. 당시 전시에 출품한 작품 가운데 유독 눈에 띄는 한 점의 그림이 있었다. 장우성의 2003년 작 ‘아슬아슬’이다. 이 그림이 눈에 띈 이유는 거장의 그림이라 하기엔 왠지 어린애 같은 치졸(稚拙)함 때문이었던 것 같다. 불안한 선조(線條)와 구성. 색도 넣지 않은 단순함, 유치원생의 스캐치북에서나 보았을 법한 그림이었다. 월전 장우성 - 아슬아슬 (2003)90대의 노대가가 왜 이런 불안한 그림을 그렸는지는 그림 아래 써놓은 몇 줄의 시를 어렵사리 읽어내고서야 알게 되었다. 無心乘新車 動輒之字驅滿座人皆駭 肝膽小如豆相問運者誰 始知初步手狂走向何去 恐將斷崖墜(二千三年夏 老月畵) 무심히 새로 탄 버스, 갈지자로 몰고 가네.승객들 모두 놀라 간담이 콩알만.운전수가 누구냐며 수군수군, 초보임을 알겠네.미친 듯 어디로 달려가나, 낭떠러지 떨어질라.(2003년 여름 노월(老月) 그림) 시를 읽고 그림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버스 바퀴 3개는 지면에서 떨어져 있고, 승객들은 잔뜩 웅크리고 있었으며, 운전사만 앞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작가는 진보 성향의 새로운 대통령을 운전기사에, 자신을 포함한 국민을 승객에 빗대어 당시의 형국을 이렇게 표현했다. 작가는 당신이 본 현실인식을 이렇게 유머러스하게 그려냈다. 아마도 90 넘은 노화가의 눈에는 진보와 개혁 성향의 대통령이 진행한 국정 초반이 이렇게 불안해 보였나보다. 노무현대통령에 대한 공과는 여기서 언급할 주제는 아니다. 그러나 그는 선거에서 기적 같은 승리를 이뤘던 만큼 준비가 부족했고, 무슨 일을 해도 DJ정부와의 성격과 차별화하기 힘들었다. 또한 그가 독기 오른 보수언론과 보수 세력은 물론, 내부의 적들과도 진보라는 이름으로 힘겹게 싸워야 했던 점은 분명해 보인다. 나는 14년 전 그림을 들여다보며 문인화의 본령을 다시 질문해 본다. 전통시대 직업화가가 아닌 문인들이 자신의 시심(詩心)을 사물에 의탁해 그려낸 문학적 회화가 문인화의 본령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우리시대의 문인화란 무엇일까를 반문할 수밖에 없다. 문인이나 무인 등의 신분개념이 사라진지 오래인 우리시대의 문인화 말이다. 문인화를 가르치는 사람이나 배우는 사람들도 전통시대 ‘군자의 표상’이라는 식물들의 관념적 외형을 답습하고 있는 것이 과연 온당한 일일까. 어쩌면 우리시대의 문인화는 형해화한 유산의 수분 빠진 껍데기만 달여 먹고 있는 게 아닐까. 우리시대의 정서를 대변할 소재 개발과 확산은 넘봐서는 안 되는 주제인가. 예술이란 결국 작가의 현실인식에서 태동하기 마련이다. 시대의 현실인식에 발을 딛고 선 문인적 시심을 회복할 때다. 장우성처럼 어린아이 같은 그림일지라도 작가가 무엇을 응시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는 문인화를 보고 싶다. 2017. 6. 15성인근(본지 편집주간)
[Project]
대학교탐방 경기대학교편 - 3부 나 서예하는 사람이야!
