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대륙을 이끈 서법가들引领大陆的书法家们| 1편 석개(石開) | 중국의 서법계가 뜨겁다. 국가 차원에서 서법에 대한 전폭적인 장려정책이 진행 중이고, 서법가들 또한 수준 높은 작품으로 서단을 꾸려 가고 있다. 중국의 서법은 문화혁명의 질곡을 딛고 현재 최고의 존중을 받고 있는 분야로 거듭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의 이면에는 중국의 전통문화인 ‘서법’을 자신들만의 고유 언어이자 신선한 예술로 일궈낸 일군의 작가들의 영향이 크다. 《대륙을 이끈 서법가들》은 그들이 일궈낸 현대서법계의 역정과 진화의 모습을 작가들의 육성을 통해 들어보고, 우리 서예계에 반추해 보기 위한 기획이다. 각 성(省)과 도시별로 다른 양상으로 나타나는 중국의 서법계를 차근차근 짚어보는 시간을 갖기로 하고, 우선 중국의 수도이자 전통 서법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베이징에서 뚜렷한 자기 색깔을 가진 네 분의 중견작가들을 만나 그들이 걸어온 길과 예술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려 한다. 그 첫 번째 순서로 일찍부터 서예, 전각, 회화 방면에서 개성미 강한 작품세계로 서법계에 신선한 충격을 던져준 석개(石開) 선생을 강렬한 폭염 속 베이징의 작업실에서 만나보았다. 인터뷰는 성인근 본지 편집주간이 진행하였고, 통역은 안재성 서법학 박사가 맡아주었다.2018. 8. 29글씨21 편집실2010년 34x34cm2005년2017년 34x34cm2006년 138x30cm x22005년1996년 96x59cm2008년 34x34cm2013년 29x24cm2009년 28x19cm2011년 34x34cm2017년 69x46cm석개(石開)1951년생(67세). 전업서화전각가푸지엔 푸저우출생 (福建福州人)푸지엔성서법가협회 부주석역임현) 중국예술연구원 중국서법원 연구원 중국전각예술연구원 연구원 북경인사 부사장제7회 AAC예술-중국의 영향력 있는 예술가 칭호를 부여받음개인서법전각 작품집 등 출판물 다수
<특집>
대륙을 이끈 서법가들引领大陆的书法家们| 2편 후캉메이(胡抗美) | 중국의 서법계가 뜨겁다. 국가 차원에서 서법에 대한 전폭적인 장려정책이 진행 중이고, 서법가들 또한 수준 높은 작품으로 서단을 꾸려 가고 있다. 중국의 서법은 문화혁명의 질곡을 딛고 현재 최고의 존중을 받고 있는 분야로 거듭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의 이면에는 중국의 전통문화인 ‘서법’을 자신들만의 고유 언어이자 신선한 예술로 일궈낸 일군의 작가들의 영향이 크다. 《대륙을 이끈 서법가들》은 그들이 일궈낸 현대서법계의 역정과 진화의 모습을 작가들의 육성을 통해 들어보고, 우리 서예계에 반추해 보기 위한 기획이다. 각 성(省)과 도시별로 다른 양상으로 나타나는 중국의 서법계를 차근차근 짚어보는 시간을 갖기로 하고, 우선 중국의 수도이자 전통 서법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베이징에서 뚜렷한 자기 색깔을 가진 네 분의 중견작가들을 만나 그들이 걸어온 길과 예술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려 한다. 그 두 번째 순서로 후캉메이 선생을 만나보았다. 인터뷰는 성인근 본지 편집주간이 진행하였고, 통역은 안재성 서법학 박사가 맡아주었다. 2018. 10. 26글씨21 편집실2012년 作 50x20cm2012년 作 136x69cm 2012년 136x40cm2012년 180x70cm2012년 60x55cm후캉메이 (胡抗美)1952년생(66세)후베이(湖北) 양양(襄陽)출생 서법가아호 - 녹문산인(鹿門山人), 득천려(得天廬), 一席堂, 得天庐, 三觉翁 등제6회 중국서법가협회 부주석중국예술연구원 석박사 지도교수쓰촨(四川)대학 박사생 지도교수이론저작 및 출판물《中国书法章法研究》, 《书为形学·胡抗美教学文献》, 《中国书法艺术当代性论稿》,《胡抗美书学论稿》, 《胡抗美书法课徒稿》, 《中国古代用人智慧》, 법교안 원고집 등 시문집《志外吟》, 《盼兮集》서법작품집『중국당대서법명가-후캉메이』 등 다수
원로에게 길을 묻다
산돌 조용선 산돌 조용선 선생은 1930년 4월 서울 종로구 예지동 8번지에서 태어났다. 다섯 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로부터 천자문과 붓글씨를 배웠으며, 학창시절에는 먹으로 쓰는 글씨는 늘 도맡아서 쓰곤 했다. 이후 오랜 세월이 흘렀고, 선생은 붓글씨에 대한 향수를 잊을 수 없어 다시금 붓글씨를 시작하게 되었다. 10여 년간 윤백영 여사의 슬하에서 장서각을 매일 출근하다시피 하며 갖가지 고전의 글씨를 임서하며 공부 했다. 1981년 중앙문화센터에 처음 한글서예반이 개설 되어 꽃뜰 이미경 선생께서 강사로 초청 받으셨고, 1년 뒤 그 수업은 산돌 선생에게 돌아갔다. 초급반과 고급반의 수업으로 나날이 발전되어 수강생을 대상으로 매년 전시회를 갖게 되었고, 구성을 갖춘 모임으로 발전되어 산돌한글서회가 생겨났으며 현재까지 다양한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산돌 선생은 고전에 한글 궁체의 무궁무진한 변화를 느끼고, 공부하여 자신만의 스타일로 제해석하여 표현하였다. 그 결과는 지금의 산돌 조용선을 탄생시켰다. 또 조용선 선생의 한글이 유독 돋보이는 까닭은 한문서예의 골기가 밑바탕이 되어서가 아닐까 싶다. 어렸을 적부터, 그리고 한글 서예를 공부할 때에도 한문서예를 따로 또 함께 공부함은 선생만의 한글 재해석에 단추역할을 하였다.현재 원로한 연세임에도 불구하고 하루 일과 속에 꼭 맨손체조와 함께 붓글씨를 1-2시간씩 한다고 전하는 선생의 기운찬 목소리에는 평생 좋아하고 열심히 했던 서예에 대한 강한 자부심이 느껴졌다. 열심히 달려왔기에 가능한 힘찬 조용선 선생의 목소리가 귓가에 여운을 남긴다. 2018. 11. 16인터뷰 김지수 기자
<특집>
대륙을 이끈 서법가들 引领大陆的书法家们| 3편 증래덕(曾來德) | 중국의 서법계가 뜨겁다. 국가 차원에서 서법에 대한 전폭적인 장려정책이 진행 중이고, 서법가들 또한 수준 높은 작품으로 서단을 꾸려 가고 있다. 중국의 서법은 문화혁명의 질곡을 딛고 현재 최고의 존중을 받고 있는 분야로 거듭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의 이면에는 중국의 전통문화인 ‘서법’을 자신들만의 고유 언어이자 신선한 예술로 일궈낸 일군의 작가들의 영향이 크다. 《대륙을 이끈 서법가들》은 그들이 일궈낸 현대서법계의 역정과 진화의 모습을 작가들의 육성을 통해 들어보고, 우리 서예계에 반추해 보기 위한 기획이다. 각 성(省)과 도시별로 다른 양상으로 나타나는 중국의 서법계를 차근차근 짚어보는 시간을 갖기로 하고, 우선 중국의 수도이자 전통 서법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베이징에서 뚜렷한 자기 색깔을 가진 네 분의 중견작가들을 만나 그들이 걸어온 길과 예술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려 한다. 그 세 번째 순서로 증래덕 선생을 만나보았다. 인터뷰는 성인근 본지 편집주간이 진행하였고, 통역은 안재성 박사(서법학)가 맡아주었다. 2018. 12. 28글씨21 편집실 江山天地五言聯 紙本 Q. 개인작업 공간에 대한 이야기 20세기 이후에 들어서 중국 서예는 어두운 시기를 지나왔습니다. 또 중국 사회도 아주 어려운 시기를 지나왔죠. 이러한 이유로, 중국인들의 삶은 아주 안 좋았습니다. 서예는 부귀의 예술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요. 국가가 안정되고 의식주가 충족이 된 이후에야 서예의 발전에도 더 나은 조건을 제공해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20세기 이후 중국 사회가 아주 어두운 시기를 지날 때에, 서예가들은 단지 집안에서 글씨를 연습할 수밖에 없었을 거라 봅니다. 그러나 제가 이러한 시기 때부터 창작 작업실을 열게 된 것은 서예의 봄이 올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고 국가의 명운이 좋은 방향으로 전환기를 맞을 것이라는 예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스스로 가슴을 열고, 더 나은 창작 작품이 발현될 수 있는 그러한 작업환경을 만드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徐大鏞詩 紙本 Q. 국가1급미술사와 같은 국가기술사 제도에 관하여 일반적으로 예술가는 개인의 노동 행위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서예는 국가적으로 민족적으로 몇 천 년에 걸쳐 그 정화가 쌓이며 쇠락하지 않고 발전해 온 민족의 예술형식이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예는 중국인들의 생활에 그리고 문맥에, 혈맥에까지 깊이 침투해있는 문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국가 차원에서 이러한 예술은 보호해야 하고 적극 지원해야 하는 것입니다. 비록 한국에는 미술기사, 예술기사 등 국가 지정의 제도적 장치가 없다고 알고 있지만 한국의 서예가들은 오랜 역사에 걸쳐 서예 발전의 전승을 위한 노력을 이어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이러한 중요 예술에 대한 계승 발전의 노력은 중국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면에서 중국의 국가 1급 미술사와 같은 칭호의 부여는 20세기 이후 국가의 교육제도에 따라서, 문화인들과 예술가들에 대한 존중을 해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이러한 칭호를 부여하고자 국가는 보호와 존중을 받을 대상을 선정합니다. 그래서 1급 서예가나 혹은 1급 화가와 같은 지정 제도는 이러한 중국의 특수한 상황과 대우에 따라 칭호를 부여합니다. 저는 중국국가화원 서예전각원의 원장으로서 국가지정의 이러한 칭호와 대우를 부여받은 것이 첫 번째로 예술적인 측면에서의 성취를 인정받았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고요 두 번째로는 몇 십 년에 걸쳐 제가 중국 서예계를 위해 행한 노력들이나 혹은 학문적으로 예술적으로 한 작업들이 대중에게서 인정을 받았기 때문에 이러한 칭호를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것이 중국 사회가 예술가에게 가장 높은 대우를 부여할 수 있는 하나의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許渾詩 紙本 李商隱詩抄 紙本Q. 국가1급 미술가로서 의무와 책임 중국국가화원의 미술가들은 국내를 대표하고 나아가서는 중국의 대표하는 예술가들입니다. 이분들은 먼저 자기의 예술 영역에 있어서 아주 높은 성취를 이룬 분들이고 사회에서 대중들에게 능력을 인정받은 분들입니다. 그렇기에 그 자격이 되어서 이 화원 소속의 예술가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첫째로 국가화원은 중국 국가가 중요 예술가들을 보호하고 양성하기 위함이 있습니다. 단, 이분들 화가들은 본인의 개인생활에 있어 스스로가 더욱 뛰어나기를 바라고 있고, 더욱 출중해지기를 노력하고 있습니다. 더욱 좋은 작품을 창작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죠. 두 번째로 그들은 국가가 진행하는 프로젝트를 수행할 의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국내 및 국제적인 문화교류 사업에 참여하는 것이죠. 그들은 각자의 영역에 있어 대표 자격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본인의 영역에 있어 시대의 예술이 발전함에 있어 스스로 책임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이는 그들이 사회진보와 인류의 문명, 민족문화의 발전에 있어 책임이 있기 때문이죠. 이러한 측면에서 아무나 쉽게 칭호를 부여해 줄 수는 없습니다. 칭호를 부여한다는 것은 그에 따른 의무와 책임 또한 부여되는 것입니다. 杜甫詩 紙本 2011年Q. 쩡라이더 개인에 대한 호칭의 의미에 대해서 한 명의 예술가가 행하는 작업이나 예술 창조는 그것이 꼭 절대적으로 공익의 평판을 얻기 위해 행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예술가는 최종적으로 그의 예술작품과 예술 풍격을 바탕으로 하여 사회와 전체 예술계를 마주하면서 마지막으로 예술계 전체의 그에 대한 평판과 비평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중국 서예계와 사회는 저에 대해 서로 다른 평판들을 주게 되었는데 저에게 있어 이러한 칭호들은 큰 영예이기도 하며 저를 다각도로 평가하는 말들이 되기도 합니다. 또 저에게 있어서 저를 표현하는 아주 엄격한 가치 평가의 표준이 되기도 할 텐데요. 저는 이러한 칭호에 대해 사실 크게 염두에 두지 않으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저는 지금까지 어떠한 저에 대한 칭호나 직책을 통해서 저 스스로가 크게 만족을 느끼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술가는 최종적으로 예술 성취로서 그리고 학문의 성과로서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회는 서로 다른 시대의 각도에 따라 서로 다르게 평가나 비평이 이루어질 수가 있는데요. 저희들도 이러한 평가에 대해 무시할 수는 없죠. 