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호 박재복
상주문자 예술의 향연은상과 서주의 대전(大篆)을 중심으로 임모하고 창작하며 연구한 결과를 선보인 전시 상주문자전이 막을 내렸다. 북경대학에서 갑골을 전공 하고, 고고발굴 현장에서 직접 실물을 보고 공부한 박재복 교수는 이러한 생생한 학습을 통해 갑골문에 있는 글자를 자유자재로 쓸뿐더러 문자의 근원에 대해서도 해박하다. 그는 지난 2016년 사승전을 열며 첫 개인전을 선보인 바 있다. 당시 그의 개인전이 그동안의 학서 과정에서 사사 받은 선생들의 작품과 임모작품 및 창작 작품을 선보이며 출사표를 내던졌다면, 두 번째 개인전인 <상주문자전>에서는 갑골·금문의 연구를 통해 서예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작업으로 이목을 사로잡았다. <상주문자전>을 통해 만나본 유호 박재복 교수는 갑골문과 금문의 고아한 매력에 흠뻑 취해있었다.유호 박재복 교수2019<상주문자전> 전시장 모습殷商 <四祀邲其卣> 70x140cm Q. 지난 2016년 첫 개인전에 사승전을 열게 된 계기는?- 저는 그동안 학서 과정에서 실력과 인품을 두루 겸비한 선생님들을 만나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남전 원중식(1941-2013)선생께는 대학시절부터 문하에 입문하여 강원도 인제와 서울의 서실을 오가며 서법의 기초를 다졌습니다. 대학 졸업 후에는 서울에 있는 시계서실에서 계속 서예를 공부했습니다. 이후 남전 선생님께서 2013년 타계하셨고, 첫 개인전을 열 당시 2016년은 남전 선생님의 3년 상이 끝나는 해였습니다. 저는 남전 선생님께 받은 가르침과 그간 공부했던 흔적들을 선보이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사승전을 기획하여 제 작품과 남전 선생님과 그동안의 학서과정에서의 선생님들 작품을 함께 전시했습니다.殷商 - 45X50cm2019<상주문자전> 전시장 모습 <笙磬同音> 42x32cmQ. 2016년 첫 개인전 <유호 박재복 서전>의 작품에 대해- 저의 작품은 서예를 배우는 과정에서 대표적인 전,예,해,행,초 5체의 전형적인 비첩과 함께 새롭게 출토된 간독자료까지 임모한 것이었습니다. 전시작품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 특징을 설명할 수 있는데, 첫째, 앞서 말씀드린 사승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다른 개인전에서 보기 드믄 것으로 그동안 학서 과정에서 사사받은 선생님들의 작품을 함께 선보인 것입니다. 권우 선생님께서 유도회 한문연수원의 11기 수료식 때에 써준 해행풍의 <攸好>, 남전선생님께서 결혼식 때 써주신 전서풍의 <盡其性>, 북경대학의 성지 선생님께서 써주신 행서풍의 <醉翁亭記>... 등등 여러 선생님들의 작품을 동시에 전시하여 그 학풍을 한눈에 볼 수 있게 하였습니다. 둘째는 임서작품 위주로 한 점입니다. 특히 중국에서 새롭게 발견되는 최신 문자자료들을 중심으로 임서작품을 구상하였고, 그것은 서예를 공부함에 있어서 가장 교과서적인 서첩들에 대한 임서작품도 있었습니다. 셋째로 창작품은 동양고전의 명구들을 엄선하여 각 서체별로 소품을 위주로 작업하였습니다. 이는 임서를 통해 체득한 서예자료의 필법을 토대로 한 것이며, 단조로움을 탈피하고자 그림, 사진, 탁본 작품, 물간, 색지 등을 활용하여 다채로운 색감을 시도하였습니다. 西周 <史牆盤> 70x205cmx2유호 박재복 교수2019<상주문자전> 전시장 모습誠則明 - 60X45cmQ. 