글씨21 기획 젊은 서예 프로젝트! 대학교탐방 1탄경기대학교 서예·문자예술학과의 문을 두드리다!- 3부 나 서예하는 사람이야! 마지막 3부는 학생들이 체험했던 서예만의 장점과 서예전공자로서의 자부심, 또 서예를 전공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그렸다. 이는 서예라는 예술 분야가 꼭 전문가들만의 영역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 학문으로의 서예와 취미로의 서예 모두가 가치 있으며 동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영상 후반부에서는 서예·문자예술학과의 학과장인 장지훈 교수의 당부와 격려가 담긴 메시지를 전하며, 대학교탐방 경기대학교 서예·문자예술학과편이 마무리된다.글씨 21 편집실
[Project]
대학교탐방 경기대학교편 - 2부 우리 과에 왜 왔니
글씨21 기획 젊은 서예 프로젝트! 대학교탐방 1탄경기대학교 서예·문자예술학과의 문을 두드리다!- 2부 우리 과에 왜 왔니2부에서는 서예가 꿈나무들의 과거, 현재, 미래를 엿본다. 학생들에게 서예·문자예술학과에 입학한 이유와 서예를 시작한 후 기억에 남는 일, 서예를 지키기 위한 방안과 자신의 롤모델, 졸업 후의 목표 등을 들어본다. 재학생들이 느끼는 서예학도로서의 즐거움과 어려움을 인터뷰를 통해 간접체험해 볼 수 있으며, 교육 차원으로의 서예가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도록 한다. 다섯 학생 개개인의 개인적인 이야기와 각자의 개성을 느낄 수 있고, 더불어 새내기의 거침없는 의지와 언변, 고학년으로 갈수록 차분하고 조심스러워지는 것을 볼 수 있다.글씨21 편집실
[A feature]
도심 속의 아름 다운 글씨 탐방 1
[특집]도심 속의 아름다운 글씨 탐방1 - 성균관을 찾아서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 데이트나 여행에서 맛집을 찾아다니는 맛집탐방 코스가 선풍적이다. 삶의 질이 개선되면서 이제는 어디에 가서든 시장한 배를 채우기 위해 아무데나 들어가서 먹으려 하지 않는다. 기왕이면 소문난 집에서 맛을 즐기길 원한다. 이에 인터넷을 샅샅이 뒤져 ‘맛집’을 찾는다. 유명 맛집은 무더위에도 1시간씩 대기하며 문전성시를 이룬다. 맛집에 목을 매는 이유는 무엇일까? 맛집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음식의 향과 비쥬얼, 맛은 물론이고 그 집에 대한 내력과 소소한 평가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먹거리 만큼이나 우리의 볼거리는 없을까 하고 글씨21에서 찾아 나섰다. 마침 ‘맛집 탐방’ 만큼이나 흥미롭게 ‘글씨 탐방’을 풀어낸 대학의 강의가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벚꽃이 흩날리는 봄날, 경기도 수원에 위치한 경기대학교의 한 수업에서 아주 재미난 과제가 공지되었다. 경기대학교 예술체육대학 한국화·서예학과 전공수업인 장지훈 교수의 ‘서예학개론’이다. <도심 속의 아름다운 글씨를 찾아서>라는 주제의 과제는 학생들이 도심 곳곳에 퍼져있는 아름다운 글씨를 직접 찾으러 떠난다. 책, 인터넷, SNS 등을 통해 자료를 미리 조사하고 글씨가 있는 곳을 현장 탐방한다. 그 곳에서 글씨를 직접 감상하고 평가하고 분석하여 자기만의 유익한 정보를 만들어낸다. 장지훈 교수는 “예전에 건축학개론이라는 영화를 보고 착안했다. 서예학개론이 원래 딱딱한 이론수업이라 텍스트로 가르친들 학생들이 수업 때만 잠시 익힐 뿐 크게 활용되지 않더라. 이론으로 배운 글씨의 세계를 직접 찾아다니는 것만큼 좋은 것이 없다는 판단에서 몇 년 전부터 이 수업에 아름다운 글씨탐방을 주문했다.”며 수업을 통해 서예를 전공하는 학생들이 생활 속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품격있는 글씨를 하나씩 하나씩 발견하고 인식하는 기회를 갖도록 하고 있다. 글씨21은 이 점에 주목하여 학생들이 직접 방문하고 조사한 보고서를 특집기사로 다룬다.조선 최고의 교육기관에는 어떤 글씨가 있을까- 성균관의 아름다운 현판을 찾아서 - 경기대 서예학과 2학년 송유나 · 이다혜 벚꽃이 만개해 나들이하기 좋은 계절이 왔다. 예쁜 사진을 찍으려 서울 도심을 누비다 보면, 심심치 않게 꽃들과 어우러진 고궁(古宮)들을 볼 수 있다. 우리는 그 고궁의 모습을 보고 이름이 무엇인지, 어떠한 곳이었는지를 알고 싶어 하는데, 그럴 때 제일 먼저 보게 되는 것이 ‘현판’이다. 