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특집>
대륙을 이끈 서법가들引领大陆的书法家们| 2편 후캉메이(胡抗美) | 중국의 서법계가 뜨겁다. 국가 차원에서 서법에 대한 전폭적인 장려정책이 진행 중이고, 서법가들 또한 수준 높은 작품으로 서단을 꾸려 가고 있다. 중국의 서법은 문화혁명의 질곡을 딛고 현재 최고의 존중을 받고 있는 분야로 거듭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의 이면에는 중국의 전통문화인 ‘서법’을 자신들만의 고유 언어이자 신선한 예술로 일궈낸 일군의 작가들의 영향이 크다. 《대륙을 이끈 서법가들》은 그들이 일궈낸 현대서법계의 역정과 진화의 모습을 작가들의 육성을 통해 들어보고, 우리 서예계에 반추해 보기 위한 기획이다. 각 성(省)과 도시별로 다른 양상으로 나타나는 중국의 서법계를 차근차근 짚어보는 시간을 갖기로 하고, 우선 중국의 수도이자 전통 서법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베이징에서 뚜렷한 자기 색깔을 가진 네 분의 중견작가들을 만나 그들이 걸어온 길과 예술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려 한다. 그 두 번째 순서로 후캉메이 선생을 만나보았다. 인터뷰는 성인근 본지 편집주간이 진행하였고, 통역은 안재성 서법학 박사가 맡아주었다. 2018. 10. 26글씨21 편집실2012년 作 50x20cm2012년 作 136x69cm 2012년 136x40cm2012년 180x70cm2012년 60x55cm후캉메이 (胡抗美)1952년생(66세)후베이(湖北) 양양(襄陽)출생 서법가아호 - 녹문산인(鹿門山人), 득천려(得天廬), 一席堂, 得天庐, 三觉翁 등제6회 중국서법가협회 부주석중국예술연구원 석박사 지도교수쓰촨(四川)대학 박사생 지도교수이론저작 및 출판물《中国书法章法研究》, 《书为形学·胡抗美教学文献》, 《中国书法艺术当代性论稿》,《胡抗美书学论稿》, 《胡抗美书法课徒稿》, 《中国古代用人智慧》, 법교안 원고집 등 시문집《志外吟》, 《盼兮集》서법작품집『중국당대서법명가-후캉메이』 등 다수
[Interview]
<특집>
대륙을 이끈 서법가들引领大陆的书法家们| 1편 석개(石開) | 중국의 서법계가 뜨겁다. 국가 차원에서 서법에 대한 전폭적인 장려정책이 진행 중이고, 서법가들 또한 수준 높은 작품으로 서단을 꾸려 가고 있다. 중국의 서법은 문화혁명의 질곡을 딛고 현재 최고의 존중을 받고 있는 분야로 거듭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의 이면에는 중국의 전통문화인 ‘서법’을 자신들만의 고유 언어이자 신선한 예술로 일궈낸 일군의 작가들의 영향이 크다. 《대륙을 이끈 서법가들》은 그들이 일궈낸 현대서법계의 역정과 진화의 모습을 작가들의 육성을 통해 들어보고, 우리 서예계에 반추해 보기 위한 기획이다. 각 성(省)과 도시별로 다른 양상으로 나타나는 중국의 서법계를 차근차근 짚어보는 시간을 갖기로 하고, 우선 중국의 수도이자 전통 서법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베이징에서 뚜렷한 자기 색깔을 가진 네 분의 중견작가들을 만나 그들이 걸어온 길과 예술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려 한다. 그 첫 번째 순서로 일찍부터 서예, 전각, 회화 방면에서 개성미 강한 작품세계로 서법계에 신선한 충격을 던져준 석개(石開) 선생을 강렬한 폭염 속 베이징의 작업실에서 만나보았다. 인터뷰는 성인근 본지 편집주간이 진행하였고, 통역은 안재성 서법학 박사가 맡아주었다.2018. 8. 29글씨21 편집실2010년 34x34cm2005년2017년 34x34cm2006년 138x30cm x22005년1996년 96x59cm2008년 34x34cm2013년 29x24cm2009년 28x19cm2011년 34x34cm2017년 69x46cm석개(石開)1951년생(67세). 전업서화전각가푸지엔 푸저우출생 (福建福州人)푸지엔성서법가협회 부주석역임현) 중국예술연구원 중국서법원 연구원 중국전각예술연구원 연구원 북경인사 부사장제7회 AAC예술-중국의 영향력 있는 예술가 칭호를 부여받음개인서법전각 작품집 등 출판물 다수
[Interview]
이 작가의 思생활, 황방연