중국 유학길에 오르게 된 계기와 북경대학에서 공부한 전공에 대해- 유도회 한문연수원에서 권우 선생님을 비롯한 여러 선생님들께 사서삼경과 같은 역대 한중 고전을 배웠습니다. 점차 금석학에 심취되었고, 더 깊은 공부를 위해 1999년 중국으로 유학길에 올라 북경대학에서 고명 갈영회 선생님의 가르침으로 고문자학의 기초를 다졌고, 추형 유서 선생님께 지도를 받아 상주고고학의 토대를 마련하였습니다. 유학중 방학기간에는 중국 전역에 산재해 있는 금석문 자료들을 직접 답사하며 견물을 넓히고 고고발굴현장과 갑골문 정리 작업에도 직접 참여하여 현장과 실물자료에 대해 상당한 지식을 축적할 수 있었습니다. 2019<상주문자전> 전시오프닝 행사<書能變詩可察聯> 21x135cm x2Q. 이번 <상주문자전>에 대해 - <상주문자전>은 작품의 소재로 갑골문과 금문만을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이번 작품중 임모작품은 갑골문과 금문으로 구분됩니다. 갑골문은 상 후기 은허 갑골문과 서주시기 주원과 주공묘 갑골문을 선별하였습니다. 금문은 <대우정大盂鼎>과 <모공정毛公鼎>, <괵계자백반虢季子白盘> 등 전서 공부에서 있어서 교과서적인 명문을 선택하였고, <이궤利簋>와 <숙측방정叔夨方鼎>, <사장반史墙盘> 등 1970년대 이래 새롭게 출토된 명문들을 선별하였습니다. 특히 시기별, 지역별, 나라별로 특징을 분류해 문자의 조형적 특징을 분석해 내고자 하였습니다. 또 창작 작품은 전래문헌과 출토문헌에서 고전명구를 선별한 것입니다. 이번 전시에서 재미있게 감상하실 수 있는 것은 제가 중국에서 직접 수집한 탁본을 서예계 선생님들께 제발을 받아 함께 선보이며 임모작품과 대조하며 감상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탁본은 <래반逨盤>과 <산씨반散氏盤>, <짐이朕匜>, <구위화裘衛盉>, <구년위정九年衛鼎>, <차정此鼎>, 동한시기 <창힐비 蒼頡碑>와 화상석, 신석기 후기 석가하 石家河 문화의 각화부호 등이 있습니다. 유호 박재복 교수유호 박재복경동대학교 한국어교원학과 부교수(사)유도회 한문연수원 서경 교수 (사)시계연서회•한국서예가협회 이사한국서예학회•동양고전학회 연구이사동양고전연구소•문화예술콘텐츠연구소 편집위원한국전각협회•강원서학회•동양서론연구회 회원중국고중세사학회•동아시아출토문헌연구회 회원 북경대학 석박사(고문자학/상주고고학)(사)유도회 한문연수원 수료북경대학 震旦古代文明中心 객좌연구원 역임성균관대학교 유교문화연구소 선임연구원 역임 주요 논문 및 저서<논문>(2013), 殷商시기 甲骨文에 보이는 商과 夷族의 관계, 『동양사학연구』 123호.(2013), 商중기 甲骨의 특징과 그 형성과정 고찰, 『고고학탐구』 13호.(2012), 蒼巖 李三晩의 書風에 나타난 복고적 성향 고찰, 『동양고전연구』,49호.(2012), 商周시기 都邑과 遷都에 관한 고찰, 『고고학탐구』12호.(2012), 殷商시기 甲骨文에 보이는 ‘征人方’ 고찰, 『유교문화연구』20호.(2011), 향교설립 이전의 유가경전 수용과 교육현황, 『동양고전연구』42호.(2011), 작품소재로 살펴본 蒼巖 李三晩의 학문세계, 『서예학연구』18호.<저서>(2011), 『선진복법연구(先秦卜法硏究)』, (중국) 상해고적출판사(上海古籍出版社)
<특집>
