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view]
<특집>
引领大陆的书法家们 - 상해 · 항주글씨21 편집실...>>인터뷰 전문 보기(클릭)<<
[Interview]
유호 박재복
상주문자 예술의 향연은상과 서주의 대전(大篆)을 중심으로 임모하고 창작하며 연구한 결과를 선보인 전시 상주문자전이 막을 내렸다. 북경대학에서 갑골을 전공 하고, 고고발굴 현장에서 직접 실물을 보고 공부한 박재복 교수는 이러한 생생한 학습을 통해 갑골문에 있는 글자를 자유자재로 쓸뿐더러 문자의 근원에 대해서도 해박하다. 그는 지난 2016년 사승전을 열며 첫 개인전을 선보인 바 있다. 당시 그의 개인전이 그동안의 학서 과정에서 사사 받은 선생들의 작품과 임모작품 및 창작 작품을 선보이며 출사표를 내던졌다면, 두 번째 개인전인 <상주문자전>에서는 갑골·금문의 연구를 통해 서예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작업으로 이목을 사로잡았다. <상주문자전>을 통해 만나본 유호 박재복 교수는 갑골문과 금문의 고아한 매력에 흠뻑 취해있었다.유호 박재복 교수2019<상주문자전> 전시장 모습殷商 <四祀邲其卣> 70x140cmQ. 지난 2016년 첫 개인전에 사승전을 열게 된 계기는?- 저는 그동안 학서 과정에서 실력과 인품을 두루 겸비한 선생님들을 만나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남전 원중식(1941-2013)선생께는 대학시절부터 문하에 입문하여 강원도 인제와 서울의 서실을 오가며 서법의 기초를 다졌습니다. 대학 졸업 후에는 서울에 있는 시계서실에서 계속 서예를 공부했습니다. 이후 남전 선생님께서 2013년 타계하셨고, 첫 개인전을 열 당시 2016년은 남전 선생님의 3년 상이 끝나는 해였습니다. 저는 남전 선생님께 받은 가르침과 그간 공부했던 흔적들을 선보이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사승전을 기획하여 제 작품과 남전 선생님과 그동안의 학서과정에서의 선생님들 작품을 함께 전시했습니다.殷商 - 45X50cm2019<상주문자전> 전시장 모습 <笙磬同音> 42x32cmQ. 2016년 첫 개인전 <유호 박재복 서전>의 작품에 대해- 저의 작품은 서예를 배우는 과정에서 대표적인 전,예,해,행,초 5체의 전형적인 비첩과 함께 새롭게 출토된 간독자료까지 임모한 것이었습니다. 전시작품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 특징을 설명할 수 있는데, 첫째, 앞서 말씀드린 사승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다른 개인전에서 보기 드믄 것으로 그동안 학서 과정에서 사사받은 선생님들의 작품을 함께 선보인 것입니다. 권우 선생님께서 유도회 한문연수원의 11기 수료식 때에 써준 해행풍의 <攸好>, 남전선생님께서 결혼식 때 써주신 전서풍의 <盡其性>, 북경대학의 성지 선생님께서 써주신 행서풍의 <醉翁亭記>... 등등 여러 선생님들의 작품을 동시에 전시하여 그 학풍을 한눈에 볼 수 있게 하였습니다. 둘째는 임서작품 위주로 한 점입니다. 특히 중국에서 새롭게 발견되는 최신 문자자료들을 중심으로 임서작품을 구상하였고, 그것은 서예를 공부함에 있어서 가장 교과서적인 서첩들에 대한 임서작품도 있었습니다. 셋째로 창작품은 동양고전의 명구들을 엄선하여 각 서체별로 소품을 위주로 작업하였습니다. 이는 임서를 통해 체득한 서예자료의 필법을 토대로 한 것이며, 단조로움을 탈피하고자 그림, 사진, 탁본 작품, 물간, 색지 등을 활용하여 다채로운 색감을 시도하였습니다. 西周 <史牆盤> 70x205cmx2유호 박재복 교수2019<상주문자전> 전시장 모습誠則明 - 60X45cmQ. 중국 유학길에 오르게 된 계기와 북경대학에서 공부한 전공에 대해- 유도회 한문연수원에서 권우 선생님을 비롯한 여러 선생님들께 사서삼경과 같은 역대 한중 고전을 배웠습니다. 점차 금석학에 심취되었고, 더 깊은 공부를 위해 1999년 중국으로 유학길에 올라 북경대학에서 고명 갈영회 선생님의 가르침으로 고문자학의 기초를 다졌고, 추형 유서 선생님께 지도를 받아 상주고고학의 토대를 마련하였습니다. 유학중 방학기간에는 중국 전역에 산재해 있는 금석문 자료들을 직접 답사하며 견물을 넓히고 고고발굴현장과 갑골문 정리 작업에도 직접 참여하여 현장과 실물자료에 대해 상당한 지식을 축적할 수 있었습니다. 2019<상주문자전> 전시오프닝 행사<書能變詩可察聯> 21x135cm x2Q. 이번 <상주문자전>에 대해- <상주문자전>은 작품의 소재로 갑골문과 금문만을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이번 작품중 임모작품은 갑골문과 금문으로 구분됩니다. 