저에 대한 칭호나 평가들은 단지 하나의 부분적인 참조용으로써 또는 큰 동력으로서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에 대한 온전한 평가를 대변한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夢 紙本Q. 쩡라이더의 작품세계에 대해(본인의 예술풍격이 청 이후 비학영향을 받은 예술 풍격이라는 대중의 평가에 대해) 제가 생각하기에 대중과 서예계의 저에 대한 평가는 관중들 개개인의 심미적인 입장에서 저를 바라본 평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제 생각을 말하자면 저는 첩학과 비학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마땅히 비학과 첩학을 교차 사용해야 함을 말하고 싶습니다. 비학과 첩학은 중국 서예가 남긴 양대 중요한 유산입니다. 과거 오랜 세월에 걸쳐 우리 조상들은 첩학 위주의 학풍이 주류를 이루었죠. 첩학은 첫째로 서예문화가 형성됨에 있어 여전히 주류였고 큰 부분을 차지하였습니다. 그리고 청대에 들어서 포세신, 강유위, 우우임 등 서예가들이 비학사상을 창도하기 시작하였고 나아가 비학서예의 지위를 전무후무한 최고의 높은 수준으로 올려놓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래서 또 그들의 세대를 잇는 후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자연스럽게 선인들이 이룩해 높은 성취의 영향을 받게 되었습니다. 비학의 영향을 받게 되었죠. 墨云白雨四言聯 紙本그리고 첩학 서예는 실용의 목적을 가지고 이루어져왔기 때문에 서신, 편지, 척독, 수권 등 실용의 기능을 가지고 응용되어 발전되어 왔죠. 그래서 작품의 크기들이 모두 작습니다. 현재의 서예는 순수한 하나의 예술형식으로 발전하였습니다. 많은 작품들이 미술관에 걸리게 되고 큰 공간에서 전시하기 위한 형태로 변하였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첩학의 영향을 받은 작품은 전시공간을 장악하는데 어려움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오히려 비학 서예가 주는 무겁고 진중함, 드넓고 강렬한 기세 등은 오늘날의 전시 작품의 형식에 더욱 부합하고 있습니다. 작품 크기를 크게 하여 작가의 내면에 내재된 감정과 상태를 과감히 드러낼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현시대를 살아가는 서예가들 중에 비학의 영향을 받지 않은 작가가 드문 것입니다. 만약 큰 글씨를 쓰기 위해 난정서의 글씨를 이렇게 크게 확대한다면 이 또한 현시대에는 맞지 않는 거라 봅니다. 그래서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곧 저의 현재 예술세계에도 부합하는 것이고 20세기 전체 서예계의 조류나 흐름에도 부합하고 있는 것입니다.秋菊幽蘭五言聯 紙本 2013年Q. 선생님의 초서작품에 대하여/ 건묵용필법 건필(乾筆)로 글씨를 쓰는 법은 제가 대략 10여 년 전부터 연구를 시작해 온 하나의 서예 풍격입니다. 사실 이는 비백서(飛白書)라고도 합니다. 이 비백서는 제가 독창한 것이 아닙니다. 약 이천여 년 전 서한 시대에 채옹(蔡邕)이라는 사람이 비백서라는 것에 대해 처음 제시하였다고 합니다. 이 비백서는 채옹이 당시 인부들이 벽에 칠을 하는 것을 보고 찾아낸 서예에 대한 느낌과 고뇌를 통해 나온 하나의 용어입니다. 역대 서예가들은 이 비백서라는 것에 대해 각자가 나름의 느낌을 구현해내기 위해 많은 노력들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적당한 비백서의 구현 방식을 찾지 못하였고 대중들로 하여금 인정받는 비백서로서의 작품이 나타나지 못하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비백서는 아직까지도 민간에서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 그러한 상태에 놓여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최근 10여 년 동안 연구와 노력을 통해 이 비백서를 하나의 서예 형식으로 표현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또 현재는 비교적 완성도 있는 비백서로서의 창작 작품 수준에 이르렀다고 생각합니다. 이로 인해 서예계에서도 나름의 긍정적이고 일치된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 이 비백서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상당한 난이도를 요구합니다. 기술적으로 큰 요구를 필요로 하죠. 첫 번째로 매 작품 작품마다 보일 듯 말 듯 표일하면서 중국전통서예의 서사적 기술적 과정을 표현 완성해야 하죠. 이 안에는 붓 안에 먹물 함유량이 적다고 해서 글씨의 무게를 잃어서는 안됩니다. 또 글자의 선질이 얇아 종이에 먹물이 깊게 투과되지 않음을 느낄 겁니다. 두 번째로 저는 작품의 첫 자에서 마지막 글자가 완성될 때까지 그 안의 기필과 수필, 획과 획 사이의 연결 관계까지, 하나의 기의 흐름으로 마지막까지 써내려간 듯이 완성해야 합니다. 그래서 제 작품은 똑같은 작품이 다시 나올 수가 없습니다. 나 스스로도 똑같은 작품을 쓸 수 없고 다른 이도 똑같이 모방할 수 없습니다. 하나 하나 작품들이 모두 오직 하나로만 존재하는 작품들입니다. 그래서 저의 비백서는 현재 당대 중국 서단에서 큰 호응과 인정을 받는 하나의 형식으로서 대중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저의 몇 십 년에 걸친 연구가 어느 한 방면에서 이룩한 성과라는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 이쪽 방향에 있어서도 계속된 연구를 해 나아갈 계획입니다. 作歌一詞語系列 90x65 2003年李日華詩 紙本Q. 선생님의 그림에 대한 이야기 뒤의 그림의 최근에 그린 작품입니다. (그림을 시작하게 된 여정에 대해) 저는 원래가 서예가입니다. 하지만 많은 분들이 제가 화가라도 생각하십니다. 서예가이든 화가이든 저는 서로 충돌이 되는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중국 미술사를 보면 화가이자 서가로 업을 삼은 예술가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들은 모두 걸출한 화가였고 동시에 우수한 서예가였습니다. 예로, 송나라 휘종은 화가였고 또 서예가였습니다. 또 문징명 등도 있죠. 이처럼 많은 유명한 사람들이 화가이자 서가였습니다. 단지, 현재 20세기 이후에 들어서 서가와 화가가 더욱 분화가 되었습니다. 각자 독립적으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이는 사실 지금에서야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는데요. 만약 화가가 글씨가 안되면 그 작가의 회화는 최종적으로 높은 수준의 작품에 이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역시나 멀리 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書法如畵, 畵以如書’라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사실 저의 회화 행위도 이 두 가지 용어를 바탕으로 탐색하고 연구한 결과입니다. 제 회화에 대한 대표적 특징을 말씀드리면 저의 초묵회화(焦墨繪畵)에 있습니다. 그리고 오랜 시간에 걸친 노력 끝에 저의 초묵회화는 대중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제 초묵회화를 하려면 몇 가지 요소를 구비해야 합니다. 첫 번째로 중국 전통 서예기법에 있어서 고난도의 모필장악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즉, 아주 농후한 먹으로 화면에 칠 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두 번째는 비백서를 쓸 수 있는 본령을 갖추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초묵회화는 주가 흑과 백으로 이루어져 있는 회화이기 때문입니다. 이 흑과 백 사이에 회색이 가미되는데요 이 회색은 흑과 백 사이의 깊이를 조절하고 화면의 공간을 적절히 채워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세 번째로 화면의 면적과 구성에 있어 현대서예에 대한 새로운 탐색이 드러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세 가지 요소가 더해져 비로소 초묵회화를 그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오늘날에 이러한 능력을 구비한 작가가 매우 적다고 봅니다.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저의 초묵회화는 역사적으로 이러한 방식으로 작업한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나 저만의 표현방식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저는 제 표현방식을 통해 무궁한 자유로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과거의 회화 형식은 주로 사생에서의 모필과 먹을 사용해 눈에 보이는 것들을 옮겨다 그리는 것이었죠. 저는 제가 사유하고 창조한 세계를 화면에 담습니다. 제가 창조한 산과 강을 그립니다. 완전히 저만의 방식을 사용해 저만의 언어와 풍격으로 표현합니다. 마침 뒤에 제가 그린 그림이 걸려있는데요. 이것은 채묵회화 입니다. 이 그림은 제가 소속되어 있는 중국 국가 화원의 일대일로(一帶一路)의 국가 미술 프로젝트에 참여해 창작한 그림입니다. 전 세계 60여 개 국가의 미술인들이 실크로드에 가 고찰 및 사생을 하였고 이 그림은 중국 서부 황토고원을 방문하여 그린 것입니다. 황토고원에 가면 이 그림과 같은 유사한 경관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소재를 주제로 하여, 일련의 탐색과정을 통해서 나만의 회화 형식을 표현하게 되었습니다. 다행히도 이러한 회화 형식이 나오자마자 대중들의 좋은 평가를 얻었습니다. 물론, 그간의 연구를 통해 여전히 탐색 중이고 더 나은 창작 작품을 하기 위해 다양한 풍격의 형식들을 시도 중입니다. 앞에 걸린 작품도 서예의 초서와 산수화 형식을 혼합하여 창작한 것으로 검은 획을 보면 덕(德) 자를 초서로 쓴 것입니다. 제 이름의 래덕(來德)인데, 덕(德) 자이죠. 산수화를 그리듯이 서사하였습니다. 이 또한 창의성이 있는 작품입니다. 최근 이러한 형식의 많은 작품들을 하고 있습니다. 역시나 탐색의 과정 중에 나온 작품들입니다. 仙書花事五言聯Q. 앞으로 진행하고자하는 방향에 대해 앞으로 저는 10가지 주제가 있는 10권의 작품집을 출간할 예정에 있습니다. 첫 번째 작품집은 저의 소해(小諧)집입니다. 99종의 소해집입니다. 일반적으로 소해는 과거부터 현재까지 한 작가가 한 가지 풍으로 보여줬던 것이 대부분이었죠. 한 가지 면모에 글자가 많고 적음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소해 분야에 있어서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작가는 거의 없다고 봅니다. 이는 소해가 글자가 작아서 창작의 구성에 있어 많은 제약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가 준비 중인 99종의 소해집은 매 종마다 각각의 표현 언어와 풍격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그래서 제 소해 창작 영역에 있어서 구속과 한계를 벗어나는 자유로움을 표현하고자 합니다. 이게 저의 첫 번제 작품집의 주제입니다. 두 번째 주제는 대련(對聯)집입니다. 조금 전에 제가 여러분들께 저의 대련집을 보여드렸는데 그것은 저의 초기 작품집입니다. 대련으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그 형식이 매우 단조롭습니다. 풍부한 세계를 표현하는데 제약을 가지고 있죠. 하지만, 제 대련집을 만나보시면 매우 풍부하고 다채로운 풍격을 보여드릴 수 있을 겁니다. 書法小品一組 紙本작품의 풍격도 다채롭겠지만 형식에 있어서도 창의성과 탐색성이 있는 작품을 싣고자 노력할 것입니다. 나아가 완성도 있는 작품을 하도록 할 것입니다. 세 번째는 저의 비백서입니다. 조금 전에서도 비백서에 대해 말씀드렸지만 비백서만을 담은 작품집이 될 것입니다. 크기가 큰 작품부터 벽을 덮을 정도가 될 것이고요 아주 작은 작품에 이르기까지 요만한 크기의 작품도 있을 것입니다.창작 가능한 범위에서 그 발전 가능성과 공간의 미를 표현하고자 합니다. 네 번째는 저의 현대서예입니다. 저의 현대서예에 대한 탐색은 30여 년의 세월에 걸쳐 이루어졌습니다. 현대서예에 대한 탐색에 있어서는 비교적 많은 노력을 한 작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재 대량의 현대서예 창작 작품들이 있는데 현대서예의 창작과 이념이 결집된 작품들입니다. 王維詩 紙本 2009年다섯 번째는 한자서예조소작품입니다. 한자서예에 대해 창작을 진행하고 이를 다시 창의적인 입체조형작품으로 전환한 작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입체의 조형성이 가미된 한자 작품입니다. 서예를 조형화한 작품이죠. 그리고 현재 완성을 앞두고 있습니다. 여섯 번째는 한자서예 건축 작품입니다. 저는 문자가 가지고 있는 구조적 원리를 통해 재조합을 진행하고 건축구조로 재창조한 한자서예 건축 작품을 선보일 겁니다. 