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즈넉함 속에 활기, 지강서예학원
일산에 위치한 한 서실을 방문했다. 어딘가 구수한 분위기를 뿜어내는 지강 김승민 작가가 운영하는 서실이다. 서실은 여름방학을 맞이해 평일 낮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학생들로 붐볐다. 그 사이에는 어른도 자리하고 계셨다. 열심히 한글서예를 쓰고 계시는 한 어른께 서예 선생님이신 지강 김승민에 대해 여쭈었더니 허허 웃으시며 모든 서체를 두루 잘하시는 것 같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실제로 지강 김승민 작가는 2011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에서 대상을 받는 영광을 누린 작가로 앞날을 촉망받는 작가 중 한명이다. 한편에는 나란히 초등학생 형제가 글씨를 쓰고 있었다. 형제에게 “지강 선생님과 사진 한 장 찍어줄까?” 했더니, 부끄러운 듯 웃으며 도망을 갔고 김승민 작가는 적잖이 당황한 것 같았다. 이 작업실에는 김승민 작가의 아내이자 파트너인 이기연 선생님이 함께 계신다. 무뚝뚝한 김승민 작가의 성격을 보완하여 아이들에게 한없이 다정한 이기연 선생님은 작업실을 한층 밝히고 계셨다.지강 김승민은 어떤 사람인가요? 저는 열심히 글씨를 쓰고 있는 젊은 서예작가입니다. 여느 작가들처럼 술 마시는 것, 노는 것을 좋아하는 작가죠, 어떤 일이든 한 번 시작하면 그 한 가지 일에만 몰두하여 끝을 보는 성격을 가졌습니다. 성격을 고쳐보고자 시작 하게 된 서예가 지금에 업이 되어있고, 평생의 동반자가 되었습니다. 林椿先生詩 작업실에 대한 소개를 하자면? 제 작업실은 경기도 일산 후곡마을 학원가에 위치해 있습니다. 아담한 사이즈에 고즈넉한 공간, 아끼는 화초들도 많이 있구요... 언제든지 편하게 오셔서 차 한 잔 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 ^^ 작업실 주변에 초등학교가 많이 배치되어 있는데, 서실 운영에 위치적 효과가 있는지? 효과가 없지는 않습니다. 질문주신 것처럼 아무래도 주변에 학교가 많다보니, 서예에 관심을 보이는 부모님들의 상담문의가 끊이지 않고 오는 편입니다.하지만 위치적 장점이 있다고 해도 내실이 허술하게 되면 부모님들은 금방 느낍니다. 학원가에 위치한 만큼 소문이 빠르게 퍼지기도 합니다. 때문에 교육내용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菜根譚句-誠心和氣 이 작업실만의 공부 스타일/ 수업방식이 있다면?- 서예교육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은? ‘인성’입니다. 예를 들어 저희 서실에서는 들어오고 나갈 때 꼭 인사를 하게끔 합니다. 간혹 아이들이 인사를 안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인성 문제에서는 그냥 지나치지 않고 교육을 합니다. 서예를 잘하고 못하고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인성교육, 그 안에서 서예교육이 비로소 꽃 피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중시하는 부분은 ‘서체의 다양성’을 경험해 보는 것입니다. 요즘 학생들은 호기심이 굉장히 많습니다. 서예라는 것은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연구하고 연습해야 하는 것이지만, 어린 학생들에게는 오히려 역효과가 나기 때문에 다양한 서체를 경험하면서 지속적인 호기심을 가지고 수업에 임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草衣禪師詩句 서예교육과 창작 작업을 동시에 하고 계신데 서로에 대한 어떤 영향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학생들에게 교육을 하면서 서예뿐 아니라 그림, 캘리그라피를 함께 하게 되는데 다양한 체본을 써주게 됩니다. 그럴 때, 생각했던 것보다 괜찮은 구도가 나오게 되면 기억해 두었다가 제 작품을 할 때 응용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맘속에 작품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임하면 왠지 부자연스럽고 썩 맘에 안 드는 경우가 많지만, 부담을 덜고 편하게 붓을 들 때 오히려 괜찮은 구도가 나오는 경우가 있지요菜根譚句-得意 요즘 서예에 관한 고민은? 서예에 관한 고민은 예전부터 지금까지 계속 해 왔던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어떻게 하면 글씨를 잘 쓰지?”, “글씨가 거친 것 같은데,,, 좀 편안하고 부드럽게는 안될까?” 등의 고민을 주로 했던 것 같습니다. 대학 졸업 후 많은 공모전에 출품하면서 글씨만 썼습니다. 법첩임서와 공모전 출품을 하면서 글씨를 쓰는 서사능력은 향상 되었지만 이론에 대한 부족함을 절실히 느껴 이론 공부를 깊이 있게 해보자 하는 마음으로 대학원에 진학하여 현재 4학기 째 다니는 중입니다. 20대 젊은 시절에는 서예전공자가 “글씨만 쓰면 되지“하는 마음으로 이론공부에 등한시 했었는데 지금에 와서는 너무 후회가 되고 안일하지 않았나, 반성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菜根譚句 - 有生之樂 虛生之憂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합니다. 현재 하고 계신 서예교육과 여러 작업들을 통한 최종 목표는? 오래전부터 생각해온 것이 ‘마흔 이전까지는 고전에 충실하고, 마흔 이후부터는 나의 이야기가 담긴 작품을 해보자’였습니다. 아직 많이 부족하고 모자라지만 언제까지 왕희지 임서만 할 수는 없는 것이니까요. 저의 작품을 보는 감상자들이 작품을 보고감동을 받을 수 있는 그런 작품을 해 보는 것이 저희 최종 목표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제가 서예를 하게끔 해 주신 초등학교 은사님과의 전시를 구상 중에 있습니다. 초등학교 5, 6학년 담임선생님 이셨는데, 제가 서예에 재능이 있다고 보시고 적극 추천해 주셨던 것이 지금까지 서예를 하고 있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은사님께서는 제가 학부 때 원광대학교 교육대학원 서예전공으로 진학을 하시면서 계속 인연이 닿았습니다. 그 후에 저의 개인전에도 먼 길 찾아 주셨죠, 처음 함께하는 전시에 대해 제안 드렸을 때에는 사양하시다가 후에 승낙을 하셨지만 아직까지는 실행에 옮기지 못했습니다. 꼭! 해보고 싶은 전시구요, 나중에 전시를 할 때 초등학교 동창들을 모두 초대하여 사제 간의 정을 돈독하게 다지는 시간을 가지고 싶은 작은 소망이 있습니다. 그때 ‘글씨21’에서도 함께 해주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지란지교를 꿈꾸며...유난히 사람냄새 나는 작업실 탐방이었다. 어느 하나 시듦이 없는 화초들은 작업실을 더욱 활기찬 공간으로 만들어 주었고, 오고가며 밝게 인사하는 아이들에게는 뭔가 즐거움이 느껴졌다. 김승민 작가의 작업실 탐방을 통해 서예의 교육과 서예작가의 삶에 대해 조금은 엿 볼 수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서예 선생님으로서, 서예 작가로서 맡은 바 최선을 다하며 소소한 꿈을 이뤄나가는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꿋꿋한 청년, 작가 김승민의 작업실 탐방이었다.인터뷰 김지수 기자
이 작가의 思생활, 박용설
서예가와 교육자의 길을 함께 걸어온명품 서예가 초민 박용설\"가장 중요한 것은 그 근본을 이해하는 것.\"모나거나 튀지 않고 묵묵히 성실한 삶을 살라며 이응백 교수(서울대 명예교수1923~2010)께서 초민(艸民)’이라는 호를 지어주셨다고 한다. 실제로 초민 박용설은 서예인생에서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며 어둠속에서 영롱한 빛을 내는 반딧불처럼 빛나고 있다. 하지만 그의 열정은 실제로 발열 없이 빛나는 반딧불이 아닌, 태양과도 같은 빛이었다. 그 빛을 조명하여 초민 박용설의 서예인생과 교육철학에 대해 집중 인터뷰를 하고자 그의 작업실을 찾았다. 오는 11월, 예술의전당에서 열리는 개인전을 앞두고 총망(悤忙)함에도 불구하고 시간을 쪼개어 할애해 주었다.그는 ‘초민’이라는 호 말고도 ‘고윤실’이라는 당호가 하나 더 있다. 육당 최남선 선생님의 글을 보고 ‘옛것을 잘 이어 새로운 것을 창조해보자’라는 뜻으로 지은 ‘고윤실’은 문자의 근본을 중시 여기는 초민 박용설의 뜻이 가득 담겨있다. 오늘날의 기형적인 획을 구사하는 서예나, 캘리그라피 작가들이 근본을 간과하고 만들어내는 문자의 오류들을 상기하며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Q. 서예와의 인연이 어떻게 시작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또 본격적으로 서예를 시작함과 동시에 학남 정환섭 선생님의 문하에 있으셨는데 학남 선생님의 서예 교육법은 어땠나요? 대학교(사범대)에 들어가서 과에 적응을 잘 못하고 방황하던 차에 교양과목으로 서예과목이 있는 것을 보고 수업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때 선생님께서 열심히 잘한다고 칭찬을 해주셨던 것이 발단이 되어 이후 방학 내내 글씨 쓰는 것을 더욱 열심히 하게 되었고 그것이 서예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대학 4년 동안 서예에 묻혀 살다시피 하다가 문득 서예를 제대로 배워야겠다고 생각하여 군대를 다녀온 후 학남 선생님 문하에 들어갔습니다. 학남 정환섭 선생님은 서울 미대 1회 졸업생으로 동기로는 산정 서세옥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대가인 학남 선생님을 처음 뵈었을 때, 글씨가 처음이냐며 그 앞에서 글씨를 써보라고 하시는데, 저는 몇 년을 공부하고 갔음에도 불구하고 처음이라고 말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論語句 60x53cm 그리고 ‘구양순’부터 법첩위주로 공부하라고 말씀하셔서 책을 보고 똑같이 쓰려고 열심히 썼습니다. 서법책을 바꿀 때는 어떤 서체를 어떻게 학습해야 하는가를 상의하고 잘 설명해 주시면서 공부의 방향성에 대해 알려주셨죠. 학남 선생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요즘 사람들은 자전이 많이 나오다 보니 법첩은 열심히 공부하지 않고 집자를 해서 바로 작품을 쓴다고,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음식중에는 김치와 홍어가 있는데 그런 것들은 곰삭아야만 제대로 맛을 내듯이 법첩을 수없이 반복하면서 완전하게 습득하도록 노력해야만 한다고 말씀하셨죠.陽村先生 獨樂堂記 句 35x140cm Q. 어느 한 서체에 치우치지 않고 5체 두루 능통하신 것 같습니다. 이러한 것이 ‘박습(博習)’하는 학서 과정을 중시하는 것과 연관이 있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나도 제대로 잘 하는 것이 없습니다. (웃음) 예전에 서예는 실용으로 일상생활에서 붓글씨를 써야했기 때문에 해, 행, 초 순서로 글씨를 배웠지만 현재에 와서 굳이 해서부터 가르치고 배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지요.문자의 발전 과정에 의해 그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문자의 어원을 살피면서 배우면 재미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전서, 예서 순으로 공부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죠, 또 그렇게 공부하는 것이 나중에 해,행,초 작품에 전예의 필의(筆意)가 옮겨져 좋은 작품이 나올 것입니다. 또 자기의 개성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물론 한 서체를 잘하게 되면 다른 서체에도 잘 전이가 되어 다른 서체 모두 격이 높아집니다. 시대별로 서체가 변천되는 그 과정을 보면 가장 큰 이유는 ‘실용성’입니다. 즉 수평으로 긋는 전,예가 약간 우측으로 올라가는 획이 나오는 해,행,초의 서체로 변하는 것은 실용성의 바탕으로 쓰기쉽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처음 해서를 가르치면 오히려 갈고리나 파임에 막혀 중도 포기를 하는 경우가 많죠, 붓을 세우고 역입하고 중봉운필, 회봉하는 것을 터득한 후 나중에 해서를 학습하는 것이 훨씬 용이하다고 생각합니다. 篤藝 28 x 51 Q. 서예와 함께한 일생은 어떠셨나요? 저에게는 글씨 쓰는 것 자체가 기쁜 일이었습니다. 날밤을 새우며 글씨를 쓰는 그 자체가 좋았지요. 결과적으로 저희 세대에는 글씨 쓰는 것으로 어느 정도 경제력이 해결이 되어 괜찮았습니다. 그리고 가정적으로 보았을 때, 제가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이 자식들에게 본보기가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이런 모든 것이 기쁨입니다. Q. 요즘 현대서예에서 볼 수 있는 재료의 다양성과 사용법은 무궁무진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기본 재료만으로도 전통서예의 매력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텐데요, 재료를 사용하는 독특한 방법이나 아끼는 재료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일상생활에서 옷을 고르거나 글씨를 쓸 때 종이에 배색을 하는 것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얀 화선지에 다양한 검은색의 먹으로 글씨 쓴 후 빨간 인주로 낙관을 찍어 완성하는 일련의 과정 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붓에 대해 간단하게 얘길 하자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붓의 종류가 ‘양호장봉이 아니면 안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국에 가서 보면 정말 여러 가지 동물의 털(토끼, 돼지, 말, 소, 양 등 )들을 다양하게 사용합니다. 이런 부분을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재료를 다양하게 접하고 사용하면 좋은 효과를 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정판교 시 70x70 Q. 작품 활동하시는 것을 보면 전통서예의 정통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전통서예를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고전에 빠지는 것만으로도 좋습니다. 고전에 깊이 천착하게 되면 무언가 내면의 것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아직까지도 새로운 것을 시도 한다는 것이 크게 마음에 내키지 않아서 전통서예를 더 깊이 연구 해야 한다고 생각하죠, 요즘 작가들을 보면 튀고자 하는 작가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서예는 문자의 약속을 지키는 조형예술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허신의 설문해자를 보면 소전 9353자가 표제자입니다. 그런데 지금 사전에 나오는 것은 거의 5만자가 됩니다. 나머지 4만여 자의 전서는 없지 않습니까? 그것을 요즘 사람들이 해서를 가지고 만들어서 전서를 씁니다. 하지만 그것은 틀린 방법이라 볼 수 있습니다. 기존에 있는 전서로 가차해서 써야하는데 자기 마음대로 만들어서 쓰는 작가들이 많은데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한자의 육서중 전주가차는 한자를 응용해서 쓰는 방법을 말하는데, 그것을 잘 공부해서 올바른 전서를 쓰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설문해자(說文解字)』는 1만(萬)여 자에 달하는 한자(漢字) 하나하나에 대해, 본래의 글자 모양과 뜻 그리고 발음을 종합적으로 해설한 책 구양수 학서 70x200 Q. 초민 박용설이란 이름 뒤에는 왠지 ‘작가+교육자’ 라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선생님만의 교육철학, 지도방법에 대해 들려주세요. 저는 사범대를 나와서 그런지 교육과정이라는 학습단계를 잘 체계화하여 가르치면 쉽고 빠르게 공부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수학을 배울 때에도 더하기를 배우고, 빼기를 배우고, 그 다음에 곱하기, 나누기를 배우고 난 후 1,2차 방정식을 배우는 식으로 학습단계대로 잘 습득해 나가면 많은 것을 잘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근본을 중시합니다. 따라서 전서를 공부하고자 하면 처음에는 좀 지루하겠지만 540부수를 다 공부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설문해자에 모든 문자를 540부수로 분류 했기때문이죠. 