갑골문은 상 후기 은허 갑골문과 서주시기 주원과 주공묘 갑골문을 선별하였습니다. 금문은 <대우정大盂鼎>과 <모공정毛公鼎>, <괵계자백반虢季子白盘> 등 전서 공부에서 있어서 교과서적인 명문을 선택하였고, <이궤利簋>와 <숙측방정叔夨方鼎>, <사장반史墙盘> 등 1970년대 이래 새롭게 출토된 명문들을 선별하였습니다. 특히 시기별, 지역별, 나라별로 특징을 분류해 문자의 조형적 특징을 분석해 내고자 하였습니다. 또 창작 작품은 전래문헌과 출토문헌에서 고전명구를 선별한 것입니다. 이번 전시에서 재미있게 감상하실 수 있는 것은 제가 중국에서 직접 수집한 탁본을 서예계 선생님들께 제발을 받아 함께 선보이며 임모작품과 대조하며 감상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탁본은 <래반逨盤>과 <산씨반散氏盤>, <짐이朕匜>, <구위화裘衛盉>, <구년위정九年衛鼎>, <차정此鼎>, 동한시기 <창힐비 蒼頡碑>와 화상석, 신석기 후기 석가하 石家河 문화의 각화부호 등이 있습니다. 유호 박재복 교수유호 박재복경동대학교 한국어교원학과 부교수(사)유도회 한문연수원 서경 교수 (사)시계연서회•한국서예가협회 이사한국서예학회•동양고전학회 연구이사동양고전연구소•문화예술콘텐츠연구소 편집위원한국전각협회•강원서학회•동양서론연구회 회원중국고중세사학회•동아시아출토문헌연구회 회원 북경대학 석박사(고문자학/상주고고학)(사)유도회 한문연수원 수료북경대학 震旦古代文明中心 객좌연구원 역임성균관대학교 유교문화연구소 선임연구원 역임 주요 논문 및 저서<논문>(2013), 殷商시기 甲骨文에 보이는 商과 夷族의 관계, 『동양사학연구』 123호.(2013), 商중기 甲骨의 특징과 그 형성과정 고찰, 『고고학탐구』 13호.(2012), 蒼巖 李三晩의 書風에 나타난 복고적 성향 고찰, 『동양고전연구』,49호.(2012), 商周시기 都邑과 遷都에 관한 고찰, 『고고학탐구』12호.(2012), 殷商시기 甲骨文에 보이는 ‘征人方’ 고찰, 『유교문화연구』20호.(2011), 향교설립 이전의 유가경전 수용과 교육현황, 『동양고전연구』42호.(2011), 작품소재로 살펴본 蒼巖 李三晩의 학문세계, 『서예학연구』18호.<저서>(2011), 『선진복법연구(先秦卜法硏究)』, (중국) 상해고적출판사(上海古籍出版社)
[Interview]
<특집>
대륙을 이끈 서법가들
[Interview]
이 작가의 思생활_심은 전정우
자신만의 서예세계를 구축한 서예가- 심은 전정우 어린 시절 학교근처 미군부대에 배치된 헬리콥터는 어린 심은의 눈에는 그저 신기한 선망의 대상이었다. 이런 헬리콥터를 특별활동시간에 서예반에 들면 탈 수 있다는 얘기에 서예를 처음 접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얼떨결에 시작된 서예와의 인연은 지금의 심은 전정우를 탄생시켰다. 심은 선생은 농필천자문, 심은체, 문자추상작품 등의 작품을 선보여왔다. 이는 단순히 법고의 차원에만 머무르지 않고 실질적인 핵심인 철학과 미학을 통해 자신만의 서예세계를 구축한 것이다. 1987년 3월 동아미술상과 9월 제6회 대한민국미술대전 서예부문 대상을 수상한 심은 선생의 당시는 최고의 엘리트만 근접할 수 있었던 삼성그룹 비서실에서의 근무를 뒤로하고 서예에 전념하기로 한 그 다음해이다. 직장생활을 병행하며 퇴근 후 공부를 하는 것은 늘 시간에 쫓기게 되었고 그러한 공부는 심은 선생의 성에 차지 않았다. 이후 과감히 서예에 몰두한 그는 영광스러운 성과를 얻은 것이다. 얼떨결에 시작된 서예 그리고 푹 빠져 지내게 된 초중학교 시절, 서예를 향한 과감한 선택이 보여주는 심은 전정우 선생의 思생활에 대해 들어보았다. ...>>인터뷰 전문 보기(클릭)<<
[Interview]
이영철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제5대 신임총장
- Q.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의 연혁을 보면 1996년 학교법인 동방학원 창립총회에서 초대 이사장 김응현 선생님을 선임하였고, 같은 해 12월 학교법인 동방학원의 설립허가로 출발. 이후 학교가 걸어온 길에 대해서 네 말씀하신 것처럼 저희 학교는 존경하는 여초 김응현 선생님께서 1996년에 설립하신 학교법인 동방학원에서 출발하였습니다. 그 이수 우여곡절을 겪고, 2013년 고광용 현 이사장님이 총장으로 취임하였습니다. 그리고 2014년에 기존의 동방대학원대학교에서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고, 기존의 학과를 문화예술콘텐츠학과, 불교문예학과, 자연치유학과, 미래예측학과로 통합 조정하여 특화시켰습니다. 