引领大陆的书法家们 - 상해 · 항주지난 <대륙을 이끈 서법가들(북경)>에서 중국의 수도이자 전통서법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북경을 찾아가 뚜렷한 자기 색깔을 지닌 네 분의 중견작가(석개(石開)/후캉메이(胡抗美)/증래덕(曾來德)/이강전(李刚田)들을 만나 그들이 걸어온 길과 예술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이 일궈낸 현대서법계의 역정과 진화의 모습을 육성을 통해 들어볼 수 있는 시간이었고, 우리는 이 기획인터뷰를 통해 우리 서예계에 반추해보고자 한다.이번 <대륙을 이끈 서법가들(상해•항주)>은 중국 남방의 서화예술에서 큰 줄기를 이루는 상해와 항주를 찾았다. 서예 전방의 영역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3인의 서법가들을 만나 그들의 예술세계에 대해 들어보았다. 그 두 번째 순서로 왕동령 선생을 찾았다.인터뷰는 글씨21의 성인근 편집주간이 이어갔으며, 통역은 김건표 중국미술학원 서예학박사가 맡아주었다. 2019. 10. 17글씨21 편집실Q. 티셔츠부터 양말, 신발 등 붉은색을 즐겨입는 이유는? 십여 년 전에 제가 매우 큰 종이에 글씨를 쓸 때부터 빨간 양말을 신었는데 주위에서 ‘양말이 마치 글씨 위에 인장을 찍는 듯하다’ 하여 즐겨 신었습니다. 사실 붉은색은 열정을 나타내는 색으로 저의 마음을 대변하는듯하여 지금도 빨간 티셔츠, 빨간 양말, 빨간 신발을 신고 있습니다. Q. 서예에 입문하게 된 계기는?제가 어렸을 때 저희 집이 잡화점을 한 까닭에 저는 매우 일찍이 붓과 접촉하였습니다. 그때는 모든 장부를 다 붓으로 기록하였지요.. 대여섯 살 되었을 때죠. 저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는데 저의 집 맞은편에 있던 돌로 만든 패방(牌坊)을 그렸더니 집에서 그런 저를 보고 개자원(芥子園) 화보를 구해주었습니다. 저는 그때부터 개자원(芥子園) 화보를 베꼈는데 주위의 어떤 노선생이 그림을 잘 그리려면 ‘글씨를 잘 써야 한다’ 하였죠. 그때부터 저는 서예를 연습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삼, 사학년 때는 사각의 넓은 벽돌(方磚)을 구해다 붓에다 물을 찍어 현완(懸腕)을 연습했습니다. 나중에는 유공권, 안진경 등을 썼는데 전문적으로 공부를 시작한 것은 1961년 남경사범대학 미술과에 입학하면서 부터였습니다. 그 학교는 장래 중·고등학교의 교사를 배양하는 학교여서 수채, 과슈(水粉), 유화, 서예를 다 배웠죠. 선즈산(沈子善), 웨이티엔츠(尉天池) 선생이 서법과의 교수님이셨고 저는 당시 서법과의 대표였는데 실제로 웨이(尉) 선생이 저희들을 가르쳤습니다.Q. 1966~1981, 남경사범대학과 중국미술학원에서 학사와 석사과정을 공부했는데, 이때의 공부와 생활에 대해 그 당시 서예 공부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것이 세 가지가 있는데 첫째로 문화대혁명 시기라 안휘(安徽)에서 생산되는 요즘 말하는 전각에 사용하는 연사지(連史紙) 즉, 선지(宣紙)에다 대자보를 많이 썼지요. 이게 제게는 서법을 단련하는 큰 기회가 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1968년 가을, 웨이티엔츠(尉天池) 선생이 처음으로 저를 데리고 린싼즈(林散之) 선생을 배견(拜見)하게 됩니다. 세 번째로 저는 현(縣)의 문화관에서 일을 하게 되는데... 아... 참, 그 먼저 인쇄소에서 흑백 그림을 그렸군요 그 후 저는 마오(毛)주석의 초상을 그렸습니다. 당시에는 어디서나 마오 주석의 대형 초상이 많이 있었지요. 그런 뒤 문화관에 가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문화관 시기에 주로 임첩(臨帖)을 하며 서법을 연마하게 되었습니다.Q. 90년대부터 해외 주요 전시에 초대되어 작품발표를 했는데, 서법을 바라보는 세계인의 다양한 시각은 어땠는지? 1979년 저는 절강(중국)미술학원의 전국 제 일기 서법과 석사생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원래 저의 스승이신 린싼쯔(林散之)선생 외에도 사멍하이(沙孟海), 루웨이자오(陸維釗), 쭈러산(諸樂三)선생을 지도교수(導士)로 모셨습니다. 