“서예는 나에게 오만과 겸손을 느끼게 해준 고귀한 존재” - 성재 황방연 전북 고창 출신인 석전 황욱 선생은 수전증을 극복하기 위해 악필법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자기극복과 정진으로 노년에 마지막 예술혼을 꽃피운 그는 전북 서예의 맥을 잇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황욱 선생은 슬하에 삼남일녀를 두었었으나 사상 문제 등으로 인해 월북하여, 곁에 남아있던 막내에게서 얻은 장손인 성재 황방연에게 집착하였다. 성재 황방연은 어릴 적부터 이어온 조부 황욱 선생의 관심 속에서 서예를 시작하였으며, 갑작스러운 사고로 잠깐의 방황의 시간 속에서도 그를 이끌었던 것은 바로 황욱 선생이었다. 서예, 문인화 등 한 가지에 몰입하는 성향이 강한 황방연은 서예에 도취되어 오만함을 느끼다가도 서예로 인해 겸손함을 느끼게 되는 등 인생에서 서예란 행복 그 자체였다. ...>>인터뷰 전문 보기(클릭)<<
[Interview]
원로에게 길을 묻다 _ 구당 여원구
한학자였던 아버지 도산 여운필 선생의 슬하에서 어린 시절부터 한문 공부를 한 구당 여원구을 만나보았다. 전통을 누구보다 소중히 여기는 여초 김응현 선생의 문하에서 엄격한 훈련을 받으며 서예에 몰두해왔다. 고린도전서 13장 48x75 2012인터뷰를 위해 선생의 작업실을 찾았을 때, 글을 쓰는 것에 몰두하던 모습이 쉬이 잊혀 지지 않았다. 연로한 연세에도 글과 글씨 쓰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는 그 모습이 바로 그가 후학들에게 존경받는 이유라고 생각했다. 여초 김응현 선생과 구당 여원구 선생동방문화대학원 대학교 2018전기 학위수여식휴정선사시-과현산화촌(休靜禪師詩-過現山花村) 37x35x2 2005구당 선생의 호는 구당(丘堂), 양소헌(養素軒)이며, 경기도 양평 출신이다. 1932년생(만86세)로 현재 활동하는 서예가로는 최고령이다. 고령의 나이임에도 글 쓰는 것과 서예, 전각을 끊임없이 작업해오고 있다. 그는 젊은 시절 일찍이 동아미술제에서 전각으로 수상을 한 바 있으며, 1983년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서예로 대상을 수상하며 그 실력을 인정받았다. 이후 1999년에는 국새제작에 참여하며 전각가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대한민국 국새 10.1x10.1 1998구원 1993 | 조관인황(鳥官人皇) 1998 | 구고심론(求古尋論)1998논어 위정편구(爲政篇句) 50x35 2012“바쁜 세상이지만, 시간을 잘 활용하여 계획을 세우고 정진한다면 좋은 결과를 얻을 것입니다.” 원로서예가로서 선생께서는 살아온 지난날을 회상하며 후학들에게 시간을 잘 활용하여 공부 할 것을 당부했다. 또 자신에게 서예라는 것은 자신의 몸에서 떨어져 나갈 수 없는, 늘 함께 모든 것을 헤쳐 나가는 몸과도 같은 것이라고 표현 했다. 고린전도서9장 구 38x48 2012과거와 현재라는 시대의 변화 속에서 파란만장한 서예의 삶을 묵묵히 지키고 이어오면서 느꼈던 감정들과 깨달음을 과감 없이 느껴볼 수 있는 인터뷰이다. 2018. 5. 9인터뷰 김지수 기자
[Interview]
토크콘서트, 중국 서예가 리우정청(劉正成)
류정청(劉正成) 선생은 중국 현대 서단이 부흥 할 수 있도록 기획하고 실천한 분이라 할 수 있다. 이번 인터뷰는 성공사례를 들어봄으로써 중국서단을 이해하는 동시에 우리서단에도 뭔가 벤치마킹할 만한 요소를 찾고자 해서이다.김희정(이하 김) | 제가 류정청(劉正成) 선생님을 처음 만난 때는 1994년 북경 중앙미술학원에서 석사연구생 때입니다. 중국서법가협회에서 주관하 신화사통신사가 후원한 국제학술토론회가 있다고 하여 방청하러 새벽부터 갔었습니다. 당시 열띤 토론회 장면과 선생님과 나눴던 이야기들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이런 자리에서 다시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리우정청(이하 劉) | 반갑습니다. 24년의 세월이 지났군요. 중국에는 “현대의 사람은 현대의 역사를 쓸 수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24년이라면 거의 한 세대라고 할 수 있으니, 이제는 그간 중국 서단에 있었던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김 | 먼저, 리우정청 선생님을 간단하게 소개하자면, 선생님은 중국 현대 서단을 반석위에 올려놓은 분이라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1986년 중국서법가협회 부비서장으로 부임한 이래 약 20여 년 간 큰 업적 세 가지를 꼽을 수 있습니다. 첫째, 중국서법가협회의 기관지인 《中国书法》을 발행하여 고대서예와 현대 중국서단에서 모범이 되는 작가와 작품들을 선양함으로써 서예의 올바른 방향을 잡아가면서 중국현대서단을 활성화 시킨 점입니다.둘째는, ‘전국중청년서법전각작품전(약칭 中靑展)’을 기획하고 실행한 점입니다. 직접 심사위원장(평위회주임)도 맡아 공정하고 정의롭게 진행하여 공모전의 모범을 만들어 놨습니다. 