이후 2015년에는 제4대 총장에 박경재 박사가 취임하였고 2019년부터 제가 총장직을 맡게 되었습니다. Q.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의 특성화 사업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저희 대학에는 특화된 4개 학과가 있습니다. 앞서 말했던 문화예술콘텐츠학과, 불교문예학과, 자연치유학과, 미래예측학과입니다. 문화예술콘텐츠학과는 서예, 회화, 미학, 디자인, 문화경영, 교육학 등의 전공으로 우리 고유의 전통문화를 현대적 콘텐츠로 재탄생 시켜 창조시대에 걸맞은 문화와 예술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불교문예학과는 불교 역사와 철학, 불교문학 및 불교예술, 상담심리 등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현대화를 통해 우리 고유문화를 계승 발전시키고, 불교사상을 다양한 시각에서 연구하는 전문가를 양성하고 있습니다. 자연치유학과는 명상상담, 약용작물, 피부미용치유, 요가치유 등의 전공에서 인간의 내재적인 면역력과 자연치유력을 증진시키고, 힐링 등을 통하여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고 건강을 회복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미래예측과는 주역, 풍수, 인상, 명리 등 동방의 고전과 예지학에 대한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연구를 통하여 불확실한 미래에 활용할 수 있는 지혜를 창출할 수 있는 전문가를 양성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전문 연구기관으로 문화예술콘텐츠연구소, 불교문예연구소, 환경조형예술연구소, 아이티 융합연구소, 자연치유연구소, 동양학연구소 등을 두어 각 분야의 전문적인 연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Q. 대학의 국제화를 현실화하기 위한 중·장기 전략이 있는데, 그중 가장 무게가 실려 있는 전략에는 어떤 것이 있고, 또 현재 진행 상태는 어떤지? 국제화라면 내용적인 면과 기술적인 면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기술적인 면이란 국제적 소통에 필요한 언어를 비롯한 네트워킹을 말합니다. 그러나 기술적 문제 이전에 가장 중요한 것은 내용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소홀하기 쉬운 우리문화가 가진 힘, 그 자체가 바로 국제화의 무기요 학교의 경쟁력이 될 것입니다.우리문화의 현대화와 세계화는 한류를 통하여 이미 확인되고 있습니다. 우리문화를 바탕으로한 올바른 사상 위에 전통문화를 콘텐츠화하고, 생활 속에 계승 발전하여 대중문화와 결합시키고, 전통문화가 갖는 가치와 의미에 대한 인지도와 중요성을 인식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봅니다. 이러한 현대화를 통해 우리문화는 미래문화를 창조하는 중요한 문화자원으로 새로운 부가가치 및 국가의 브랜드를 형성할 수 있다고 봅니다. 아울러 저희 학교는 현재 교육부가 정한 유연학기제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특히 중국, 몽골, 네팔 등의 외국인을 받아들여 교육부가 정한 교육과정과 규정에 의해 석사와 박사과정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Q. 인재양성을 위해 대학에서 뒷받침할 수 있는 요소에는 어떤 것이 있고, 총장님께서 생각하시는 강조할 부분은? 우수한 인재확보와 양성을 위해서는 교수와 학생의 연구활동과 학습환경에 대한 지원이 필요합니다. 특히 올해는 보다 쾌적한 강의공간을 제공하기 위해 5층 신축건물을 마련하였습니다. 이는 학생들의 학습환경을 높이고, 또한 교수님들이 연구와 강의에 매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저는 이러한 기초에서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을 생각입니다. Q. 최근 대학사회에서 구조개혁, 학사구조 개편 등 여러 문제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대학이 발전할 수 있는 방향은? 