예를 들어 王(임금왕)자를 자전, 옥편에서 찾을 때 王(임금왕)자는 자획이 4획입니다. 그런데 정작 찾는 것은 5획인 玉(구슬옥)변인 5획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강의자전이 214개의 부수로 문자를 분류하다보니 전서의 540부수를 압축시켜놓아 그런것이죠. 그러니 올바른 전서를 쓸 수가 없습니다. 저는 이렇게 공부하기를 원합니다. 연필로 우선 부수를 익히면서 머리에 넣어야 합니다. 글씨는 가슴에 있는 것을 손으로 표현하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사람들은 눈으로만 보고 손으로 표현하려고 하는데 그렇게 되면 공부가 잘 되지 않아요 전서 뿐 아니라 예서 같은 경우에도 그냥 214부수를 공부하고 그 다음에 글자를 쓸 수 있도록 하며, 행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무목 변을 보면 좌변이나 우측 방에 올 때, 밑에 올 때 매번 다른 모양으로 오게 되죠. 이런 모든 것들을 다 가슴으로 익힌 다음에 붓으로 쓰게 되면 훨씬 체계적으로 익힐 수 있고 그 후에 글씨를 쓰게되면 자기정리가 됩니다. 그렇지만, 재미있게 공부해야 합니다. 부수에 대한 자원, 글자에 대한 자원을 공부하게 되면 옛사람들의 놀라운 지혜가 그 문자 속에 있기 때문에 빨리 익혀지고 재미있게 할 수 있습니다.최승로 선생 시 88x88 Q. 훌륭한 후학들을 많이 길러내셨습니다. 제자들과의 인연은 어떤가요? 제자들과의 인연에 대해서 얘기 드리자면, 삶은 만남의 연속입니다. 제자들과의 인연이 같은 시대에 끝까지 좋은 인연으로 남으려면 선한 인연이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따라서 가슴과 가슴으로 만나야 그 관계가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죠. 인격 대 인격으로 서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좋은 인연을 유지할 수 있는 겁니다. 저는 강요하기보다는 스스로 방향을 찾아 갈 수 있도록 지도합니다. Q. 한자 문화권인 한 · 중 · 일에서 유독 한국의 서예가들이 마땅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여러 요인들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가장 큰 요인은 무엇인지, 또 어떠한 인식변화가 필요한지에 대한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제 생각에는 중국과 일본은 한자가 없이는 생활 할 수 없는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인데, 어느 날부터 한글 전용으로 인해 한문서예가 너무 난해하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한문서예작품을 집에 걸어놓았는데 손님이 와서 집주인에게 글씨의 뜻에 대해 물어봤는데 갑자기 생각이 안나서 난감해 하는 등 한자의 사용이 잦아듦에 따라 서예가 우리나라에서 미술품으로의 가치가 낮아졌다는 것입니다.우리나라의 긴 역사를 보더라도 한글이 전용이 되어 사용하게 된 것은 한글이 창제된 것이 600년, 해방 이후에 한글 운동이 왕성하게 일어났습니다. 그 이전 까지 역사의 모든 기록은 다 한문이었어요. 한문은 중국문자가 아니라 동양문화의 문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고전도 모두 한문이기 때문에 한글의 우수성만을 강조할 것이 아니라 우리 동양문자인 한문 공부에 요점을 두었으면 좋겠습니다. 현재 전통문화연구원에서 노력하고 있지만, 국민 전체의 한문에 대한 이해 부족이 서예문화에 대한 이해부족으로 이어지고 디지털 문화의 속도에 밀려 한국 서예의 위기가 초래된다고 여겨집니다. 하지만 한글 창제 이전의 고전에 대한 접근의 중요성과 동양문화의 세계화에 서예의 높은 문화가치를 높혀나간다면 우리 서예인들의 위상이 회복되리라 여겨집니다.야은 선생 시 50x135 Q. 한글서예의 발전과 우려에 대해 말씀 부탁드립니다. 앞으로 한글서예의 비약적인 발전을 예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연구를 잘하여 앞으로 서예하면 한글서예가 기본으로 여겨질 만큼 발전 했으면 합니다. ‘한글서예’하면 판본체나 서간체등의 많은 작품들을 하지만 근본적으로 훈민정음 해례본을 전부 잘 읽어봐야 할 것입니다.예를 들어 치읓(ㅊ), 히읗(ㅎ)을 쓸 때, 첫 획을 가로획이 아닌 위에서 내려 긋는 세로획으로 써야합니다. 궁체를 쓸 때는 점으로 쓰지만 판본이나 고체를 쓸 때는 점이 아닌 획으로 구분하여 써야합니다. 또 디귿(ㄷ), 티읕(ㅌ)도 마찬가지로 세 획이 다 붙어야 하는데 한 획을 떼고 디귿(ㄷ)으로 쓴다든지 하는 것은 근본원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쓰는 겁니다. 문자는 약속이니까 약속의 범주 내에서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쌍시옷(ㅆ)을 볼 때 좌우로 배치해야 하는데 위아래로 쓰면서 기발하고 좋은 듯 여기며 쓰는 것은 오류라고 봅니다.한글은 회화문자가 아닙니다. 표음문자이지 표의문자가 아니기 때문에 마음대로 확대해석하여 쓰는 것은 올바른 행동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한자 같은 경우에는 사물의 형상을 단순화시키거나 추상화시켜서 표현하지만 한글은 천지인 인 점, 가로획, 세로획 으로 모음을 삼고 입술과 입안의 모양을 가지고 만든것이기 때문에 상형화 한다는 것은 그 사람만의 재미일 뿐입니다. Q. 예술과 감성은 어떠한 상관관계가 있습니까? 학남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길, 경쾌한 글씨를 표현하고 싶다면 비발디의 사계를 틀어놓고, 장중한 글씨를 표현하고 싶다면 베토벤의 운명과 같은 음악을 틀어놓으신다고 하셨습니다. 클래식을 매우 좋아하셨지요, 모든 것이 그렇겠지만 가슴과 손이 하나가 되었을 때 좋은 작품이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저는 항상 음악을 듣습니다.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녀서 음악과 가까이 해왔는데, 듣는 것과 하는 것 둘 다 좋아합니다. 왕희지가 취흥이 도도한 가운데 썼다는 난정서가 있지요, 그 이후로 서예가들이 술을 좋아하고 마시고 하는데 어느 정도 취하게 되면 잘 쓰고 싶다는 욕심을 버리고 흥취에 이끌려 무작위서의 경지에 들어가지 않나 생각합니다. 서예도 분명히 감성이 필요하기 때문에 저는 그것을 음악을 통해서 합니다. Q. 첫 개인전을 준비하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소감을 전해주세요. 그 동안 초대전이나 그룹전 등 1년에 십여 차례를 전시해왔는데 항상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보여줄 것이 없는데 어떻게 개인전을 할까’라는 생각에 있다가, 이제야 처음 개인전시를 하게 되었어요. 겸손한 마음으로 그 동안 공부했던 것들을 정리하는 마음으로 임하고, 또 후학들에게 혹시 도움이 될까하여 준비하고 있습니다. 대작으로 30~40점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Q. 평소에 작품 활동 시 시제를 어디에서 찾으십니까? 주로 책을 많이 읽으면서 가슴에 와 닿는 문장이나 시를 선택합니다. 특히 고문진보에 나오는 시나 문들이 가슴에 와 닿는 글들이 많아요. 시는 재주있는 사람이 잘 지을 수 있다고 합니다. 요즘 한문 시를 많이 지어서 쓰기도 하지만 한문을 제대로 공부하는 사람은 드문 것 같아요 좋은 문장을 쓰는 사람은 인격이나 그 외 모든 것이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도연명, 소동파의 글들을 위주로 보고 있습니다.우암 선생 시 46x136Q. 한국서예의 미래에 대해서 후학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말씀 부탁드립니다. 한국서예가 발전하려면 한문공부에 천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근본을 해결하고 다지지 않고서는 발전할 수 없죠, 또 새로운 젊은 작가들도 가슴속에 온축이 된 것을 꺼내야만 좋은 작품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문자학에 대한 공부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예를 들면, ‘시라카와 시즈카’라는 일본에 유명한 문자학자가 있는데 그분은 일본의 국보라 불리우는 사람입니다. 그분이 쓴 책이 우리나라에도 많이 번역되어있습니다. 자서(字書) 삼부작인 자통(字統), 자훈(字訓), 자통(字通)은 아주 명저입니다. 자원을 밝히는데 중국에 어느 문자학자보다도 깊이 있습니다. 한자의 세계, 갑골문의 세계, 금문의 세계 그런 것들을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재미있습니다.옛사람들의 지혜가 어떤 사물을 추상화내지 간소화시켜서 문자가 된 근거를 잘 밝히고 있죠, 그걸 깊이 있게 공부하면 나아갈 방향을 잘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분의 책을 열심히 공부하시길 부탁합니다. 무엇이든 공부하는 법을 제대로 알고 접근해야 한다는 초민 박용설의 교육철학은 그의 70년 서예인생에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한문을 배울 때 제일 먼저 부수를 이해하고 다음 단계로 가는 것, 서예를 배울 때 전서의 필의를 먼저 알고 다음 단계로 가는 것 등의 기초 교육은 초학자가 배움에 어려움을 느끼고 중도 포기를 하지 않게 할 수 있으며, 후에 글씨의 이해도를 수준 높게 할 수 있는 결과를 낳는다. 인터뷰를 정돈하며 하나 둘, 이야기들을 가슴속으로 되새기던 중 초민 박용설의 인생철학이 하나로 모아지는 느낌을 받았다.‘무엇이든 제일 먼저 그 근본에 접근하고 시작해야 하며, 가슴을 통하여 밖으로 배출되어야 한다.’이러한 그의 철학과 반듯한 서예인생은 서예인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또한 그는 어떤 인연이든 가슴과 가슴으로 나누고, 이야기해야 오래도록 유지하며 돈독해 질 수 있다고 당부했다. 그의 정신을 들여다볼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이었다. 필히 서예를 하는 젊은 청년, 중년층이 함께 고민하고 실천에 옮겨 마음속 깊이 느낄 수 있길 바란다. 인터뷰 김지수 기자 <艸民 朴 龍 卨>약력- 국립현대미술관 초대전 출품(87‘, 91’)- 동아미술제 심사위원·운영위원 역임(동아일보사)- 서울대학교 / 이화여자대학교 / 성신여자대학교 서예강사- 대구예술대학교 서예과 겸임교수 역임- 추사김정희 선생 기념사업회 고문- 예술의전당 자문위원- 고윤서예 주재艸民 朴龍卨, 柔韻·正氣· 雅美의 書藝美學 追究 鄭泰洙(韓國書藝史硏究所長) 초민 박용설 작가는 누구인가? 우리나라 현대서예계에서 우아하고 세련미 넘치는 작품으로 많은 호응을 얻고 있는 초민(艸民) 박용설(朴龍卨)(이하 작가로 호칭) 선생. 현재 서예계에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중진작가로 평가받는 그는 군더더기 없는 작품세계를 보여준다. 일찍이 당나라 손과정은 『서보(書譜』에서 서예공부의 사이클을 평정(平正)에서 험절(險絶)로 다시 평정(平正)으로 돌아간다고 말한 바 있다. 현재 작가의 작품을 손과정의 논리에 견주어 보면 마지막 평정의 초입에 들어섰다고 살펴진다. 그는 어떤 과정을 거쳐서 오늘에 이르렀을까. 우리는 그의 학서과정에 대해 궁금증을 갖게 된다. 작가는 경동고등학교 재학시절 인사동의 고문화 거리에 살게되면서 서예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 관심은 군에서 재대한 뒤 서울사대 재학시절에 학남 정환섭 선생의 문하에 입문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때부터 본격적으로 서예에 몰입했는데 대학미전에서 특선을 할 정도로 필재를 보이기 시작했고, 대학 3학년 때는 인사동 학남선생의 서실에 주야로 출입하면서 미협에서 개최한 대한민국서예공모전에 출품하여 학생신분으로 대상을 수상했다. 그 뒤 이화여고에서 15년 동안 교사로 근무하면서도 지필묵은 작가의 손에서 떠나지 않았다. 미술대전에서 8번의 입선과 2번의 특선을 거친 뒤 1986년 초대작가로 선정되면서 서예계에 자신의 필명을 널리 알렸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통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공모전이나 단체전에 본인이 자신있는 하나의 서체로 출품하는데 반해 작가의 경우 공모전에 출품할 때부터 한문 오체를 골고루 출품하였으니 그것은 폭넓게 공부하기 위한 소신에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의지는 제자들에게 그대로 전수되어 제자들의 모임인 고윤서회(古胤書會)가 작품전을 개최할 때는 매년 각 서체별로 돌아가면서 진지하게 연구한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예컨대 작가 스스로 전서를 공부하려면 214부수가 아닌 540부수를 완전히 암기하고 있어야 변통의 길이 열린다는 뚜렷한 학습관을 견지하고 있다. 이렇게 일차적으로 폭넓게 공부한 뒤 이차적으로 깊이 있게 파고드는 공부분위기 때문에 고윤서회 회원들의 작품 또한 어느 서숙에서 보지 못한 다양함이 엿보인다. 이규용의 해동시선에 ‘박이정(博而精) 정이박(精而博)’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 말은 어떤 사람이 격식이나 무엇을 선정하는 기준이 넓고도 정밀하며, 정밀하면서도 넓은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바꾸어 말하면 여러 방면으로 널리 알뿐만 아니라 깊게도 앎을 의미하니 나무도 보고 숲도 본다는 뜻이다. 작가는 서예공부를 함에 있어 자신이 공부해 왔던 그대로 제자들에게 전수하면서 바로 ‘박이정(博而精) 정이박(精而博)’의 공부방법을 제시했던 것이다. 최근 작가의 작업을 보면, 여러 방면으로 널리 알 뿐만 아니라 깊게도 알아야 되는 박이정(博而精)의 학서방법에 따라 농익은 작품세계가 펼쳐지고 있어 서예계 내외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그렇다면 작가의 작품에서 어떤 요소와 어떤 풍격이 있어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호응을 받고 있을까. 그런 의문을 가지고 이번에 발표되는 작가의 작품과 과거 서론에서 말한 풍격을 견주어서 살펴보는 것도 좋은 감상방법이 될 듯하다. 부드럽고[柔), 바르며[正] 우아한[雅] 멋을 추구하는 작가 오랜 서예역사에서 서예가의 서예풍격을 형성한 가장 근원적인 요인은 개인의 기질· 사상· 감정· 교양 등의 결합으로 형성되었다. 곧 서예가는 개인의 인격적 특성과 같은 독특한 자신만의 서예풍격을 지니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예는 조형적인 면에서 음양·허실·흑백 등 상대적인 대대요소(對待要素)의 조화미를 통해 작가의 조형적 풍격을 표현하는 의상(意象)예술이다. 다만, 수많은 대대요소 가운데 이 글에서는 서예의 풍격을 강(剛)과 유(柔), 정(正)과 기(奇), 아(雅)와 속(俗) 등의 제한된 몇 가지 요소를 통해 작가의 작품을 살펴보려고 한다. 비록 제한적이긴 하나 이러한 세 가지 갈래의 서예풍격을 작가의 작품에 대입하여 조망해 보면 작가의 작품풍격을 대략적으로 가늠할 수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부모 자르듯 분명한 선을 긋는 것은 두 가지 요소가 하나로 융화된 작품의 경우에는 한계가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첫째, 강(剛)과 유(柔)는 흔히 양강과 음유의 미로 거론된다. 주지하듯이 양강의 미는 골(骨), 힘, 형세 등이 강조되는 요소로 장사가 칼을 차고 있는듯한 기세가 엿보이고, 모나고[方], 곧고[直], 급하고[急], 마른[枯] 등의 미적 분위기를 추구한다. 반면에 음유의 미는 운치, 맛, 정취 등을 강조하면서 평담하거나 소산하면서도 고요한 경지를 추구하는 것이 연상되므로 둥글고[圓], 감추고[藏], 굽고[曲], 윤택함이 있는 것[潤] 등을 드러내는 편이다. 예컨대 작가의 간독(簡牘) 작품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를 보면, 방필과 거침없는 강한 필세를 느끼게 된다. 전형적인 양강의 작품으로 백척(百尺)이나 되는 장대 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라, 그러면 비로소 새로운 세계가 그 모습을 보인다는 의미로 죽음을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오직 죽음뿐이라는 가르침을 전하는 작품이다. 