류장(劉江), 짱주안(章祖安) 선생은 조교수로 모셨으며... 지도 교수님은 세분이셨죠. 그때는 문화부에서 중국서법을 배우러 온 구미(毆美)쪽 학생들을 모두 절강미술학원으로 보냈습니다. 저는 처음 이 유학생들을 가르치는 책무를 맡았는데 새로운 과제였으며 도전이었습니다. 그들은 동방문화에 대한 기초가 별로 없었지만 서방의 철학, 음악, 회화의 수양이 있었죠. 이 과정 속에서 저는 서방 학우들의 경험들을 이해하고 집적할 수 있었습니다. 그 후 1989년부터 1992년까지 미국의 미네소타대학의 요청을 받고 미국에 가서 약 사 년간 중국의 서법을 가르쳤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서법을 가르칠 때 두 부류의 학생들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동아시아과 학생들로 그들은 중국어나 일본어 및 역사를 공부하였는데 이들은 동아시아 전통의 방법으로 해서 및 행서를 익혔습니다. 또 한 부류의 학생들은 예술과의 학생들인데 그들은 석고 데생이나 인물 같은 것을 공부하는 게 아니라 주로 추상 아니면 비추상들을 하는 학생들이었습니다. 이들은 한자를 모르므로 이들에겐 서법을 회화의 언어로 가르쳤습니다. 이들에겐 주로 전서(大篆)와 초서를 가르쳤습니다. 전서는 도안성과 회화성이 강하여 비교적 간단한 중봉 필법으로 하게 하였고, 초서는 그 필선의 리듬감과 허실 및 추상적 공간 감각을 파악하도록 하였지요. 저는 이들을 가르치는 한편 중국서법의 창작 상황을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서방인들의 관점으로 중국의 해서나 행서들을 보았을 때 결국 글자를 이해하지 못하는 바람에 중국 서법을 이해하고 좋아하는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적습니다. 그러나 소수의 회화사 등에 연구를 하는 사람들은 중국의 서법이 서방의 추상미술에 끼친 영향이 크다는 것을 알게 되고 많은 관심을 가지기도 합니다. 이때부터 저는 서법의 경계를 넘는 실험적 작품을 하기 시작하는 데, 예를 들면 서법적 감각으로 추상 수묵을 한다거나 화보 위에 글씨들을 썼습니다. 이런 작품들은 서방의 예술적 소양이 있는 사람들로부터 더 많은 이해와 감상을 얻게 되었습니다. 서방 예술은 일찍이 일본의 전위 서법에 크게 영향을 주었고 한국에는 ‘백남준’ 작가도 나오게 하였습니다.뿐만 아니라 지금 출현한 중국의 우수한 작가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지금 이런 현상이 우리에게 던지는 문제는 동방의 서법 즉, 중국 한국 일본의 서법도 21세기에 들어와서는 반드시 새로운 표현과 돌파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의 세계 예술의 본원지에서 찬란해지려면 반드시 전진과 돌파가 있어야 합니다. 지금에서야 이를 주시하게 된 서방세계는 큰 박물관인 미국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영국의 대영박물관, 그리고 스위스의 박물관 등에서 당대 수묵 및 서법의 전시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한국에도 많은 우수한 작가들이 경계를 넘나드는 작품을 하고 있지만 이런 창신과 돌파를 진행하는 작품들은 보수적 관념을 지닌 사람들에 의해 질의나 비평이 뒤따릅니다. 그래서 이런 작품을 하려면 반드시 용기와 정력(定力)이 필요합니다. 