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씨와 놀다. 매거진 '글씨 21'

글씨 21

칼럼

2018-01-09
성인근의 글씨를 읽다-10

 국새 수난기

 

중국의 오래된 역사책에는 승국보(勝國寶)라는 단어가 간혹 보인다. 여기서 승국(勝國)’이란 멸망한 나라, 즉 망국(亡國)으로 현재의 국가를 승리로 이끌어 준 나라라는 묘한 뉘앙스를 내포한 용어이다. 따라서 승국보라는 명칭은 패망한 나라의 국새를 뜻한다() 나라와 같은 경우에는 모든 천자의 큰 제사에 자국의 국새와 함께 패망국의 승국보를 궁궐의 뜰에 진설했다. 전쟁에서 이겨 영토를 넓혔다는 자긍심과 승전국으로서의 도취감을 드러낸 일종의 세레모니(ceremony)였다.


100여 년 전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한 일제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일제는 한일합방을 강제 체결하고 약 6개월 후인 191133일 대한제국의 국새 10과 가운데 6과를 약탈했다. 이들 국새는 천황의 진상품으로 바쳐져 일본 궁내청으로 들어가는 모욕을 겪었다. 빼앗긴 주권과 함께한 국새의 숙명이었다. 이후 8.15 해방 1년 후인 1946815일 미군정은 궁내청 소장 대한제국 국새를 모두 인수하여 한국에 정식으로 인계했다. 그 뒤 6·25 전란을 겪었고, 전쟁의 와중에 국새를 모두 분실했다. 한국전쟁이 휴전에 접어들었던 19546월 잃어버렸던 대원수보(大元帥寶)제고지보(制誥之寶),칙명지보(勅命之寶)3개는 되찾아 현재 국립박물관에서 보관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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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미군정으로부터 대한제국의 국새를 인계받고 있는 83세의 오세창.

 

한 나라의 국격을 가장 상징적으로 집약한 물품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국새(國璽)일 것이다. 그러나 식민지와 전쟁을 겪은 한반도의 국새는 늘 해외 불법 반출의 표적이 되어왔다. 국왕을 중심으로 사회가 형성된 왕조시대의 국새는 국가 최고권력자의 인장인 동시에 국가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또한, 유물 자체로서의 국새는 최고 품질의 금속과 옥을 사용하며, 제작방식에서도 왕실 공예술의 정수를 담고 있다. 그러나 그 부피가 여타의 문화재보다 작기 때문에 비교적 용이하게 반출할 수 있다는 약점을 가지고 있다.


2,000년대에 들어 조선 시대와 대한제국기에 사용한 국새들이 이국의 땅에서 속속 모습을 드러내 환수되고 있다. 질곡과 부침이 심해 우리의 국새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던 과거에 대한 일종의 정리와 보상과 같아 보이기도 한다. 여하튼 국외소재 인장문화재가 외교적 협력에 의해 국내로 환수되는 일은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지난 20093월에는 잃어버렸던 고종황제의 국새를 되찾았다는 기사가 연일 신문지상에 발표되었다. 한 재미교포가 소장하고 있던 유물을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인수하였다는 보도였다. 고종의 비밀 국새인 <황제어새(皇帝御璽)>였다. 국사편찬위원회가 소장하고 있는 유리원판필름에 실물의 사진과 당시의 문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던 국새 유물이 국내에 유입된 것이다. 조선 시대를 비롯하여 대한제국기까지 우리 국새의 실물이 빈약한 시점에서 이 유물의 출현은 국민적 관심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한 사건이었고, 해외에 불법 반출된 우리 국새에 대한 시선이 맹목적으로 일본에 집중된 데 반해 미국으로까지 시야를 확대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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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환수한 황제어새(皇帝御璽)와 인면(印面), 국립고궁박물관.

 

그로부터 약 5년이 지난 시점인 2014425,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과의 한미정상회담에서 조선왕실과 대한제국에서 사용한 인장 9점을 한국 측에 정식 반환하였다. 이들 인장은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국 해병대 장교가 덕수궁에서 불법으로 반출한 문화재로 그 후손이 보관해오고 있었다. 문화재청에서는 이들 인장문화재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관계 전문가에게 유물의 국적과 내용, 가치 등에 대한 자문을 얻어 한국의 중요문화재임 확인하였다. 20131023일 문화재청의 수사요청에 따라 1118일 샌 디에고(San Diego)에서 미국 국토안보수사국(HSI)에 의해 유물이 압수되었으며, 한미 정상회담을 계기로 한국에 정식 인계하였다.


반환한 유물은 대한제국의 국새 1, 어보 1점을 비롯해 조선시대의 국새 2점과 왕실에서 소장한 사인(私印) 5점으로 총 9점이다. 구체적으로는 대한제국의 국새인 황제지보(皇帝之寶), 어보인 수강태황제보(壽康太皇帝寶)를 비롯해, 조선시대 국새인 유서지보(諭書之寶)준명지보(濬明之寶)2점과, 헌종(憲宗)을 위시한 왕실 소장 사인(私印) 5점으로 총 9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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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반환한 9과의 인장 가운데 황제지보(皇帝之寶)와 인면, 국립고궁박물관.

 

돌아온 인장 9점은 모두 가치를 따지기 어려운 중요한 문화재이지만, 그 가운데서도 황제지보는 대한제국의 선포를 계기로 제작한 국새로 고종의 자주독립 의지를 상징하는 유물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 대한제국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세계적 격변기에 한민족 자주독립의 염원을 담고 수립하였다. 비록 제국주의가 만연한 시기에 여러 약소국처럼 국권을 잃었지만, 중국 중심의 세계관에서 오늘날의 세계체제로 변모하는 과도기에 엄존한 국가이다. 고종황제는 대한제국을 수립하면서 황제국에 걸맞은 새로운 국새 10과를 새로 제작했다. 황제지보는 그 가운데 황제가 직접 관리를 임명할 때 내려주는 임명장인 친임관칙지(親任官勅旨)에 찍었던 국새였다.


필자가 조사한 바로는 조선시대와 대한제국기에 사용하여 1,900년대 초반까지 한국에 존재했던 국새는 모두 37과에 달한다. 그러나 최근 환수한 국새를 포함하더라도 현재까지 파악된 사례는 8과에 불과하다. 29과의 국새유물의 소재가 파악되지 않는 셈이다. 국내외의 어디엔가 존재하고 있을 이들 국새를 찾는 일에 눈을 크게 뜨지 않을 수 없다.

 

2018. 1. 8

성인근 본지 편집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