모든 번뇌를 놓아버리고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의미를 붓 끝에 담아 휘호함으로써 50년의 견고한 필력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이와 반대로 연암 박지원 선생의 <법고이지변(法古而知變) 창신이능전(創新而能典)>을 전서 대련으로 쓴 작품을 보면, 청말 전서명가들의 필의를 이어받아 능숙하고 유려하게 휘호하니 음유미가 강하게 발산된다. 작가는 둥글고 윤택함이 있는 부드러운 선을 통해 평담하면서 고요한 음유의 맛을 잘 드러내 보인다. 둘째, 정(正)과 기(奇)는 정통적인 규범과 비규범의 구분으로 보면 될 듯하다. 즉 정(正)은 상식적이며 규범을 잘 지키고, 기(奇)는 상식에 반하며 규범으로부터 멀어진다. 서풍에 있어 정(正)이란 필법과 결구에서 평정, 균칭을 중시한다. 이런 글자를 보는 사람의 인상은 친밀감이 있다. 이에 반해, 서풍상 기(奇)는 그 용필과 결구가 신기(新奇)를 추구하고, 인상은 모두 다르다. 서예는 자연으로부터 기(奇)를 얻는다. 글자의 본질을 연구해 기(奇)를 얻고 옛사람들의 굳은 틀을 부수어 독자적인 기(奇)를 개척한다. 예를 들면, 작가의 예서 대련작품 <춘풍득의(春風得意)>는 간독필법이나 비교적 정(正)의 형상을 유지하고 있다. 자간과 행간도 분포를 고르게 하고 시각적인 균형감을 잃지 않고 있어 결구에서 안정감을 느끼게 한다. 이에 반해 계사년에 휘호한 <장사전 시(蔣士銓 詩)>는 금문으로 기(奇)의 맛을 풍기고 있다. 비대칭에 변화를 가함으로써 평정과 균칭에서 멀어져 보이나 기울어진 불균형 가운데 균형의 조화를 보이며 운치를 자아낸다. 셋째, 아(雅)와 속(俗)은 쉽게 말해 우아함과 속됨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서예는 우아함[雅]의 예술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문자를 소재로 하는 서예작품은 문학, 그림, 음악 등 아(雅)의 활동과 결합한다. 다른 하나는, 대개 서예를 하는 사람은 독서인이고 따라서 학자적, 학문적 분위기를 띄고 있기 때문에 이것도 아(雅)의 맛을 가지고 있다. 서예역사에서 아(雅)를 추구하는 의식은 진대(晋代)에서 일어났다. 진대 사람들은 고아자연(古雅自然)과 표일탈속(飄逸脫俗)을 중시했다. 그로부터 700년이 지난 송대(宋代) 사람들도 아(雅)를 추구했다. 황정견과 미불이 그들이다. 미불은 선인의 서예를 평가할 때 아(雅)를 중요한 표준으로 삼았다. 예를 들면 서예의 새로운 형식을 추구한 안진경이나 유공권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 이 두 사람에 대해서는 속품(俗品)이라고 단정하고, 추하고 괴이한 악필(惡筆)의 시조라고 폄하하였다. 그러나 속됨[俗]은 아(雅)의 변화이고 상호 대립과 공존의 보조인자가 된다. 현대 미국에서 팝아트가 유행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다시 돌아와 작가의 작품을 보자. 작가의 임진년 초서작품 <다산선생시(茶山先生詩)>를 보면 천의무봉의 거침없는 필세와 절주감이 녹아있고 세련된 아취(雅趣)가 물씬 풍긴다. 이 정도의 서사력을 보여주려면 하루아침에 가능하지 않다. 이 작품을 통해 작가의 50년 필력을 가늠할 수 있고, 수많은 법첩을 익혔다는 것을 읽을 수 있으며, 왕희지의 글씨를 얼마나 열심히 임서했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예서작품 <오월춘추(吳越春秋) 구(句)>는 간독작품으로 동세가 심하고 글자의 크기와 글자 사이의 공간이나 기울기가 차이가 나기 때문에 속(俗)의 형상이 두드러져 보인다. 동병상련은 ‘같은 병을 앓는 사람끼리 서로 가엽게 여긴다.’라는 뜻으로 선문(選文)을 통해 이웃을 생각하는 작가의 마음을 읽어낼 수 있다. 서성(書聖) 왕희지의 초서는 아(雅)의 극점에 도달했다. 그러나 이 극아(極雅)의 풍격은 바로 그의 단점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그의 아들인 왕헌지가 지적했다. 왕헌지의 글씨는 속(俗)의 대표격으로 그는 왕희지에게 “아버지의 서체는 기세가 부족하고 자유스럽지 못합니다.”라고 말했다. 즉, 왕헌지는 속(俗)으로 아(雅)를 엷게 하여 새로운 아(雅)를 한층 강조하고 새로운 서체를 만들어 내려고 하였다. 아(雅)를 지향하면서 되새겨 볼 대목이기도 하다. 과거 왕희지는 아(雅)의 궁극이자 서예인의 목표점이었으나 최근 국내 서예계 일각에서 첩파를 중시하는 일군의 작가들은 아(雅)를 경시하는 경향이 없지 않아 보인다. 물론 역사상 아와 속은 상보적으로 작용하여 새로운 변화서풍을 창출해 왔지만 여전히 서성(書聖)이 추구하던 아(雅)의 절대성은 상존하고 있다. 법고창신(法古創新)을 지향하며 지금까지 우리는 초민 선생의 서예풍격을 살펴보면서 부드럽고[柔), 바르고[正] 우아한[雅] 특성이 상대적으로 강(剛), 기(奇), 속(俗)의 요소보다는 우세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바로 작가만의 풍격이자 작가가 선호하는 서풍이라고 읽혀진다. 필자는 작가의 평소 삶의 모습이 이와 매우 근접되어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아랫사람에게도 매우 유순하고 심지어 제자들에게도 함부로 대하지 않는 것을 여러 번 목격하였다. 이런 작가의 삶이 그대로 글씨에도 투영되어 부드러움[柔]을 보여준 것이다. 또한 작가는 매사에 언행이 일치하고 약속을 수행함에 있어 한 치의 어긋남이 없었다. 그렇기에 글씨 또한 차분하고 빈틈이 없고 세련미를 지켜나가고 있으니 바름[正]을 선호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무엇보다 작가의 서풍은 수많은 법첩을 섭렵한 뒤 아름답고 친근한 우아함[雅]을 굳게 지켜나가면서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있으니 올곧은 선비의 우아한 자태를 보는 듯하다. 왕우군이 3체에 능하였으나 5체까지 이르지는 못하였다. 이제 작가는 왕우군이 보여주지 못한 나머지 두 가지 서체에 간독과 금문의 필의까지 보여주고 있으니 앞으로 그의 끝없는 변주에 더욱 기대를 걸게 된다. 폴구젤이란 사람은 『예술에 관하여』란 저서에서 “예술 중의 추(醜)를 허위나 고의로 만들거나, 내면을 표현하지 못하고 외관만 빛나게 한 것은 부자연한 웃음과 같아서 엉터리일 뿐이다”라고 말하였다. 억지로 강하게 보이게 하거나 멋으로 기울어지게 하거나 일부러 속되게 보이도록 연출하는 것은 어쩌면 부자연스러운 옷을 걸치는 것과 같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따라서 작가가 추구하고자 하는 부드러운 운치[柔韻], 바른 기운[正氣] 우아한 아름다움[雅美]을 추구하려는 작품세계는 역사에서 일시적이지 않고 영속적으로 평가받을 가능성이 충분해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작가가 항상 염두에 두고 있는 글귀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이다. 옛 것을 본받으면서도 변화할 줄 알고 새 것을 만들어도 법도를 그르치지 않는다. 모름지기 옛것을 본받고자 하는 사람은 낡은 것에 매달리는 것이 흠이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려는 사람은 전통에 의거하지 않는 것이 걱정이다. 진실로 옛것을 본받되 개변시킬 줄 알아야 하며, 새로운 것을 창조하되 전통에 의거할 줄 알아야한다. “이것이 진정한 법고창신(法古創新)이 될 것”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법고창신을 지향하는 작가의 예술행로에 행운이 있길 기원드린다. 2017년 白露에 觀書齋에서
원로에게 길을 묻다 _ 송천 정하건
몇 해 전 팔순 기념 전시를 개최한 서예가 송천 정하건(1935生, 號 : 松泉, 솔샘) 선생은 한국 서단의 원로 서예가이다.청년시절 법학을 전공한 송천 정하건 선생은 어린 시절 가학으로 한문을 배웠다. 이후 애국심으로 나라를 보국하기 위한 길로 서예를 택하게 된다. 서예에 전념 전력을 쏟아 일생을 달려온 그의 서예의 길에는 강한 집념이 보이지만 그것이 모나지 않으며 강한 듯 여유로운 필체를 구사하는 송천 선생의 필체를 닮았다. 李舜臣將軍詩 陣中吟 70x144 선생의 서예 인생이 고스란히 담긴 자택은 서예박물관 그 자체를 방불케 했다. 어딘가 옛 정취가 묻어나는 대문을 넘어서면 넓은 마당엔 크고 작은 수석들이 가지런히 자리 잡고 있었다. 현관에 들어선 후 송천 선생의 서재가 있는 3층으로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오르는 걸음마다에 정하건 선생의 숨결이 녹아있는 듯 포근했다.守道.擇交 18x33 선생께서 귀하게 소장한 작품을 소개할 때면 천진하고 상기된 목소리로 작품 하나하나 상세히 설명해주었다. 추사, 표암, 좀처럼 만나기 힘든 이수 허목의 글씨까지 하나하나 귀중하게 보관하고 감상한다는 그의 말에서 서예를 얼마나 아끼고 승사(承事)하는지 느낄 수 있었다. ‘서예 안에 모든 것이 들어있다.’송천 선생의 말씀처럼 그의 일생에는 서예라는 큰 둘레 안에서 무한히 정하건 선생은 반복하여 학습할 것을 강조했으며, 서예를 잘 모른다고 할지라도 우선 많이 보고, 관심을 갖기를 간절히 말씀하였다.千忍一聲 32x108李斗熙先生句 35x135x2 송천 정하건 선생은 고고하고 웅장한 해서에 육조체를 기본으로 하여 전, 예, 행초를 두루 섭렵하였으며, 서예를 통해 전통을 계승하여 보국의 길을 이어가고자 했던 그의 따뜻한 마음은 현재까지 이어져 후학들에게 큰 모범이 되고 있다. 2017. 12. 21인터뷰 김지수 기자
철농과 소정을 기억하다
연희동에 위치한 <스페이스 창배>갤러리에 카메라와 마이크 스위치가 켜졌다. ‘철농과 소정을 기억하다’라는 주제로 기획된 이 영상은 철농 이기우와 그의 사위인 소정 황창배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모여 그들의 삶과 예술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 한 자리였다. 철농 이기우 선생의 딸이자 소정 황창배의 부인인 이재온(스페이스 창배) 관장과 철농 이기우의 제자이며 서예, 전각의 근원적인 천착을 통해 서예계에서 큰 존경을 받고 있는 김양동(계명대학교 석좌) 교수, 철농 이기우의 제자이며 전 한동대학교 건축학과 교수, 현 목사인 김학철 교수, 철농 이기우의 마지막 제자인 이종목(이화여자대학교 동양화전공) 교수가 한데모여 철농과 소정을 기억한다.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다. 1. 스페이스 창배의 설립목적과 배경2017년 4월 개관기념展, 이후 두 번째 전시이자 첫 번째 기획 전시로 ‘파격의 뿌리’展을 개최했다. 이재온 관장과 철농 이기우, 소정 황창배는 모두 아버지이자 남편으로 가족관계이다. 우선 스페이스 창배라는 문화예술공간의 설립목적과 과정에 대해 이재온 관장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2. 철농 이기우의 삶과 예술, 그리고 교육철농의 삶의 개략에 대해 김학철 교수의 이야기, 예술적 성과와 특징과 서예교육자로서의 의미에 대해 김양동 교수의 이야기, 철농 선생의 마지막 제자인 이종목 교수가 받았던 의미있는 가르침. 3. 소정 황창배의 삶과 예술황창배의 삶의 개략에 대해 부인인 이재온 관장의 이야기, ‘황창배 신드롬’, ‘미술계의 이단아’, ‘한국화단의 혁명가’, ‘한국화의 테러리스트’, ‘현대회화의 전위’ 라는 강렬한 수식어들이 붙는 황창배의 화가로서의 작업과 특징에 대해 이종목 교수의 이야기. 서양화 뿐 아니라 전각에도 두각을 드러냈던 황창배 전각의 특징과 의미에 대해 김양동 교수가 풀어내는 이야기. 마지막으로 현대미술과 디자인, 건축 등에서 전각예술의 활용방향과 가능성에 대해 건축가인 김학철 교수의 답변을 들어볼 수 있다. 2018. 1. 8글씨21 편집실
이 작가의 思생활, 구지회
“과거를 알지 않고는 현대를 살아갈 수 없다.” 지난 12월 중순, 지속적인 한파를 기록하던 추운 날이었다. 서울의 옛 골목을 간직하고 있는 이화동의 재미난 벽화와 함께 가파른 계단을 지나 다다른 곳에는 소석 구지회 선생의 수더분한 미소와 따뜻한 차가 글씨21팀을 반기고 있었다. ‘石(돌 석)’자를 좋아하셨던 치련 허의득 선생께서 지어주신 호, ‘소석(素石)’은 본래의 것을 지키며 우직한 삶을 살아온 구지회의 인생과 닮았다. 그가 몇 년째 작업실로 사용 해 온 ‘소석화실’은 한옥과 양옥의 조화가 독특하게 잘 어우러진 작업실이었고, 소품 하나하나에 온정이 묻어났다. 전통 문인화의 고상한 아름다움보다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고무공 같은 분위기를 지닌 그 매력은 쉽게 따라갈 수 없다. 독보적인 독특함을 가진 구지회 선생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Q. 의재 허백련 선생님의 맥을 이어 조카인 치련 허의득 선생님께 사사를 하였는데, 처음 문인화를 접하게 된 계기는? 우선 기본적인 단계로 보자면 사군자와 십군자 그리고 산수, 화조도 등을 배우게 됩니다. 저 또한 그러한 과정에서 그림을 배우던 중, 동아일보에서 공모전을 개최하였는데 그때 문인화 부문이 새로 생겨나면서 접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1980년도 전남도전에서 대나무로 우수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문인화’라는 장르에 본격적으로 돌입하게 되었죠, 아마 그때 승부를 걸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Q. 치련 허의득(1934-1997) 선생께 받은 가르침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형상보다는 뜻을 더 중요시했던 의재 허백련(1891- 1976)은 한국 남종화풍의 대가 소치 허련(1807-1892)에 그 뿌리가 있습니다. 그런 허백련 선생님의 조카인 치련 허의득 선생님께서는 허백련 선생님의 필법을 그대로 전수해 주셨어요. 가르침이 좀 특이했던 것 같습니다. 제자들이 가르침을 받다가 종종 원하는 다른 방향을 연구해올 때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늘 꾸짖지 않으시고 응원해주시며 좀 더 나은 방향을 제시해주시고 다양한 연구방법을 알려주시며 발전하기를 바라셨어요. 다만 남의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엇나가는 방향에 대해서는 혀를 몇 번 차시면서 안타까움을 표현해주셨죠. 그게 큰 표현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자신만의 생각과 개성으로 표현하면 무엇이든 인정해주셨습니다. 이러한 교육 방법이 특이하게 다가왔었던 것 같습니다. 117x51 한지에 수묵담채 Q. 이화동 ‘소석화실’이 책에도 소개되어 유명세를 타고 있는데, 어떤 계기로 알려지게 되었는지? 우연히 ‘행복이 가득한 집’이라는 곳에서 취재를 나오게 되었지요. 이야기를 나누며, 사진도 찍고 인터뷰를 했어요. 이후 몇 사람을 선정하여 작업실을 주제로 한 책을 만들게 되었는데 ‘소석화실’이 거기에 선정이 되었어요. 양옥과 한옥의 독특한 구조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구조는 전통과 현대를 잇는 방식으로 다양한 느낌을 주었죠. 이러한 독특한 작업실을 꾸미게 된 것은 지인 중에 한옥을 짓는 분이 계셔서 그분과 많이 이야기를 통해 작업실의 세세한 부분까지 저 자신 나름의 방향으로 만들어 갈 수 있었습니다. Q. 동양화는 수묵 위주의 문인화적 화풍인 남종화풍과 채색 위주의 북종화풍으로 나뉩니다. 현재까지의 선생님의 작품을 보면 현대적인 새로운 화법이 나타나는 것 같은데, 자신의 화풍에 대해 정의를 내린다면? 저의 뿌리를 보게 되면 치련 허의득, 의재 허백련, 소치 허련, 추사 김정희. 그리고 초정 박제가, 연암 박지원 까지 거슬러 오르며 실학파에 근거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문인화가 실학(實學)의 맥을 가지고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에는 다양한 화풍의 모습을 볼 수 있는 방법들이 무궁무진합니다. 또 직접 경험할 수 있죠. 영국, 미국, 프랑스나 독일 등의 문물과 작품들을 모두 관람하고 느낄 수 있기 때문에, 보고 느낀 것들을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맥이라는 것과 현대, 두 가지를 모두 잡으려고 하니 어렵긴 하죠.. 어떤 좋은 생각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분들을 움직일 수는 없지만, 제가 지금 현재에 살아있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표현 할 수 있죠. 수묵이나 채색을 떠나 전통의 맥을 이어 현대에 있는 ‘지금의 나’를 표현 할 수 있는 화풍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Q. 제주 문인화 동아리 ‘그림 벗’을 이끌게 된 계기는? ‘그림벗’은 1992년 치련 허의득 선생의 지도아래 모임을 갖다가 1997년 창립전시회를 열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 했습니다. 그러나 그 해 3월 갑작스럽게 치련 허의득 선생께서 타계하시고 그 이후 저와 다른 회원들이 함께 배움을 지속하게 된 것입니다. 저는 27살 때부터 광주에서 화실을 운영하며 많은 사람들과 교감을 하게 되었죠, 그때의 경험으로 연륜이 쌓였고 ‘그림벗’을 맡아 다른 회원들과 함께 모임을 이어왔어요. ‘그림벗’은 올해 20주년이 되는 해로 이를 기념하기 위해 27명이 제주에 모여 뜻 깊은 전시회를 열었어요. ‘그림벗’은 제가 가르친다고 하기보다는 함께 공부하고 성장해가는 모임이라고 볼 수 있지요. Q. 