만일 진정 어린 예술의 심지를 안고 현대인의 더 풍부한 정신적 자산을 창조해내려 한다면 반드시 끝까지 견지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Q. 초서에 빠지게 된 계기와 선생님의 초서작품 변천사에 대해초서는 중국 서법의 다섯 가지 서체 중에서 가장 자유스러우며 규칙성이 없습니다. 가장 높은 경지라 할 수 있으며 그래서 청대의 유희재(劉熙載)는 전서의 성인(篆聖)이나 예서의 성인(隷聖)은 없으며 오직 초서의 성인(草聖)만 있다 하였습니다. 초서는 그전에 반드시 다른 서체의 기초가 있은 뒤에 수심소욕(隨心所欲), 그 정취를 발휘하되 반드시 초법에 맞아야 합니다. 초서는 사람의 정서와 정감, 그리고 정신을 더욱더 표현할 수 있어 규거가 많은 해서와 달리 필묵을 표현하는데 더욱 분방하고 자유롭습니다. 좋은 초서는 네 가지 변화가 있는데 필법의 변화, 묵법의 변화, 포백의 변화 그리고 정감과 정신의 변화입니다.Q. 난서(亂書)작업과 서단의 방향 처음 글씨를 접하면서 특히 남경에서 대학을 다닐 때부터는 거의 매일을 견지하여 첩을 임서하였습니다. 용장사비(龍藏寺碑)로부터 시작하여 한비(漢碑) 등을 섭렵하면서 계속 현대서예에 대한 모색과 탐색을 쉬지 않았습니다. 서체의 급진적인 난서(亂書)의 창작에 관해서 말씀드리면 과거에도 이런 예가 없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성적으로나 예술적 관념으로나 이 난서를 긍정적으로 보지는 않았습니다. 이를 긍정적으로 보게 된 것은 대략 5-6년 전부터였습니다. 저는 처음 가로세로 2미터 정도의 난서(亂書) 작품을 제작하면서 거기서 저는 저의 예술적 언어를 발견하였습니다. 원래 저는 전통적인 서법가를 추구하였으나 중국미술학원에 들어오고 또 미국을 다녀오고 나서는 서법가가 아닌 예술가가 되고자 했습니다. 서법에서 나온 우리 시대의 예술가, 즉 난서(亂書)는 이런 저에게 하나의 접합점이 되었습니다. 난서(亂書)는 사실상 중국 전통서법의 이천 년 넘게 내려온 엄격한 규칙에 대하여 진행된 타파(打破)이며 도전입니다. 알다시피 예전의 우리 전통서법은 좌우 결구에서 서로가 교차하거나 부딪혀서는 안됩니다. 지금 저는 교차하는 것뿐만 아니라 중첩시키기도 하는데, 제가 글씨를 쓸 때는 여전히 60여 년에 걸친 임지(臨池)의 경험과 공력을 바탕으로 진지하게 작업합니다. 글씨를 중첩시키지 않았으면 그저 초서가가 쓰는 초서일 뿐이나 난서(亂書)로 형성된 뒤에는 한자로서의 식별은 어렵지만 그러나 그 가운데 선조의 질감이나 정신 그리고 기(氣)는 여전히 구현되어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저는 난서(亂書)가 광초(狂草)의 정신을 더욱 체현하고 있다고 봅니다. 명나라 서위(徐渭) 같은 이도 작품 중에 행간을 타파하는 경우가 있었고 정판교(鄭板橋) 역시 \'길에 어지러이 돌을 깐다(亂石鋪街)‘는 경우도 있었지만 아직 서로 중첩이나 교차하지는 않았습니다.그것은 지금으로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 것이다’는 것은 따로 없습니다. 모두가 다 자연스럽게 생겨났지요.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난서(亂書)에 관한 비평들인데 저는 중국 및 한국의 동인들 속에서도 비평하는 의견이 있을 줄 믿습니다. 그러나 괜찮습니다. 저는 반드시 해나갈 것입니다. 이를 위해 저는 스스로에게 엄격한 요구를 하고 있는데 지금도 계속하여 첩을 임서하고 있습니다. 