현재 유명 건축학자들과 협의를 통해 진행 중에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현재의 건축물들을 보면, 대부분이 서양식의 영향을 받은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중국에 과거의 고전적이고 전통적인 건축물들이 있었죠? 하지만, 현재는 서양식 건축물들로 대부분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는 한국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서울만 보아도 성냥갑 모양의 네모반듯한 건축물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모두 서양식 건축물입니다. 그렇다면 동방에 건축물들에 있어 그 신분과 언어를 대부분 잃어버린 것과 같다고 봅니다. 禮一文字系列 紙本그럼 우리는 어떻게 잃어버린 것들을 다시 찾아올 수 있을까요? 이에 대한 고민을 시작으로, 저는 서예의 한자 구조가 가지고 있는 언어로부터 새로운 해법에 대한 진행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한자서예의 형태를 통해 건축구조 공간을 창조해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섯 번째 진행하려는 주제이죠. 일곱 번째는 초묵회회입니다. 방금 설명드렸죠? 그리고 여덟 번째가 채묵회화 입니다. 색채가 들어가는 회회죠. 아홉 번째는 저의 수묵회화입니다. 마지막 열 번째가 문헌집이 됩니다. 제가 기술한 문헌집들이 있는데 300만 자에 이르는 자료집입니다. 여기에는 저의 예술에 관점과 사상, 그리고 서예에 대한 인문학 논고 등이 실리게 될 것입니다. 현재까지 다수의 이론집을 출간한 경력이 있습니다. 倪云林詩 紙本열한 번째로는 제 시집을 출간할 겁니다. 현재까지 제가 작시한 시가 삼 천여 편에 이르고 장편은 300여 편에 이릅니다. 시집을 같이 출간하는 이유는 오늘날의 예술가로서 시의(詩意)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반드시 예술가라면 예술을 함에 있어 엄격한 견지와 충만된 시적 감성, 자신만의 예술창작세계, 그리고 예술창작에 있어 이론적 지식의 수반이 갖춰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것들을 완성해나가는 것이, 저의 이후의 작업 방향이 될 것입니다. 지금 제가 80년대 출간한 저의 작품집이 있습니다. 곧, 여러분들께 보여드릴 텐데요. 이 작품집이 출간된 지 30여 년이 흘렀습니다만, 현재 예술 서적 시장에서도 큰 인기를 보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책을 출간할 당시는 중국 서예가 현대서예로 들어서는데 막 새로운 탐색이 시작될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제 작품들을 보면 현재 30여 년이 흐른 지금 다시 지금의 시각으로 평가를 해보아도 여전히 시대를 앞서가는 현대서예의 풍격을 그대로 보여주었다고 봅니다. 그래서 그때 당시에 3만 원 정도 하던 책 가격이, 지금은 권당 40만 원 정도에 거래가 되고 있습니다. 곧, 저와 같이 그 책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래서 저의 사상과 관념은 쉬지 않고 계속 발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방금 준비 중인 11부의 작품집은 전면적으로 저의 예술세계의 과정을 개괄하고 정리한 성과가 되고 미래 발전의 방향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曾來德(zēng lái dé)1956년생(62세). 쓰촨(四川)성 출생현)중국국가화원 부원장중국국가화원 서법전각원 원장중국서법가협회 이사교육위원회 부주임중국미술관 전문평가심사위원회 위원베이징대학 객좌교수; 문화부우수전문가, 국가1급미술사출판 <쩡라이더서법작품집>, <쩡라이더현대서법작품집>등 작품집《写无尽书》、《曾来德谈艺录》、《书法的立场》、《横竖有理-曾来德文集》、《书法之诗、水墨之诗》저술。
기획좌담회
한·중 서예시장 분석과 대안 모색얼마 전 국회에서 서예진흥법이 통과되어 그동안 암울했던 한국서예가 다시금 솟아날 수 있는 전기(轉機)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이러한 때에 국제서예가협회 중국 주석인 유정성 선생께서 한국작가들의 중국서예시장 진출에 대한 의견을 내었고, 이번 좌담회에서 구체적인 방안과 대안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자리가 마련되어 더욱 뜻깊은 좌담회라 할 수 있다.劉正成(유정성)이 안건으로 이야기 나누는 것은 이번이 세 번 째입니다. 우선 중국 서예가 발전하게 된 배경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중국의 서법 시장도 30여 년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시작이 있었고, 흥함이 있었으며, 현재는 하강하는 추세에 있습니다. 70년 말, 80년 초 당시에는 서예가의 작품은 누가 받아주기만 해도 아주 기뻐했으며, 시장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82년도쯤, 지인 한 명이 작품 몇 점을 가지고 제게 와서 보여줬습니다. 재백석의 새우 그림, 서비홍의 고양이 그림, 장대천의 산수화와 다른 그림 등을 가지고 와서 진품인가 가품인가를 물었습니다. 내가 보기에 문제없는 진품이었습니다. 그 당시 가짜를 만들 사람이 별로 없었습니다. ‘이 그림을 사온 것이냐’라고 물어보니까, 당시 중국 돈으로 400원에 사 왔다고 했습니다. 40년 전에는 돌아가신 작가들의 작품만 판매되고, 살아있는 작가들의 작품은 팔리지 않았습니다. 80년대 중기에 이르러, 86~87년도에 일본 위에티엔이라는 작가와 계공 선생이 중국미술관에서 전시회를 했습니다. 당시 계공 선생의 작품을 영보재에서 한 점에 400위안을 받았습니다. 당시 5-6년 사이에 돌아가신 분들 작품이 400위안 정도였습니다. 86년도에 계공 선생님 작품 1점 가격이 400위안 매겨졌습니다. 400위안이라는 가격은 중국 사람에게 아주 비싼 가격이었기 때문에 사는 사람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일반 작가들의 작은 작품이라도 일본 돈으로 1000엔 정도였습니다. 제가 그때 일본 작가를 따라온 제자들을 영보재에 데리고 가서 계공 선생님 작품을 사게 하였습니다. 그러는 바람에 영보재에서 바로 다음날 작품을 800위안으로 올렸습니다. 지금 계공 선생의 작품 가격은 몇 십만 위안입니다. 20-30년 사이에 가격이 엄청 올랐습니다. 한•중•일 세 나라에 서예시장의 차이점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시장은 대개 대중소비에 의존하는데, 일본과 한국 시장은 주로 자국 작가들이 골동품을 많이 선호합니다. 자신의 제자들이 스승의 작품을 사주는 것을 제외하고, 시장이 거의 형성되지 않고 있습니다. 중국의 서예시장은 경매시장이 잘 형성된 편입니다. 대형 경매장에서는 주로 작고작가나 대가들의 작품이 주로 거래되고, 작은 갤러리에서는 현재 살아있는 작가들의 작품이 주로 거래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말씀드리자면, 중국의 서예 시장에서 가장 활발한 곳은 산동성과 감숙성입니다. 산동성은 비교적으로 비싼 작품들이 판매되고, 감숙성에서는 저렴한 작품들이 거래됩니다. 왜냐면 산동성이 감숙성보다 경제적으로 좋은 편이기 때문입니다. 감숙성의 창주와 즈보지방에서 중국에서 뛰어난 작가들은 대부분이 거래됩니다. 중국에서 유명한 서예가들 중에 이곳에 가보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감수성은 산동성보다 금융 소비는 낙후되었지만 서예 시장 기반은 아주 좋습니다. 2001년도에 제가 감수성에 처음 갔을 때 반절지 한 점에 천 원 정도에 팔았습니다. 비슷한 나이 대에 작가들, 왕용, 손백상 선생님 같은 분들도 거의 비슷한 가격이었습니다. 나이 비슷한 작가 중에도 지명도가 조금 뒤떨어진 작가들은 100원 200원에도 거래되었습니다. 유명한 곽자서 손백상 선생들도 200원부터 팔기 시작했습니다. 감수성은 서예 시장 기반이 튼튼하기 때문에, 감수성 통우현이라는 지방에는 집집마다 작품을 걸려있습니다. 제가 처음 통우현에서 작품 판매전을 했었는데, 작품을 사러 온 사람들의 돈 봉투가 두툼했습니다. 집에 보관해 오던 오 원짜리 십 원짜리 돈을 가져와 작품을 사러 온 것입니다. 만약 1,000원짜리 작품을 샀는데, 다른 사람이 1,200원 준다면 바로 팔아넘겨요. 200원 남기고도 거래를 합니다. 2007년도에 퉁우이현에 화랑이 몇 십 개가 있었습니다. 그때 성장님과 한담할 기기회가 있었는데, 구분 말이 “우리 현에 화랑이 오 십 개가 있으면 최소 백오십 명이 먹고 살 수 있습니다. 화랑에서 일하는 종업원도 있어야 하고, 표구사도 있어야 하기 때문이지요.”라고 했습니다. 당시 인구가 2-3만 명밖에 없는 작은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길이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그 현에 서화 판매가 번창하면서 지금은 화랑만 1,000개가 되었고, 인구도 십몇 만 명 정도로 늘었습니다. 그래서 중국 문화부에서 통우이현을 ‘서예지향’이라고 명명했습니다. 지금 저와 같은 레벨의 작가 작품들은 한 점에 몇 만 원에 팔리기도 하지만, 너무 비싸기 때문에 잘 팔리지 잘 팔리지 않습니다. 반면 젊은 작가들은 몇 백 원에도 팔기 때문에 잘 팔립니다. 100원이나 200원의 아주 저렴한 가격으로 팔아서 기초 자본을 마련하고, 그것으로 작품 활동을 계속해 갑니다. 산동지방과 감숙성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청년작가들을 양성하는 서예 시장이 많기 때문에 전업 작가로 생계가 가능합니다. 한국과 일본의 작가들은 대개 교육을 기반으로 살아가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대학교나 사설학원을 개설하여 생계를 해결하는데, 중국은 이렇게 서예 외적인 방법을 살아가는 서예가는 비교적 적습니다. 중국의 서예 시장은 서예 발전에 큰 역할을 했으며, 한국과 일본에도 참고할게 있을 겁니다. 그래서 올해 초 한국을 방문했을 때 한국작가들의 중국 서예 진출을 제의했던 것입니다. 중국은 2005년도까지 가장 왕성했는데, 이때는 ‘예물시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예작품이 선물이나 뇌물로 쓰였던 것입니다. 근자에 중부에서 부패 척결을 내세우면서 지나치게 높은 작품 가격은 정상으로 조정이 되었는데, 일반 작가들의 작가들은 본래 가격이 그다지 높지 않기 그런대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젊은 작가들이 경매시장에 진출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왜냐면 경매 회사들이 작품 가격이 높지 않은 젊은 작가들의 작품 거래를 꺼리기 때문입니다. 싼 작품은 팔려봤자 수수료가 많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요즘 젊은 작가들은 경매회사나 화랑보다 인터넷 경매를 많이 합니다. 요즘에는 인터넷 경매보다도 위쳇을 이용한 위쳇 경매를 많이 하는데, 북경 유리창에 있는 행단미술관에서 하는 행단위쳇경매가 있습니다. 여기서는 젊은 작가뿐만 아니라 저나 왕용 같은 영향력 있는 작가들이 함께 경매를 합니다. 그런데 사실 저나 왕용 같은 작가는 위쳇 판매를 원하지는 않습니다, 왜냐면 젊은 작가들과 함께 하기 때문에 가격을 높이 책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조그만 작품을 출품하여 가격을 낮춥니다. 그래도 이 경매에서 명가 작품의 가격이 올라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재미를 느끼고 주목하게 되면서 젊은 작가들 작품이 덩달아 올라가게 됩니다. 이같이 한국에서도 명가는 작은 작품을 출품하고 젊은 작가들은 좀 큰 작품을 내놓아 함께 명가와 젊은 작가들이 함께 경매에 참여하는 방법은 어떨지 고려해봤으면 좋겠습니다. 김양동(金洋東)우리나라에 서예 시장..., 시장이라는 것은 소비가 형성되지요. 그런데 그 소비가 어떤 성격의 소비인가가 중요합니다. 즉 돈을 주고받는 거래의 소비인가, 아니면 그냥 도덕적으로 교환하는 소비인가? 조선시대에는 거래를 하게 되면 상인으로 천시했습니다. 더구나 서예는 선비들이 했던 것이었기 때문에 더 중시되었는데, 그러다가 일제시대가 되어 추사의 서예가 활발하게 거래되었습니다. 그것은 찾는 사람이 있고, 작품이 귀하니 값이 형성되었지요. 그러다 광복 이후 국전이 생겨나면서 한국 서단이 생겨나게 되었죠. 그러나 역시 한국에서도 돌아가신 분들의 작품은 거래가 되었지만, 산 사람들의 작품은 대 원로작가를 제외하고는 거의 형성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배우는 문도들에 의해서 스승의 작품을 사드리곤 했지요. 그리고 80년 대 이후 90년 때 까지 경제발전으로 부가 축적되니까 글씨가 거래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한국도 마찬가지로 젊은 작가들의 작품은 돌아보지 않고 원로 중심으로 형성되었습니다. 2000년대 이후 특히 2010년 이후에는 한국경제도 분화되고 급격히 문자 환경, 문화의 미적으로 보는 관점이 변화가 많았습니다. 세대가 교체되면서 한자를 모르는 세대가 정계, 제계를 주름잡다 보니 한자서예는 자연스레 인기가 떨어지게 되었고, 그중에 반성적 의미에서 중국 경제의 부흥과 더불어 중국과의 관계성에 의해서 중국 문화를 눈여겨보던 관점 중 하나가 서예였지요. 