옛 건축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판은 그 건축물의 시간과 성격을 그대로 담고 있으며, 보는 이로 하여금 건축물이 어떤 기관이었는지를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더욱이 현판에 쓰인 글씨는 해당 건축물이 지어진 시대에 살고 있던 최고의 학자, 명필가, 혹은 임금님이 하사한 글씨로 제작된 것이어서 역사적 의의가 더욱 크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수많은 고궁 중에서도 조선 당대 최고의 교육기관이었던 성균관을 찾아가 현판의 글씨를 감상해 보았다. 성균관의 현판은 전(殿)마다 모두 쓴 이가 달랐으며 현판 문구의 의미, 서체의 선정, 현판의 배치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빼놓을 수 없을 정도로 선현들의 고심이 담겨있었다. 성균관에는 수많은 현판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유교사회인 조선의 최고 교육 기관이 성균관이었다는 점을 감안하여 가장 의미가 깊은 대성전(大成殿)과 명륜당(明倫堂)의 현판을 중심으로 조사해 보았다. 처음으로 소개할 현판은 ‘대성전(大成殿)’이다.<그림1> 성균관 대성전(大成殿)의 현판성균관에서 대성전은 공자를 모시는 사당의 역할을 하는데, 공자를 비롯하여 선현(先賢) 39명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곳이다. 대성전의 ‘대성(大成)’은 공자의 시호(諡號)인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을 두 글자로 축약한 것인데, 처음부터 시호가 이렇게 길었던 것은 아니었다. 739년 당나라 현종 때에 ‘문선왕(文宣王)’이라는 시호를 시작으로, 송나라 진종 때에는 ‘지성문선왕(至聖文宣王)’이었고, 원나라 무종 때에 이르러서야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이라는 시호를 갖추게 되었다. ‘대성전’의 글씨는 당대 최고의 명필가로 통하였던 석봉(石峯) 한호(韓濩, 1543~1605)의 글씨로 전해지며, 서체는 해서(楷書)체로 쓰여졌다. 서체가 단정하고 획이 굵은 편이어서 골법을 잃은 것이 아니냐는 비평을 받기도 하였으나, 개인적으로는 공적 기관인 성균관에 걸리는 글씨인 만큼 정갈한 느낌을 주기 위한 의도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두 번째로 소개할 현판은 ‘명륜당(明倫堂)’이다.<그림2> 성균관 명륜당(明倫堂)의 현판 1명륜당은 대성전 문묘 뒤에 지어져 조선의 유생들이 문과(文科)를 준비하며 유교경전을 강학하던 장소이다. ‘명륜(明倫)’이라는 단어를 해석해보면 윤리, 그 중에서도 인륜을 밝힌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도리와 명분을 중요시했던 유학의 가르침을 그대로 배우고 익히게 하는 공간이었던 것이다. 명륜당의 글씨는 명나라의 사신 주지번(朱之蕃, 1565~?)이 썼으며, 대성전의 현판과 마찬가지로 해서체로 쓰여졌다. 주지번이 조선에 사신으로 와 있으면서 써준 현판 중 해서로 된 현판은 4점이 있는데, 그 중 명륜당의 서체는 다른 현판의 서체에 비해 획의 굵기가 얇고 정갈한 느낌을 준다. 어질게, 하지만 강직한 심성의 수련을 강조하는 유교의 가르침과 부드럽지만 무르지 않은 굳셈이 느껴지는 현판 서체가 상호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림3> 성균관 명륜당(明倫堂)의 현판 2이 현판 역시 명륜당의 현판이며, 명륜당 안쪽에 걸려있는 것으로 우리에게는 ‘주자(朱子)’로 알려져 있는 주희(朱熹)의 글씨이다. 이 글씨의 진위여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았으나, 오랜 설전과 연구 끝에 주희의 글씨로 밝혀졌다. 위에서 언급한 주지번이 쓴 명륜당의 현판과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점이 있다. 즉, 해서체라는 점, 느낌이 점잖고 단정하다는 점은 비슷하나, 이 글씨는 주지번의 글씨와 비교했을 때 육(肉)이 좀더 많으며 기필, 수필 부분이 상대적으로 더 감춰져 있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또한 하얀 바탕에 검은 글씨가 아닌, 나무의 색 그대로에 바래져 있는 금빛의 글씨를 보고 있자면 주지번이 쓴 현판보다 건물과 더욱 어울리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그림4> 성균관 명륜당 경내의 은행나무어느 정도 조사를 마치고 명륜당 앞 돌계단에 앉아 쉬고 있었는데, 눈 앞에 커다란 나무가 보였다. 