참고로, ‘중청전(약칭)’ 중국서단의 미래를 열어갈 수 있는 25세~55세까지 참가할 수 있는 서예공모전입니다. 특히 기업의 스폰서를 받아 행사를 치룬 것으로 알 고 있습니다.셋째는, 전국의 학자와 작가들을 결집하여 《中國書法全集》 총100권 씨리즈를 편찬한 일입니다. 각 권마다 이론가와 작가들이 맡아서 정리하였는데, 중국 서법사에 등장하는 작품들과 작가들을 정밀하게 고증하고 정확하게 기술하여 매우 권위 있는 책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 작가는 이론에 대해서 깊이 연구하게 되었고, 이론가들에게는 작품에 대해서 더욱 깊이 있게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서 하나씩 자세한 설명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김 | 먼저, 《中国书法》은 劉正成 선생님께서 사장이자 주편으로 계시면서 매월 발행한 중국서법가협회 기관지입니다. 이 책에서는 고대 서가와 작품도 소개가 되지만, 주로 현대 작가들의 작품과 평론을 많이 싣고 있습니다. 이 잡지에서 추구하는 방향과 내용의 특징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劉 | 18년 동안 《中国书法》 주필을 맡아 발행했습니다. 처음 중국서법가협회에 부임했을 당시 치공(啓功) 선생님이 주필을 맡고 계셨습니다. 4년 동안 3기를 발행했었고, 제가 제4기부터 맡아 발행하였습니다. 치공선생님께서 주편을 맡고 계셨지만 실제적인 일은 다른 두 분이 계셨습니다. 여기서 실명을 말씀 드리지 않겠습니다. 당시 내용은 당대 서예가들은 소개하지 않았고, 대부분 옛날 명가들만을 소개하는 정도였습니다. 특히 중청년 서예가들의 활동상황에 대해서는 전혀 소개하지 않았습니다. 미술잡지나 문학잡지 등은 대부분 당대 작가들과 작품을 소개하는데, 유독 서예잡지에서는 현존하는 작가들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제가 맡으면서는 서예고전과 원로작가보다는 현재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중청년 작가들에 각별히 관심을 갖었습니다. 당대 잡지는 무엇보다도 당대 작가들과 작품에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본 잡지가 이러한 기획의도의 전환은 중국서법계에 커다란 전환을 하였습니다. 본 잡지는 서예계 뿐만 아니라 미술계, 문학계, 철학계, 미학계, 고문자학계 등등 서예와 관련이 있는 여타의 학술과 예술분야를 망라하여 원고를 실었습니다. 마흔총이라는 미학자께서는 서예가 왜 예술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철학적(미학적) 문제를 다룸으로써 중국서단에 서예에 대한 관념(인식)을 전환하고 인식을 명확히 하게했습니다. 야오종이(饒宗頤) 선생은 대학자입니다. 제가 직접 방문하여 서예에 관하여 인터뷰를 하였습니다. 또 현재 중국서법가협회 부주적으로 계신 당시 중국미술학원 교수 천젼리엔(陳振濂) 선생이 주도하는 ‘학원파’ 서예에 대해서도 잡지에 실었습니다. 당시 ‘학원파’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사람들이 많았으나, 이에 관한 문장과 작품도 소개하여 공론화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여 실은 이유입니다. 제가 주관하기 전에는 이렇게 다양한 분야에 대한 관심을 두지 않았고, 특히 현대서예와 관견 된 문장이나 작가들에 대해서는 좀처럼 소개되지 않았습니다. 김 | 다음은 중국서법가협회와 《中国书法》잡지사가 주관한 ‘전국중청년서법전각전(약칭 中靑展)’의 기획 배경과 방법, 그리고 현대 중국 서단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요? 劉 | 내가 중국서법가협회에 부임한 다음 해에 ‘중청전’을 주관하였습니다. 예전에는 젊은 작가가 두각을 나타내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프로작가로 등단하기까지는 먼저 자기가 사는 지역부터 시작해 시와 성을 순서대로 거쳐 점점 전국에 이름을 알렸습니다. 이 때쯤이면 이미 늙어버립니다. 게다가 당시의 국전은 아무나 출품할 수도 없었습니다. 자신이 활동하는 지방에서 추천을 받고, 심사를 거친 후에야 출품 자격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자격을 얻어 출품하게 되지만, 서단의 보수적인 분위기로 인해 작품의 수준이나 개성보다는 누구의 서풍을 닮았느냐를 먼저 보고 입선 낙선이 결정됐습니다. 