그것은 서예의 희망이었지만, 대중의 관심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김종건(金鍾鍵)변화 중에서 가장 큰 변화를 말씀드리자면, 그전에는 디자이너들이 하나의 도구로서 캘리그라피를 찾았었고, 지금에 와서는 일반인들이 손글씨를 잘 쓰기 위해서 취미로 배우기 시작합니다. 펜이 아닌 붓펜을 쉽게 사용을 하는 거죠. 한글에서는 훈민정음이라고 하는 고체 스타일과 궁서체 스타일, 민체 스타일 등을 배워서 자신의 글씨를 만들어내는 거죠. 전에는 디자이너가 쓰는 하나의 도구였다면 지금은 취미로서도 하고, 최근에 와서는 나도 작가가 된다는 의미에 작품으로서의 글씨를 배우기도 합니다. 몇 년 전부터 또 한 가지 주목할 사항은 글씨를 하나의 힐링의 대상으로 여깁니다. 먹을 갈고, 글씨를 쓰고, 요가를 하고 차를 마시는 공간으로 활용하는데, 지금 이 공간이 바로 그러한 공간입니다. 외국인들이 그런 문화를 체험 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젊은 작가들은 중국과 일본에서 교류전을 하고 있는데요. 중국 북경중앙미술학원 디자인과 교수랑 전시를 하고 싶은데, ‘너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러면 한글 디자인인 것 같습니다. 한글 글꼴에 대한 다양성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호남미술사법대에서 교류전을 한 적이 있는데 거기에는 전통 서예가 타이포그래피 캘리그라피가 모여서 중국과 교류전을 했습니다. 여태명(余泰明)오늘 우리가 모인 것은 서예가들도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80-9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에 서예 시장이 아주 활발했는데, 지금에 와서는 정말 어렵기만 합니다. 어제 국회에서 서예진흥법이 통과되면서 기대를 가지고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2000년 이후에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준비과정에서 엄청난 변화가 있었습니다. 북경에 있는 집값이 오백 배 이상 올랐습니다. 그리고 서예 시장도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굉장히 활성화가 되었고, 치바이스 작품가격이 오르다 보니 청년작가들 작품도 함께 올랐던 것 같습니다. 저는 3년 전부터 연말에 페친들에게 이벤트를 합니다. 페이스북에 일 년 동안 활동을 하고, 저를 알고 있는 페친들에게 인터넷 경매를 합니다. 어떤 때는 높은 가격으로 낙찰이 되고, 어쩔 때는 낮은 가격에 낙찰되기도 합니다. 이런 것도 하나의 방법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보면 현판, 기념비를 만들게 되면 작품비 면목이 없습니다. 돌이나 시공비는 책정이 되는데 글씨를 쓴 것에 대한 작품비가 없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한국 사람들이 중국에 진출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중국 사람의 중국 사람 작품을 사게 되지, 한국 사람의 작품을 사진 않습니다. 그것을 극복하는 것을 논의해야 할 것입니다.섭흔(葉欣-이에신)중국 사람들도 대개는 자기 지방의 뛰어난 작가 작품만 삽니다. 전국적으로 다 잘 팔리는 사람은 손에 꼽힙니다. 중국 시장도 한국작가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잘 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각각 먹고 살 수 있는 길은 있습니다. 오리지널 시장에 형성되지 않은 작가들이 많습니다. 어떤 작가는 시장에 걸면 잘 안 팔리는데, 자기 글씨를 좋아하는 사업자 한두 사람이 있으면 먹고 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시장을 무시하는 겁니다. 그러면 또 비싸게 팔게 됩니다. 그런 현상이 많습니다. 사실상 사람들이 작가들의 위치, 활동력 등 종합적인 것을 보고 구매하지 작품만을 잘 썼다고 팔리지 않습니다. 중국의 모든 작가들은 경매에서 시작할 때 0원부터 시작합니다. 어떤 사람은 다 표구해놓고 20원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면 표구비도 나오지 않습니다. 안 사더라도 자기 돈으로 작업을 계속합니다. 그래서 작업시간이 많이 필요합니다. 유정성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은 한국작가들이 이번에 경매장에 들어가는데, 자기 돈 아니면 주변에 아는 사람을 통해서라도 작품을 사라. 그래야 활성화가 될 것이다. 진출하려면 너무 예술적으로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개인전 할 때 작품도 보면 자신의 예술세계를 보여주고 싶어 하는 작품과 팔고 싶어 하는 작품이 금방 보이잖아요? 이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경매에 내놓았을 때 그림처럼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양식이 필요하고, 큰 작품보다는 소품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큰 기대를 하기보다는 일단 시작을 해보고 여러 번 진출해야 할 것입니다. 여초선생님 작품은 중국에 많이 진출하잖아요. 가끔 보면 여초 선생님 작품을 찾는 사람이 있습니다. 일중선생을 우리들은 잘 알지만 중국 사람들이 잘 모르기 때문에 아무리 얘기해도 사는 사람, 찾는 사람이 없습니다. 지금 구당 선생님도 거의 진출하지 않기 때문에 잘 모릅니다. 초정 선생님도 잘 나가죠, 이렇게 중국에 진출하려면 젊을 때부터 많이 나가고 알려야 합니다. 2019. 1. 10글씨21 편집실
서예진흥법 통과, 그 과정과 차후 방향에 대해서
서예진흥법이 통과되었다. 이제 시행령과 시행규칙이 만들어진 후 다가오는 6월부터 시행된다. 이 법안이 통과되기 까지 약 5년간의 기간이 소요되었으며, 서총의 네 단체장들의 큰 역할, 함께한 많은 의원, 입법추진위원회 등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 합심하여 이룬 결과이다. 이번 인터뷰는 법안통과의 중심에 있었던 서총(한국서예단체총협희외)의 총간사를 맡고 있는 이종선 간사를 만나 법안 통과까지의 과정과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 자세히 들어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2019. 1. 23글씨21 편집실 Q-1. 2013년 11월 1차 서예진흥정책포럼 개최로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는데, 그 이전의 구체적인 시작 경위와 더불어 1차 서예진흥정책포럼의 결과는 어땠나요? 1차 포럼이 열리기 1년 전입니다. 2012년 11월, 이동국(예술의전당 서울서예박물관) 서예부장에게서 연락을 받았습니다. 최재천 국회의원이 서예 단체장들을 한자리에 모으고 싶다는 연락이었습니다. 저는 미술협회 분과위원장을 해서 미술협회 대표로 가게 되었고, 서예협회는 노복환 이사장, 서가협은 김성환 이사장, 서도협은 김영기 회장님이 대표로 최재천 의원실로 모이게 되었습니다. 서단이 여러 단체로 나눠진 이래로 여러 단체장이 한자리에 모인 것은 초유의 일이었습니다. 그때 최재천 의원이 서단을 위해서 뭔가 일을 좀 해보자고 하였고, 서단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부터 이야기해보기로 했습니다. 아무런 준비 없이 갔던 우리는 각자 생각나는 대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습니다. 교육 문제, 서예과 폐지 문제, 서예가들의 생활상 같은 얘기들을 했지요. 그러자 최의원이 이렇게 중구난방으로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 대표자들이 정리했으면 좋겠다고 했고, 다시 만날 것을 약속했어요. 그때 요약했던 것이 서예가들의 활동 공간의 문제로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을 꼽았습니다.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은 생긴 이후로 20년이 지나도록 리모델링이 되지 않아 어떻게 하면 잘 활용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있었고, 또 하나는 서예 교육에 대한 문제였고, 그리고 작가 지원이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어서 그것을 문제 삼았습니다. 이렇게 세 가지 문제를 요약해서 최 의원을 다시 만났습니다. 최의원께서 이제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회가 활동하는 것이 좋겠다. 우선 포럼을 한 번 주기적으로 열어보자 하셨습니다. 그런 포럼을 열기 위해선 사람들이 동원되어야 하는데 그럴 때는 소속 단체 회원들이 와줘야만 했죠. 그때 각 단체 대표들이 암묵적으로 이야기를 한 것이 ‘이제 네 단체가 합심해서 같이 노력하자. 일정한 협의체도 필요한 때이다.’ 이런 이야기가 집약됐죠. 그다음 해에 네 단체장이 모여서, 이 공동 목표인 서단의 현안을 해결하기 위한 협의체를 만드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여 서총(한국서예단체총협의회)가 만들어지게 됩니다. 그것이 2013년 8월입니다. 서총을 결성하고 첫 번째 행사로 제1차 포럼을 개최한 것이 그해 11월에 열린 제1차 서예진흥포럼입니다. 서예인들이 모두 모인다고 홍보를 했고, 각 계에서 참석해주었습니다. 그때 국회의원이 열세 명이나 오셨습니다. 김한길 민주당 대표, 정종섭 장관, 유진룡 문광부 장관, 교육부 장관도 오시고, 문화예술계에서는 서예계의 원로이셨던 故 동강 조수호 선생, 김동호 문화융성위원회 위원장, 고학찬 예술의전당 사장, 혜문스님을 비롯해 많은 분들이 오셨습니다. 방송·언론 쪽에서는 홍석현 중앙일보 사장을 비롯한 KBS, CBS, EBS 사장님들도 오시고 각 계 알만한 분들은 전부 오신 겁니다. 모두 오셔서는 이구동성으로 ‘서단이 화합한다는구나! 정말 축하할 일이다.’라며 모두 축하해주었습니다. 침체되는 서예가 반드시 중흥을 시켜야 하는 덕목이라고 생각하며 격려와 지지를 아끼지 않았죠. 그때 서예가들은 고무(鼓舞)가 되었습니다. 서예진흥을 위한 결의문도 낭독했습니다. 제1차 포럼의 의의라고 한다면 한국 서단이 서총을 중심으로 모인 것, 그리고 서예를 진흥시킬 수 있는 불씨를 하나 만들어 낸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Q-2. ‘서예진흥법’제정의 필요성과 당위성이 아주 중요한 요점이었을텐데요, 어떠한 방법으로 강조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우선 서예가 동양 고유의 예술이고, 또 우리 민족의 역사를 통해 면면히 이어져 온 전통예술입니다. 그런데도 교육정책이라든지 서구문물에 의해 밀려 나가고 있습니다. 이것을 그냥 사라지게 하면 안 되는 덕목이며, 어떻게든 계승시켜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또, 인성이 점차 피폐해지는 사회 문제 속에서도 서예가 할 일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현재 미술이라는 장르를 위해 편성되는 예산이 천억이 넘습니다. 그런데 미술에 속해있는 서예는 지원이 없습니다. 그래서 법을 제정하여 서예를 보호해야겠다고 의견을 모았습니다. Q-3. 5년간의 노력 끝에 얻어낸 결과입니다. 지난 5년간 어떠한 과정을 거쳤는지, 그 과정에 대해 개괄적인 설명 부탁드립니다. 우선 초기 과정을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서예진흥법을 만들기 위해서는 국회의 관심을 끌어야 하고, 또 국민적 관심을 주목받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서예가 왜 필요한지, 왜 서예진흥법을 만들어야 하는지에 대한 당위성을 알리기 위해 네 번의 포럼을 국회에서 열게 됩니다. 계속 포럼을 개최하고 진흥법 초안이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국회의원을 찾아다니면서 공동발의를 요청하고, 서예인들과 국민들에게 지지 서명을 받았습니다. 2015년 11월 최재천 국회의원이 대표 발의를 하고 119명의 의원이 공동발의를 하는 서예진흥법 발의안을 발표하는 기자회견을 열게 됩니다. 그래서 발의가 되어 교문위원회에 상정해 놓았는데, 그때 대통령 탄핵정국이 되어 국회가 열리지를 않는 것입니다. 결국 국회를 열지 못하고 탄핵이 되어 정국이 마감되어 19대 국회가 폐회됩니다. 국회가 막을 내리면 발의가 되었던 법안은 자동 폐기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만들었던 법안은 제대로 상정도 못 해보고 폐기되는 안타까운 지경을 맞이합니다. 이후 20대 국회가 다시 구성되었고, 바로 유성엽 교문위원장님을 만나서 서예진흥법 대표 발의를 부탁드렸죠. 유성엽 의원은 서예에 대해 많이 알고 계시고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흔쾌히 대표 발의를 맡아 주셨고, 다시 국회의원회관 대강당에 전국에서 모인 서예인들과 함께 서예진흥법의 당위성과 필요성에 대한 포럼을 열었고, 다시 의원들의 지지 서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법안도 다시 수정하여 작년에 재발의 하는 기자회견을 열게 됩니다. 