제법 긴 역사를 가지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알아본 결과, 4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성균관을 지키고 있는 은행나무였다. 천연기념물 제 59호로 지정되었으며 실제로 보면 나무라는 생명체가 주는 생기, 또한 뿌리를 내린 지 400년이 넘은 고목(古木)이 주는 위엄과 푸근한 느낌을 동시에 받을 수 있다. 과거 이 곳에 머물렀던 성균관 유생들은 아마 은행나무처럼 건전하게 자라 바른 사람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따스한 봄날 성균관을 둘러보며 꽃도 보고 옛 글씨들도 둘러보니 과제를 위하여 왔다는 사실은 잊고 성균관의 정취에 빠지게 되었다. 평소에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던 현판 글씨가 이렇게 많은 의미와 정성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 우리나라의 현판을 외국인 사신이 써주었다는 사실도 신선하게 다가왔다. 대성전과 명륜당의 서체는 모두 해서체였지만 전부 다른 느낌을 주고 있었다. 하나의 필적 안에는 서체와 내용만 담긴 것이 아니라 수백 년의 시간과 글씨를 쓴 이의 정신도 담겨있다. 우리 역시 글씨를 쓰는 사람으로서 언젠간 필적을 남기게 될 것이고, 그것이 시간을 담은 뒤에 어떠한 평가를 받게 될지 모른다. 때문에 그 어떤 필적을 남기더라도 붓을 잡는 순간만큼은 부끄럽지 않게 정성과 혼을 쏟아 먼 훗날 세상에 아름다운 묵향으로 기억되는 글씨를 남겨야 하지 않을까 한다.좌) 이다혜 학생 / 우) 송유나 학생글씨21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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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탐방 경기대학교편 - 1부 흔한 서예학도의 하루
글씨21 기획‘서예’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무엇일까? 진품명품 혹은 조상님의 유품을 떠올리는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서예가 어르신들의 취미, 오래되고 낡은 지루한 것이라는 편견이 많다. 이러한 편견을 깨기 위해, 옛 것의 훌륭함을 지키되 새로운 시도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순간에도 부단히 노력하고 있는 젊은 서예학도들이 바로 그들이다. 장차 우리나라 서예의 미래를 이끌어 나가야하는 대학생들에게서 볼 수 있는 밝고 경쾌한 모습, 또 그 안에서 나름의 고민을 하며 이에 대한 해결점을 찾는 모습을 진솔하게 담고자 하였다. 이를 통해 젊은 서예인들의 서예에 대한 애정과 자긍심, 현대인들에게 잊혀가는 서예를 수호하기 위한 노력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또한 학생들을 뒤에서 지켜보며 때로는 말없이, 때로는 강한 어조로 응원하는 교수진들의 모습도 보여주고자 한다. 서예의 기본에 충실하되, 보다 다채롭고 현대적인 표현 방법을 연구하고 훈련하는 이들의 삶을 바라보며, 그들의 피와 땀을 응원한다.젊은 서예 프로젝트! 대학교탐방 1탄경기대학교 서예·문자예술학과의 문을 두드리다!- 1부 흔한 서예학도의 하루미쳐 미쳐 미쳐! 불광불급(不狂不及), 미치지(狂) 않으면 미치지(及) 못한다는 각오를 구호로 외치는 경기대학교 서예·문자예술학과를 찾아갔다.1부에서는 경기대학교 학생들의 학교생활을 엿보고, 각 학년마다의 서로 다른 분위기를 느껴본다. 이 영상에 등장하는 세 명의 교수와 아홉 명의 학생들을 통해 강의 진행 모습과 과제, 개인이 하고 있는 작업, 재료 준비 방법 등을 소개한다. 서예를 하는 사람이면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을 인터뷰로 다루고, 서예를 하지 않는 사람들이 궁금할 법한 실기 위주의 수업을 밀착 카메라 형식으로 담았다.글씨21 편집실
[Column]
성인근의 글씨를 읽다