예컨대 구양순·안진경과 같은 고전적 서풍이나 치바이스(齊白石), 치궁(啓功) 등과 같은 유명한 서풍의 글씨라야만 인정받아 입선할 수 있었습니다. 북위서체나 간독 글씨, 갑골문 서체 같은 익숙치 못한 서풍의 작품은 낙선되기 일쑤였죠.하지만 새롭게 시작한 <중청전>은 지역의 추천이나 유명인사의 추천을 받지 않고도 누구나 직접 출품할 수 있고, 개성이 뚜렷해도 입선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혁신적이었습니다. 벽촌에 사는 이라도 좋은 작품만 할 수 있다면 바로 입선을 하고, 전국에 이름을 알릴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김 | 심사방식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劉 | 심사위원의 경향이 심사를 결정하기 때문에 심사위원은 매우 중요합니다. 또 심사위원을 구성하는 일은 서단의 방향을 어떤 쪽으로 이끌고 가겠다는 의지를 드러내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전에는 대부분 북경에 있는 유명한 서예가들이 심사를 맡았습니다. 하지만 <중청전>의 심사위원 구성은 매우 획기적이었습니다. 심사위원진의 변화에는 치궁(啓功) 선생의 도움 컸습니다.치궁선생님은 <중청전>을 기획하던 당시 중국 서단에서 중요한 위치에 계셨습니다. 그래서 운영위원장으로 모시고자 말씀 드리니까, “청년들의 일은 청년들이 알아서 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을 고문으로 모시고, 당시 대부분의 원로작가들을 고문으로 모셨습니다. 운영위원장으로 당시 60세가 안되셨던 션펑(沈鵬) 선생을 모셨고, 운영위원이나 심사위원들은 55세 미만이었던 중청년들이 맡았습니다. 제2회에서는 저도 심사위원으로 참가했는데, 제 나이가 40세였고, 가장 젊은 심사위원이었던 천전리엔 교수는 불과 30세였습니다. 또한 북경에 있는 작가에 국한 하지 않고 전국 각지에서 실력 있는 작가들을 심사위원으로 모셨습니다. 지역과 유파 나이를 초월하여 오직 실력에 따라 심사 위원장-부위원장-심사위원을 맡겼습니다. 김 | 이러한 변화들이 실제로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요? 劉 | 제5회에서 이른바 ‘광시(廣西) 현상’이라 불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심사위원들 투표를 통해서 수상작을 뽑고 보니 1등상 수상자 10명 중 4명이 광시성(廣西省) 출신이 됐습니다. 그중에는 아직 대학을 졸업하지 않는 수상자도 있었습니다. 모두가 깜짝 놀랐습니다. 광시성은 중국 외곽 지역으로 서예가 번창한 곳도 아니었고, 그 지역 출신이 심사위원에 있지도 않았습니다. 이유를 알고 보니 수상자들이 위진남북조 시대의 위진잔지(魏晉殘紙)의 서체와 서풍을 참고해서 작품을 했는데, 여태껏 공모전에서 볼 수 없었던 신선함 때문에 심사위원들이 그들에게 표를 던진 겁니다. 에피소드 하나만 더 소개하겠습니다. 1986년 <제2회 중청전>에 현대파 서예를 등단시켰던 일입니다. 본인은 전통서예 뿐만 아니라 현대파 서예도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현대파서예는 서예라고 취급해주지도 않았기 때문에 <중청전>에서도 현대파 서예가 입선에 들 가능성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현대파 서예학회에 10명의 현대파 서예 작품을 뽑아 추천해주면 입선시켜주겠다는 약속을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심사에 에서는 심사장에서 저를 안아서 밖으로 던져버리고 자기들끼리 심사를 다시 하여 모두 낙선시키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제가 심사위원장이었기 때문에 이미 결정된 심사결과를 다시 번복할 수 없다고 하여 입선을 시킨 일이 있었습니다. 이렇듯 우여곡절 끝에 오늘날과 같은 다양한 서풍이 등장하고 획기적인 작품들이 자리 잡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김 | 세 번째로 『중국서법전집』 총 100권 시리즈를 펴내셨는데요, 그 배경과 과정이 궁금합니다. 劉 | 서예나 미술은 실기와 이론이 구분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실기를 하지 않은 채 이론에만 치중하다 보면 학술적 깊이가 본질에 닿지 못하기도 합니다. 순수 서론만 하는 학자들은 서예작가를 따라가기 힘든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서『중국서법전집』의 저자들은 중국 전역에서 이론을 겸비한 우수한 서예가들을 주로 발탁했습니다. 