이제 법안이 발의되면 주무부서의 검토를 거치게 되는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 문광부에서 미술진흥법을 문광부에서 마련하고 있어 미술진흥법이 만들어지면 서예진흥은 더불어 일어나는 것인데, 서예진흥법이 별도로 필요한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그때 장관님께 이야기한 것이 지금까지 미술 속에 서예가 있으면서도 서예 쪽에 지원되는 것은 전무하다. 서예는 서예대로 살아나가는 길밖에 없다. 그동안 문광부에서 서예를 보호하고 육성하려고 노력했다면, 우리가 무엇 때문에 법을 별도로 만들려고 하겠느냐, 지금까지 안 해온 것을 봐서 미술진흥법이 만들어진다고 해도 같은 결과가 나올 것이다. 꼭 필요하다는 항의 겸 협조 요청을 했고, 문광부 장관님도 동의를 해주었습니다. 또 기재부 법안에 보면 5조에 서예진흥원의 설립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진흥원을 만들어서 재정을 확보하고 지원을 해야 한다는, 그런데 기재부에서는 진흥원 설립에 대해 반대를 했습니다. 이유는 진흥원이 만들어지면 정부는 거기에 대한 예산을 확보해야 하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국가 예산상 진흥원 설립은 어렵기 때문에 서예진흥법을 반대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일리가 있습니다. 만들어지는 법마다 모두 그렇게 한다면 국가 예산이 감당할 수가 없겠죠. 그래서 아쉽지만 5조 진흥원 설립의 조항을 실태조사로 바꿔서 법률을 수정했습니다. 그 수정안을 가지고 유성엽 교문위원장이 바로 대표 발의를 했습니다. 국회의 운영은 전반기와 하반기로 운영이 됩니다. 그때 유성엽 위원장이 전반기 교문위원장을 맡고 있을 때 교문위를 통과했으면 하고 바라고 유성엽 의원도 노력했습니다만, 그때 또다시 국회가 정치적인 문제로 열리지 못했습니다. 결국 하반기로 넘어가게 되었고,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바람이 좋게 불어서 좋은 결과가 나왔습니다. Q-4. 20대에서 결국 성공했는데 그때의 자세한 과정을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입법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서예인들의 관심을 집약시켰고, 추진위원회를 중심으로 서예인들이 활발한 활동을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문광부하고 밀접하게 접촉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2018년 11월 23일 10시 국회 본회의가 열립니다. 국회 본회의에서 우리 안건이 열두 번째 안건으로 상정이 됩니다. 박인숙 의원이 낭랑한 목소리로 법안 발의를 했습니다. 재석 의원이 205명이었고, 그중 199명이 찬성을 하고 6명이 기권을 해서 당당하게 본 회의를 통과했습니다. 그때 아마 그 광경을 지켜보는 전 서예인이 감동 했을 것입니다. Q-6. 서예진흥법 통과까지 정말 많은 분들의 도움과 노력이 있었는데요. 한 분 한 분 소개 부탁드립니다. 우선 안팎으로 말씀을 드려야 하겠죠, 우리 서예계부터 말씀을 드리면 처음 서예진흥법을 시도할 때 온 서예인들이 반신반의하면서 믿지 않았습니다. 입법이라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보니 관심도가 아주 낮았습니다. 그 관심도를 집중시키는 일이 어려웠죠. 이 과정에서 서총 공동대표단체의 네 단체장(권인호, 윤점용, 강대희, 김영기)들이 굉장히 노력 하셨습니다. 각 단체의 관심을 집약하고 취합하고, 참여하게 하는 데 많은 일조를 하셨지요. 밖으로 보면, 많은 도움이 있었는데 그중에서 최재천 의원님의 노고를 뺄 수가 없습니다. 그분이 없었다면 이 진흥법은 만들어지지 않은 것이죠. 우선 본인이 국회의원이었던 19대에서 포럼을 계속 이끌어가면서 서총(한국서예단체총협의회) 탄생의 산파 역할도 직접 맡으셨던 것이고, 무산되었지만 발의까지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20대에 와서 유성엽 위원장이 대표 발의를 하는데에도 최재천 의원이 연결고리 역할을 해주셨습니다. 그분의 역할이 아니었다면 어려웠을 것입니다. 백번을 말해도 부족한 내용이죠. 그다음에는 아무래도 이번 국회에서 대표 발의를 해주신 유성엽 의원의 노고를 빼먹을 수 없습니다. 그분이 교문위원장을 맡으면서 교문의원들을 설득하고 대표 발의를 하여 된 것입니다. 그분의 영향이 컸습니다. 그리고 간사를 맡으셨던 이동섭 의원, 손혜원 의원, 박인숙 의원께서 문광위 위원들에게 서예진흥법이 반드시 만들어져야 한다. 조속히 처리하자고 설득하여 문광위(문화체육관광위원회)를 통과할 수 있었죠. 문광위원들에게도 고마운 것입니다. 그리고 법사위원회에서도 거부 반응 없이 그대로 통과시켜주었고, 또 본 회의를 통과하는데 문희상 국회의장님을 비롯한 여러분들이 노력해주셨습니다. 모든 국회의원에게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합니다. 또 드러나지 않게 지원을 해주신 서예진흥재단 홍석현 이사장님, 그 밖에 여러 문화예술계의 지지가 컸고, 예술의전당 고학찬 사장을 비롯한 직원분들도 많이 협조해주었습니다. 고마운 분들이 많습니다. Q-7. 앞으로 남은 과정은 구체적으로 어떤 사안이 남았나요? 이번에 국회에서 통과된 법안은 모법입니다. 그것을 기준으로 우리 주무 부서인 문화관광부가 시행령과 시행규칙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시행령과 시행규칙에 관한 간담회를 엊그제 문화관광부하고 진행했습니다. 그 시행령과 시행규칙은 석 달 정도에 걸쳐 수정 보안하게 됩니다. 각계의 여론도 수렴하고, 과정을 거쳐 공람을 하고 공청회를 열게 됩니다. 또 법제처에 심의를 받고 국무회의를 통과해야 합니다. 그것이 대게 3, 4, 5월을 거쳐 6월 12일부터 시행하게 되어있습니다. 이 과정은 실질적으로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시행령과 시행규칙을 잘 만들어야 어떻게 시행할 것인가가 되는 것이죠. 우선 기본계획을 수립해야 하는 조항이 있는데, 기본계획에도 단기 계획과 중장기 계획이 있습니다. 단기 계획도 중요하지만, 중장기 계획은 어떻게 수립하느냐에 따라 서단의 체제를 바꾸는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굉장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리고 서예 교육 문제인데, 서예 교육을 하기 위해 전문 인력이 필요하고 전문 인력을 어떻게 양성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상당히 디테일한 문제입니다. 또 교재를 개발하고 커리큘럼이 완성되어야 할 것입니다. 또 서예진흥위원회 설립에 대한 필요성과 필요하다면 어떻게 만들어질 것인가에 대해 논의되어야 합니다. 법이라는 것이 너무 세부적이어도 안되고 너무 포괄적으로 해도 해석하기 어려워 모호하게 진행될 수 있기 때문에 지금 논의 과정에서 다뤄져야 할 것입니다.Q-8. 진흥법 통과로 인해 침체된 서예발전이 기대되는 가운데, 교육에 관한 방안도 관심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교육과 관련된 사항으로 어떤 것들이 논의되고 있나요? 사실 서예의 중흥이라고 하는 것은 교육으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저변이 약한 것은 발전을 기대할 수가 없죠. 그 저변이 바로 학교 교육입니다. 학교 교육에 서예를 어떻게 다뤄지게 할 것 인가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서예진흥법이 여러 가지 이유로 필요하지만 어쩌면 이 서예교육 때문에 정말로 필요하다고 보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학교에서 어떻게 서예 교육을 시키게 할 것이냐, 교육이 실시된다면 누가 가르칠 것인가,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가 중요한 얘기입니다. 그것이 추상적이거나 지금까지 우리가 해왔던 대로 장님 문고리 잡는 식으로 해서는 교육의 효과를 달성할 수 없을 것입니다. 충분한 준비가 있고, 그런 다음에 실시해야 교육의 효과가 있게 되는 것이죠. 그런 것을 위해 교육장을 설치하고 전문 인력을 모집하고, 교육하고 교재를 만들고, 커리큘럼을 짜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Q-9. 전국의 서예인들이 서예진흥을 위해 앞으로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요? 우선 서예가 국민적인 사랑을 받으려면 서예가 서예다워야 합니다. 다른 장르와 다른 면모를 보여줘야 하는 거죠. ‘서예인들은 일반 사회인과 다르구나’, ‘역시 서예인이구나’ 할 수 있는 면모를 보여줘야 합니다. 스스로 자성도 해야 하고 행동도 조심해야 합니다. 교육에서도 마찬가지 일겁니다. 스스로 서예인으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서예술을 하는 서예가로서 품위를 유지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6월 12일, 시행령이 시행되면 각 지방 자치 별로 조례를 만들 수가 있습니다. 이게 모법이 되어 중앙정부에 이런 법이 있으니 우리 시, 도에서도 이런 조례를 만들어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각 지방 의회는 시행령과 시행규칙에 준해서 그 지방에 맞는 조례를 만들 수 있죠. 각 지방에서도 각자 흐트러지는 목소리를 내지 말고 같이 모여서 요구 사항을 가지고 의원들과 접촉하고 조례를 만들어 지방, 지역별로 활성화할 수 있습니다. Q-10. 이번 성공적인 법안 통과에 대해 소감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제가 특별한 역할이 있는 것은 아니고 실무 간사로서 단체의 의견을 조율하고 조정하고 또 서단과 국회를 연결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아무도 기대하거나 믿지 않았던 서예진흥법이 만들어진 것은 거의 기적이나 다름없습니다. 그 기적을 만들어낸 주역이 바로 서총의 네 대표단체입니다. 그분들의 노력과 단합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던 거죠. 6년 전, 1차 포럼이 다시 생각나는데요. 처음으로 서예인들이 모두 모여 소리 높여 이제는 서예를 진흥시키자 결의문을 낭독했습니다. 그 소리가 귀에 쟁쟁합니다. 또 많은 분이, 사회 저명인사들이 오셔서 서단의 단합을 축하해주었습니다. 이런 것들이 모여 오늘의 서예진흥법이라는 대어를 낚은 셈인데요. 하지만 이것은 법만 만들어졌다고 해서 갑자기 뭐가 좋아지거나 하지 않습니다. 서예인들은 서총이 진행되는 과정과 더불어서 앞으로 이런 단합된 힘을 결집해야 합니다. 그럴 때 정부도 우리를 지원하고, 사회가 우리를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서총은 이제 법인화를 추진합니다. 그러면 서총이 대정부 창구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서단의 중지(衆智)를 모아서 침체된 서예를 다시 일으키고, 다 죽어가는 서예교육을 살려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많이 지켜봐주시고 지원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특집>
引领大陆的书法家们| 4편 이강전(李刚田) |
이영철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제5대 신임총장