학사의 문제는 출산율저하, 고령화의 문제와 직결되기도 하는데 본교의 학생들은 주로 중년이나 중년이후 연령대입니다. 내용적으로도 본교는 비제도권 학문을 제도권으로 안착시키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교의 학과와 전공은 일반대학과 다른 부분이 많습니다. 그동안 동방문화중 많은 부분이 제도권 학문에서 벗어나 있어,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전통문화의 콘텐츠들을 계승하고 창조적으로 재해석하여 현대사회에 맞게 발전시켜 새로운 블루오션을 창출하고 있는 것이 본교의 최대 장점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학과 특성화에 따른 집중화, 동방문화의 계승을 통한 선도학문 구축의 전문화, 특성화 분야에 대한 관련 산업 협력체계를 강화하는 연계화, 경쟁대학 사이에서 비교우위를 지속하는 차별화를 통한 동방문화 창달, 전통문화의 현대화, 세계롸로 인류공동체 발전에 기여하는 대학원대학교를 목표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Q.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준비하는 학생에게 한 말씀 한다면본교의 학생들은 사회 각계각층의 경험자와 비교적 연령대가 높아 학교 발전에 대한 의견제시가 적극적인 편입니다. 이런 의견을 수렴하여 학사행정에 적극 반영하고 있으며, 학교주변건물들을 매입하여 시설을 확충하고, 교육환경을 꾸준히 개선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학교와 학생간의 소통을 통하여 만족도를 높여나가고 있습니다. 부디 전통문화의 현대화를 통해 미래 문화를 창조하는 길에 여러분이 동반자가 되어주시기 바랍니다. Q. 끝으로 이번 신임 총장에 취임된 소감과 앞으로의 행보에 대해서 모두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저희 대학은 특화된 학과와 연구소가 있습니다. 이를 학과와 연구소가 유기적으로 소통하여 우리의 전통문화가 갖는 가치와 의미에 대한 현대화와 국제화하는데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또한 존경하는 이사장님의 뜻을 이어 학생들의 쾌적한 학습환경을 만들어 나아가고, 교수님들을 비롯한 구성원 모두가 행복한 학교가 되길 노력하겠습니다. 아무쪼록 동방문화의 계승을 통한 재해석과 특성화 분야에 대한 관련 산업의 협력체계를 강화하여 다른 대학과의 비교우위와 차별화에 중점을 두겠습니다. 다시 말해서 동방문화의 창달, 전통문화의 현대화, 세계화, 인류 공동체 발전에 기여하는 학교가 되는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2019. 4. 1 인터뷰 김지수 기자
[Interview]
<특집>
引领大陆的书法家们| 4편 이강전(李刚田) |
[Interview]
서예진흥법 통과, 그 과정과 차후 방향에 대해서
서예진흥법이 통과되었다. 이제 시행령과 시행규칙이 만들어진 후 다가오는 6월부터 시행된다. 이 법안이 통과되기 까지 약 5년간의 기간이 소요되었으며, 서총의 네 단체장들의 큰 역할, 함께한 많은 의원, 입법추진위원회 등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 합심하여 이룬 결과이다.이번 인터뷰는 법안통과의 중심에 있었던 서총(한국서예단체총협희외)의 총간사를 맡고 있는 이종선 간사를 만나 법안 통과까지의 과정과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 자세히 들어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2019. 1. 23글씨21 편집실 ...>>인터뷰 전문 보기(클릭)<<
[좌담회]
기획좌담회
한·중 서예시장 분석과 대안 모색얼마 전 국회에서 서예진흥법이 통과되어 그동안 암울했던 한국서예가 다시금 솟아날 수 있는 전기(轉機)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이러한 때에 국제서예가협회 중국 주석인 유정성 선생께서 한국작가들의 중국서예시장 진출에 대한 의견을 내었고, 이번 좌담회에서 구체적인 방안과 대안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자리가 마련되어 더욱 뜻깊은 좌담회라 할 수 있다.劉正成(유정성)이 안건으로 이야기 나누는 것은 이번이 세 번 째입니다. 