전쟁의 상처와 예술의 치유- 오창석(吳昌碩)의 명월전신(明月前身) -몇 년 전 지인에게 오창석이란 사람을 아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는 엉뚱하게도 아침드라마에 나온 주인공 아니냐며 내게 되물었다. 오창석이란 이름의 배우가 있다는 사실을 모른 나는 인터넷을 찾아 말끔하게 잘 생긴 그를 확인하고 적잖은 이질감을 느껴야 했다. 내가 아는 오창석은 사실 잘생김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똑같은 이름을 이야기해도 전혀 다른 이미지를 떠올리는 일은 잦으며 간혹 당혹스럽다. 같은 시간과 공간에서 숨을 내쉬고 있어도 한 사람이 살아온 경험의 축적은 이승과 저승만큼이나 멀다. 오창석, 60세의 초상과 자찬(自讚)돌이켜 보면 아마도 내가 처음으로 사랑한 중국인이 바로 오창석이 아닌가 싶다. 서예를 배우던 초기에 그의 전서를 보고 한눈에 매료되었고, 글씨, 그림, 전각으로 확장하면서 일관된 정신의 흐름에 인간적인 매력으로까지 빠져들게 되었다. 나보다 한 세기 이상나 먼저 사람이고 국적도 다르지만 그를 느끼고 애호할 수 있다는 일은 즐거운 행운 이상이라 하겠다. 지금도 나는 한가할 때면 다락에 숨긴 단지처럼 그의 인보(印譜)를 꺼내보곤 한다. 『오창석인보』그가 남긴 인영(印影) 가운데 눈길을 끄는 한 방의 전각이 있다. 그의 나이 66세 때인 1909년 작 ‘명월전신(明月前身)’이다. 인문은 전(田)자형 계선(界線) 안에 소전풍 양각으로 4글자를 새겼는데, 획 안에 쌓인 밀도가 매우 높고 탄탄하다. 특히 직선과 곡선, 글자와 변(邊), 매끄러움과 거침의 조화가 절묘하다. ‘明月前身’ 인영그는 인면을 새기고 난 후 인신(印身)의 상단에 기유년 2월 오(吳)에서 66세에 새겼다(己酉春仲 客吳下 老缶年六十有六)는 간략한 기록을 남겼다. ‘明月前身’ 관지또한 인신의 한 측면에는 음각으로 도려낸 공간에 한 여인이 서 있는 모습을 새겼다. 마치 감실(龕室) 속의 부처를 연상케 한다. 또 다른 한 측면에는 세로 6자, 가로 3자로 총 18자의 글자를 양각으로 새겼는데, 마치 북위(北魏) 때의 조상기(造像記)를 대하는 듯 금석기(金石氣)가 짙다. 여기에 그는 이런 내용을 남겼다. “元配章夫人夢中示形 刻此作造像觀 老缶記”“원부인 장씨가 꿈속에 나왔길래 이 돌에 조상(造像)을 새겨 만들고 기록하다.” ‘明月前身’의 조상(造像)과 조상기(造像記)이 전각의 배경은 그의 나이 16세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1850년부터 1864년까지 중국 대륙에서는 ‘태평천국의 난’이라는 대규모 내전이 일어났다. 교전은 만주족 황실의 청나라 조정과 기독교의 구세주 사상을 기반으로 한 종교국가 ‘태평천국’ 사이에 일어났다. 전란의 주요 무대는 강소성, 절강성, 안휘성, 호북성이었으나, 14년간의 긴 전쟁 동안 북서쪽 끝의 감숙성을 제외한 모든 중국의 성을 최소한 한 번 이상 태평천국군이 지나갔다. 이 내전으로 적어도 2천만~7천만 명이 사망했고, 난민 신세가 된 사람도 수백만 명에 달한다. 오창석이 살던 절강의 안길현(安吉縣)도 이 전쟁을 피해가지 못했다. 그의 나이 16세 되던 1860년, 태평천국군과 청군은 이곳에서 참렬한 전란을 치렀다. 오창석은 당시 집안 어른의 주선으로 안길현 과산촌(過山村)에 살던 장씨(章氏)의 딸과 약혼을 한 상태였다. 늘 그렇듯 전쟁이 났을 때 가장 취약한 사람들은 여성과 아이들이다. 전쟁의 속성은 예상치도 못한 광기를 수반할 때가 많으며, 특히 다 큰 처자들은 적군의 위험에 노출되기 십상이다. 장씨는 그의 딸을 예비 사위집으로 보내 급박한 형국을 피하고자 하였다. 교전이 심해지자 당시 오창석 일가는 피난을 갈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였다. 그런데 약혼녀가 다리를 다치는 바람에 오창석의 모친이 장씨의 딸을 보호하며 집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오창석과 그의 부친은 호북성과 안휘성 등을 전전하며 난을 피해 유망하였다. 그러나 전쟁이 진정되어 돌아온 고향은 폐허가 되어 있었고, 오창석의 자매들은 죽거나 흩어져 생사조차 확인할 길이 없었다. 약혼녀 장씨 또한 병고와 기근으로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살아남은 모친의 말로는 그녀의 시신을 뜰 안의 계수나무 아래에 묻었다고 한다. 오창석은 죽은 장씨를 위해 제대로 된 무덤이라도 만들 생각으로 계수나무 아래를 파보니 이미 유골조차 찾을 수 없었다. 살아남은 자로서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던 그는 참담한 마음으로 부인을 가슴에 묻을 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50년이 지나 66세 되던 해에 장씨가 꿈에 나타나 주었다. 그는 마음속에 참담한 생각이 일어 그녀를 위해 이 작은 인장을 새겼다. 인문에 보이는 ‘명월전신(明月前身)’은 사공도(司空圖)의 《이십사시품(二十四詩品)》․〈세련(洗練)〉에 나오는 한 구절로 ‘유수금일(流水今日) 명월전신(明月前身)’의 부분이다. 문학에서 가장 정결하고 순수한 경계를 나타내는 언어이다. 그는 50년 전 잃은 아내의 모습을 꿈속에서나마 보고 정결과 순수의 상징어인 ‘명월전신’에 그녀를 비유했다. 또한 무덤조차 만들 수 없었던 처참한 현실에서 전각의 형식을 빌어 조상(造像)과 조상기를 제작하여 불교적 장례를 치렀다. 그는 50년 동안 가슴에 묻어두었던 원부인에 대한 처참한 마음의 상처를 이렇게 스스로 치유한 것이 아니었을까. 성인근(본지 편집주간)