작업실 곳곳, 작품 등에 개구리가 많이 등장하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제가 살던 곳이 시골이다 보니 곤충, 동물, 꽃, 풀 등을 자연스레 많이 보고 관찰하게 되었어요. 어느 날은 비 온 뒤 풀잎 끝에 빨간 잠자리가 있는 것을 보고 너무 재미났죠. 또, 무료했던 어느 날은 우연히 개구리를 관찰하고 스케치하기 시작했어요. 그때 제가 발견한 것이 있는데, 개구리가 사람하고 너무 똑같은 거예요. 눈 두 개에, 코와 입이 있고 귀같이 볼록 튀어나온 것이 있고, 앞다리와 뒷다리가 있는 것이 세워놓으면 사람하고 똑같더라고요. 그래서 개구리를 의인화를 시켜보자 생각했죠. 제가 술을 먹고 있는 모습을 그리는 것보다는 개구리가 술을 마시고 있는 모습이 훨씬 재미있겠구나 생각했죠. 그래서 저 자신을 개구리의 모습에 투영시켜 작업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 작업실 이름도 ‘금와산방(金蛙山房)’이라 지었어요. 제 그림이 나타나는 개구리 또는 다른 곤충, 동물들은 아마 자연적인 것과는 좀 다르게 보일 겁니다. 특히 눈을 다채롭게 표현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이죠. 117x51 한지에 수묵담채 Q. 많은 전시회를 개최하셨는데,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전시나 작품은? 질문을 받고 회상해보니 가장 기억에 남는 전시는 2009년 6월, <바람에 길을 묻다 展>입니다. 제8회 개인전이었는데, 그때 제가 하고 싶었던 화목(花木), 새, 개구리, 여치 등 평소 하고 싶었던 대상들을 총망라하여 작업했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에 재미난 전시를 기획해보자는 생각을 했었고, 실제로 작품에 임하면서 즐거웠던 기억이 납니다. 제8회 개인전 <바람에 길을 묻다 展>제8회 개인전 <바람에 길을 묻다 展> Q. 앞으로의 작품 활동에 많은 기대가 됩니다. 지금 계획하고 계신 작업 방향이 있다면? 요즘 시대의 젊은 작가들은 산수화를 많이 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산수’라는 전통에 들어가 모든 것을 풀고 헤집어 공부하고, 또 그것을 다시 현대로 가지고 나오는 것을 계획했고 현재 산수화의 작업에 빠져있습니다. 많이 관찰하고 영감을 받아서 현대의 작업으로 재해석하는 작업을 연구 중입니다. Q. 이 시대의 어떤 작가로 기억되고 싶은가? 욕심 같아서는 가장 평범한 그림을 그렸던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어른부터 어린아이까지 전 연령이 다 이해할 수 있는 그런 천진한 그림을 그렸던 사람. 그리고 항상 같이 있는 듯한 느낌의 작가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143x76 한지에 수묵담채 Q. 문인화의 매력에 빠져있는 후학들에게 해주고 싶은 당부의 말은? 첫째로 열심히 할 것을 당부하고 싶어요. 그리고 두 번째로는 우리는 우리 것(전통)을 잘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과거를 알지 않고 어떻게 현대를 살아갈 수 있으며 미래를 짚을 수 있겠어요. 우리 것을 정확히 아는 사람은 어디를 가도 제 길을 잘 찾아갑니다. 또 아는 것을 잊어야 합니다. 버려야 하죠. 알기는 하되, 알았으면 버려야 합니다. 좀 이상하죠? 옛것을 알기도 해야 하지만 또 버리기도 해야 합니다. 아니까 버릴 수 있는 겁니다. 모르면 절대 버릴 수 없습니다. 또 ‘왜 버리라고 하는가?’라고 묻는다면, 버려야 새것이 나올 수 있습니다. 이러한 얘길 꼭 전해주고 싶습니다. 165x56x2 금지에 수묵 ‘순수’라는 단어의 사전적 뜻은 ‘전혀 다른 것의 섞임이 없음’이다.글씨21의 <이 작가의 思생활> 인터뷰에서 만나고 온 소석 구지회 선생의 이미지가 그랬다. 어떤 질문에도 그에 따른 답변에는 자신의 소신 외에 다른 것의 섞임 없이 순수했다. 그 소신은 문인화를 애정 하는 마음에서 시작되었고, 그리고 그 마음은 처음 문인화를 시작하던 그때와 다르지 않았으며 순수를 넘어 순질(淳質)함이 느껴졌다. 인터뷰를 마치며 구지회 선생이 말했던 “과거를 알지 않고는 현대를 살아갈 수 없다.”라는 말을 다시금 회상하게 되었다. 과거의 잘못된 일을 바로잡고 본받을 만한 일을 마음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전통으로 들어가 깊이 천착하고 난 후에는 그것을 과감히 내려놓고 다시 새로운 것을 창작해 낼 것을 기약한 구지회 선생의 앞으로의 행보가 기대된다. 또 그의 활약과 함께 문인화 작가의 길을 걷고 있는 후학들이 많은 생각과 함께 창작의 향연을 펼치길 고대한다. 2018. 1. 19인터뷰 김지수 기자 < 약 력 >치련 허의득, 소암 현중화 선생 사사1988 동국대학교 교육대학원 미술교육과 수료1976 전남도전 입선1980 전남도전 서예부분 우수상 및 초대작가 심사위원 역임1988 광주직할시 미술대전 대상 및 초대작가 심시위원 역임1995 대한민국 서예대전 우수상 및 초대작가 심사위원 역임1982,87 대한민국 미술대전 입선1984 ~ 개인전 7회1993 한중미술교류전(북경미술관) 우리시대의 난전(운현궁미술관)1987 동락전(세종문화회관)2000 새천년 남도미술 대전 조명전(남도예술회관)2001 개인전 7회(갤러리 상)2004 일본동경한국문화원 초대전2009 그림벗회원전 (백악미술관) 한국문인화 대표작가전(수원한국서예박물관) 개인전 8회 소석구지회전 바람에 길을 묻다(인사아트센터)2011 광주 KBS초청 3인의 변주전 10회 구지회 한옥과의 동행전(일여헌 갤러리)2013 11회 개인전 “쉰여덟 지금” (인사아트센터)2016 12회 소석 구지회 유희전(인사아트센타)현소석 문인화연구실 운영, 대한민국 미술대전 초대작가, 그림벗회 주관, 한국문인화 연구회 회원 광주, 종로미협회원 벽壁과 사이間 - 현대미술로서 구지회의 필묵筆墨언어 이동국(예술의전당 서예부 수석큐레이터)1솔직히 말해 우리시대 문인화文人畵는 그 중요성과 가치만큼은 문인화의 황금기였던 조선보다 더 크다. 이유는 오늘날 문자영상시대 만큼 전통시대 융복합 문예의 결정체인 시서화詩書畵 가 다시 하나 되어야만 하는 때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저기서 발표되는 작품은 별 감흥이 없고, 그래서 시큰둥해지는 것이 필자의 솔직한 심정이다. 오늘날은 전통사회 문인文人이 사라진지도 오래되었다. 분화될 대로 분화된 우리시대, 정치도 하고 학문도 하고 동시에 문예도 담당했던 조선의 전방위 인물을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이다. 필묵筆墨의 현대적 재해석 문제야 어쩔 수 없다손 치더라도 작품의 형식이나 구도, 소재 자체가 구태의연한 그대로다. 이 시대 문인화는 전통의 현대적 재해석이라기보다 수구守舊나 매너리즘의 끝자락으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한 말이겠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시대 문인화 작품을 보고 시대정신이나 사회성을 이야기 한다는 것은 난감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문인文人이 사회를 주도했던 조선은 시서화 일체의 문인화가 조형으로 소통하는 언어의 주류였다면 문인이 사라진 현대사회에서는 문인화자체가 시민 대중들에게 소통이 아니라 벽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지금 와서 보면 사군자・문인화・동양화・한국화・수묵화 운운 자체가 시세 물정에 따라 그 때 그 때마다 벽에다 또 벽을 세운 것 일 뿐이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 더 따지면 이 시대 대중들에게는 필묵 자체가 벽이다. 우리시대 사람들에게 먹 덩어리는 물질物質일 뿐이다. 검다black이상의 어떤 의미도 감흥도 없다. 그것이 아니라면 실존은 쏙 빠지고 현지우현玄之又玄으로 우주자연의 오묘奧妙하고 오묘한 도道의 광대무변함을 이야기하는 시작과 끝일뿐이다. 좌우지간 전자든 후자든 먹 덩어리로 만들어진 작품은 재미없고 어렵다. 2표구사를 들어서자마자 제일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먹 무더기다. 용트림하듯 인상적이다. 하늘에 무겁게 드리워져 있지만 먹구름도 아니다. 집이나 산과 같이 어떤 사물의 실체도 아니다. 그렇다고 원형질이라 하기도 그렇다. 무엇인가하고 했더니 작가로부터 뜻밖의 대답이 돌아온다. “벽이다”고 한다. 필자가 놀란 것은 작품도 작품이지만 작가의 발언이다. 필자는 ‘먹 덩어리’라 봤는데, 작가는 이것을 ‘벽壁’이라고 말 하고 있다. ‘아니 문인화가 세상을 고민하다니’ 여기서 문인화가에 대한 필자의 통념이 송두리째 깨지고 있었다. 구지회의 신작 <벽壁시리즈>가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공간을 가로지르는 벽, 세로지르는 벽, 이리 저리 얽힌 벽, 지그제그 벽, 대못처럼 공간을 내리 박는 벽 . . . . 벽이라? 공간을 둘로 나누는 것이 벽이다. 벽으로 해서 안과 밖이 만들어진다. 여백도 벽이라는 먹 덩어리로 해서 비로소 그 존재를 실감한다. 그러고 보니 화선지가 우주일진데 구지회의 먹 덩어리 한 점은 다름 아닌 바로 빅뱅이다. 우주의 탄생이다. 석도1642-1707, 石濤가 『고과화상화어록苦瓜和尙畵語錄』에서 말 한대로 태고의 순박淳朴을 깨는 일획이다. 태고太古적에는 법法이 없었다. 순박淳朴이 깨지지 않았다. 순박이 깨지자 법이 생겼다. 법은 어디에서 나왔는가? 한 획劃에서 나왔다. 한 획이란 존재存在의 샘이요, 만상萬象의 뿌리다太古無法, 太朴不散, 太朴一散, 而法立矣, 法於何立, 立於一劃, 一劃者, 衆有之本, 萬象之根. 구지회의 먹 덩어리는 순박淳朴을 깨는 일획이다. 한 획이란 존재存在의 샘이요, 만상萬象의 뿌리다. 더구나 그 시공간은 간단하기 그지없다. 음양의 대비가 극단적이다. 텅 빈 공간에 먹 더미가 둥실 떠 있다고나 할까 극도의 갈필인가 싶으면 흔근한 먹물 속에 빠져있다. 지금 불끈 쥐어짜도 먹물이 뚝뚝 떨어질 지경이다. 이렇듯 구지회의 ‘벽’과 석도의 ‘일획’사이는 전통 문인화에서 기대할 수 없었던 전복된 해독코드를 들이대야 풀린다. 그래서 구지회의 필묵조형언어는 전통이자 현대의 접점을 내달리고 있다. 지금까지 문인화하면 시서화일체가 대전제다. 그래서 창작주체가 문인이어야만 하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구지회는 문인이 아니다. 작품에도 우리가 기대했던 우아한 자작시, 아니 남의 글이라도 좋은 시 한 수 없다. 지금에 와서 보면 문인화・수묵화・사군자・동양화・한국화와 같은 그림은 이름이 다를 뿐 사실상 맥락을 같이 하는 하나의 그림이다. 작가를 문제 삼는 문인화는 말 그대로 문인이 그린 그림을 말해왔다. 수묵을 재료로 하는 수묵화는 그야말로 먹그림이다. 사군자四君子는 여러 화목 중 매梅 난蘭 국菊 죽竹이라는 소재를 군자에 비유하여 친 것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서양화와 대비되는 동양화가 있고, 또 그 중에서도 중국화 일본화와 다른 한국화가 명명되어져 왔다. 동양화 한국화와 같은 이 모든 그림은 방점을 어디에 찍는 가가 다를 뿐 같은 유전인자를 가지고 있다. 오늘의 입장에서 보면 현대미술이다. 이런 맥락에서 구지회의 작업은 문인화・사군자・수묵화・동양화・한국화이자 현대미술이다. 그래서 구지회의 그림은 그냥 문인화가가 아니라 우리시대 그림이고 현대미술이다. 다만 유화로 그린 서양화나 설치미술이 아닐 뿐이다. 그런데 지극히 익숙한, 그래서 너무나 고리타분하다고 하는 필묵筆墨을 고수하는 작가이지만 그의 작품은 그 반대편에서 읽힌다는 것이 문제다. 바로 구지회의 반전처인데 끝 간 데 없이, 여지없이 낯설게 필묵을 깨버리는 지점이다. 그래서 구지회 그림의 해독은 조형이전의 필묵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필묵그자체가 그림이 말하고자하는, 작가가 발언하고자 하는 근본을 스스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지회의 필묵은 물질을 넘어 우주에 넘치는 기氣의 파동이다. 필묵의 윤갈潤渴과 농담濃淡의 극단적인 대비는 그 흐름을 더욱 극적인 스트록stroke으로 보여준다. 3흔히 경험하는 바 이지만 추상화에서 ‘무제無題’ 또는 ‘Untitled’라 붙여놓은 경우가 많다. 이유를 물어보면 ‘작가는 작품으로 말을 해야지 무슨 설명이 필요 한가’하고 반문이 돌아온다. 일견 옳은 말이지만 관객입장에서 보면 이것보다 더 무책임한 발언도 없다. 속성상 조형언어는 말 언어와 달리 보는 사람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해진다. 그 중에서 작가가 자신의 조형언어를 작품주제 명제 키워드와 같은 말언어로 풀어주는 것은 다양한 관객 해석의 시발점이다. 작가와 관객이 작품을 매개로 소통疏通하는 실마리다. 다시 말하면 작품주제가 구체적으로 제시되지 않는다면 작가=작품=관객내면의 저변에 흐르는, 가속도가 붙어, 살아 속삭이는 내밀한 조형언어는 기대할 수가 없다. 문인화도 이와 다르지 않다. 누가 그리던지 지금까지 그래왔듯 그냥 문인화라고 하는 통념을 벗어나지 못한다. 앞서 본대로 따지고 보면 문인화안에서 어떤 소통의 문제를 논하기 이전에 문인화 자체가 거대한 불통의 존재가 되고 만 것이 오늘이다. 이것은 관객이 아니라 작가가 바뀌기 전에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이다. 그래서 구지회의 벽은 작품속의 벽 이전에 현대미술에서 문인화 자체가 감단해야 하는 벽이기도 하다. 반복되지만 이 시대는 문인화자체가 벽이 된 시대다. 말 그대로 독단이다. 자기만족에 도취된 나머지 사회와의 소통을 거부한 필묵의 독단이다. 하지만 예술만큼 더 한 사회적인 존재가 없다. 사회가 없는 종교, 사회가 없는 철학 생각할 수 없듯, 이런 종교와 철학의 총합의 꽃이 예술 아닌가. 이런 맥락에서 예술가들이 사회와 벽을 쌓는 순간 예술은 죽음이다. 4구지회 작품에서 전통문인화의 고상한 아름다움이나 문인의 수양 격조 이런 것은 더 이상 기대 할 수 없다. 예컨대 일련의 <표주박시리즈>를 보자. 줄기와 잎의 난맥상 그 자체다. 파필破筆이다 못해 쩍쩍 갈라진 필획이나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것 같은 멀겋게 갈아붙인 생 먹의 은근함은 혼돈이다. 텅 비었는가하면 완전추상의 농묵이 무겁게 하늘에 드리워져 있다. 그런가 하면 땅에는 개구리가 오색의 꽃밭에서 막 점프를 할 태세다. 또 다른 시리즈에서는 금방이라도 장대비를 쏟아 부을 것 같은 그야말로 용트림하듯 꿈틀대는 먹구름은 벽이 되어 만물이 정지된 듯한 꽃밭을 노려본다. 극단적 조형언어가 한 화면에 공존하고 있다. 이런 갈필의 황량함과 동시에 농묵의 습윤함이 주는 조형미감이란 절대고독이기도 하고 숨 막히는 현실을 그려낸 것이기도 하다. 언뜻 보면 통속적인 문인화에 숨어있는 듯한 구지회 필묵의 끝은 이렇듯 알게 모르게 우리사회의 부조리한 심장부를 겨누며 찌르고 비틀고 있다. 이것은 바로 구지회가 살고 있는 실존 그 자체이기도 하다. 벽의 다른 말은 불통不通이다. 오늘처럼 우리사회에서 불통을 많이 이야기 하는 때도 없었다. 최첨단 소통기계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창조되는 이때 언론에서 사무실에서 국회에서 가정에서 불통 불통 불통을 이야기 하는 것은 역설중의 역설이다. 그래서 구지회의 벽은 확장하면 우리가 앓고 있는 현대사회의 내면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현대미술은 작가가 살고 있는 시공時空, 즉 현대사회에 대한 생각과 실존을 그린 것이다. 먹물이든 아크릴이든 플라스틱이든 어떤 도구 재료도 관계없다. 그것이 또 그림으로 표출되든지 글씨로 써지든지 설치로 만들어 져도 마찬가지다. 이런 맥락에서 문자나 글씨가 서가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그 역도 마찬가지다. 문자영상이 하나인 시대 한가운데가 지금 아닌가. 더 나아가 구지회의 경우 왜 그리는가는 결국 왜 사는가의 문제와 같다. 예컨대 그의 화업은 농업이다. 농부의 논밭과 같은 것이 구지회의 화선지다. 대지의 밤과 낮, 춘하추동과 같은 우주자연의 움직임에 따라 논밭을 갈아 씨 뿌리고 가꾸고 추수를 하는 것은 화면에 필묵으로 그림을 그리는 일이다. 화면 위 필묵이 음양원리에 따라 공간을 경영해내는 것이 바로 구지회의 그림공간이다. 농사나 화업이나 가장 현실적이면서 가장 우주적인 근본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이런 맥락에서 구지회 그림의 문제의식은 가장 우주적이면서도 가장 현실적인데 까지 직통한다. 이렇게 놓고 보면 대상의 재현으로서 구상과 내면의 표출로서 추상이 공존하면서 작가의 실존을, 현대사회를 필획한 것이 구지회의 <벽시리즈>이고 <표주박시리즈>다. 작가는 현실에서 느끼는 불통을 다름 아닌 벽으로 표출한 것이다. 하지만 구지회의 필묵은 벽이라는 문제제기나 사회고발로만 그치지 않는다. 동시에 과도할 정도로 텅텅 빈 공간으로 광대무변의 소통을 열어 재끼고 있다. 이 지점에서 비로소 필묵의 유희遊戱도 자리한다. 유희를 위한 유희가 아니다. 그래서 벽壁은 동시에 사이間이고 숨통이다. 구지회의 문인화 내지는 필묵어법의 힘은 벽으로 벽을 깨는데 있다.