우선 중국 서예가 발전하게 된 배경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중국의 서법 시장도 30여 년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시작이 있었고, 흥함이 있었으며, 현재는 하강하는 추세에 있습니다. 70년 말, 80년 초 당시에는 서예가의 작품은 누가 받아주기만 해도 아주 기뻐했으며, 시장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82년도쯤, 지인 한 명이 작품 몇 점을 가지고 제게 와서 보여줬습니다. 재백석의 새우 그림, 서비홍의 고양이 그림, 장대천의 산수화와 다른 그림 등을 가지고 와서 진품인가 가품인가를 물었습니다. 내가 보기에 문제없는 진품이었습니다. 그 당시 가짜를 만들 사람이 별로 없었습니다. ‘이 그림을 사온 것이냐’라고 물어보니까, 당시 중국 돈으로 400원에 사 왔다고 했습니다. 40년 전에는 돌아가신 작가들의 작품만 판매되고, 살아있는 작가들의 작품은 팔리지 않았습니다. 80년대 중기에 이르러, 86~87년도에 일본 위에티엔이라는 작가와 계공 선생이 중국미술관에서 전시회를 했습니다. 당시 계공 선생의 작품을 영보재에서 한 점에 400위안을 받았습니다. 당시 5-6년 사이에 돌아가신 분들 작품이 400위안 정도였습니다. 86년도에 계공 선생님 작품 1점 가격이 400위안 매겨졌습니다. 400위안이라는 가격은 중국 사람에게 아주 비싼 가격이었기 때문에 사는 사람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일반 작가들의 작은 작품이라도 일본 돈으로 1000엔 정도였습니다. 제가 그때 일본 작가를 따라온 제자들을 영보재에 데리고 가서 계공 선생님 작품을 사게 하였습니다. 그러는 바람에 영보재에서 바로 다음날 작품을 800위안으로 올렸습니다. 지금 계공 선생의 작품 가격은 몇 십만 위안입니다. 20-30년 사이에 가격이 엄청 올랐습니다. 한•중•일 세 나라에 서예시장의 차이점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시장은 대개 대중소비에 의존하는데, 일본과 한국 시장은 주로 자국 작가들이 골동품을 많이 선호합니다. 자신의 제자들이 스승의 작품을 사주는 것을 제외하고, 시장이 거의 형성되지 않고 있습니다. 중국의 서예시장은 경매시장이 잘 형성된 편입니다. 대형 경매장에서는 주로 작고작가나 대가들의 작품이 주로 거래되고, 작은 갤러리에서는 현재 살아있는 작가들의 작품이 주로 거래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말씀드리자면, 중국의 서예 시장에서 가장 활발한 곳은 산동성과 감숙성입니다. 산동성은 비교적으로 비싼 작품들이 판매되고, 감숙성에서는 저렴한 작품들이 거래됩니다. 왜냐면 산동성이 감숙성보다 경제적으로 좋은 편이기 때문입니다. 감숙성의 창주와 즈보지방에서 중국에서 뛰어난 작가들은 대부분이 거래됩니다. 중국에서 유명한 서예가들 중에 이곳에 가보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감수성은 산동성보다 금융 소비는 낙후되었지만 서예 시장 기반은 아주 좋습니다. 2001년도에 제가 감수성에 처음 갔을 때 반절지 한 점에 천 원 정도에 팔았습니다. 비슷한 나이 대에 작가들, 왕용, 손백상 선생님 같은 분들도 거의 비슷한 가격이었습니다. 나이 비슷한 작가 중에도 지명도가 조금 뒤떨어진 작가들은 100원 200원에도 거래되었습니다. 유명한 곽자서 손백상 선생들도 200원부터 팔기 시작했습니다. 감수성은 서예 시장 기반이 튼튼하기 때문에, 감수성 통우현이라는 지방에는 집집마다 작품을 걸려있습니다. 제가 처음 통우현에서 작품 판매전을 했었는데, 작품을 사러 온 사람들의 돈 봉투가 두툼했습니다. 집에 보관해 오던 오 원짜리 십 원짜리 돈을 가져와 작품을 사러 온 것입니다. 만약 1,000원짜리 작품을 샀는데, 다른 사람이 1,200원 준다면 바로 팔아넘겨요. 200원 남기고도 거래를 합니다. 2007년도에 퉁우이현에 화랑이 몇 십 개가 있었습니다. 그때 성장님과 한담할 기기회가 있었는데, 구분 말이 “우리 현에 화랑이 오 십 개가 있으면 최소 백오십 명이 먹고 살 수 있습니다. 화랑에서 일하는 종업원도 있어야 하고, 표구사도 있어야 하기 때문이지요.”라고 했습니다. 당시 인구가 2-3만 명밖에 없는 작은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길이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그 현에 서화 판매가 번창하면서 지금은 화랑만 1,000개가 되었고, 인구도 십몇 만 명 정도로 늘었습니다. 그래서 중국 문화부에서 통우이현을 ‘서예지향’이라고 명명했습니다. 