- Q. 방문화대학원대학교의 연혁을 보면 1996년 학교법인 동방학원 창립총회에서 초대 이사장 김응현 선생님을 선임하였고, 같은 해 12월 학교법인 동방학원의 설립허가로 출발. 이후 학교가 걸어온 길에 대해서 네 말씀하신 것처럼 저희 학교는 존경하는 여초 김응현 선생님께서 1996년에 설립하신 학교법인 동방학원에서 출발하였습니다. 그 이수 우여곡절을 겪고, 2013년 고광용 현 이사장님이 총장으로 취임하였습니다. 그리고 2014년에 기존의 동방대학원대학교에서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고, 기존의 학과를 문화예술콘텐츠학과, 불교문예학과, 자연치유학과, 미래예측학과로 통합 조정하여 특화시켰습니다. 이후 2015년에는 제4대 총장에 박경재 박사가 취임하였고 2019년부터 제가 총장직을 맡게 되었습니다. Q.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의 특성화 사업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저희 대학에는 특화된 4개 학과가 있습니다. 앞서 말했던 문화예술콘텐츠학과, 불교문예학과, 자연치유학과, 미래예측학과입니다. 문화예술콘텐츠학과는 서예, 회화, 미학, 디자인, 문화경영, 교육학 등의 전공으로 우리 고유의 전통문화를 현대적 콘텐츠로 재탄생 시켜 창조시대에 걸맞은 문화와 예술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불교문예학과는 불교 역사와 철학, 불교문학 및 불교예술, 상담심리 등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현대화를 통해 우리 고유문화를 계승 발전시키고, 불교사상을 다양한 시각에서 연구하는 전문가를 양성하고 있습니다. 자연치유학과는 명상상담, 약용작물, 피부미용치유, 요가치유 등의 전공에서 인간의 내재적인 면역력과 자연치유력을 증진시키고, 힐링 등을 통하여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고 건강을 회복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미래예측과는 주역, 풍수, 인상, 명리 등 동방의 고전과 예지학에 대한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연구를 통하여 불확실한 미래에 활용할 수 있는 지혜를 창출할 수 있는 전문가를 양성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전문 연구기관으로 문화예술콘텐츠연구소, 불교문예연구소, 환경조형예술연구소, 아이티 융합연구소, 자연치유연구소, 동양학연구소 등을 두어 각 분야의 전문적인 연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Q. 대학의 국제화를 현실화하기 위한 중·장기 전략이 있는데, 그중 가장 무게가 실려 있는 전략에는 어떤 것이 있고, 또 현재 진행 상태는 어떤지? 국제화라면 내용적인 면과 기술적인 면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기술적인 면이란 국제적 소통에 필요한 언어를 비롯한 네트워킹을 말합니다. 그러나 기술적 문제 이전에 가장 중요한 것은 내용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소홀하기 쉬운 우리문화가 가진 힘, 그 자체가 바로 국제화의 무기요 학교의 경쟁력이 될 것입니다.우리문화의 현대화와 세계화는 한류를 통하여 이미 확인되고 있습니다. 우리문화를 바탕으로한 올바른 사상 위에 전통문화를 콘텐츠화하고, 생활 속에 계승 발전하여 대중문화와 결합시키고, 전통문화가 갖는 가치와 의미에 대한 인지도와 중요성을 인식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봅니다. 이러한 현대화를 통해 우리문화는 미래문화를 창조하는 중요한 문화자원으로 새로운 부가가치 및 국가의 브랜드를 형성할 수 있다고 봅니다. 아울러 저희 학교는 현재 교육부가 정한 유연학기제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특히 중국, 몽골, 네팔 등의 외국인을 받아들여 교육부가 정한 교육과정과 규정에 의해 석사와 박사과정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Q. 인재양성을 위해 대학에서 뒷받침할 수 있는 요소에는 어떤 것이 있고, 총장님께서 생각하시는 강조할 부분은? 우수한 인재확보와 양성을 위해서는 교수와 학생의 연구활동과 학습환경에 대한 지원이 필요합니다. 특히 올해는 보다 쾌적한 강의공간을 제공하기 위해 5층 신축건물을 마련하였습니다. 이는 학생들의 학습환경을 높이고, 또한 교수님들이 연구와 강의에 매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저는 이러한 기초에서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을 생각입니다. Q. 최근 대학사회에서 구조개혁, 학사구조 개편 등 여러 문제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대학이 발전할 수 있는 방향은? 학사의 문제는 출산율저하, 고령화의 문제와 직결되기도 하는데 본교의 학생들은 주로 중년이나 중년이후 연령대입니다. 내용적으로도 본교는 비제도권 학문을 제도권으로 안착시키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교의 학과와 전공은 일반대학과 다른 부분이 많습니다. 그동안 동방문화중 많은 부분이 제도권 학문에서 벗어나 있어,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전통문화의 콘텐츠들을 계승하고 창조적으로 재해석하여 현대사회에 맞게 발전시켜 새로운 블루오션을 창출하고 있는 것이 본교의 최대 장점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학과 특성화에 따른 집중화, 동방문화의 계승을 통한 선도학문 구축의 전문화, 특성화 분야에 대한 관련 산업 협력체계를 강화하는 연계화, 경쟁대학 사이에서 비교우위를 지속하는 차별화를 통한 동방문화 창달, 전통문화의 현대화, 세계롸로 인류공동체 발전에 기여하는 대학원대학교를 목표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Q.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준비하는 학생에게 한 말씀 한다면본교의 학생들은 사회 각계각층의 경험자와 비교적 연령대가 높아 학교 발전에 대한 의견제시가 적극적인 편입니다. 이런 의견을 수렴하여 학사행정에 적극 반영하고 있으며, 학교주변건물들을 매입하여 시설을 확충하고, 교육환경을 꾸준히 개선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학교와 학생간의 소통을 통하여 만족도를 높여나가고 있습니다. 부디 전통문화의 현대화를 통해 미래 문화를 창조하는 길에 여러분이 동반자가 되어주시기 바랍니다. Q. 끝으로 이번 신임 총장에 취임된 소감과 앞으로의 행보에 대해서 모두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저희 대학은 특화된 학과와 연구소가 있습니다. 이를 학과와 연구소가 유기적으로 소통하여 우리의 전통문화가 갖는 가치와 의미에 대한 현대화와 국제화하는데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또한 존경하는 이사장님의 뜻을 이어 학생들의 쾌적한 학습환경을 만들어 나아가고, 교수님들을 비롯한 구성원 모두가 행복한 학교가 되길 노력하겠습니다. 아무쪼록 동방문화의 계승을 통한 재해석과 특성화 분야에 대한 관련 산업의 협력체계를 강화하여 다른 대학과의 비교우위와 차별화에 중점을 두겠습니다. 다시 말해서 동방문화의 창달, 전통문화의 현대화, 세계화, 인류 공동체 발전에 기여하는 학교가 되는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2019. 4. 1 인터뷰 김지수 기자
이 작가의 思생활_심은 전정우
자신만의 서예세계를 구축한 서예가- 심은 전정우 어린 시절 학교근처 미군부대에 배치된 헬리콥터는 어린 심은의 눈에는 그저 신기한 선망의 대상이었다. 이런 헬리콥터를 특별활동시간에 서예반에 들면 탈 수 있다는 얘기에 서예를 처음 접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얼떨결에 시작된 서예와의 인연은 지금의 심은 전정우를 탄생시켰다. 심은 선생은 농필천자문, 심은체, 문자추상작품 등의 작품을 선보여왔다. 이는 단순히 법고의 차원에만 머무르지 않고 실질적인 핵심인 철학과 미학을 통해 자신만의 서예세계를 구축한 것이다. 1987년 3월 동아미술상과 9월 제6회 대한민국미술대전 서예부문 대상을 수상한 심은 선생의 당시는 최고의 엘리트만 근접할 수 있었던 삼성그룹 비서실에서의 근무를 뒤로하고 서예에 전념하기로 한 그 다음해이다. 직장생활을 병행하며 퇴근 후 공부를 하는 것은 늘 시간에 쫓기게 되었고 그러한 공부는 심은 선생의 성에 차지 않았다. 이후 과감히 서예에 몰두한 그는 영광스러운 성과를 얻은 것이다. 얼떨결에 시작된 서예 그리고 푹 빠져 지내게 된 초중학교 시절, 서예를 향한 과감한 선택이 보여주는 심은 전정우 선생의 思생활에 대해 들어보았다. Q. 지금까지 붓과의 인연을 이어올 수 있었던 이유는?초등학교 때 처음 글씨를 써보니 너무 재미있었어요 그것이 중학교 시절까지 내내 이어졌지요. 고등학교와 대학교 때에는 공부 때문에 서예를 잠시 놓았다가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 다시 글씨를 쓰게 되었어요. 늘 서예에 대한 생각을 하던 차에 서른 살이 되었을 때 그때에 최고의 선생을 찾아가자는 생각에 여초선생님을 만나서 공부를 하게 된 것입니다. 6개월 정도 직장생활과 함께 서실을 병행하며 공부를 하던 중 직장을 옮기게 되었고, 옮긴 직장은 밤 9시 넘어야 일을 마칠 수가 있었어요. 그 당시 여초 선생님께서는 오후 5-6시쯤이면 서실 문을 닫으셔서 더 이상 공부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10여년을 직장 때문에 서실에 다니지 못하고 혼자 취미삼아 연습하는 정도로 공부를 했었지요.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직장을 관둘 때가 됐구나’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후 서예에 전념하게 되었습니다. 水澤山林 32x128x21987년 동아미술제 시상식 - 미술상 수상Q. 여초 선생님과의 인연에 대해 여초 선생님께 사사 받기 전까지 어떠한 인연은 없었어요. 다만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다니면서 스스로 터득했던 것이, ‘무엇을 배우던 최고의 스승에게 배움을 받자’라는 것이었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깨달은 바를 일기장에 적어놓았어요. 그 당시 필방을 통해 서예를 배울 수 있는 스승을 추천받아 6개월 정도 선생님을 찾게 되었지요. 그러다가 일중 김충현 선생님과 여초 김응현 선생님을 알게 되었는데, 일중 선생님께 배우면 서예가로서 출세를 할 수 있고, 여초 선생님께 배우면 서예를 연구하고 공부하며 제대로 공부할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여초 선생님은 당시 돌아가시기 전까지 늘 학구열이 있으셨고 근면성실하며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정신세계, 한마디로 선비정신을 그대로 지키셨던 분입니다. 또 일중 선생님께서는 그 당시에도 서단을 위해 활동하는 최고의 원로서예가였지요. 그때 저는 출세하려고 글씨를 쓰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제대로 공부를 해봐야겠단 생각에 여초 김응현 선생님께 가르침을 받고자 했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6개월의 가르침으로 응용하여 지금까지 공부했어요 그것은 나에게 큰 행운이었지요. 하지만 꾸준한 가르침을 받지 못했던 것은 불행이었습니다. 이후 직장생활을 관두고 여초 선생님께 다시 사사 받게 되었지요.1988년 국제서법예술연합 현판식Q. 이번에 안평안견창작상을 수상하여 초대전을 개최하는 소감은? 이번에 안평안견창작상 수상자로서 초대전을 개최하는 것이 10번째 전시입니다. 첫 개인전시 때문에 모두 기억이 나고 특별합니다. 열 번째 전시를 맞았는데 이번에는 (사)안평안견현창사업회에서 초대를 한 것이기 때문에 타 장르의 예술가들이 많이 볼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것은 서예도 미술의 한 파트로써 다른 예술가들이 보고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기회의 전시가 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求古尋論1987년 동아미술제 미술상 수상작품1987 동아미술제 수상작품 앞에서구당 여원구 선생(우)/ 심은 전정우 (좌)Q. 2년 전 인천에서 열린 개인전에서 심은 혼용체 120체 천자문을 선보였는데.. 2004년도에 세종문화회관에서 열었던 개인전에서는 순수서예와 캔버스를 응용한 회화 작품과 또 서예와 조각을 접목한 작품을 선보인 후 스스로가 어느 정도 공부가 된 것 같다는 건방진 생각이 들었었습니다. 이후 다음에는 어떻게 공부를 하는 것이 좋을까 하는 생각을 두어 달 하게 되었어요. 고민을 하면서 생각해보니 제가 항상 나름대로의 테마를 정해서 공부를 해온 것을 알게 되었지요. 그렇게 2004년 전시가 끝나고 정한 테마가 바로 천자문이었어요. 천자문은 1,000자가 다 다른 글자로 되어있기 때문에 공부를 하면 큰 공부가 되겠다고 생각했지요. 천자문을 10년간 연습해서 5체의 천자문을 써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시작해보니 연습해서 될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느 정도 글씨의 기본이 되지 않고서는 천자문을 쓴다는 것은 정말 보통일이 아닙니다. 10년을 바라보고 시작했는데 한 번 쓰고나니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많이 힘들었고, 다시 쓰고 싶지 않은 생각이 들었지요. 주변에서 많은 사람들이 연습을 얼마나 했냐고 질문하지만 720개의 천자문을 쓰는데 720번을 썼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혹여 틀리더라도 다시 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혼신의 힘을 다해 써야합니다. 1987년도 말레시아 新明日報 주최 \'국제 화문서법새\'에서 국제부문 특우장 수상작廣開土大王碑 千字文 70x140人 시리즈2(群像) 35x35Q. ‘선’하나에 담긴 철학을 말한다면? 글씨라고 하는 것은 ‘스킬’이라고 하는 기능 면도 있지만 정신적인 면도 있습니다. 그래서 과거부터 서예는 사대부, 소위 선비정신이라고 하는 선비들이 하는 행위였습니다. 그것이 현대에는 예술로 승화가 된 것이지요. 그렇다면 선비라고 하면 첫 번째로 생각나는 것이 무엇인가하면, 바로 선비정신입니다. 부정부패를 한다든지 마음이 깨끗하지 못하면서 글씨를 쓰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이지요. 올곧은 정신이 바로 서예정신입니다. 그러니 서예라고 하는 것은 그 정신적인 무념무상, 자기의 생각조차 없는 세계입니다. 그것은 저는 ‘선의 경지’라고 합니다. 선의 경지에서 자기 자신을 잊어야 합니다. 생각이 많아진다면 글씨는 흐려질 것입니다. 