서예가인 동시에 학자라고 할 수 있는 분들입니다. 예를들어 진한대(秦漢代) 저자 중 한 분인 왕용(王鏞) 선생은 오랫동안 진한대의 서예에 천착해왔고, 서예술 역시 진한대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니 누구보다 높은 안목으로 예술성 있는 작품을 선별할 수 있는 셈이죠. 이렇게 하여 중국 서단에 학술적 분위기를 더할 수 있었습니다. 김 | 중국 현대 서단에는 고전주의·신고전주의·서법주의·학원파서법·민간서법 등 다양한 주장이 존재합니다. 이에 대한 생각을 여쭙고 싶습니다. 劉 | 송대의 법첩인 『순화각첩』 에 수록된 진(晉) 시대의 글씨는 전반적으로 비슷합니다. 중국서예사에서 지금처럼 수많은 유파가 존재했던 적이 없습니다. 이는 1980년대 중반부터 꾸준히 성장해온 중국서예의 현재를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어느 파가 좋다 나쁘다는 지금 단계에서 말하기 어렵습니다. 오래 살아남는 것이 좋았다고 할 수 있겠죠. 김 |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더욱 건강하시고 우리나라도 자주 찾아주셔서 서예 발전에 공헌해주시기 바랍니다. 2018. 4. 30정리 김희정
[Interview]
藝結金蘭
예결금란- 韓中代表書藝家 李敦興 劉正成 春樹暮雲展 - 정종원(월간묵가 편집장) 학정 이돈흥(鶴亭 李敦興)과 리우정청(劉正成)의 2인전이 3월 13일부터 오는 6월 17일까지 광주시립미술관 제1·2전시실에서 열리고 있다. 동년배인 두 작가는 한국과 중국을 대표하는 서예가로 20년 간 서예를 통해 교류해왔다. 전시 주제인 ‘예결금란(藝結金蘭)’은 예로써 맺어진 금란지교란 뜻이고 전시명인 ‘춘수모운(春樹暮雲)’ 역시 두보(杜甫)가 멀리 있는 친구인 이백(李白)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아 지은 시에서 유래한 것이니 이로써 두 작가의 두터운 우정을 짐작할 만하다. 두 작가는 각국의 서예 발전에 크게 이바지해 왔을 뿐만 아니라 교류를 통해 양국 서예계의 발전을 위해 힘써왔다. 특히 학정 선생은 국제서예가협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세계청소년서예대전을 꾸준히 운영하여 한국 서단의 국제 경쟁력을 높이는데 공헌하였다. 리우정청 선생은 중국서법가협회의 부비서장으로서 중국 서단의 새로운 부흥기를 이끈 인물로 평가받는다. 서예잡지 『중국서법(中國書法)』을 창간하였고, 중국 서예사를 총망라한 『중국서법전집(中國書法全集)』 100권 시리즈를 출판하기도 하였다. 이번 전시는 광주시립미술관에서 매년 당대 최고 작가들의 작품을 선보이는 대한민국 명품전의 일환으로, 서예인 및 일반 관객들에게 한·중의 서예술을 한자리에서 비교 감상할 수 있는 드문 기회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전시 개막식 날인 3월 15일, 광주 금남로에 위치한 학정서예연구원을 찾아 두 작가와 나눈 이야기를 문답 형태로 정리하여 전한다. Q. 이번 전시를 소개해주십시오. (이돈흥(이하 이)) 그간 한국과 중국이 외교적인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이에 광주시립미술관에서 문화예술을 통해 양국 관계를 풀어보고자 한국과 중국 작가 2인전을 기획하였습니다. 지난 10월 말 경에 결정된 전시라 준비기간이 짧았지만 리우정청 선생님께서 흔쾌히 허락을 해 전시회를 열 수 있었습니다. (리우정청(이하 劉)) 한국과 교류한 지 30년이 넘었는데 이렇게 큰 전시는 처음입니다. 한국의 서예가와 관객들의 많은 관심과 조언을 바랍니다. 이번 ‘예결금란’이라는 전시명은 이돈흥 선생님과 저, 두 사람만의 우정이 아닌 오래전부터 교류해온 한국과 중국의 관계를 상징한다고도 생각합니다. 양국의 우정이 지속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돈흥 作Q. 두 분의 인연이 오래 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만나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劉) 여초 김응현 선생님 덕분입니다. 그분께서는 생전에 한국 서단과 중국 서단의 교류에 큰 역할을 하셨습니다. 한 번은 김응현 선생님이 권창륜·여원구·이돈흥 선생님 3분과 함께 베이징에 오셨죠. 그때 처음 이돈흥 선생님을 알게 됐습니다.본격적으로 가까워진 것은 그로부터 약 10년 후부터입니다.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 참가 차 전주에 왔다가 광주에 와 학정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후부터는 전주에 올 때마다 광주에 들렀죠. 