지금 저와 같은 레벨의 작가 작품들은 한 점에 몇 만 원에 팔리기도 하지만, 너무 비싸기 때문에 잘 팔리지 잘 팔리지 않습니다. 반면 젊은 작가들은 몇 백 원에도 팔기 때문에 잘 팔립니다. 100원이나 200원의 아주 저렴한 가격으로 팔아서 기초 자본을 마련하고, 그것으로 작품 활동을 계속해 갑니다. 산동지방과 감숙성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청년작가들을 양성하는 서예 시장이 많기 때문에 전업 작가로 생계가 가능합니다. 한국과 일본의 작가들은 대개 교육을 기반으로 살아가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대학교나 사설학원을 개설하여 생계를 해결하는데, 중국은 이렇게 서예 외적인 방법을 살아가는 서예가는 비교적 적습니다. 중국의 서예 시장은 서예 발전에 큰 역할을 했으며, 한국과 일본에도 참고할게 있을 겁니다. 그래서 올해 초 한국을 방문했을 때 한국작가들의 중국 서예 진출을 제의했던 것입니다. 중국은 2005년도까지 가장 왕성했는데, 이때는 ‘예물시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예작품이 선물이나 뇌물로 쓰였던 것입니다. 근자에 중부에서 부패 척결을 내세우면서 지나치게 높은 작품 가격은 정상으로 조정이 되었는데, 일반 작가들의 작가들은 본래 가격이 그다지 높지 않기 그런대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젊은 작가들이 경매시장에 진출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왜냐면 경매 회사들이 작품 가격이 높지 않은 젊은 작가들의 작품 거래를 꺼리기 때문입니다. 싼 작품은 팔려봤자 수수료가 많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요즘 젊은 작가들은 경매회사나 화랑보다 인터넷 경매를 많이 합니다. 요즘에는 인터넷 경매보다도 위쳇을 이용한 위쳇 경매를 많이 하는데, 북경 유리창에 있는 행단미술관에서 하는 행단위쳇경매가 있습니다. 여기서는 젊은 작가뿐만 아니라 저나 왕용 같은 영향력 있는 작가들이 함께 경매를 합니다. 그런데 사실 저나 왕용 같은 작가는 위쳇 판매를 원하지는 않습니다, 왜냐면 젊은 작가들과 함께 하기 때문에 가격을 높이 책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조그만 작품을 출품하여 가격을 낮춥니다. 그래도 이 경매에서 명가 작품의 가격이 올라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재미를 느끼고 주목하게 되면서 젊은 작가들 작품이 덩달아 올라가게 됩니다. 이같이 한국에서도 명가는 작은 작품을 출품하고 젊은 작가들은 좀 큰 작품을 내놓아 함께 명가와 젊은 작가들이 함께 경매에 참여하는 방법은 어떨지 고려해봤으면 좋겠습니다. 김양동(金洋東)우리나라에 서예 시장..., 시장이라는 것은 소비가 형성되지요. 그런데 그 소비가 어떤 성격의 소비인가가 중요합니다. 즉 돈을 주고받는 거래의 소비인가, 아니면 그냥 도덕적으로 교환하는 소비인가? 조선시대에는 거래를 하게 되면 상인으로 천시했습니다. 더구나 서예는 선비들이 했던 것이었기 때문에 더 중시되었는데, 그러다가 일제시대가 되어 추사의 서예가 활발하게 거래되었습니다. 그것은 찾는 사람이 있고, 작품이 귀하니 값이 형성되었지요. 그러다 광복 이후 국전이 생겨나면서 한국 서단이 생겨나게 되었죠. 그러나 역시 한국에서도 돌아가신 분들의 작품은 거래가 되었지만, 산 사람들의 작품은 대 원로작가를 제외하고는 거의 형성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배우는 문도들에 의해서 스승의 작품을 사드리곤 했지요. 그리고 80년 대 이후 90년 때 까지 경제발전으로 부가 축적되니까 글씨가 거래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한국도 마찬가지로 젊은 작가들의 작품은 돌아보지 않고 원로 중심으로 형성되었습니다. 2000년대 이후 특히 2010년 이후에는 한국경제도 분화되고 급격히 문자 환경, 문화의 미적으로 보는 관점이 변화가 많았습니다. 세대가 교체되면서 한자를 모르는 세대가 정계, 제계를 주름잡다 보니 한자서예는 자연스레 인기가 떨어지게 되었고, 그중에 반성적 의미에서 중국 경제의 부흥과 더불어 중국과의 관계성에 의해서 중국 문화를 눈여겨보던 관점 중 하나가 서예였지요. 