토크콘서트, 일본 서예를 말하다.
글씨21(대표 석태진)과 함께 하는 토크콘서트, <일본 서예를 말하다.>가 지난 2월 8일 북촌한옥마을 ‘갤러리 사이’에서 열렸다. 참여자 모집부터 많은 관심을 모은 토크콘서트는 글씨21이 주최하고 (사)한국서예단체총협의회, 월간서예문화와 월간묵가가 주관하였으며, 심은 미술관(관장 전정우)이 후원하였다.월간 서도계 발행인 후지사키 아츠시이번 콘서트는 일본 서예계를 가감 없이 이야기하여, 서예계의 실상과 허상에 대해 논하고 더 나아가 한국의 실정을 짚어보자는 데에 취지가 있었다. 이날 토크콘서트에는 일본의 월간 서도계 발행인 후지사키 아츠시와 일본 마이니치 신문 서도부 담당기자 키리야마 마사토시가 참석 예정이었으나 키리야마 마사토시는 신변상의 문제로 한국에 오지 못했다. 진행 김주회토크콘서트는 후지사키 아츠시씨와 글씨21의 일본지사 김주회 부사장의 통역과 진행으로 차분한 분위기에서 시작되었다. 일본 서예의 현 상황에 대해 논의하고 후지사키 아츠시씨 또한 한국의 실상에 대해 궁금한 점이 많았으며 서로의 대화를 통해 토크콘서트는 더욱 깊어졌다. ‘한국’과 ‘일본’이라는 외교적 관계를 벗어나기 어려운 큰 현실 속에서 동아시아의 큰 공통점인 ‘서예’를 통해 서예의 과거와 현실을 짚어보는 시간을 가졌으며, 참여자들의 무거운 눈빛에는 어두운 서예 미래를 조금이나마 밝혀보고자 하는 긍지의 빛이 담겨있었다. 글과 화면과는 확연히 다른 만남, 직접 대상을 만나 이야기 듣고 궁금한 점을 바로바로 질문할 수 있는 형태의 토크콘서트를 성공적으로 마친 글씨21은 앞으로도 이러한 진솔한 대화의 장을 지속적으로 발전하여 만들어 나갈 것을 기약했다. 2018. 3. 27취재 김지수 기자
藝結金蘭
예결금란- 韓中代表書藝家 李敦興 劉正成 春樹暮雲展 - 정종원(월간묵가 편집장) 학정 이돈흥(鶴亭 李敦興)과 리우정청(劉正成)의 2인전이 3월 13일부터 오는 6월 17일까지 광주시립미술관 제1·2전시실에서 열리고 있다. 동년배인 두 작가는 한국과 중국을 대표하는 서예가로 20년 간 서예를 통해 교류해왔다. 전시 주제인 ‘예결금란(藝結金蘭)’은 예로써 맺어진 금란지교란 뜻이고 전시명인 ‘춘수모운(春樹暮雲)’ 역시 두보(杜甫)가 멀리 있는 친구인 이백(李白)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아 지은 시에서 유래한 것이니 이로써 두 작가의 두터운 우정을 짐작할 만하다. 두 작가는 각국의 서예 발전에 크게 이바지해 왔을 뿐만 아니라 교류를 통해 양국 서예계의 발전을 위해 힘써왔다. 특히 학정 선생은 국제서예가협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세계청소년서예대전을 꾸준히 운영하여 한국 서단의 국제 경쟁력을 높이는데 공헌하였다. 리우정청 선생은 중국서법가협회의 부비서장으로서 중국 서단의 새로운 부흥기를 이끈 인물로 평가받는다. 서예잡지 『중국서법(中國書法)』을 창간하였고, 중국 서예사를 총망라한 『중국서법전집(中國書法全集)』 100권 시리즈를 출판하기도 하였다. 이번 전시는 광주시립미술관에서 매년 당대 최고 작가들의 작품을 선보이는 대한민국 명품전의 일환으로, 서예인 및 일반 관객들에게 한·중의 서예술을 한자리에서 비교 감상할 수 있는 드문 기회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전시 개막식 날인 3월 15일, 광주 금남로에 위치한 학정서예연구원을 찾아 두 작가와 나눈 이야기를 문답 형태로 정리하여 전한다. Q. 이번 전시를 소개해주십시오. (이돈흥(이하 이)) 그간 한국과 중국이 외교적인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이에 광주시립미술관에서 문화예술을 통해 양국 관계를 풀어보고자 한국과 중국 작가 2인전을 기획하였습니다. 지난 10월 말 경에 결정된 전시라 준비기간이 짧았지만 리우정청 선생님께서 흔쾌히 허락을 해 전시회를 열 수 있었습니다. (리우정청(이하 劉)) 한국과 교류한 지 30년이 넘었는데 이렇게 큰 전시는 처음입니다. 한국의 서예가와 관객들의 많은 관심과 조언을 바랍니다. 이번 ‘예결금란’이라는 전시명은 이돈흥 선생님과 저, 두 사람만의 우정이 아닌 오래전부터 교류해온 한국과 중국의 관계를 상징한다고도 생각합니다. 양국의 우정이 지속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돈흥 作Q. 두 분의 인연이 오래 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만나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劉) 여초 김응현 선생님 덕분입니다. 그분께서는 생전에 한국 서단과 중국 서단의 교류에 큰 역할을 하셨습니다. 한 번은 김응현 선생님이 권창륜·여원구·이돈흥 선생님 3분과 함께 베이징에 오셨죠. 그때 처음 이돈흥 선생님을 알게 됐습니다.본격적으로 가까워진 것은 그로부터 약 10년 후부터입니다.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 참가 차 전주에 왔다가 광주에 와 학정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후부터는 전주에 올 때마다 광주에 들렀죠. 마찬가지로 학정 선생님도 북경에 오면 꼭 저를 만났습니다. (이) 리우정청 선생님과 10일가량 돈황 지역을 여행한 적이 있습니다. 그 여행에서 그가 학문적으로도 높고 서예술에도 깊이 천착한, 훌륭한 작가임을 깊이 느낄 수 있었고 더욱 친하게 되었습니다. 언어는 서로 다르지만 예술로 교류하면서 서로에 대해 깊이 알고 있는 지기(知己)라 하겠습니다. Q. 이번 전시 준비는 어떻게 하셨는지요? 전시의 특징은요? (劉) 지난 10월 말에 결정된 전시라 준비할 시간이 많지는 않았습니다. 학정 선생님과 함께 하였기에 가능한 전시였고, 그간 서예로 교류하면서 공부한 것들을 관객들에게 보여준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마련한 전시입니다.특히 중국의 우수한 시가(詩歌) 뿐만 아니라 그동안 한국을 접하면서 알게 된 한국의 시가 역시 작품에 담았습니다. 또 전·예·해·행·초 등 여러 서체를 선보였는데 초서 작품에는 저의 감정이, 행서에는 저의 사상이 담겨있습니다. 전서와 예서로 쓴 작품은 한·중 교류가 가장 활발했던 청나라 시기, 특히 옹방강과 추사의 이야기를 주제로 했습니다. 아무쪼록 한국 작가들과 관객들의 많은 지도편달을 바랍니다. 특히 학정 선생님께 부탁드립니다. (이) 이번 전시에는 한국과 중국, 양국의 작가가 함께하는 전시이기에 한국이라는 정체성, 그리고 광주라는 지역의 역사를 담고자 했습니다. 김상헌·성삼문의 글이라든지 광주에서 의병장을 했던 충장공 김덕령 장군에 관한 시와 글을 주제로 했습니다.그리고 리우정청 선생님이 말씀하신대로 2인전은 상호보완이라고 해야 할까요? 말하지 않는 가운데서도 상대방의 글씨를 보다 보면 ‘아, 무엇을 배워야겠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거든요. 리우정청 선생님께서 겸손하게도 저에게 지도를 해줬으면 하고 말씀하셨지만 저야말로 리우정청 선생님께 지도 말씀을 부탁드립니다.아울러 한국과 중국 서예가의 2인전으로는 예전에 김응현·치궁(啓功), 권창륜·선펑(沈鵬), 그 뒤로는 박동규·저우샹린(周祥林)의 전시가 있었죠. 저희의 2인전이 4번째라고 할 수 있는데요, 이런 전시가 우리 서단에 좋은 영향을 미쳐서 후배들이 무언가를 느끼고 새로운 목표나 지향점을 가졌으면 합니다. 우리가 그럴 수 있을 만큼 좋은 작품을 했나 걱정이 되긴 하지만요.리우정청 作Q. 상대방의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신다면요? (劉) 학정 선생님과 저는 서로가 글씨를 쓰는 모습을 보며 영향을 주고받고 공부를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흔히 펜으로 교류를 한다고 하는데, 저희는 서사(書寫)라는 행위로서 교류를 한 셈입니다. 학정 선생님은 높은 경지의 서예술을 지니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이미 그 실력이 잘 알려져 있고 중국에서 봐도 대단히 수준이 높습니다. 앞으로는 다른 이의 시나 문장 외에도 선생님 본인의 생각과 감정을 시로 짓고 이를 붓으로 표현하신다면, 서예계뿐만 아니라 문학계에도 영향을 미치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 중요한 말씀입니다. 한국 서단의 서예가들은 스스로 시를 지어 쓰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다. 언어의 문제로 시를 읽을 수는 있어도 짓는 수준이 되기까지는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자작 시를 쓰고 이를 서예작품화한다는 것은 자기감정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인데요, 바꿔 말하면 다른 이의 글을 쓸 때도 그 글을 충분히 이해하고 느껴야 한다는 거죠. 특히 행초의 경우, 충분히 이해하고 느끼지 못한 상태에서 쓰면 글씨도 제대로 나오지 못합니다.리우정청 선생님은 서론에도 밝을 뿐만 아니라 개성이 강한 행초를 씁니다. 행초를 씀에 있어서 장초를 쓴다는 것은 변화를 꾀하는 것을 의미해요. 왕탁 글씨를 보면 이런 장초가 조금씩 섞여있는데 리우정청 선생님의 행초에는 장초가 상당히 많이 보이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리고 보통의 작가들이 넘볼 수 없는, 굉장한 속필이죠. 오래 볼수록 깊이가 느껴지는 그런 글씨입니다. 이돈흥 作Q. 두 분은 국제서예가협회에서 각국의 회장직을 맡고 있기도 합니다. 한국 서단이 중국 서단의 발전을 통해 어떤 점을 배워야 할까요? (이) 그간 한국과 중국의 교류전을 수차례 개최했습니다. 처음에는 한국과 중국이 거의 비슷한 수준이었는데 지난 10년 사이에 중국의 실력이 많이 좋아졌습니다. 중국에서는 서예를 국가적으로 육성하고 있는데, 우리는 학교에서 서예를 가르치지 않고 한문도 가르치지 않다 보니 갈수록 서단이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특히 젊은 서예가들이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죠. 서예진흥법 통과 등 정책적으로 서예를 발전시키려는 움직임이 있어야 합니다. 몇 사람 개인의 노력으로는 힘들죠. 우리 서예인이 모두 뭉치고 한학자들이 뭉쳐 무엇인가를 해야 변화가 있을 것입니다. (劉) 한국은 한글을 쓰기 때문에 한자가 필요 없는 상황이고, 한자 교육도 하지 않기에 중국의 서예가들보다 환경적으로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한국의 많은 서예가들이 공부하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면서 서예를 대하는 정신에 대해 배우곤 합니다. 한국 서단과 중국 서단의 발전은 동보(同步), 같이 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리우정청 作Q.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합니다.(劉) 두 가지 큰 계획이 있는데 모두 학정 선생님과 관련이 있네요. 우선 이번 2인전을 중국에서 다시 한 번 개최하고 싶습니다. 한국과 중국의 서예가가 어떻게 교류하고 있는지 중국 작가들에게 보이고 평가를 받고 싶습니다. 그리고 10년 정도가 흘러 80세가 넘었을 때 학정 선생님과 다시 한 번 전시를 하고 싶습니다. 그때는 법에 얽매이지 않고 더 자유롭게, 마음 내키는 대로 쓰고 싶습니다. (이) 특별한 계획은 없습니다. 다만 리우정청 선생님이 말씀하신 대로 이번 전시를 중국에서 할 수 있다면 큰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 매일 밥 먹듯이 매일 글씨를 쓰면서 저의 소임을 하는 거죠. 열심히 부지런히 붓하고 노는 것, 그것이 계획이라면 계획입니다. * 본 인터뷰는 『월간 묵가』와 공동으로 진행하였습니다. 『월간 묵가』의 4월 호에서도 인터뷰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2018. 4. 4글씨21 편집실
토크콘서트, 중국 서예가 리우정청(劉正成)
류정청(劉正成) 선생은 중국 현대 서단이 부흥 할 수 있도록 기획하고 실천한 분이라 할 수 있다. 이번 인터뷰는 성공사례를 들어봄으로써 중국서단을 이해하는 동시에 우리서단에도 뭔가 벤치마킹할 만한 요소를 찾고자 해서이다. 김희정(이하 김) | 제가 류정청(劉正成) 선생님을 처음 만난 때는 1994년 북경 중앙미술학원에서 석사연구생 때입니다. 중국서법가협회에서 주관하 신화사통신사가 후원한 국제학술토론회가 있다고 하여 방청하러 새벽부터 갔었습니다. 당시 열띤 토론회 장면과 선생님과 나눴던 이야기들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이런 자리에서 다시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리우정청(이하 劉) | 반갑습니다. 24년의 세월이 지났군요. 중국에는 “현대의 사람은 현대의 역사를 쓸 수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24년이라면 거의 한 세대라고 할 수 있으니, 이제는 그간 중국 서단에 있었던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김 | 먼저, 리우정청 선생님을 간단하게 소개하자면, 선생님은 중국 현대 서단을 반석위에 올려놓은 분이라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1986년 중국서법가협회 부비서장으로 부임한 이래 약 20여 년 간 큰 업적 세 가지를 꼽을 수 있습니다. 첫째, 중국서법가협회의 기관지인 《中国书法》을 발행하여 고대서예와 현대 중국서단에서 모범이 되는 작가와 작품들을 선양함으로써 서예의 올바른 방향을 잡아가면서 중국현대서단을 활성화 시킨 점입니다.둘째는, ‘전국중청년서법전각작품전(약칭 中靑展)’을 기획하고 실행한 점입니다. 직접 심사위원장(평위회주임)도 맡아 공정하고 정의롭게 진행하여 공모전의 모범을 만들어 놨습니다. 참고로, ‘중청전(약칭)’ 중국서단의 미래를 열어갈 수 있는 25세~55세까지 참가할 수 있는 서예공모전입니다. 특히 기업의 스폰서를 받아 행사를 치룬 것으로 알 고 있습니다.셋째는, 전국의 학자와 작가들을 결집하여 《中國書法全集》 총100권 씨리즈를 편찬한 일입니다. 각 권마다 이론가와 작가들이 맡아서 정리하였는데, 중국 서법사에 등장하는 작품들과 작가들을 정밀하게 고증하고 정확하게 기술하여 매우 권위 있는 책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 작가는 이론에 대해서 깊이 연구하게 되었고, 이론가들에게는 작품에 대해서 더욱 깊이 있게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서 하나씩 자세한 설명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김 | 먼저, 《中国书法》은 劉正成 선생님께서 사장이자 주편으로 계시면서 매월 발행한 중국서법가협회 기관지입니다. 이 책에서는 고대 서가와 작품도 소개가 되지만, 주로 현대 작가들의 작품과 평론을 많이 싣고 있습니다. 이 잡지에서 추구하는 방향과 내용의 특징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劉 | 18년 동안 《中国书法》 주필을 맡아 발행했습니다. 처음 중국서법가협회에 부임했을 당시 치공(啓功) 선생님이 주필을 맡고 계셨습니다. 4년 동안 3기를 발행했었고, 제가 제4기부터 맡아 발행하였습니다. 치공선생님께서 주편을 맡고 계셨지만 실제적인 일은 다른 두 분이 계셨습니다. 여기서 실명을 말씀 드리지 않겠습니다. 당시 내용은 당대 서예가들은 소개하지 않았고, 대부분 옛날 명가들만을 소개하는 정도였습니다. 특히 중청년 서예가들의 활동상황에 대해서는 전혀 소개하지 않았습니다. 미술잡지나 문학잡지 등은 대부분 당대 작가들과 작품을 소개하는데, 유독 서예잡지에서는 현존하는 작가들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제가 맡으면서는 서예고전과 원로작가보다는 현재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중청년 작가들에 각별히 관심을 갖었습니다. 