[Collaboration]
캘리그라피 X Collaboration 3rd
캘리그라퍼와 여러 영역의 아티스트가 만나 다양한 예술 세계를 공유하고 벽을 허무는 글씨21의 Collaboration 3rd는 캘리그라피와 힙합의 만남이다.힙합은 1970년대 후반 뉴욕 할렘가에서 시작된 대중음악의 한 장르로 자유롭고 즉흥적이며 패션, 음악, 댄스, 노래 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각이나 삶을 이야기하는 자전적인 랩 가사로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우리나라 힙합계의 슈퍼루키로 급 부상하고 있는 래퍼 ‘매이스원더’와 캘리그라퍼 ‘이시엽’이 함께 작업한 영상물로 젊은 두 남자의 솔직 담백한 글씨와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21세기 글씨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 모색해보자.글씨21 편집실인터뷰 영상뮤직비디오 캘리그라퍼 이시엽15 ‘ 원광대학교 미술대학 서예문화예술학과 졸업16 ‘ 허밋레코즈 소속 아티스트14 ‘ 캘리그라피 디자인그룹 <어울림> 기획위원17 ‘ 한국 캘리그라피협회 정회원 16’ ‘경의선 책거리‘ 개장기념 [한글 멋 글씨전] (경의선책거리)16’ 계절의 소리를 담은 ‘한글일일달력전‘ (세종문화회관 세종이야기)16’ 2016 한글 문화 큰잔치 ‘한글 멋 글씨전’ ( 광화문 광장)16’ 한글 어울림 전 (메가박스 코엑스점 씨네아트갤러리)17’ ‘한량전‘ (역삼동 유나이티드 갤러리) 17’ ‘2017 덕담 전’ (근현대디자인박물관 갤러리모디움)17’ ‘2017 한국캘리그라피디자인협회 정기회원전 (갤러리 이앙) 15’ 가수 ‘이바다‘ <춤추는 소녀>앨범 자켓 타이틀 제작 참여16’ 가수 ‘리썬‘ <지켜줄게> 앨범 티져영상 타이틀 제작 참여16’ 랩퍼 masewonder <굿럭> 뮤비 메이킹필름 캘리그라피 참여16’ 가수 ‘천석만,파랑망또 <맘에 안들어> 앨범 자켓 타이틀 제작 참여17’ 가수 ‘서린‘ <내곁에> 앨범 자켓 타이틀 제작 참여17’ 가수 a-tone 앨범 자켓 타이틀 제작 참여17’ ‘랩퍼 masewonder 뮤직비디오 타이틀 및 제작참여17’ ‘랩퍼 YunB <윤비> 앨범 타이틀 제작참여 16’ 메가박스 코엑스점 ‘예쁜 글씨써주기’ 행사 참여16’ 한글날 ‘예쁜 엽서공모전’ 캘리그라피 행사 참여16’ 마포구청 ‘자원봉사의 날’ 캘리그라피 행사 참여16’ 추사추모휘호대회 캘리그라피 부분 입선17’ IBK기업은행 캘리그라피 행사 참여17’ 전국 주민자치전진대회 캘리그라피 행사 참여래퍼 MaseWonder2017. 06 미니앨범 발매 Feat. YunB(Hi-lite Recrods)2017. 05 미니앨범 선공개곡 ‘Earphone’ 발매 2017. 03 ‘Nujabas Homage’콘서트 참여2017. 02 Yun.B – ‘YAYO’ Feat. MaseWonder 2017. 02 팔로알토(Hi-Lite Records) 뉴욕 공연 2016. 12 일본 HW&W Japan Tour 공연2016. 01 웹진 Kpop Stars 올해의 주목받는 아티스트 선정2016. 08. Singel Album ‘Feel so good’2015. 10. Singel Album ‘Summer Night’ 데뷔
[Column]
성인근의 글씨를 읽다 ㆍ 팔대산인 - 1
그곳의 소나무는 나처럼 기괴하고 늙었다.명말청초(明末淸初)를 살다 간 한 남자가 있다. 그는 왕족이었다는 소문도 있고, 어떤 사람은 승려, 혹은 도사였다고도 한다. 또 어떤 이들은 벙어리였다고 하고, 심지어 미치광이였다는 풍문도 있다. 그가 남긴 글씨와 그림이 많으므로 서화가였음은 분명한데, 남겨진 작품의 전반에선 철저한 저항감과 고독감이 묻어난다. 그는 자신의 서화에 ‘팔대산인(八大山人)’이라 썼는데, 사람들은 ‘곡지(哭之)’ 혹은 ‘소지(笑之)’처럼 보인다고 한다. 혹자는 마음 놓고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는 자신의 처지를 나타낸 장치라고 이야기한다. 