그것은 서예의 희망이었지만, 대중의 관심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김종건(金鍾鍵)변화 중에서 가장 큰 변화를 말씀드리자면, 그전에는 디자이너들이 하나의 도구로서 캘리그라피를 찾았었고, 지금에 와서는 일반인들이 손글씨를 잘 쓰기 위해서 취미로 배우기 시작합니다. 펜이 아닌 붓펜을 쉽게 사용을 하는 거죠. 한글에서는 훈민정음이라고 하는 고체 스타일과 궁서체 스타일, 민체 스타일 등을 배워서 자신의 글씨를 만들어내는 거죠. 전에는 디자이너가 쓰는 하나의 도구였다면 지금은 취미로서도 하고, 최근에 와서는 나도 작가가 된다는 의미에 작품으로서의 글씨를 배우기도 합니다. 몇 년 전부터 또 한 가지 주목할 사항은 글씨를 하나의 힐링의 대상으로 여깁니다. 먹을 갈고, 글씨를 쓰고, 요가를 하고 차를 마시는 공간으로 활용하는데, 지금 이 공간이 바로 그러한 공간입니다. 외국인들이 그런 문화를 체험 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젊은 작가들은 중국과 일본에서 교류전을 하고 있는데요. 중국 북경중앙미술학원 디자인과 교수랑 전시를 하고 싶은데, ‘너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러면 한글 디자인인 것 같습니다. 한글 글꼴에 대한 다양성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호남미술사법대에서 교류전을 한 적이 있는데 거기에는 전통 서예가 타이포그래피 캘리그라피가 모여서 중국과 교류전을 했습니다. 여태명(余泰明)오늘 우리가 모인 것은 서예가들도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80-9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에 서예 시장이 아주 활발했는데, 지금에 와서는 정말 어렵기만 합니다. 어제 국회에서 서예진흥법이 통과되면서 기대를 가지고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2000년 이후에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준비과정에서 엄청난 변화가 있었습니다. 북경에 있는 집값이 오백 배 이상 올랐습니다. 그리고 서예 시장도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굉장히 활성화가 되었고, 치바이스 작품가격이 오르다 보니 청년작가들 작품도 함께 올랐던 것 같습니다. 저는 3년 전부터 연말에 페친들에게 이벤트를 합니다. 페이스북에 일 년 동안 활동을 하고, 저를 알고 있는 페친들에게 인터넷 경매를 합니다. 어떤 때는 높은 가격으로 낙찰이 되고, 어쩔 때는 낮은 가격에 낙찰되기도 합니다. 이런 것도 하나의 방법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보면 현판, 기념비를 만들게 되면 작품비 면목이 없습니다. 돌이나 시공비는 책정이 되는데 글씨를 쓴 것에 대한 작품비가 없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한국 사람들이 중국에 진출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중국 사람의 중국 사람 작품을 사게 되지, 한국 사람의 작품을 사진 않습니다. 그것을 극복하는 것을 논의해야 할 것입니다.섭흔(葉欣-이에신)중국 사람들도 대개는 자기 지방의 뛰어난 작가 작품만 삽니다. 전국적으로 다 잘 팔리는 사람은 손에 꼽힙니다. 중국 시장도 한국작가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잘 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각각 먹고 살 수 있는 길은 있습니다. 오리지널 시장에 형성되지 않은 작가들이 많습니다. 어떤 작가는 시장에 걸면 잘 안 팔리는데, 자기 글씨를 좋아하는 사업자 한두 사람이 있으면 먹고 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시장을 무시하는 겁니다. 그러면 또 비싸게 팔게 됩니다. 그런 현상이 많습니다. 사실상 사람들이 작가들의 위치, 활동력 등 종합적인 것을 보고 구매하지 작품만을 잘 썼다고 팔리지 않습니다. 중국의 모든 작가들은 경매에서 시작할 때 0원부터 시작합니다. 어떤 사람은 다 표구해놓고 20원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면 표구비도 나오지 않습니다. 안 사더라도 자기 돈으로 작업을 계속합니다. 그래서 작업시간이 많이 필요합니다. 유정성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은 한국작가들이 이번에 경매장에 들어가는데, 자기 돈 아니면 주변에 아는 사람을 통해서라도 작품을 사라. 