마찬가지로 학정 선생님도 북경에 오면 꼭 저를 만났습니다. (이) 리우정청 선생님과 10일가량 돈황 지역을 여행한 적이 있습니다. 그 여행에서 그가 학문적으로도 높고 서예술에도 깊이 천착한, 훌륭한 작가임을 깊이 느낄 수 있었고 더욱 친하게 되었습니다. 언어는 서로 다르지만 예술로 교류하면서 서로에 대해 깊이 알고 있는 지기(知己)라 하겠습니다. Q. 이번 전시 준비는 어떻게 하셨는지요? 전시의 특징은요? (劉) 지난 10월 말에 결정된 전시라 준비할 시간이 많지는 않았습니다. 학정 선생님과 함께 하였기에 가능한 전시였고, 그간 서예로 교류하면서 공부한 것들을 관객들에게 보여준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마련한 전시입니다.특히 중국의 우수한 시가(詩歌) 뿐만 아니라 그동안 한국을 접하면서 알게 된 한국의 시가 역시 작품에 담았습니다. 또 전·예·해·행·초 등 여러 서체를 선보였는데 초서 작품에는 저의 감정이, 행서에는 저의 사상이 담겨있습니다. 전서와 예서로 쓴 작품은 한·중 교류가 가장 활발했던 청나라 시기, 특히 옹방강과 추사의 이야기를 주제로 했습니다. 아무쪼록 한국 작가들과 관객들의 많은 지도편달을 바랍니다. 특히 학정 선생님께 부탁드립니다. (이) 이번 전시에는 한국과 중국, 양국의 작가가 함께하는 전시이기에 한국이라는 정체성, 그리고 광주라는 지역의 역사를 담고자 했습니다. 김상헌·성삼문의 글이라든지 광주에서 의병장을 했던 충장공 김덕령 장군에 관한 시와 글을 주제로 했습니다.그리고 리우정청 선생님이 말씀하신대로 2인전은 상호보완이라고 해야 할까요? 말하지 않는 가운데서도 상대방의 글씨를 보다 보면 ‘아, 무엇을 배워야겠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거든요. 리우정청 선생님께서 겸손하게도 저에게 지도를 해줬으면 하고 말씀하셨지만 저야말로 리우정청 선생님께 지도 말씀을 부탁드립니다.아울러 한국과 중국 서예가의 2인전으로는 예전에 김응현·치궁(啓功), 권창륜·선펑(沈鵬), 그 뒤로는 박동규·저우샹린(周祥林)의 전시가 있었죠. 저희의 2인전이 4번째라고 할 수 있는데요, 이런 전시가 우리 서단에 좋은 영향을 미쳐서 후배들이 무언가를 느끼고 새로운 목표나 지향점을 가졌으면 합니다. 우리가 그럴 수 있을 만큼 좋은 작품을 했나 걱정이 되긴 하지만요.리우정청 作Q. 상대방의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신다면요? (劉) 학정 선생님과 저는 서로가 글씨를 쓰는 모습을 보며 영향을 주고받고 공부를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흔히 펜으로 교류를 한다고 하는데, 저희는 서사(書寫)라는 행위로서 교류를 한 셈입니다. 학정 선생님은 높은 경지의 서예술을 지니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이미 그 실력이 잘 알려져 있고 중국에서 봐도 대단히 수준이 높습니다. 앞으로는 다른 이의 시나 문장 외에도 선생님 본인의 생각과 감정을 시로 짓고 이를 붓으로 표현하신다면, 서예계뿐만 아니라 문학계에도 영향을 미치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 중요한 말씀입니다. 한국 서단의 서예가들은 스스로 시를 지어 쓰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다. 언어의 문제로 시를 읽을 수는 있어도 짓는 수준이 되기까지는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자작 시를 쓰고 이를 서예작품화한다는 것은 자기감정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인데요, 바꿔 말하면 다른 이의 글을 쓸 때도 그 글을 충분히 이해하고 느껴야 한다는 거죠. 특히 행초의 경우, 충분히 이해하고 느끼지 못한 상태에서 쓰면 글씨도 제대로 나오지 못합니다.리우정청 선생님은 서론에도 밝을 뿐만 아니라 개성이 강한 행초를 씁니다. 행초를 씀에 있어서 장초를 쓴다는 것은 변화를 꾀하는 것을 의미해요. 왕탁 글씨를 보면 이런 장초가 조금씩 섞여있는데 리우정청 선생님의 행초에는 장초가 상당히 많이 보이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리고 보통의 작가들이 넘볼 수 없는, 굉장한 속필이죠. 오래 볼수록 깊이가 느껴지는 그런 글씨입니다. 이돈흥 作Q. 두 분은 국제서예가협회에서 각국의 회장직을 맡고 있기도 합니다. 한국 서단이 중국 서단의 발전을 통해 어떤 점을 배워야 할까요? (이) 그간 한국과 중국의 교류전을 수차례 개최했습니다. 