당대 잡지는 무엇보다도 당대 작가들과 작품에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본 잡지가 이러한 기획의도의 전환은 중국서법계에 커다란 전환을 하였습니다. 본 잡지는 서예계 뿐만 아니라 미술계, 문학계, 철학계, 미학계, 고문자학계 등등 서예와 관련이 있는 여타의 학술과 예술분야를 망라하여 원고를 실었습니다. 마흔총이라는 미학자께서는 서예가 왜 예술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철학적(미학적) 문제를 다룸으로써 중국서단에 서예에 대한 관념(인식)을 전환하고 인식을 명확히 하게했습니다. 야오종이(饒宗頤) 선생은 대학자입니다. 제가 직접 방문하여 서예에 관하여 인터뷰를 하였습니다. 또 현재 중국서법가협회 부주적으로 계신 당시 중국미술학원 교수 천젼리엔(陳振濂) 선생이 주도하는 ‘학원파’ 서예에 대해서도 잡지에 실었습니다. 당시 ‘학원파’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사람들이 많았으나, 이에 관한 문장과 작품도 소개하여 공론화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여 실은 이유입니다. 제가 주관하기 전에는 이렇게 다양한 분야에 대한 관심을 두지 않았고, 특히 현대서예와 관견 된 문장이나 작가들에 대해서는 좀처럼 소개되지 않았습니다. 김 | 다음은 중국서법가협회와 《中国书法》잡지사가 주관한 ‘전국중청년서법전각전(약칭 中靑展)’의 기획 배경과 방법, 그리고 현대 중국 서단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요? 劉 | 내가 중국서법가협회에 부임한 다음 해에 ‘중청전’을 주관하였습니다. 예전에는 젊은 작가가 두각을 나타내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프로작가로 등단하기까지는 먼저 자기가 사는 지역부터 시작해 시와 성을 순서대로 거쳐 점점 전국에 이름을 알렸습니다. 이 때쯤이면 이미 늙어버립니다. 게다가 당시의 국전은 아무나 출품할 수도 없었습니다. 자신이 활동하는 지방에서 추천을 받고, 심사를 거친 후에야 출품 자격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자격을 얻어 출품하게 되지만, 서단의 보수적인 분위기로 인해 작품의 수준이나 개성보다는 누구의 서풍을 닮았느냐를 먼저 보고 입선 낙선이 결정됐습니다. 예컨대 구양순·안진경과 같은 고전적 서풍이나 치바이스(齊白石), 치궁(啓功) 등과 같은 유명한 서풍의 글씨라야만 인정받아 입선할 수 있었습니다. 북위서체나 간독 글씨, 갑골문 서체 같은 익숙치 못한 서풍의 작품은 낙선되기 일쑤였죠.하지만 새롭게 시작한 <중청전>은 지역의 추천이나 유명인사의 추천을 받지 않고도 누구나 직접 출품할 수 있고, 개성이 뚜렷해도 입선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혁신적이었습니다. 벽촌에 사는 이라도 좋은 작품만 할 수 있다면 바로 입선을 하고, 전국에 이름을 알릴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김 | 심사방식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劉 | 심사위원의 경향이 심사를 결정하기 때문에 심사위원은 매우 중요합니다. 또 심사위원을 구성하는 일은 서단의 방향을 어떤 쪽으로 이끌고 가겠다는 의지를 드러내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전에는 대부분 북경에 있는 유명한 서예가들이 심사를 맡았습니다. 하지만 <중청전>의 심사위원 구성은 매우 획기적이었습니다. 심사위원진의 변화에는 치궁(啓功) 선생의 도움 컸습니다.치궁선생님은 <중청전>을 기획하던 당시 중국 서단에서 중요한 위치에 계셨습니다. 그래서 운영위원장으로 모시고자 말씀 드리니까, “청년들의 일은 청년들이 알아서 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을 고문으로 모시고, 당시 대부분의 원로작가들을 고문으로 모셨습니다. 운영위원장으로 당시 60세가 안되셨던 션펑(沈鵬) 선생을 모셨고, 운영위원이나 심사위원들은 55세 미만이었던 중청년들이 맡았습니다. 제2회에서는 저도 심사위원으로 참가했는데, 제 나이가 40세였고, 가장 젊은 심사위원이었던 천전리엔 교수는 불과 30세였습니다. 또한 북경에 있는 작가에 국한 하지 않고 전국 각지에서 실력 있는 작가들을 심사위원으로 모셨습니다. 지역과 유파 나이를 초월하여 오직 실력에 따라 심사 위원장-부위원장-심사위원을 맡겼습니다. 김 | 이러한 변화들이 실제로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요? 劉 | 제5회에서 이른바 ‘광시(廣西) 현상’이라 불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심사위원들 투표를 통해서 수상작을 뽑고 보니 1등상 수상자 10명 중 4명이 광시성(廣西省) 출신이 됐습니다. 그중에는 아직 대학을 졸업하지 않는 수상자도 있었습니다. 모두가 깜짝 놀랐습니다. 광시성은 중국 외곽 지역으로 서예가 번창한 곳도 아니었고, 그 지역 출신이 심사위원에 있지도 않았습니다. 이유를 알고 보니 수상자들이 위진남북조 시대의 위진잔지(魏晉殘紙)의 서체와 서풍을 참고해서 작품을 했는데, 여태껏 공모전에서 볼 수 없었던 신선함 때문에 심사위원들이 그들에게 표를 던진 겁니다. 에피소드 하나만 더 소개하겠습니다. 1986년 <제2회 중청전>에 현대파 서예를 등단시켰던 일입니다. 본인은 전통서예 뿐만 아니라 현대파 서예도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현대파서예는 서예라고 취급해주지도 않았기 때문에 <중청전>에서도 현대파 서예가 입선에 들 가능성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현대파 서예학회에 10명의 현대파 서예 작품을 뽑아 추천해주면 입선시켜주겠다는 약속을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심사에 에서는 심사장에서 저를 안아서 밖으로 던져버리고 자기들끼리 심사를 다시 하여 모두 낙선시키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제가 심사위원장이었기 때문에 이미 결정된 심사결과를 다시 번복할 수 없다고 하여 입선을 시킨 일이 있었습니다. 이렇듯 우여곡절 끝에 오늘날과 같은 다양한 서풍이 등장하고 획기적인 작품들이 자리 잡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김 | 세 번째로 『중국서법전집』 총 100권 시리즈를 펴내셨는데요, 그 배경과 과정이 궁금합니다. 劉 | 서예나 미술은 실기와 이론이 구분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실기를 하지 않은 채 이론에만 치중하다 보면 학술적 깊이가 본질에 닿지 못하기도 합니다. 순수 서론만 하는 학자들은 서예작가를 따라가기 힘든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서『중국서법전집』의 저자들은 중국 전역에서 이론을 겸비한 우수한 서예가들을 주로 발탁했습니다. 서예가인 동시에 학자라고 할 수 있는 분들입니다. 예를들어 진한대(秦漢代) 저자 중 한 분인 왕용(王鏞) 선생은 오랫동안 진한대의 서예에 천착해왔고, 서예술 역시 진한대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니 누구보다 높은 안목으로 예술성 있는 작품을 선별할 수 있는 셈이죠. 이렇게 하여 중국 서단에 학술적 분위기를 더할 수 있었습니다. 김 | 중국 현대 서단에는 고전주의·신고전주의·서법주의·학원파서법·민간서법 등 다양한 주장이 존재합니다. 이에 대한 생각을 여쭙고 싶습니다. 劉 | 송대의 법첩인 『순화각첩』 에 수록된 진(晉) 시대의 글씨는 전반적으로 비슷합니다. 중국서예사에서 지금처럼 수많은 유파가 존재했던 적이 없습니다. 이는 1980년대 중반부터 꾸준히 성장해온 중국서예의 현재를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어느 파가 좋다 나쁘다는 지금 단계에서 말하기 어렵습니다. 오래 살아남는 것이 좋았다고 할 수 있겠죠. 김 |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더욱 건강하시고 우리나라도 자주 찾아주셔서 서예 발전에 공헌해주시기 바랍니다. 2018. 4. 30정리 김희정
원로에게 길을 묻다 _ 구당 여원구
한학자였던 아버지 도산 여운필 선생의 슬하에서 어린 시절부터 한문 공부를 한 구당 여원구을 만나보았다. 전통을 누구보다 소중히 여기는 여초 김응현 선생의 문하에서 엄격한 훈련을 받으며 서예에 몰두해왔다. 고린도전서 13장 48x75 2012인터뷰를 위해 선생의 작업실을 찾았을 때, 글을 쓰는 것에 몰두하던 모습이 쉬이 잊혀 지지 않았다. 연로한 연세에도 글과 글씨 쓰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는 그 모습이 바로 그가 후학들에게 존경받는 이유라고 생각했다. 여초 김응현 선생과 구당 여원구 선생동방문화대학원 대학교 2018전기 학위수여식휴정선사시-과현산화촌(休靜禪師詩-過現山花村) 37x35x2 2005구당 선생의 호는 구당(丘堂), 양소헌(養素軒)이며, 경기도 양평 출신이다. 1932년생(만86세)로 현재 활동하는 서예가로는 최고령이다. 고령의 나이임에도 글 쓰는 것과 서예, 전각을 끊임없이 작업해오고 있다. 그는 젊은 시절 일찍이 동아미술제에서 전각으로 수상을 한 바 있으며, 1983년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서예로 대상을 수상하며 그 실력을 인정받았다. 이후 1999년에는 국새제작에 참여하며 전각가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대한민국 국새 10.1x10.1 1998구원 1993 | 조관인황(鳥官人皇) 1998 | 구고심론(求古尋論)1998논어 위정편구(爲政篇句) 50x35 2012“바쁜 세상이지만, 시간을 잘 활용하여 계획을 세우고 정진한다면 좋은 결과를 얻을 것입니다.” 원로서예가로서 선생께서는 살아온 지난날을 회상하며 후학들에게 시간을 잘 활용하여 공부 할 것을 당부했다. 또 자신에게 서예라는 것은 자신의 몸에서 떨어져 나갈 수 없는, 늘 함께 모든 것을 헤쳐 나가는 몸과도 같은 것이라고 표현 했다. 고린전도서9장 구 38x48 2012과거와 현재라는 시대의 변화 속에서 파란만장한 서예의 삶을 묵묵히 지키고 이어오면서 느꼈던 감정들과 깨달음을 과감 없이 느껴볼 수 있는 인터뷰이다. 2018. 5. 9인터뷰 김지수 기자
이 작가의 思생활, 황방연
“서예는 나에게 오만과 겸손을 느끼게 해준 고귀한 존재” - 성재 황방연 전북 고창 출신인 석전 황욱 선생은 수전증을 극복하기 위해 악필법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자기극복과 정진으로 노년에 마지막 예술혼을 꽃피운 그는 전북 서예의 맥을 잇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황욱 선생은 슬하에 삼남일녀를 두었었으나 사상 문제 등으로 인해 월북하여, 곁에 남아있던 막내에게서 얻은 장손인 성재 황방연에게 집착하였다. 성재 황방연은 어릴 적부터 이어온 조부 황욱 선생의 관심 속에서 서예를 시작하였으며, 갑작스러운 사고로 잠깐의 방황의 시간 속에서도 그를 이끌었던 것은 바로 황욱 선생이었다. 서예, 문인화 등 한 가지에 몰입하는 성향이 강한 황방연은 서예에 도취되어 오만함을 느끼다가도 서예로 인해 겸손함을 느끼게 되는 등 인생에서 서예란 행복 그 자체였다. Q. 선생님의 호인 ‘성재’는 깰 성(醒)자에 재계할 재(齋)를 사용하고 있는데요, 자세한 뜻과 사용하시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원래 호라고 하는 것은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여 쓰는 것은 아니라고 알고 있어요. 저의 호(성재)는 작고하신 석전 조부께서 지어주신 호입니다. 제가 철없던 시절에 과음을 하는 것은 몇 번 보시고는 그것을 걱정하는 마음에서 지어주셨지요. 후담으로는 30대 초반에 저를 부르셔서 호를 바꿔야겠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이제는 네가 술을 그리 조심하지 않아도 되겠다.’라고 하시면서 사슴록(鹿)에 샘천(泉)자를 써서 녹천(鹿泉)을 지어주셨는데, 저는 왠지 지금의 호를 일찍부터 사용해서 그런지 ‘성재(醒齋)’가 마음에 들어서 감히 거부를 했었죠. 그 이후에는 줄곧 지금의 호만을 사용했습니다. Q. 서예를 시작하시게 된 계기가 조부이신 석전(石田) 황 욱(黃旭 1898~1993) 선생님께 있을 것 같습니다. 조부로서의 황 욱 선생님과 서예 스승으로서의 황 욱 선생님의 다른 점이 있으셨는지요? 절대 나눠질 수 없습니다. 불가분입니다. 조부께서 서예를 사랑하셨던 것과 늦게 본 장손인 저를 사랑하셨던 마음은 차이가 없었어요. 조부께서는 3남 1녀를 두셨었습니다. 당시 유난히도 사상 문제가 많았을 때였는데, 그때 장자와 둘째 아들을 다 잃으시고, 막내아들에게서 얻은 아들인 제가 장손이 되었죠, 더구나 어린 장손에게 서예의 재주를 느끼시고는 장손에 대한 집착을 보이셨습니다.그리곤 결국 저도 모르는 사이에 서예에 빠져들어있던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20대 초반에 국전에 입선을 하거나 전라북도에서 상을 받으면서 자신감이 생기고, 오만함까지 곁들여져 서예를 꼭 해야겠다는 운명같이 느껴졌습니다.어릴 때부터 석전 할아버지께 공부를 배웠는데, 할아버지께서는 기법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해주시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자연스럽게 그분이 하시는 것을 옆에서 따라 쓰고 모습도 많이 보고 공부했어요.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그렇게 공부를 했습니다. 제가 처음 국전에 입선할 때도 실은 석전 할아버지가 쓰셨던 체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거기에서 벗어나 제 것이 따로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시 여초 선생님께서 서법에 대해 여러 가지를 논하시곤 할 때였는데, 그때부터 서법에 대한 서책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예술원 회원이신 일랑 이종상 선생님께 문인화 공부를 2-3년 동안 했습니다. 그 선생님께 배우면서 가장 크게 느꼈던 것은 어떤 것을 공부하고, 또 어느 것을 통해 내가 공부할 방향을 설정할 것인가에 대해 많이 느꼈습니다. 근현대명가서품전2017Q. 갑작스러운 사고가 있으셨다고 들었습니다. 팔을 다치신 후 다시 서예를 시작하기 힘드셨을 것 같은데요. 그때의 일을 이야기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갑작스럽게 사고를 당해 오른쪽 팔을 다치게 되었지요. 당시 저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웬만한 사람이라면 모두 손으로 붓을 잡을 수 없는 상태가 됐어요. 그래서 방황을 하게 되었어요 다른 방황이라기보다는 이제 서예를 못하게 된다는 것에 큰 방황을 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이후 전주에서 서울로 와서 당시 유명한 동방연서회에 여초 김응현 선생님께 공부를 하며 여쭤봤습니다. ‘제 손이 이런데 글씨를 쓸 수 있습니까?’하고 여쭤보니 여초 선생님께서 ‘그게 무슨 상관이냐’라고 답하셨습니다. 그분은 항상 붓을 잡는 방법에 대해 깐깐하게 말씀하시고 지도하시곤 했었는데 저한테 그렇게 말씀을 해주셨지요. 그래서 그때부터 다시 서예에 천착해도 되겠다 하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지요. Q. 1993년 대한민국미술대전 서예부문에서 대상을 수상한 경력이 있으십니다. 이외에도 여러 큰 상을 수상하셨는데요, 젊은 시절 상을 수상하던 시절의 선생님과 시간이 꽤 지난 현재의 선생님이 달라진 점은 무엇입니까? 제가 93년도에 대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석전 할아버지께서 건강이 위독하실 때였습니다. 