자연미도 떨어질 뿐 아니라 인위적이게 되는 것이지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예술은 자연이라고 합니다. 본래의 것. 자기를 잊은 상태에서 나온 선, 그것을 다른 말로 획이라고 하는데, 누구든지 그으면 선이 되지만 획이라고 한다면 그사람의 생각과 철학, 관념이 다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 획을 본다면 그 사람의 정신이 어떻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글씨의 가장 궁극적인 목표는 선의 예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획의 예술이지요. 대한민국미술대전 대상 수상작품 앞에서 심은 전정우농필천자문 앞쪽 일부Q. 요즈음 연구하는 작업에 대해 저는 테마를 잡아서 공부를 합니다. 글씨와 같은 그림, 그림 같은 글씨, 이게 조형성으로 보았을 때 서화의 동원이라는 근원을 찾다보면 글씨 자체가 추상입니다. 그래서 ‘그림하고 어떻게 접목을 시킬 수 있을까?’ 생각했을 때 일부에서는 반서반화다. 즉 반은 서예이고 반은 회화라는 것입니다. 문자 추상은 서양화의 남간 선생, 동양화의 김기창 선생 또는 고암 이응로 선생께서 선보였습니다. 그런데 그 선생님들의 작품세계라는 것은 문자를 원형元型화해서 회화로 표현한 것입니다. 문자에 뜻이 없고 그냥 회화작품입니다. 문자를 원형元型 했기 때문에 문자추상이라고 했지만, 저는 그게 아닙니다. 서예를 하기 때문에 서예의 글자를 가지고 회화성을 표현하고 또 그 회화를 서예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래서 반은 서예고 반을 회화라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2-3년에 한 글자씩 테마로 잡아 작품을 합니다. 처음에는 고를화(龢), 그다음엔 없을 무(無), 그 다음엔 무리 중(衆) 그리고 얼굴 면(面)을 했습니다. 그리고 금년 1월부터 사람 인(人)으로 작품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글자들을 선택한 이유는 현시대에 국내적으로나 세계적으로 끊임없는 갈등구조가 펼쳐지고 있는 가운데 아름다운 동행을 강조하고 싶은 마음을 담은 것입니다. 아름다운 동행이라는 큰 테마 속에 한 글자, 한 글자를 맞추어 작품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글씨라는 것은 선, 획의 예술입니다. ‘획을 어떻게 더 레벨 업 시킬 것인가?’ 그리고 ‘문자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끌고 갈 것인가?’라는 고민을 많이 해보니, 자기 인생에서 나오는 지향목표와 현재 공부하는 것이 합쳐져 나오는 것이 창조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항상 지향목표를 가지고 도전하고 공부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공부해왔던 120서체라는 것을 조금만 그 시대 상황에 맞춰 변화시키면 자기만의 창조물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求古尋論 70x205Q. 서예에 대한 목표는? 서예도 어떤 미술이라고 하는 큰 장르 속에 하나의 파트라고 봅니다. 서예는 별개의 작품세계라기보다 전반적인 미의 세계로 봤을 때 서예도 거기에 포함되어 있는 예술세계라고 생각하지요. 그래서 저의 작품세계가 서예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역을 더 넓혀야 한다는 잠재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해왔던 작업들은 과정일 뿐입니다. 앞으로 나가려는 세계는 획이라고 하는 선의 미감을 어떻게 해서 국제미술시장에서 승부 볼 수 있느냐 하는 생각과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Q. 서예진흥법에 대한 견해는? 서예진흥법이 통과된 것은 굉장히 환영할 일이며, 서예발전을 위한 초석이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너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럴 때 일수록 우리 서계계의 단합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현재는 협회나 법인 등 단체가 많습니다. 서예진흥법 행정에 관한 일들은 전문 행정가들이 잘 수습해야 하며 서예가들은 자신의 작품세계를 쌓으며 공부를 해야 할 것입니다. 서예가들이 전부 진흥법에만 쫒아가게된다면 본질이 흐려질 것입니다. 서예의 진흥을 위해 응원을 하되 각자의 위치에서 다투지 말고 큰 대의를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반드시 서예계는 더욱 발전할 것입니다. Q. 후배 청년작가들에게 들려줄 조언은?조언이라고 하는 것은 처음 공부하는 사람, 10년 공부한 사람, 20년 공부한 사람에게 하는 것이 그 부류대로 이야기 하는 것이 다릅니다. 개인적으로 작가라고 하는 기준이 있습니다. 저는 개인전을 하지 않으면 작가보다는 아마추어라고 생각합니다. 서예가가 아닐 것입니다. 작가(作家)라는 것은 하나의 터를 마련한 것입니다. 그런데 전부 서예가로 자칭하고 있습니다. 엄격하게 따지자면 서예인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지요. 예를들어 자전을 보고 그대로 연습하여 입선이나 특선을 했다라고 하는 것을 보면 안타깝습니다. 공모전에만 치중하는 사람치고 제대로 공부한 사람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공모전은 그저 시험 삼아 내보는 것이지요. 제 생각엔 최소 2년에서 10년은 바라보고 주제를 잡고 공부를 해야 한다고 봅니다. 하지만 많은 청년들이 현재 눈앞에 있는 작품만 열심히 하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청년작가전이라고 해서 여러 번 다녀봤는데 지금의 작품만 어떻게 꾸밀까하는 생각이 꽉 차있는 듯했습니다. 공부는 짧더라도 자기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반드시 결과는 나오게 외어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아름다움 미감을 곁들인 선질이 나와야 합니다. 너무 꾸미기만 하는 것은 결코 좋은 현상이 아니며 깊이 있는 작품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2019. 7. 2인터뷰 김지수 기자도행지이성(道行之而成)과 심은 전정우의 예술세계 손 형 우 (철학박사, 예술기획·평론가)\"길은 다님으로 해서 이루어진다.\" 『장자』 제물론에 나오는 글이다. 2013년 1월 이후 심은 전정우의 예술세계는 그가 나아가고자 하는 바대로 이루어진다. 필자가 보기에 도행지이성(道行之而成)처럼 심은 예술세계의 길을 적절히 드러내는 말은 매우 드문 듯하다. 그러한 까닭은 다음에 있다. 필자가 처음 심은 전정우 선생과 인연을 맺은 것은 2007년 여름 즈음의 일이다. 당시 부남미술관 부관장인 신명균(現 부남장학재단 상임이사)님의 소개로 처음 심은 선생님을 만났다. 2006년 11월 25일 심은 전정우 선생님은 부남미술관의 초대전을 받아 전시를 했다. 당시 초대전을 기획한 신명균 부남미술관 부관장에 따르면, \'다양한 천자문 서체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신의 경지에 있는 분\'이라 극찬했다. 년 늦은 가을 우연한 계기로 강화도 심은미술관을 방문했다. 2013년 1월은 심은 선생님의 천자문 120체 720종의 서체가 완결된 해이다. 천자문 120체 완성이라는 여정은 2004년 10월부터 시작해서 매주 5일간 하루 15시간이라는 상상을 초월하는 인고의 시간이 소요되었으며, 만8년 3개월 만에 끝났다. 그 대장정의 막바지인 2012년 가을 심은미술관에서 그 서체의 일부를 직접 목도하는 호사를 누렸다. 직접 보고 놀란 것은 120체 중 서체마다 전혀 다른 경지에서 쓰인 글씨임에 크게 놀랐다. 마음 깊이 새겨진 그때의 감동은 지금도 춤을 추는 듯하다. 2017년 1월에는 서예 교육 자료를 청하기 위해 서실을 방문했다. 그날 뜻밖에도 심은 선생에 대한 세부 인터뷰 자료와 영상자료가 매우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술철학을 전공한 필자의 관점에서 보면, 후대의 연구를 위해서도 선생에 대한 자료는 다양한 각도에서 축적되어야 한다. 선생과 논의 끝에 선생의 생애와 작품세계에 대해 인터뷰 작업을 시작했다. 이때의 인터뷰 영상작업은 2017년 2월 9일부터 7월 17일까지 13차례 정도 이루어졌다. 촬영된 영상물은 인터뷰 형식의 기록물과 글씨 쓰는 장면을 동영상으로 녹화한 것이다. 1차 기록영상은 차후 재논의를 통해 보완할 예정에 있다. 심은 전정우에 대한 인터뷰는 여러 면에서 필자에게 폭넓은 시각을 제시했다. 또한 심은 예술세계를 이해하는 단초를 제공했다. 심은 예술세계는 시기별로 보면, 강화도의 유년시설, 중고등학교 학창시절, 대학과 군대시절, 사회진출, 여초 선생님과의 만남과 서예입문(1978.07.12.~79.02), 삼성 재직기간, 1986년 5월 삼성 퇴직과 서실 연구시기, 2004년 10월부터 2013년 1월 천자문 120체(크기 종류에 따라 720종이라 부르기도 함)를 완성한 시기, 2013년 120체 완성 이후 시기로 구분된다. 심은 전정우의 예술세계의 관점에서 보면, 1단계 서예에 대한 관심(중고등학교 학창시절에서 사회진출까지), 2단계 서예입문시기(여초 선생님과의 만남과 삼성 재직기간), 3단계 서실연구시기(1986년 5월 삼성 퇴직과 서실 연구시기), 4단계 천자문 120체(천자문 120체 720종류 천자문 완성시기, 2004년 10월 ~ 2013년 01월), 5단계 2013년 1월 이후 현재까지, 새로운 경지의 심은 예술세계(농필(弄筆)천자문, 심은체(混融體), 추상서(未來書), 문자추상(文字抽象) 등등)의 시기로 구분된다.심은 전정우 예술세계의 진면목년 1월 이후 심은 전정우는 자유로운 경지의 농필(弄筆)천자문, 그간의 모든 서체를 아우르며 내적으로 재해석해낸 심은 혼융체(일명 심은체), 미술과 서예의 경계를 넘나드는 문자추상, 그 외에도 서예의 새로운 길을 열어가는 여정에 있다. 그렇다면 심은 전정우의 예술세계는 어디에서 왔는가. 그 예술세계의 진면목을 이루는 참된 그 바탕은 또한 무엇인가. 面16 45.5x37.5필자는 다음 3가지 항목을 꼽고자 한다. 끈기(陰, 貞直, 誠實), 어린아이 같은 순수한 열정(陽), 자유로운 예술적 영혼(莊子 逍遙遊). 이 세 가지 항목은 심은 전정우 생애 전반을 인터뷰하고, 필자가 조심스럽게 내린 결론이다. 매우 평범하고 소박한 듯 보이는 이 말들 안에는 심은 전정우를 거대한 예술가로 성장하게 하는 든든한 버팀목이며 근간이다. 끈기와 어린아이 같은 순수한 열정. 이 간결하고 단순한 말 안에 천재적 예술가 심은 전정우를 있게 한 숨겨진 힘과 원천이 있다. \'끈기와 어린아이 같은 순수한 열정\'에 숨겨진 심은 전정우의 진면목을 살펴보기로 하자. 우선 \'끈기\'라 함은 그 속성상 매우 단단하다. 단단함이란 어지간한 흔들림에서 굳건하게 버티는 힘이니, 음양(陰陽)으로 보자면 陰에 해당한다. 陰은 대개 움직임이 적다. 그러니 움직이지 아니하고 참고 견디며 버티는 힘이 대단히 강하다. 반대로 \'어린아이 같은 순수한 열정\'은 陽에 해당하는 기운이다. 어린아이는 계절로 보면 봄에 해당한다. 봄은 생명력으로 가득하다. 봄에 나는 풀들은 쉽사리 시들지 않는다.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며, 누군가 밟거나 꺾을지라도 이튼 날이면 어김없이 새순이 자랄 만큼 강력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또한 순수한 열정은 에너지로서 확산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확산에너지는 팽창하는 기운으로 그 기세를 쉽게 꺾을 수 없다. 심은 전정우는 \'끈기(陰)와 열정(陽)\'이라는 서로 다른 속성을 한 몸처럼 가지고 있다. 이 속성은 심은 전정우를 세계적인 천재 서예가를 탄생하게 했다. 우리는 다음의 일화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심은 전정우는 1986년 5월 삼성을 퇴직하고 지금까지 서실에서 평균 5시간이 매일매일 빠짐없이 썼다고 한다. 그간 사용한 붓은 300여 자루에 달한다. 1986년 5월부터 2017년 8월까지 글씨를 쓴 시간을 어림잡아 계산하면 14,965일 동안 글씨를 썼다. 만41년 4개월 동안 글씨를 쓰는 데에 매진했다. 물리적 시간으로 환산하면 오로지 74,825시간을 글씨 쓰는 데에 보냈다. 단순 시간으로는 각고의 노력의 시간을 체감할 수 없다. 그 시간을 체감할 수 있는 날짜들로 단순 환산하면 3,117일 동안 잠을 자지 않고 글씨를 쓴 셈이다. 신경과학자 다니엘 레비틴의 연구에 따르면, 사람의 성공이면에는 \'1만 시간의 법칙(The 10,000-Hours Rule)\'이 있다고 한다. 심은 전정우는 다니엘의 1만 시간의 법칙을 넘어선 지 이미 오래이다. 오히려 그 보다 더 놀라운 것은 서예 세계의 특성에 있다. 오래전 서예 역사 속에만 자리한 글씨를 새로운 숨결을 불어 넣어 되살릴 수 있느냐는 것이다. 어느 특이 서체는 표본으로 삼을 만한 것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핵심을 찌르는 천재적 통찰력으로 역사 속의 서체와 결을 같이 하지 않고서야 도달할 수 없다. 그 세계는 \'끈기와 순수한 열정\'을 바탕으로 도달한 경지이다. 그 끝에서 심은의 \'예술적 자유로운 영혼\'은 경계를 넘어 서예사의 수많은 서체들과 결을 같이하며 넘나든다. 