처음에는 한국과 중국이 거의 비슷한 수준이었는데 지난 10년 사이에 중국의 실력이 많이 좋아졌습니다. 중국에서는 서예를 국가적으로 육성하고 있는데, 우리는 학교에서 서예를 가르치지 않고 한문도 가르치지 않다 보니 갈수록 서단이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특히 젊은 서예가들이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죠. 서예진흥법 통과 등 정책적으로 서예를 발전시키려는 움직임이 있어야 합니다. 몇 사람 개인의 노력으로는 힘들죠. 우리 서예인이 모두 뭉치고 한학자들이 뭉쳐 무엇인가를 해야 변화가 있을 것입니다. (劉) 한국은 한글을 쓰기 때문에 한자가 필요 없는 상황이고, 한자 교육도 하지 않기에 중국의 서예가들보다 환경적으로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한국의 많은 서예가들이 공부하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면서 서예를 대하는 정신에 대해 배우곤 합니다. 한국 서단과 중국 서단의 발전은 동보(同步), 같이 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리우정청 作Q.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합니다.(劉) 두 가지 큰 계획이 있는데 모두 학정 선생님과 관련이 있네요. 우선 이번 2인전을 중국에서 다시 한 번 개최하고 싶습니다. 한국과 중국의 서예가가 어떻게 교류하고 있는지 중국 작가들에게 보이고 평가를 받고 싶습니다. 그리고 10년 정도가 흘러 80세가 넘었을 때 학정 선생님과 다시 한 번 전시를 하고 싶습니다. 그때는 법에 얽매이지 않고 더 자유롭게, 마음 내키는 대로 쓰고 싶습니다. (이) 특별한 계획은 없습니다. 다만 리우정청 선생님이 말씀하신 대로 이번 전시를 중국에서 할 수 있다면 큰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 매일 밥 먹듯이 매일 글씨를 쓰면서 저의 소임을 하는 거죠. 열심히 부지런히 붓하고 노는 것, 그것이 계획이라면 계획입니다. * 본 인터뷰는 『월간 묵가』와 공동으로 진행하였습니다. 『월간 묵가』의 4월 호에서도 인터뷰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2018. 4. 4글씨21 편집실
[Talk]
토크콘서트, 일본 서예를 말하다.
글씨21(대표 석태진)과 함께 하는 토크콘서트, <일본 서예를 말하다.>가 지난 2월 8일 북촌한옥마을 ‘갤러리 사이’에서 열렸다. 참여자 모집부터 많은 관심을 모은 토크콘서트는 글씨21이 주최하고 (사)한국서예단체총협의회, 월간서예문화와 월간묵가가 주관하였으며, 심은 미술관(관장 전정우)이 후원하였다.월간 서도계 발행인 후지사키 아츠시이번 콘서트는 일본 서예계를 가감 없이 이야기하여, 서예계의 실상과 허상에 대해 논하고 더 나아가 한국의 실정을 짚어보자는 데에 취지가 있었다. 이날 토크콘서트에는 일본의 월간 서도계 발행인 후지사키 아츠시와 일본 마이니치 신문 서도부 담당기자 키리야마 마사토시가 참석 예정이었으나 키리야마 마사토시는 신변상의 문제로 한국에 오지 못했다. 진행 김주회토크콘서트는 후지사키 아츠시씨와 글씨21의 일본지사 김주회 부사장의 통역과 진행으로 차분한 분위기에서 시작되었다. 일본 서예의 현 상황에 대해 논의하고 후지사키 아츠시씨 또한 한국의 실상에 대해 궁금한 점이 많았으며 서로의 대화를 통해 토크콘서트는 더욱 깊어졌다. ‘한국’과 ‘일본’이라는 외교적 관계를 벗어나기 어려운 큰 현실 속에서 동아시아의 큰 공통점인 ‘서예’를 통해 서예의 과거와 현실을 짚어보는 시간을 가졌으며, 참여자들의 무거운 눈빛에는 어두운 서예 미래를 조금이나마 밝혀보고자 하는 긍지의 빛이 담겨있었다. 글과 화면과는 확연히 다른 만남, 직접 대상을 만나 이야기 듣고 궁금한 점을 바로바로 질문할 수 있는 형태의 토크콘서트를 성공적으로 마친 글씨21은 앞으로도 이러한 진솔한 대화의 장을 지속적으로 발전하여 만들어 나갈 것을 기약했다. 2018. 3. 27취재 김지수 기자
[Interview]
이 작가의 思생활, 구지회
“과거를 알지 않고는 현대를 살아갈 수 없다.” 지난 12월 중순, 지속적인 한파를 기록하던 추운 날이었다. 서울의 옛 골목을 간직하고 있는 이화동의 재미난 벽화와 함께 가파른 계단을 지나 다다른 곳에는 소석 구지회 선생의 수더분한 미소와 따뜻한 차가 글씨21팀을 반기고 있었다. ‘石(돌 석)’자를 좋아하셨던 치련 허의득 선생께서 지어주신 호, ‘소석(素石)’은 본래의 것을 지키며 우직한 삶을 살아온 구지회의 인생과 닮았다. 그가 몇 년째 작업실로 사용 해 온 ‘소석화실’은 한옥과 양옥의 조화가 독특하게 잘 어우러진 작업실이었고, 소품 하나하나에 온정이 묻어났다. 전통 문인화의 고상한 아름다움보다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고무공 같은 분위기를 지닌 그 매력은 쉽게 따라갈 수 없다. 독보적인 독특함을 가진 구지회 선생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인터뷰 전문 보기(클릭)<<