그래야 활성화가 될 것이다. 진출하려면 너무 예술적으로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개인전 할 때 작품도 보면 자신의 예술세계를 보여주고 싶어 하는 작품과 팔고 싶어 하는 작품이 금방 보이잖아요? 이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경매에 내놓았을 때 그림처럼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양식이 필요하고, 큰 작품보다는 소품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큰 기대를 하기보다는 일단 시작을 해보고 여러 번 진출해야 할 것입니다. 여초선생님 작품은 중국에 많이 진출하잖아요. 가끔 보면 여초 선생님 작품을 찾는 사람이 있습니다. 일중선생을 우리들은 잘 알지만 중국 사람들이 잘 모르기 때문에 아무리 얘기해도 사는 사람, 찾는 사람이 없습니다. 지금 구당 선생님도 거의 진출하지 않기 때문에 잘 모릅니다. 초정 선생님도 잘 나가죠, 이렇게 중국에 진출하려면 젊을 때부터 많이 나가고 알려야 합니다. 2019. 1. 10글씨21 편집실
[Interview]
<특집>
대륙을 이끈 서법가들引领大陆的书法家们| 3편 증래덕(曾來德) | 중국의 서법계가 뜨겁다. 국가 차원에서 서법에 대한 전폭적인 장려정책이 진행 중이고, 서법가들 또한 수준 높은 작품으로 서단을 꾸려 가고 있다. 중국의 서법은 문화혁명의 질곡을 딛고 현재 최고의 존중을 받고 있는 분야로 거듭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의 이면에는 중국의 전통문화인 ‘서법’을 자신들만의 고유 언어이자 신선한 예술로 일궈낸 일군의 작가들의 영향이 크다. 《대륙을 이끈 서법가들》은 그들이 일궈낸 현대서법계의 역정과 진화의 모습을 작가들의 육성을 통해 들어보고, 우리 서예계에 반추해 보기 위한 기획이다. 각 성(省)과 도시별로 다른 양상으로 나타나는 중국의 서법계를 차근차근 짚어보는 시간을 갖기로 하고, 우선 중국의 수도이자 전통 서법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베이징에서 뚜렷한 자기 색깔을 가진 네 분의 중견작가들을 만나 그들이 걸어온 길과 예술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려 한다. 그 세 번째 순서로 증래덕 선생을 만나보았다. 인터뷰는 성인근 본지 편집주간이 진행하였고, 통역은 안재성 박사(서법학)가 맡아주었다. 2018. 12. 28글씨21 편집실 江山天地五言聯 紙本...>>인터뷰 전문 보기(클릭)<<
[Interview]
원로에게 길을 묻다
산돌 조용선 산돌 조용선 선생은 1930년 4월 서울 종로구 예지동 8번지에서 태어났다. 다섯 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로부터 천자문과 붓글씨를 배웠으며, 학창시절에는 먹으로 쓰는 글씨는 늘 도맡아서 쓰곤 했다. 이후 오랜 세월이 흘렀고, 선생은 붓글씨에 대한 향수를 잊을 수 없어 다시금 붓글씨를 시작하게 되었다. 10여 년간 윤백영 여사의 슬하에서 장서각을 매일 출근하다시피 하며 갖가지 고전의 글씨를 임서하며 공부 했다. 1981년 중앙문화센터에 처음 한글서예반이 개설 되어 꽃뜰 이미경 선생께서 강사로 초청 받으셨고, 1년 뒤 그 수업은 산돌 선생에게 돌아갔다. 초급반과 고급반의 수업으로 나날이 발전되어 수강생을 대상으로 매년 전시회를 갖게 되었고, 구성을 갖춘 모임으로 발전되어 산돌한글서회가 생겨났으며 현재까지 다양한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산돌 선생은 고전에 한글 궁체의 무궁무진한 변화를 느끼고, 공부하여 자신만의 스타일로 제해석하여 표현하였다. 그 결과는 지금의 산돌 조용선을 탄생시켰다. 또 조용선 선생의 한글이 유독 돋보이는 까닭은 한문서예의 골기가 밑바탕이 되어서가 아닐까 싶다. 어렸을 적부터, 그리고 한글 서예를 공부할 때에도 한문서예를 따로 또 함께 공부함은 선생만의 한글 재해석에 단추역할을 하였다.현재 원로한 연세임에도 불구하고 하루 일과 속에 꼭 맨손체조와 함께 붓글씨를 1-2시간씩 한다고 전하는 선생의 기운찬 목소리에는 평생 좋아하고 열심히 했던 서예에 대한 강한 자부심이 느껴졌다. 열심히 달려왔기에 가능한 힘찬 조용선 선생의 목소리가 귓가에 여운을 남긴다. 2018. 11. 16인터뷰 김지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