그는 만년에 입버릇처럼 이런 얘기를 하고 다녔다고 하는데, “나는 허공에 우뚝 솟은 산과 절벽으로 가고 싶다. 그곳의 소나무는 나처럼 기괴하고 늙었다.” 朱耷, 소나무이야기의 주인공은 17세기 중국 예원(藝苑)의 개성파 서화가를 대표하는 주답(朱耷; 1627~1705)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팔대산인’이란 호는 60세 이후 『팔대인각경(八大人覺經)』이란 경전을 늘 소지하고 있다는 의미로 지은 그의 자호(自號)이다.한 사람의 생을 몇 줄의 글로써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마는, 여기서는 그를 둘러싼 여러 소문들을 풀어보며 삶의 괘적을 따라가 보기로 하자. 우선 왕족이었다는 소문에 대해서, 기록에 의하면 그는 명나라를 개국한 명태조(明太祖) 주원장(朱元璋)의 16번째 아들 영헌왕(寧獻王) 주권(朱權)의 9대손이다. 주권은 명태조에 의해 남창(南昌)에 왕으로 봉해졌는데, 그의 후손들은 대대로 이곳에 자리 잡고 살았으며, 주답 또한 이곳에서 태어나 자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이른바 ‘태어나 보니 입에 금수저를 물고 있었다’는 왕족이었다. 유년기의 그는 매우 똑똑했고, 특히 서화에 재능이 많았다고 한다. 朱耷의 서명과 인장둘째, 승려였다는 소문에 대해서, 1645년 그의 나이 스무 살이 되던 해에 명나라가 망하고 대대로 살아온 남창이 점령되었다. 명나라의 왕족이었던 그에게는 불행의 신호탄이었다. 또한 같은 해 부친이 사망하는 불운을 겪으면서 평탄했던 삶은 고난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는 무력이나 완력으로 적군에 대항할 수 없는 처지에 이르자 명나라 종실의 후손들이 그랬듯이 신분을 숨기고 산속에 은거했고, 1648년 삭발하여 승려가 되었다. 소장형(邵長蘅)이 쓴 「팔대산인전(八大山人傳)」에는 “약관(弱冠)에 변(變)을 만나 집을 버리고 봉신산중(奉新山中)으로 피하여 머리를 깎고 승(僧)이 되었다. 몇 년이 되지 않아 종사(宗師)라 칭해졌고 산에서 거주한지 20년 후 학문을 따르는 문인(文人)이 이미 백여 명이었다.”고 적었다. 그는 스무 살부터 대략 마흔 이전까지 승려 신분이었음이 확인된다.셋째, 도사였다는 소문에 대해, 그는 약 20년 동안의 승려생활 이후 환속하여 도교(道敎)로 개종했다. 부인을 얻고 아이도 낳고 살았는데, 이 무렵의 생활은 주로 그림을 팔아 연명하였다고 한다. 고향 남창에 청운보도원(靑雲譜道院)을 건립하여 도가사상에 심취하기도 했는데 이 무렵부터 본격적인 서화가로서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왕족이었다거나 승려, 혹은 도사였다는 소문은 모두 소문이 아닌 사실인 셈이다.넷째, 벙어리, 혹은 미치광이였다는 소문에 대해, 1679년 54세의 그는 임천(臨川)의 현령(縣令) 호역당(胡亦堂)의 초청으로 1년간 임천에 머무른 적이 있었다. 이때 청나라 조정에서는 『명사(明史)』를 편찬하고자 국내의 저명한 학자와 선비들을 불러 임용하고 각지에 흩어져 있던 명나라 유민 사대부들을 동참시키고자 하였다. 이는 청나라의 조정이 한족 문인들에게 취한 일종의 회유책이었다. 호역당은 본래 명나라 문인이었으나 청나라 조정을 위해 사대부들을 동참시키는 일에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朱耷, 하(荷)이때 주답은 호역당의 주선으로 임천 관사에 모인 벗들과 함께 시도 짓고 술도 마시고 노래를 부르는 등 흥을 즐겼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호의가 호역당이 꾸며낸 술수의 함정에 빠져든 사실을 깨닫고 참을 수 없는 치욕과 모욕감을 느꼈다. 그는 입고 있던 자신의 옷을 발기발기 찢어 불에 던져버린 이후 임천을 떠나 남창으로 돌아왔다. 창랑의 물이 탁하면 발이나 씻으면 될 일이지만 그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미치광이였다는 소문은 당시부터 심해진 광기 짙은 정신병세 때문이었다. 그는 이후 함구하고 사람들과 대화를 끊어버렸다. 누군가 그에게 말을 건네도 ‘벙어리아(啞)’자를 써서 보여주곤 했다. 벙어리였다는 소문은 여기에서 기인한 듯하다. 朱耷, 조석(鳥石)그는 노년기에 남창의 몇몇 한림을 중심으로 활동했으며, 가난과 병마로 고독한 삶을 살다가 1705년 10월 15일 향년 80으로 남창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시대가 안겨준 침통한 고뇌를 은일(隱逸)의 삶으로 저항하였고, 스스로 가시밭길을 걷는 체험을 통해 창조적 예술가로서 이름을 남겼다. 성인근(본지 편집주간)