심은 천자문은 좁은 화면 안에 천자문 1000개의 글자가 빠짐없이 담겨 있으며, 글씨는 120체의 글씨에 따라 모두 그 격을 달리한다. 갑골문 천자문, 왕희지 천자문 익히 들어 알 수 있는 수많은 서체들이 그 격과 숨결을 달리하며 춤을 춘다. 마치 당대의 글씨 서체로 돌아가듯 혼연일체가 되어 보이는 이를 압도한다(莊子, 物化와 逍遙遊의 境地). 이때의 심은은 이미 사람의 경지가 아니다. 어찌 사람이 당대의 수많은 명 서체를 아우르며 천자문을 써내려갈 수 있단 말인가. 그 경탄의 이면에는 수많은 날들을 서예에 매진했던 숨 막히듯 타오르는 열정 같은 긴 여정(끈기와 어린아이 같은 열정)이 있다. 심은 전정우에게 천자문 120체는 法古創新이며 운명이고 숙명이며 천운이다. 미래의 서예 역사(심은체, 미래서, 문자추상)를 쓰는 그의 새로운 서예여정은 바로 이곳에서 발원한 까닭이다. 화이위조(化而爲鳥)와 심은 전정우의 새로운 예술세계(농필천자문, 심은 혼융체, 추상서(未來書), 문자추상)천자문 120체를 완성한 심은 전정우는 이제 새로운 길을 나아가고 있다. 그간의 서체를 아우르며 자신만의 독창적인 서체를 뿜어내고 있다. 농필(弄筆)천자문, 심은체(混融體), 추상서(抽象書, 未來書), 문자추상이 그 근간에 있다. 40년이라는 인고의 시간을 보낸 전정우의 서예 여정은 법고창신法古創新을 넘어 장자의 도행지이성(道行之而成)에 있다. 천자문 120체를 완성한 심은 전정우의 예술세계는 그가 나아가고자 하는 바대로 이루어지는 새로운 여정에 있다. 농필 천자문, 심은 혼융체, 추상서(미래서), 문자추상 등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나 필자가 무엇보다 주목하는 것은 문자추상과 추상서(미래서)이다. 이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面2 40x60먼저 심은의 문자추상은 미술(畵)과 서예(書)의 경계에 서 있다는 점에서 매우 특별한 위치를 점한다. 이응로와 남관 화백의 기존의 문자추상은 미술 중심의 접근에서 이루어졌다. 이러한 상황에 비추어서 심은 문자추상은 서예에서 미술로 나아간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심은 문자추상은 서예에 뿌리를 두고 있다. 반은 글씨이고 반은 그림이라는 점에서 반서반화(半書半畵)라 부르기도 한다. 서예와 그림이 그 뿌리가 같다는 서화동원론(書畵同源論)은 당대 장언원(815~875)의 역대명화기(서화일치론(書畵一致論)와 원대 조맹부(1254~1322)의 화론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보다 앞선 흥미로운 사례는 고대 이집트 피라미드 벽화에 등장하는 히에로글리프(hieroglyph)로 도화(圖畵)문자(상형문자)이다. 본래 도화문자 같은 상형문자는 사물의 형체를 본떠 그 의미를 전하는 문자이다. 이러한 유형의 상형문자는 고대 중국의 갑골문자, 마야문명이나 아스테카(Aztecas)의 문자, 지중해 고대 문자 등에서 볼 수 있다. 물체의 형상을 본떠 만든 상형문자는 그림과 글씨의 경계를 오간다는 점에서 현대적 문자추상과 일면 그 맥을 같이 한다. 서구사회의 문자추상으로 주목되는 것은 모노그램(monogram)이다. 모노그램은 얽혀 있는 문자 이미지로 구성되었다. 주로 인장과 상징, 상표로 대표되며, 중세 교회나 예술, 상업 분야에서 사용되었다. 모노그램이나 문양은 인쇄업자들이 종종 사용하거나 화가, 조각가, 도예가 들이 문양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심은 도자기 작품에 새겨 넣은 서체들은 문양이나 모노그램 같은 문자추상의 관점으로도 볼 수 있다. 미술과 서예의 경계를 오가는 현대 문자추상 화가는 한국의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이응로(1904~1989)와 남관(1911~1990)을 들 수 있다. 고암 이응로는 동양의 사의(寫意)적인 서화개념을 서양의 추상적 조형성과 접목하고자 했다. 이응로는 1960년대 말부터 70년대 말까지 서예적 추상 또는 문자추상으로 명성을 얻었다. 남관은 동굴벽화나 중국의 상형문자에서 모티브를 얻어 동양의 의식세계를 규명하고자 했다.고암 이응로와 남관의 문자추상은 미술영역 중심의 예술이다. 이를테면 서예와 글자의 속성을 미술영역으로 가져와 작품세계를 구현한 것이다. 반면 심은 전정우의 문자추상을 일으킨 것은 서예에서 비롯되었으며, 미술영역으로 확장된 것이다. 방향성과 예술을 이루는 본질적 바탕이 이응로·남관과 다르다. 그렇다면 심은 전정우의 문자추상은 어떠한 행보를 보이고 있는가. 심은 문자추상 작품은 서예의 필치에서 왔다. 그러므로 심은 문자추상은 서예가 가지는 맛과 힘이 있다. 서예의 근본을 바탕으로 한 미적 조형으로 확장된 셈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천자문 120체라는 천하제일의 법고창신의 경지에 이른 심은이 아닌가. 그런 그에게 글(書)과 그림(畵)이라는 문자추상과 추상서는 새로운 반전이 아닐 수 없다. 무엇이 그를 그림과 글의 본질적 탐구로 이끌었는가. 불현듯 필자의 뇌리를 스치는 것이 있다. 아~ 하는 감탄과 함께 떠오르는 말이 있다.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 처음으로 돌아가 그 근본을 바로 보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러니 서예의 뿌리를 찾아 서화동원론을 탐구하였고, 문자추상, 상형문자, 도화문자를 관심을 가진 것이 아닌가. 노자 16장에는 \'만물은 무성하여 가득하지만 그 뿌리로 되돌아간다(夫物芸芸 各復歸其根)\'라는 구절이 있다. 심은에게 무성한 시절은 천자문 120체이며, 그 뿌리 근본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서예의 근본, 그림의 근본을 탐색하는 여정일 것이다. 그 여정에 문자추상과 추상서(미래서)가 있다. 문자추상과 추상서는 대상의 본질적 형상을 매우 간결하고 힘 있게 드러낸다. 마치 어린아이 같다. 대가의 풍모와 어린아이 같은 일면은 심은 전정우에게 자주 포착된다. 우연일까. 정말 우연일까. 노장 28장에는 \'어린 아이로 되돌아간다(복귀어영아(復歸於嬰兒)). 통나무로 되돌아간다(복귀어박(復歸於樸))\'이 있다. 이 구절이 교차한다. 왜 일까. 人 시리즈3(群像) 35x35노자와 장자는 동양 예술철학의 정수를 차지하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특히 노자는 장자에 앞서 보다 근원적 위치를 점한다. 우주 대자연의 순환사상을 담고 있는 노장사상은 강화도 한적한 곳에서 나고 자란 심은 전정우에게 운명처럼 필연처럼 다가왔다. 아니 심은이 비록 老莊을 모른다 해도 괜찮다. 이미 자연에 가깝고 자연과 벗 하면 사는 심은(沁隱)에게 대자연을 닮은 철학적 예술적 사유는 필연이다. 그의 문자추상과 추상서(미래서)는 자연을 닮고 사람을 닮았다. 매우 간결하며 힘이 있다. \'無\', \'和\', \'衆\', \'面\'은 심은 문자추상의 주요 소재이다. 그의 작품의 바탕에는 인간에 대한 사랑과 현대인의 따뜻한 시선이 묻어난다. 근래 들어 면(面) 시리즈 작품은 사람 얼굴을 모티브로 하여 하늘을 보듯 향한 얼굴들로 가득하다. 사람이 사람 얼굴을 맞대고 이루는 조화가 따뜻하다. 화면 구성은 현대회화의 추상적 선과 면을 이룬다. 그 안에 강렬한 선의 힘은 서예적 강렬한 필치가 아니고는 담아낼 수 없다. 이는 여타의 기존의 화가적 문자추상과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심은의 문자 추상은 글씨와 그림 그리고 현대적 감각의 예술로서도 손색이 없다. 최근 심은의 문자추상과 함께 주목되는 것이 추상서(抽象書), 즉 일명 미래서(未來書)이다. 이 추상서는 문자추상과 다르게 형상을 본 뜬 것이 아니다. 선의 본질적 힘과 변화가 강하게 드러나고, 강렬한 선을 통해 구획되는 화면의 긴장감이 시선을 압도한다. 가장 단순한 것으로 다양한 변화를 이끌어내는 심은의 추상서(미래서)는 가장 현대적이고 세련된 면모를 담고 있다. 이는 현대적 미감의 변화와도 무관치 않다. 심은(沁隱)은 현대적 예술의 변화에도 빠르게 응대하고 있다. 현대인은 스마트폰과 하이퍼미디어를 중무장하며, 인공지능과 인터넷 세계를 활보하며 이미지 홍수 속에 살고 있다. 현대사회의 다양한 영상과 이미지 정보는 기존의 한자가 지닌 정보 중심사회에서 벗어나 있다. 그보다는 순간 간파할 수 있는 함축적 의미 상징이미지에 현대인은 보다 열광한다. 지하철에서 현대인은 한편의 영화와 드라마 보다는 짧은 영상과 이미지에 관심을 가진다. 사회는 변화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넘치는 이미지 홍수 속에 예술도 변모하고 있다.강렬하고 신랄하며 함축적이고 상징적인 예술이 21세기 인공지능 시대와 함께 다가오고 있다. 수 천 년의 서예 역사를 담아낸 천자문 120체를 넘어선 예술 장인 심은 전정우는 가장 젊고 참신한 시선으로 미래 예술을 말한다. 그 한가운데 심은 추상서(미래서)와 문자추상이 있다. 근래의 심은 전정우의 행보를 보면 떠오르는 구절이 하나 있다. 장자 소요유편에 북쪽의 큰 물고기는 변해서 붕이라는 거대한 새가 된다(北冥有魚 其名爲鯤. … 化而爲鳥 其名爲鵬.). 그리고 자유롭게 남쪽의 큰 바다로 날아간다. 곤이라는 물고기가 붕이라는 새로 변화하는 장자의 화이위조(化而爲鳥)처럼, 천자문 120체라는 인고의 시간을 넘어선 심은 전정우의 새로운 예술세계는 한국 넘어 새로운 시대의 세계문화예술로 향하는 변화와 도전에 있다.<약력>沁隱 全 正 雨심은 전 정 우 학 력 : 연세대학교 화공과 졸업전 삼성 GROUP 회장비서실 근무사 사 : 고 해오 금관호 선생 (한문) 고 여초 김응현 선생 (서예)구당 여원구 선생 (전각)심은미술관 : 인천광역시 강화군 하점면 강화서로 915-1전화 : 032-933-0964(FAX 겸용)휴대전화 :010-3364-0946심은서원 : 서울종로구 삼일대로30길 21 종로오피스텔 1202~3호휴대전화 : 010-3364-0946E-mail : manisanin@hanmail.net ■ 수상경력全國揮毫大會 銅賞 受賞(中央日報·東洋放送, 國際書道聯盟)全國篆刻公募展 金賞 受賞(韓國篆刻學會)大韓民國 美術大展 書藝部門 特選(韓國文藝振興院)大韓民國 美術大展 書藝部門 大賞 受賞(韓國文藝振興院, 韓國美術協會)東亞美術祭 書藝部門 美術賞 受賞, 篆刻 特選(東亞日報社)國際才藝大賽 國際特賞 受賞(臺灣CAA書法&藝術國際聯盟)國際華文書法賽 特優奬 受賞(馬來西亞 新明日報)國際書法大展 書藝 優秀賞, 篆刻 銀奬 受賞(中國書法家協會)자랑스런 江華人賞 受賞(江華郡)安平 創作賞 受賞(鐘路區, 서울安堅紀念事業會)仁川文化賞 受賞(仁川廣域市) ■ 주요전시 출품경력ASINA GAME기념 國際書法展(韓國DESIGN包裝CENTER)東亞美術祭 受賞作家 招待展(國立現代美術館)國立現代美術館 招待作家展(國立現代美術館)國際書法交流大展(新加坡博物院)東方硏書會 三五週年 紀念展(藝術의殿堂)第1回 書藝個人展(朝鮮日報 美術館)SEOUL書藝大展(SEOUL市立美術館)臨政廳舍復元紀念 韓中聯合書畵展(藝術의殿堂)中國 山東論語碑苑 造成展(孔子博物館)SEOUL 定都 600年 紀念 書藝大展(SEOUL市立美術館)韓國篆刻大展(雲峴宮美術館,圓光大 博物館)國際書法交流展 東京大展(東京CENTRAL美術館)國際篆刻展(北京 歷史博物館)第2回 書藝個人展(藝術의殿堂 書藝館)한글書藝의 오늘과 내일展(藝術의殿堂 書藝館)世界書藝BIENNALE 招待展全州, 97\', 99\', 01\', 03\')文字와 IMAGE展(大田 翰林美術館)北京, 서울, 東京) 國際書畵展서울市立美術館)上海當代中國書法名家國際要請展(上海 박물원)새千年韓國藝術江華展(沁隱美術館)世紀韓國書藝文人畵家 招待展(成均館大學校)京畿大學校 書院設立展(京畿大學校)文字와 人間展(SEOUL市立美術館)國際書法藝術聯合展(世宗文化會館)第3回 個人展(世宗文化會館·沁隱美術館)까마의 눈 作家招待展(白岳美術館)韓·中·日 代表作家三十人展(中國文化院)書藝 BIENNALE 招待展(SEOUL)第4回 個人展 「沁隱千字文展」(扶南美術館·沁隱美術館)大韓民國代表作家展(藝術의殿堂)戊子同行展(白岳美術館·沁隱美術館)第5回 個人展 「66體千字文과 文字抽象」(延大博物館·沁隱美術館·扶南美術館)元老重鎭書藝家招待展(韓國書藝館)大韓民國美術大展 招待作家展世界書藝祝典(仁寺Art Plaza Gallery, 書藝世上)茶山誕生 250周年 記念 書藝展(한길사, 茶山硏究所)沁隱 120書體 720種 千字文 完成10~2013. 1)中央日報, 藝術의殿堂, 仁川廣域市 共同主催「沁隱 天字遊戱展」(SEOUL書藝博物館)仁川廣域市-中國天津市 姉妹結緣 20週年 紀念「沁隱 全正雨展」 共同開催釜山書藝BIENNALE(釜山文化會館)韓·中·日 漢字藝術大展(中國 深圳)崔致遠 風流誕生 招待展(SEOUL書藝博物館)第13回 世界書藝招待祝展(書藝世上, 仁寺ART PLAZA)韓國書藝逸品展(仁寺洞 H GALLERY)大韓民國美術大展 受賞作家 特別招待展(韓國書藝博物館)世界書藝全北BIENNALE 招待展(全州)月刊 墨家 創刊 10週年 紀念 誌上 招待展歷代 大韓民國美術大展 受賞作家展(韓國美術協會)國際書法名家展(如初書藝紀念館)藝術의殿堂 書藝博物館 再開館紀念 招待展(SEOUL書藝博物館)國際蘭亭筆會 招待 慶州展(慶州藝術의殿堂)韓國書藝逸品展(白岳美術館)藝術의殿堂 齊白石展 招待出品(SEOUL書藝博物館)仁川廣域市 主催 沁隱 全正雨 遊戱自如展(仁川文化藝術會館) ■ 주요대회 심사大韓民國美術大展 審査委員 및 運營委員長 歷任東亞美術祭 審査委員 歷任全國揮毫大會(KBS, 國際書法藝術聯合) 審査委員 歷任剛菴書藝大展 審査委員長 歷任第1回 如初先生追慕展 揮毫大會 審査委員 歷任世界書藝全北BIENNALE 審査委員長 歷任 ■ 현 재江華沁隱美術館長 ■ 작품집沁隱般若心經印存 發刊(民族社)沁隱全正雨 書藝展 作品集 第一輯 發刊(月刊書藝文人畵)沁隱全正書集 第二輯 發刊(梨花文化出版社)沁隱全正雨書集 第三輯 發刊(月刊書藝文人畵)沁隱千字文展 作品集 第四輯 發刊(月刊書藝文人畵)沁隱 66體千字文·文字抽象 作品集 第五輯 發刊(月刊書藝文人畵)沁隱全正雨: 天字遊戱展 作品集沁隱全正雨: 遊戱自如展 作品集
<특집>
대륙을 이끈 서법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