그래서 그때 전시장을 가보지도 못했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생각이 드는 것이, 제가 그때만 하더라도 초서에 깊이 천착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행서에 주로 많이 중점을 두고 공부를 할 때였어요. 그 순간에 초서를 공부할 때가 되었다고 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중한서예가30인전 2010Q. 원광대,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등 후학들을 양성하는데 힘써주고 계십니다. 강의할 때 후학들에게 특히 강조하는 부분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습니까? 지금은 강의를 하고 있지 않지만, ‘예전에 어떻게 수업을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또 ‘지금 하게 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학교라는 것은 학교 나름대로의 특성이 있어서 학교가 요구하는 바가 있습니다. 학부나 대학원에서 똑같은 것만 나열하게 되면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서예’라고 하는 한 가지 목표점을 가지고 이야기할 때 반드시 빼놓지 말아야 할 것들은 있습니다. 바로 ‘인내’, ‘소양’입니다. 소양이 없는 사람은 억지로 그것을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소양이 있다면 또 인내가 꼭 필요합니다. 한국서예가협회전2011(제46회)Q. 선생님께서는 특히 초서에 일가견을 가지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초서’란 어떤 예술인가요? 초서를 ‘어떤 예술’이라고 답한다는 것은 참 어려운 것 같습니다. 서예는 ‘藝’자를 쓰긴 쓰지만 서예를 예술이라고 하는 것에도 논란이 있습니다. 하물며 ‘초서’라는 것을 무조건 예술이라고 묶어놓고 이야기하는 것은 문제가 있죠. 초서를 원래부터 예술이라고 표현하기보다는, 서예 중에 ‘초서’라는 분야가 가지고 있는 예술성을 가지고 논할 수 있습니다.글자를 표기하기 쉽게 간략하게 만들어 놓은 것이 초서입니다. 초서에는 지금 우리가 말하는 초서의 형태만이 초서가 아닙니다. 예서에서 획을 생략하여 만든 것도 초서이고, 전서에서 획을 생략하고 간편하게 한 것도 초서이며, 초서의 시작으로 볼 수 있습니다.해서나 예서와 초서를 음악적으로 비교해보면 4/4박자나 6/4박자 등의 박자 개념과 같이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음악적으로 봤을 때 얼마나 놀기 좋은지의 문제이죠. 또 시로 본다면 산문시나 운율이 있는 시의 차이를 보면 이해가 쉽겠죠. 이렇기 때문에 서예 중에서 초서가 예술적으로 가장 근접하기 때문에 우리가 예술이라고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더 예술적으로 표현하기로는 사람의 개성, 감성, 희로애락, 자연의 모든 형상 등을 표현하기에 가장 편리한 것이 초서라고 할 수 있겠고, ‘예술이라고 말하기가 가장 무난하다’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도연명 歸田園居 70x205Q. 위의 질문에 연계하여 ‘초서는 어떻게 쓰는 것인가’에 대해 시청자들에게 그 핵심을 얘기해 주시겠습니까? 초서는 초서답게 쓰면 되겠지요?(웃음) 이 질문은 제가 가르치고, 또 함께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많이 들어봤습니다. 초서라는 것은 절대 익지 않으면 안 됩니다. 무엇보다 자연스러움 속에서 해야 합니다. 당대에 장언원이라는 화가가 말하길 망상, 형상을 잃어버려야 하고 학이, 내가 생각하는 이치에서 멀리 떠나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말하는 것은 쉽지만 실제 몸으로 행 하기는 쉽지 않지요. 무엇이든 보고, 알고 하는 정도를 떠나서 보지 않고도 상상이 되는 정도가 되어야 초서를 쓸 수 있습니다. 만고의 서예 역사 속, 초서에 있어서는 당나라에 두 사람이 있습니다. 뒤집어지는 욱이라 하여 장전(張顚)이라고 불렀던 장욱과 미친 듯이 썼다 하여 회소, 이 두 사람이 초서를 완성할 때 그 과정을 표현한 것이 있습니다. 장욱의 여러 표현 중에 하나는 어느 폭포가 있는데 굵은 물줄기의 폭포가 중간에 어느 바위에 부딪혀 깨지고 흩어졌다가 다시 모여 내려오고 또 부딪혀서 깨지고 또다시 모여서 내려오는 것을 보고 자신의 필법을 개발했다고 합니다. 또 회소는 스님인데, 검무를 하는 사람들이 검을 자유자재로 휘두르는 것을 보고 착안하여 자신의 필법을 만들었다고 합니다.두 사람의 공통점이 취한 후에 더 좋은 작품이 나왔다고 합니다. 한유라는 대문장가가 장욱에 대해 쓴 글 중에 가장 첫 부분에 장욱이 초서로 지금 시대까지 유명한 것은 아주 취한 뒤에 쓴 글이 마음에 들어 술이 깬 후에 다시 쓰려고 했으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것은 물아망상, 나와 그 대상을 잊어버린 후에 해야 한다. 어디에 메어서 하면 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Q. 대한민국미술대전 초대작가이면서 심사위원장을 역임하셨습니다. 많은 이들이 이전부터 각종 공모전과 휘호대회의 문제점을 지적해왔으며, 지금까지 개선하고 발전해온 것 같습니다. 현재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문제점은 무엇이며 해결방안을 제시해본다면 어떤 것이 있겠습니까? 제가 20년 전까지는 문제점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 이후부터 문제점을 조금씩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제도권 자체의 관행이나 형식에 대해 잘 알지 못했어요. 제가 미술협회에 분과위원이나 이사가 되면서 관여를 하게 되었고, 그런 과정을 통해 그전에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들을 알게 되고 깨우치게 되었습니다. 지금에서야 후회스럽게 생각되는 부분은 너무 잘 알지 못했던 것도 있고, 어느 정도 느끼게 된 부분을 고치려고 나서거나 강력하게 반발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제 와 문제점이 무엇이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강력한 강제권을 가진 쪽에서 관여를 하여 약간의 강제성을 부여하지 않고서는 어렵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느냐하면, 국전이라고 하는 것은 국가단체에서 하는 것인데, 이것이 88년도에 민간단체로 넘어오게 되면서 한국예총이란 곳으로 넘어오게 되었는데 그 당시 예술인들의 소망은 국가적 관리차원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것인데 거기에서 벗어나 시간이 지나고 나니 이런 불협화음이 생겨난 것이죠. 그렇다면 이 문제는 다시 강제성이 필요할 것입니다. 아니면 단체 내에서 강력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 누구한테도 다 지지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스스로 의지를 가지고 나서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참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한중한묵전2012한국서예일품전2018霽月鳶飛 30x180x2Q. 선생님과 수 십 년 함께 해온 ‘서예’가 이젠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가 된 것 같습니다. 오랜 시간 공부해온 만큼 ‘서예’라는 것이 싫으셨을 때도 있을 것 같은데, 언제 가장 힘드셨습니까? ‘서예’라고 하는 것은 아시다시피 예전에도 직업으로 삼았던 적은 없었습니다. 국가에서 녹봉을 받고 그림을 그리는 화공은 있었지요. ‘서예’라고 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저에게 석전 할아버지께서 서예를 하면 잘 살 수 있다고 하셨을 때 믿지 않았고, 좋아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직업으로 삼을 때도 갈등이 많았습니다.내가 다른 직업을 가지고 있으면서 ‘서예는 예술가만 하는 것이다’고 생각했었는데 어느새 남들을 가르치고 있었죠. 이것으로 경제적인 부분은 해결이 되었어요, 한때 있었던 서예의 붐으로 인해 예전에 가졌던 갈등은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가르치는 것을 하다 보니 제 스스로 하는 예술에 대해 등한 시 되었습니다. 그래서 정신을 차리고, 제 공부에만 빠져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스스로 오만했던 때였습니다. 하지만 오만하면 반드시 후회하게 됩니다. 그런데 제가 가지고 있던 오만함이 ‘서예’로 인해 위태로운 경계에서 조절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지금은 후회하기보다는 고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지금도 서예를 하는 자체가 좋고, 아직 공부할 것이 남아있다는 것에 희열을 느끼곤 합니다. Q. 후배 청년 작가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조언이 있으시다면? 절대로 서두르거나 조급해하면 안 됩니다. 시대적인 흐름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리고 공부한 것은 내 스스로 빨리 밝히려고 할수록 숨게 됩니다. 중용에 보면 나타내려고 하는 자는 자꾸 숨게 되고, 감추려고 하는 자는 밖으로 보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서예와 아주 잘 맞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실력을 보이려고 할수록 결점이 많이 보이게 되고, 가진 것을 있는 그대로 보이려고 할 때, 장점과 결점이 나뉘어 보이는 것입니다. 자신이 가진 것보다 더 좋게 보이려고 하면 그것은 본인에게만 그렇게 보일 뿐 다른 사람에게는 결점만 비추게 될 것입니다.그리고 너무 과한 것이 걱정됩니다. 어느 정도 격을 깨뜨리는 것은 필요하지만 너무 과하면 안 됩니다. 요즘 젊은 친구들은 너무 과한 것 같습니다. 대부분 회화적인 것이 강합니다. 초서에는 회화성이 필요합니다. 회화성과 모든 구도가 알맞게 잘 맞춰져야 하는데 초서 자체가 회화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書가 가지고 있는 가치관과 존재위치를 너무 넘어버리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난해한 것이 훌륭하다는 개념은 벗어나야 합니다. 난해한 것은 말 그대로 어려운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상당히 진중하게 열심히 꾸준히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조금만 기다려달라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행복이라는 것이 다가 올 것입니다. Q. 선생님께서는 후대에 어떤 작가로 기억되고 싶습니까? 의도적으로 ‘어떻게 되어야겠다’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습니다. 다만 몇 십 년 살아보니 내가 참 바보같이 서예만 해왔다는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부이신 석전 할아버지의 호 뜻이 풀이 그대로 돌 밭입니다. 밭에 돌이 많아 밭 갈기가 쉽지 않다는 거죠, 평생 돌을 주워내고 갈아내고 헤쳐나간다는 뜻입니다. 제 인생을 할아버지의 호처럼 돌밭을 가는 마음으로 살고자 함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제 서예작품도 너무 유별난 것보다는 오랫동안 천착해서 평생 서예를 사랑하고 애써왔던 것이 묻어나는 작품을 했던 작가로 기억되면 훌륭한 작가보다 더 의미가 있고 좋을 것 같습니다. 이번 인터뷰에서는 성재 황방연 작가의 서예 인생 중 일부를 보았다고 할 수 있지만, 그가 지닌 예술관과 초서의 예술성을 느껴볼 수 있었다. 또한 이어지는 이영철 교수(동방문화대학언대학교)가 들려주는 서평을 통해 성재 황방연 작가에 대해 더욱 깊이 들여다보자. 2018. 8. 6인터뷰 김지수 기자 아속(雅俗)과 전통(傳統)의 조화(調和)에서의 창신(創新)-성재(醒齋) 황방연(黃邦衍)의 서작(書作)에 대하여- 1. 성재(醒齋) 황방연(黃邦衍)은 전북 고창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비범한 재능을 보였다. 서예가였던 조부(祖父)의 가르침으로 지식에 눈을 뜬 그는 서예에 큰 포부를 품게 되었고, 10대 초반에 당시(唐詩) 1백수를 암송할 수 있었다. 조부의 가르침 속에 다양한 분야를 섭렵한 그는 성장과정에서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비롯한 한시(漢詩), 그리고 『설문해자(說文解字)』와 세계 각국의 문화예술 서적들을 두루 읽었다. 아울러 조부와 부친으로부터 옛 선비(先儒)들의 고의(高義)와 문학의 체계를 배웠다. 그의 조부인 석전(石田) 황욱(黃旭, 1898~1993)선생은 가학(家學)으로 어려서부터 한학(漢學)을 배웠으며 1920년 금강산 돈도암(頓道庵)에 들어가 왕희지(王羲之)와 조맹부(趙孟頫)의 법첩을 중심으로 서예에 정진하였다. 1930년 32세 때 고향인 고창으로 돌아와 15년간 신위(申緯)를 사숙하며 서예를 익히고, 더불어 육예(六藝)를 배우고 율계를 조직하여 가야금에 망국의 슬픔을 달래며 은둔(隱遁)하였다. 이때부터 그와 친교가 있던 정인보(鄭寅普)와 김성수(金性洙) 등은 그의 행서(行書)를 격찬했다.蕩滌鄙吝 70X46 1960년경부터 오른손 수전증으로 붓을 잡기 어렵게 되자, 왼손바닥으로 붓을 잡고 엄지로 필두(筆頭)를 눌러 운필하는 악필법(握筆法)을 개발하여 1970년 악필전(握筆展)을 열었다. 1980년부터는 우수(右手)마저 힘들어 85세 이후 좌수(左手)악필로만 글씨를 썼다. 이때부터 역대 서예의 기교를 초월한 기세(氣勢)의 웅강(雄强)함과 순박함, 그리고 초탈함의 특징을 지닌 그의 악필 행초서(行草書)가 세상에 회자(膾炙)되기 시작하였다. 이는 무기교(無技巧)와 육예에 의한 탈속의 초연한 인품에서 유래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의 부친 유당(由堂) 황병근(黃炳槿, 1934∼)선생은 석전 선생의 3남으로 사단법인 성균관유교총연합(成均館儒敎總聯合) 전북본부회장을 거쳐 성균관장(成均館長) 직무대행을 수행하였다. 그는 일찍부터 우리의 전통문화 발전에 관심을 같고, 현실의 물질문명 노도(怒濤)에 밀려 우리의 수 천년동안 숭상했던 도덕적 가치윤리를 회복하는데 혼신은 다하였고, 더욱 선친이신 석전의 작품을 비롯한 수많은 문화유품(文化遺品)을 박물관에 모두 기증하였다. 이는 그의 평소 소신인 문화가 있고, 신의(信義)가 있는 올바른 세상을 이룩하기 위한 몸부림의 일환이었다. 이처럼 조부와 선친의 서예와 유학(儒學), 그리고 육예를 아우르는 가학은 그대로 성재(醒齋)에게 전해졌다.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조부의 작품 활동을 곁에서 도와 드리며, 왕희지(王羲之)의 <낙의론(樂毅論)>을 비롯해 구양순(歐陽詢)와 조맹부(趙孟頫)의 법첩(法帖)을 익히고, 진보적인 사고를 배양하였으니 성재의 사상과 작품의 품성, 그리고 문화를 일깨워 준 스승은 조부와 부친임이 틀림없다. 2. 아(雅)와 속(俗)은 상대적인 개념이다. 아(雅)는 억지로 꾸며 부자연스럽고 어색하며 교활하지 않는 것을 이른다. 아(雅)와 속(俗)은 상대성과 역사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 구체적인 함의는 꾸준히 발전하고 변화되는 중이다. 