[Column]
성인근의 글씨를 읽다
“할 말은 많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랴”- 김정희의 《자화상》- 한 노인이 종이 앞에 앉았다가 자신의 모습을 화폭에 옮겨놓았다. 누군가의 주문에 의해 그린 그림은 아닐 터이다. 나는 지금 160년도 더 된 그의 자화상 앞에 앉아 그의 붓끝 하나하나를 따라가 본다. 김정희, 《자제소조(自題小照)》 32×23.5㎝. 선문대학교박물관 의관과 격식을 갖춘 조선의 여타 초상화와 달리 평상복 차림의 소박한 모습이다. 왼쪽 어깨가 기우뚱하게 올라간 주인공의 상반신이 중앙 하단에 위치해 있다. 그림은 가는 먹선 위주로, 특히 주름과 수염을 꼼꼼하게 그렸다. 화면 속 노인은 얼핏 보아 육십은 훌쩍 넘어 보이며, 마른 체구에 초췌한 모습으로 화면 밖을 응시하고 있다. 머리카락과 구레나룻, 수염조차 정돈이 안 되었고, 주름은 살아온 세월만큼 움푹 움푹 파였다. 야무지게 닫은 입술엔 ‘할 말은 많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이냐’며 쉽게 열 것 같지 않다.화면 속 주인공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누구도 알지 못한다’는 추사 김정희(1786~1856, 정조 10~철종 7)다. 그는 경사(經史)는 물론 불교, 금석․고증, 서예, 회화 등 전방위의 영역에서 독보적 자취를 남긴 조선 말기의 문인이다. 조선시대에 초상화를 남긴 사람은 국왕으로부터 문무관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많으며, 주인공의 신분과 공로를 한껏 드러내기 위한 장치들도 여럿 구사했다. 그러나 조선의 초상화 가운데서도 이토록 담박하면서도 전신사조(傳神寫照)의 화론을 내밀화한 작품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그중 자화상을 남긴 인물로 공재 윤두서, 표암 강세황 등이 떠오르지만 그들과 다른 추사만의 체취가 감지된다.화면의 우측 상단에는 다른 종이에 써서 삐딱하게 오려 붙인 그의 화상찬(畵像讚)이 적혀 있다. 이 글에는 화면 속의 자신이 왜 그렇게 입을 야무지게 닫고 있는지에 대한 입장이 적혀 있다. 자제부분(自題部分) 謂是我亦可, 謂非我亦可. 是我亦我, 非我亦我. 是非之間, 無以謂我. 帝珠重重, 誰能執相於大摩尼中. 呵. 果老自題. (이 사람을 나라고 해도 좋고, 내가 아니라고 해도 좋다. 나라고 해도 나이고, 내가 아니라 해도 역시 나다. 시비를 가리는 사이에 나라고 할 수 없게 된다. 제석천의 구슬이 주렁주렁한데, 뉘라서 큰 여의주 속에서 실상을 잡아낼까? 껄껄껄... 과노(果老) 스스로 쓰다.) 문장 끝의 ‘과노(果老)’는 ‘과천(果川) 노인’이란 의미의 자호(自號)로, 그가 북청 유배에서 풀려나 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과천에 은거할 때인 1852년(철종 3), 즉 67세 이후의 초상임을 암시한다. 이 화상찬은 그의 문집 『완당선생전집』에 「자제소조(自題小照)」의 제목으로 실려 있는데, 생략한 글자와 일부 다른 글자가 있으나 전체적 맥락 차이는 없다.김정희는 화상찬에서 자신의 초상에 담겨진 내면의 실상을 보아야지, 겉모습이 닮았는지의 시비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비유적으로 설파했다. 닮고 닮지 않고의 시비를 벗어난 존재의 실상(實相)이 무엇인지 아는 까닭에 ‘나라고 해도 좋고, 내가 아니라고 해도 좋다.’며 껄껄껄 웃는 여유까지 보였다.그렇다면 그가 남긴 실상이 아닌, 어쩌면 종이쪼가리에 불과한 이 자화상의 실체는 무엇인가? 여기서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끝을 따라가다 보면 그것이 향하는 저쪽의 달이 있다. 그러나 달을 보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자신이 직접 보고 체험한 것이 아니면 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누가 큰 여의주 속에서 실상을 잡아낼까?’라며 껄껄껄 웃는 선종풍(禪宗風)의 문자로 깨우침을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실상은 문자에 의해 온전히 표현할 수 없지만, 문자를 쓰지 않고서 남에게 전할수도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성인근 본지 편집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