[대담]
철농과 소정을 기억하다
연희동에 위치한 <스페이스 창배>갤러리에 카메라와 마이크 스위치가 켜졌다. ‘철농과 소정을 기억하다’라는 주제로 기획된 이 영상은 철농 이기우와 그의 사위인 소정 황창배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모여 그들의 삶과 예술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 한 자리였다. 철농 이기우 선생의 딸이자 소정 황창배의 부인인 이재온(스페이스 창배) 관장과 철농 이기우의 제자이며 서예, 전각의 근원적인 천착을 통해 서예계에서 큰 존경을 받고 있는 김양동(계명대학교 석좌) 교수, 철농 이기우의 제자이며 전 한동대학교 건축학과 교수, 현 목사인 김학철 교수, 철농 이기우의 마지막 제자인 이종목(이화여자대학교 동양화전공) 교수가 한데모여 철농과 소정을 기억한다.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다. 1. 스페이스 창배의 설립목적과 배경2017년 4월 개관기념展, 이후 두 번째 전시이자 첫 번째 기획 전시로 ‘파격의 뿌리’展을 개최했다. 이재온 관장과 철농 이기우, 소정 황창배는 모두 아버지이자 남편으로 가족관계이다. 우선 스페이스 창배라는 문화예술공간의 설립목적과 과정에 대해 이재온 관장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2. 철농 이기우의 삶과 예술, 그리고 교육철농의 삶의 개략에 대해 김학철 교수의 이야기, 예술적 성과와 특징과 서예교육자로서의 의미에 대해 김양동 교수의 이야기, 철농 선생의 마지막 제자인 이종목 교수가 받았던 의미있는 가르침. 3. 소정 황창배의 삶과 예술황창배의 삶의 개략에 대해 부인인 이재온 관장의 이야기, ‘황창배 신드롬’, ‘미술계의 이단아’, ‘한국화단의 혁명가’, ‘한국화의 테러리스트’, ‘현대회화의 전위’ 라는 강렬한 수식어들이 붙는 황창배의 화가로서의 작업과 특징에 대해 이종목 교수의 이야기. 서양화 뿐 아니라 전각에도 두각을 드러냈던 황창배 전각의 특징과 의미에 대해 김양동 교수가 풀어내는 이야기. 마지막으로 현대미술과 디자인, 건축 등에서 전각예술의 활용방향과 가능성에 대해 건축가인 김학철 교수의 답변을 들어볼 수 있다. 2018. 1. 8글씨21 편집실
[Interview]
원로에게 길을 묻다 _ 송천 정하건
몇 해 전 팔순 기념 전시를 개최한 서예가 송천 정하건(1935生, 號 : 松泉, 솔샘) 선생은 한국 서단의 원로 서예가이다.청년시절 법학을 전공한 송천 정하건 선생은 어린 시절 가학으로 한문을 배웠다. 이후 애국심으로 나라를 보국하기 위한 길로 서예를 택하게 된다. 서예에 전념 전력을 쏟아 일생을 달려온 그의 서예의 길에는 강한 집념이 보이지만 그것이 모나지 않으며 강한 듯 여유로운 필체를 구사하는 송천 선생의 필체를 닮았다. 李舜臣將軍詩 陣中吟 70x144 선생의 서예 인생이 고스란히 담긴 자택은 서예박물관 그 자체를 방불케 했다. 어딘가 옛 정취가 묻어나는 대문을 넘어서면 넓은 마당엔 크고 작은 수석들이 가지런히 자리 잡고 있었다. 현관에 들어선 후 송천 선생의 서재가 있는 3층으로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오르는 걸음마다에 정하건 선생의 숨결이 녹아있는 듯 포근했다.守道.擇交 18x33 선생께서 귀하게 소장한 작품을 소개할 때면 천진하고 상기된 목소리로 작품 하나하나 상세히 설명해주었다. 추사, 표암, 좀처럼 만나기 힘든 이수 허목의 글씨까지 하나하나 귀중하게 보관하고 감상한다는 그의 말에서 서예를 얼마나 아끼고 승사(承事)하는지 느낄 수 있었다. ‘서예 안에 모든 것이 들어있다.’송천 선생의 말씀처럼 그의 일생에는 서예라는 큰 둘레 안에서 무한히 정하건 선생은 반복하여 학습할 것을 강조했으며, 서예를 잘 모른다고 할지라도 우선 많이 보고, 관심을 갖기를 간절히 말씀하였다.千忍一聲 32x108李斗熙先生句 35x135x2 송천 정하건 선생은 고고하고 웅장한 해서에 육조체를 기본으로 하여 전, 예, 행초를 두루 섭렵하였으며, 서예를 통해 전통을 계승하여 보국의 길을 이어가고자 했던 그의 따뜻한 마음은 현재까지 이어져 후학들에게 큰 모범이 되고 있다. 2017. 12. 21인터뷰 김지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