고대에는 아(雅)와 속(俗)을 둘러싼 대립이 심한 편이었으나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환경에서 아(雅)와 속(俗)의 대립과 구별은 계속 사라지고 있다. 고대에는 정(正), 즉 후세에게 남길 수 있는 사물을 아(雅)라고 했다. 문예방면에서 아(雅)는 보통 품위가 높고 우아함을 가리킨다. 아(雅)의 이상적인 모델은 사상적 함의가 넓고 크며 숭고하고 심오하며 선진적이고, 상상이 풍부하고 아름다우며 경계가 고결하면서 우아하다는 것이다. 반면에 속(俗), 또는 통속적인 것은 주로 문학예술 가치의 세속화 경향을 대변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이는 어떠한 심오한 사상적 함의(含意)를 추구하지 않고, 알기 쉬우면서 많은 사람이 받아들이기 쉬운 방식으로 만족을 추구한다. 또한 대중에게 보편적이고 광범위한 예술적 취향을 만들면서 매력적인 오락적 색채를 보여주고 있다. 1993年 - 대한민국미술대전 서예부문 대상作 그러나 아(雅)와 속(俗)은 동태적 파악의 역사 범주로 시간, 장소, 조건의 변화에 따라 바뀌어갔다. 문학예술발전사에서 당시 속(俗)하다고 여겨진 것들은 후대에 아(雅)한 것이 된다. 다시 말해서 아(雅)와 속(俗)에 대한 관념의 발전과 변천 과정을 통해 이들은 상호 의존하는 두 개의 문화 취향(趣向)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속(俗)함이 없으면 소위 말하는 아(雅)함도 없고, 아(雅)함이 없으면 속(俗)함도 없는 법이다. 아(雅)의 문화는 속(俗)의 문화와 상호의존하면서 서로 포함되고, 아(雅)문화가 속(俗)문화에서 영양분을 흡수하지 못하면 아(雅)한 문화는 생길 수 없고 성장은 더더욱 불가능하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속(俗)문화는 모든 아(雅)문화를 배양하는 어머니라고 할 수 있다. 아(雅)문화는 이전의 속(俗)문화에서 발전된 것이며, 모든 속(俗)문화는 아(雅) 문화로 발전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하나의 문화가 문화사에 오래도록 기억되려면 반드시 속(俗) 단계에서 아(雅)의 단계를 거쳐야 하며 최초의 상태에서부터 정형화(定型化), 다양화(多樣化), 추상화(抽象化) 과정을 겪어야 한다. 엄격히 말하면 아(雅)와 속(俗)의 판단은 심미적 대상과 심미적 주체 사이의 객관적인 관계에 달려있으며, 사물의 유용성과 감상자의 가치관에 따라 달라진다. 아(雅)와 속(俗)에 대한 개별적인 판단은 감상자와 감상 대상의 가치 관계만 반영할 뿐, 심미적 대상의 아름다움(美)과 추(醜)함을 결정지을 수는 없다.博觀約取 厚積薄發 180X32 옛 것은 질박하고 지금의 것이 아름다운 것은 정상적인 순리이다.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고 질박한 것을 경시하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손과정(孫過庭)은 “내용의 질박함은 시대의 발전에 따라 생기고 형식의 아름다운 꾸밈은 풍속의 변화로 인해 바뀐다. 비록 최초의 문자가 말을 기록하고자 생겨났지만 시대의 풍조가 바뀜에 따라 나중에 글자도 자연스럽게 순박하고 인정이 두터운 곳으로부터 천박한 곳으로 흐르고, 서풍(書風)도 질박함에서 아름다운 꾸밈으로의 변화를 여러 차례 거듭했던 것이다. 앞사람을 계승하면서도 또한 변혁을 이루니 만사의 발전 법칙이란 항상 이런 것이다. 옛사람을 배우고 계승하면서도 시대의 기풍에 어긋나지 않고, 또 당대의 사조에 순응하면서도 현세의 병폐에 동화되지 않는 것을 숭상할 수 있다”고 하였다.중한서예가30인전 2010 서예는 ‘고의(古意)’와 ‘고기(古氣)’를 강조한다. 이는 금석기(金石氣)를 바탕으로 다변(多變)을 말하는 것이다. ‘고의’를 숭상하고 ‘고기’를 숭배’하는 것은 우리의 전통문화의 본성 중 하나이다. 원(元)대의 조맹부(趙孟頫)는 고의설(古意說)을 제창했고, 명(明대)의 왕탁(王鐸)과 부산(傅山) 등도 옛 것을 숭상했다. 금석기(金石氣)의 주요 심미적 특징은 기백이 있어 힘차고 박력이 있다는 것이다. 금석기는 일종의 강건한 아름다움으로 서양 미학에서 말하는 숭고함에 가깝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금석기는 남북조(南北朝)와 그 이전의 금석비각(金石碑刻) 서예에서 표현한 심미적 특징 또는 미적 흥취이다. 이는 소박하면서 온화하고 웅장하면서 그윽한 기운과 거칠고 호방한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금석기를 지닌 작품의 선은 힘이 매우 넘치고, 입체미와 율동미가 풍부해 포세신(包世臣)은 “그 결구(結構)가 기이하면서 뛰어나고 풍성하면서 조밀하며 변화가 다양하고 자연스러우며, 그 풍격은 고상하면서 힘이 넘치고, 기운은 소박하고, 골육(骨肉)은 풍성하고 아름다우며, 천진난만하고, 당당하면서 완전무결하고, 그 풍부한 함의와 낭만적인 분위기가 아무리 보아도 싫증나지 않게 한다”고 말했다. 서예에서 질박한 선, 험준한 결구, 역동적인 기세, 고상하면서 순박한 품격 등은 모두 금석기를 표현하는 말이다. 유희재(劉熙載)는 “글씨는 그 학식과 같고 그 재능과 같으며, 그 취향과 같으니 결국에는 그 사람과 같을 뿐이다”고 하였다. 이는 서예가와 예술작품 간의 상호 관계를 강조하는 말이다. 서예작품의 고하(高下)는 서예가의 학식, 재능, 취향 등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이후 강유위(康有爲)는 옛사람들의 언급을 바탕으로 “무릇 글씨란 형학이다(蓋書,形學也)”라고 하며 『廣藝舟雙楫』에서 “고인(古人)들은 글씨를 논하며 세(勢)를 우선으로 삼았다. 중랑(中郎)은 ‘구세(九勢)’라 하였고 위항(衛恒)은 ‘서세(書勢)’라 하였으며, 희지(羲之)는 ‘필세(筆勢)’라 하였다”고 말했다. 따라서 세(勢)는 형(形)의 뒷받침을 벗어나 홀로 존재할 수 없으며, 심지어 형(形)이 있다고 해서 꼭 세(勢)가 있으리란 법은 없다고도 할 수 있다. 세는 형을 바탕으로 해야 비로소 자유로이 모습을 바꿀 수 있고, 형과 세의 상호 의존과 대체 불가능한 관계는 ‘형신겸비(形神兼備)’의 미적 이념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다. 칸트(Immanuel Kant, 1724 ~ 1804))는 분석 판단으로는 개념(槪念)이외의 지식을 얻을 수 없으며 진정한 창조적인 지식은 전부 종합 판단에서 비롯된다고 말했다. 서예 학습도 이러한 종합적인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관점은 전통 서예를 토대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유일한 방법이면서 노력하고 실천하여 증명해낸 진리이기도 하다. 3. 성재의 서품(書品)에는 ‘아(雅)’와 ‘속(俗)’이 내재되어 있다. 아울러 ‘필기(筆氣)’와 ‘체기(體氣)’가 어울러졌으며 원방(圓方)이 함께한다. 그의 서예는 소박하면서 무게가 있는 ‘필기’와 조밀하고 웅장하며 행기(行氣)가 구애 받지 않고, 순박하면서 온화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체기’가 있다는 말이다. 필력(筆力)은 ‘필기’이다. ‘필기’, 즉 ‘필력 표현’에 대한 감상은 구체적으로 필획의 풍성함과 빈약함, 운필 리듬의 빠르고 느림 등에 대한 심미적 인상이다. 그의 글씨를 보면 ‘필기’가 매우 소박하면서 힘이 넘친다. 이는 부산(傅山)의 예술 형식과 심미적 효과에서 놀라울 만큼 일치한다. 운필(運筆)에서의 공통된 특징은 직필(直筆)은 둥글고, 측필(側筆)은 네모지기 때문에 대부분의 필획이 원필(圓筆)이다. 운필에서 ‘제필(提筆)’법을 많이 활용하고 있는데 이는 그가 부산의 필법을 약간 바꾸고 있음이다. 서예의 미묘함은 전부 운필에서 비롯된다. 성재작품의 각진 획은 돈필(頓筆)을 활용하고, 둥근 획은 제필(提筆)을 활용한다. 제필은 중함(中含)이고, 돈필은 외탁(外拓)이다. 중함을 활용하면 소박하면서 힘이 있고, 외탁을 활용하면 웅장하면서 강하다. 중함은 전서의 서법이고, 외탁은 예서의 서법이다. 제필은 부드럽고 완곡하고, 돈필은 정교하면서 또렷하다. 원필은 쓸쓸하면서 고상한 반면, 방필(方筆)은 단정하면서 침착하다. 제필은 힘이 넘치고 돈필은 조화롭다. 원필은 한데 얽혀있는 것이고 방필은 펼쳐지는 것이다. 원필에서 한데 얽혀지지 않으면 위축된 것 같고, 방필에서 펼쳐지지 않으면 정체된 것 같다. 원필이 가파르면 기세가 강해지고, 방필이 반듯하지 못하면 거센 느낌이 든다. 제필은 허공에 떠있는 가느다란 거미줄과 같고, 돈필은 웅크리고 앉은 사자와 같다. 미묘한 점은 방필과 원필을 동시에 활용하는 것이다. 각이 지지도 않고 둥글지도 않게, 각이 졌으면서도 둥글게 보이는 원방필(圓方筆)의 조화가 눈에 띤다. 성재는 그의 행초서(行草書)에서 전필(篆筆) 또는 원필(圓筆)을 사용했기 때문에 소박하면서 힘이 있고, 고상하고 속되지 않은 심미적 효과가 느껴진다. 그는 원필, 삽행(涩行)의 운필 방식을 많이 활용하였기 때문에 필획이 웅대하면서도 소박한 힘이 느껴진다. 이러한 필력의 속도는 매우 느리지만 과감하고 결단력 있으면서 막힘없어야 한다. 이런 이유로 그의 글씨는 기백이 넘치고 힘찬 심미적 특징이 보다 충분하게 구현될 수 있었다. 그는 역대 초서 작품 가운데 부산(傅山)의 작품을 좋아한다. 그러나 본인의 행초서 작품에서는 전서(篆書)를 인용하여 행초서로 들어가는 방법을 활용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행초서에서 전필(篆筆)을 많이 사용했고 필기가 자연스럽고 입체감이 풍성한 필획을 썼다. 선(線)의 형태가 둥글면서 자연스러운 전서의 특징, 점과 획이 소박한 예서의 특징, 점획이 다변하는 해서의 특징, 필획이 역동적인 행서의 특징 등 그의 필세(筆勢)는 웅장하면서 강한 필력, 역동적인 기세, 소박한 모양, 다양하게 변하는 모습 등의 심미적인 특징이 종합적으로 느껴진다. 그러므로 작품의 전체적인 효과를 보면 광활함과 당당함, 그리고 수려함과 강건한 기상이 느껴지는 것이다. 그는 결자(結字)와 장법(章法)을 매우 중시했다. 등석여(鄧石如)가 제시한 계백당흑(計白當黑)을 통해 글자의 짜임새와 구조의 핵심을 깨달았고 장법을 강조한다. 특이 위비(魏碑)인, <석문명(石門銘)>과 <정문공(鄭文公) 등의 마애(磨崖)의 독특함과 고상함을 좋아한다. 그의 ‘소소밀밀(疎疎密密)’의 장법은 여기에서 기인하였을 것이다. 또한 그는 ‘행기(行氣)’를 중시했다. 행기(行氣)는 필세(筆勢)의 감성을 드러낸 것이자 필세에 관한 심미적 인상을 일컫는다. 서예는 일회성이므로 모든 서예 결과물은 연속적인 운필 활동을 통일시켜 하나의 유기적인 존재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구체적으로 필적에 나타나며 필획과 필획, 글자와 글자 사이에서 선후연결과 조화 등 필순화(筆順化) 현상과 시간적인 관계를 드러낸다. 그러나 그 본질은 필력(筆力)의 연속적인 움직임과 그 표현이다. 이렇게 작품 형식 안에서 비춰지고 체험하는 연속적인 움직임이 바로 ‘행기’이다. 서예에서 행기는 이어짐과 끊어짐이 있다. 행기의 이어짐은 필획과 필획, 글자와 글자 사이에서의 연결로 나타나며, 행기의 끊어짐은 필획과 필획, 글자와 글자 사이에서의 돈좌(頓挫)로 나타난다. 성재 작품에는 ‘행기’의 일탕(逸宕)함이 있다. 여기서 “일(逸)은 글씨를 쓸 때 운필이 힘이 넘치고 거침없이 들어가며 필세가 강하다는 뜻이고, 탕(宕)은 글씨를 쓸 때 필획이 굳세고 도도하며 법도를 잃지 않음을 뜻한다”고 소식(蘇軾)은 말했다. 바꿔 말하면 글씨를 쓸 때 필기(筆氣)의 움직임에 따라 붓을 사용하여 필세(筆勢)가 자연스럽게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다. 이는 성재 서예작품의 전형적인 유형이다. 운필은 역세삽진(逆勢涩進) 방식을 활용하였다. 그래서 행필(行筆) 도중 필력이 가로막히고 필획이 멈추려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이때 필호(筆毫) 자체의 탄력이 계속 나타나기 때문에 필획이 끊어지지 않는 현상이 나타난다. 필호의 탄력이 지면의 마찰력을 극복하면서 필봉(筆鋒)은 다시 앞으로 움직이는 릴레이 경주 같은 느낌이 들게 한다. 이처럼 그가 새로운 힘을 추가하는 곳에서 필호는 압박을 받기 때문에 탄력이 증가한다. 그래서 필호의 탄력이 다시 생겨나고 필호가 한층 더 전진하는 곳에서 필획 위에는 예상치 못한 절점(節點), 즉 필획형태의 우연성이 생겨난다. 이렇게 쓴 필획은 뜻밖에 생기기도 하지만 이러한 현상이 바로 필세(筆勢)의 생동감 있는 표현, 즉 행기(行氣)의 존재인 것이다.중한서예가30인전 2010 아울러 순박하면서 온화한 분위기가 그의 서예의 또 다른 특징이다. 이러한 분위기는 소박하면서 힘이 있는 필기(筆氣), 조밀하면서 웅장한 체기(體氣), 아무 것에도 구애 받지 않는 행기(行氣), 부조화의 매력을 지닌 장법(章法), 농담(濃淡)이 적절한 묵법(墨法)에 따라 달리 나타난다. 다시 말해서 그의 서예 작품은 대부분 행기(元氣)가 왕성한 심미적 인상을 준다. 소박하면서 웅장한 힘과 기이하고 변화무쌍한 형태와 역동적인 기세를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고상함과 소박함, 그리고 편안하고 웅대함, 자연스러운 생동감과 당당하고 강인한 심미적 효과를 갖추고 있다. 성재는 금석기(金石氣)를 기초한 강건한 기운이 이끄는 중화(中和)의 미(美)를 강조한다. 중화미(中和美)에는 순박하면서 예스러움과 소박하면서 힘이 넘치고, 웅대하면서 자유분방함과 질박하면서 온화함, 그리고 고상하면서 중후함과 웅장하면서 소박함이 뒤섞여 이루어져야 한다. 다시 말해서 성재의 작품에서 태허(太虛) 기운이 움직이는 금석기와 중화미에 바탕한 원기(元氣)가 넘치는 숭고하고 존엄한 아름다움의 풍격이 보여 짐은 여기에 있다. 물론 그의 서예작품 모두가 지고지선(至高至善)하지는 않을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말하면 다소 어지러운 점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이룬 새로운 형식의 초서는 완전무결의 경지로 나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의 서예 작품은 웅장하고 강인한 기백과 소박하면서 온화한 분위기가 느껴지지만 정교한 예술 형식이 결핍된 경우도 있다. 말하자면 그의 글씨는 변체(變體)에서 정체(正體)로 되돌아가기 위한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성재 서예의 중대한 의의는 바로 여기에 있다. 신서체(新書體)를 창조하려는 서예가는 반드시 이전의 ‘정체’를 포기하고 용감하게 이러한 과도기 상태 ‘변체’를 뛰어넘어야 하며, 새로운 ‘정체’를 창조하는 ‘부정(否定)의 부정’ 과정을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그가 추구하는 서예의 새로운 길은 더 많은 계승자가 참여해야만 완성될 수 있을 것이다. 4. 황방연(黃邦衍)은 진보적인 사고를 가진 서예가로 인품의 절개와 지식의 함양을 중시한다. 조부 밑에서 체득한 성현대도(聖賢大道)에 대한 깨달음은 그의 성향과 서법창작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이처럼 어릴 적부터 훌륭한 가학과 타고난 천성(天性)에 기초한 박학다식(博學多識)함은 그의 서예로 여실히 증명되었다. 본고는 성재의 서예작품에 대한 통시적(通時的)인 단편(斷篇)에 불과하다. 그의 서작(書作)이 적지 않고, 일찍이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대상을 받는 등 많은 수상과 경력을 갖고 있어 일일이 평가하는 데는 필자(筆者) 능력의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본고의 미흡한 부분에 대해서는 모두다 필자의 아둔함에 기인되며 동도자(同道者)로서 건강하고 계속된 훌륭한 작품을 창신(創新)할 것을 간곡히 바라며 글을 맺는다. 東方文化大學院大學校 敎授 李永徹 두손모음2018년 8월 <약력>성재(醒齋) 황방연(黃邦衍) 약력 1954年 生서예가 서예 전각 서각 전주대학교 학사 원곡 서예상 수상(93)대한민국미술대전 서예부문 대상 수상(93)자랑스런 향토인상 수상(94)원광대학교 서예과 출강원광대학교 동양학대학원 겸임교수 역임동방대학원대학교 지도교수 역임대한민국 서예대전 심사위원장 역임국제서예학술연구회 부회장유예회 주재서실 : 서울 종로구 인사동 4길 17. 건국빌딩 30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