저는 저를 굳게 믿고 특히 예술에 강한 의지력과 정력(定力)으로 임하고 있으며, 최종에 가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작품을 보고 정말 좋은가, 순수한가를 판단하고 이해할 것이라 봅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 나가야 한다는 계획은 없지만 예전에 제가 인체 사진 위에 글씨를 쓰곤 했는데 여기에 난서(亂書)가 보태지면서 더 조화롭고 전체적인 것이 되어가지 않을까 생각을 해 봅니다.Q. 난서(亂書)라는 용어에 대해 \'난(亂)\' 이 글자는 고한어의 해석에 \'치(治)\'라는 뜻이 있습니다. 난세를 다스리는 관원 같은 뜻입니다. 그리고 백거이(白居易)의 시 중에 \'난화점욕미인안(亂花漸欲迷人眼)\'라는 구절이 있죠. 꽃이 어지럽다, 꽃이 흩날린다는 이 말은 매우 아름다운 경지를 말하는 것이며 구름이 어지럽다(亂雲), 돌이 어지럽다(亂石), 산이 어지럽다(亂山)라고도 씁니다. 만일 그저 한 봉우리의 산이라면 난산(亂山)이라 하지를 않죠, 많은 산들이 중첩되어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난(亂) 이 글자는 본래 한어(漢語)에서 대부분 폄의 또는 비평의 뜻이 있지만 시어로서의 난(亂)자는 매우 풍부하며 낭만적인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Q. 항주에 있는 애플사와 함께 공동작업을 하게 된 계기와 현장휘호를 하며 느낀 점에 대해 그들은 인터넷으로 저의 작품을 보고 찾아왔습니다. (현장휘호는) 두 가지가 있는데 어떤 내용들은 제가 꼼꼼히 외워서 휘호를 하는 것이고 둘째는 한 번에 완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패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기본기를 시험하는 것과 같습니다. Q. 한국 작가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 오늘 한국의 서법21 여러분들의 탐방을 대단히 기쁘게 생각합니다. 저는 이 매체를 빌어 한국의 서법가 동인들에게 안부의 말씀을 전합니다. 한국에 많은 분들이 저에 대한 지지와 사랑을 보내주신대 늘 고맙게 생각합니다. 특히 잊지 못할 것은 제가 제1회 전주비엔날레에서 대상을 받은 적이 있는데 당시 제가 얘기한 것은 상을 제 개인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모든 중국 예술가들에게 주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때 받은 큰 격려로부터 저는 부단히 노력하여왔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王冬龄(왕동령 wángdōnglíng) 1945년(74세) 출생. 서법가. 약력: 中國美術學院敎授,博士生導師。中國書協理事,浙江省書協副主席、中國書法進修學院副院長、美國明尼蘇達(미세노타)大學客座敎授。전시: 中國香港(홍콩)、台灣(대만)、澳門(마카오)等地 日本、新加坡、馬來西亞、德國等國家多次舉辦個人書畫印系列展覽
원로에게 길을 묻다
규당 조종숙 오랜 세월 자신만의 서예 세계 구축에 일념을 다한 규당 조종숙 선생은 특히 한글서예의 맥을 이어오며 열정을 쏟았다. 반세기에 걸친 시간 동안 한문과 한글을 넘나들며 폭넓은 작품세계를 보여주었으며, 현재는 한글서예의 일가를 이루고, 후학 양성에 앞장서는 등 원로서예가로서 후학들에게 큰 모범이 되고 있다. 규당 조종숙 선생은 동방연서회에 입문하면서 일중 김충현, 여초 김응현 선생을 만나게 되었고, 본격적인 서예 공부를 시작한 규당 조종숙 선생은 안진경의 해서를 시작으로 몇 년을 이어 한문서예 공부를 해 나갔다. 당시 일중 선생의 가르침에는 체본을 써주는 것을 일절 없었으며, 스스로 공부하고 연습하며 깨닫도록 하는 방식으로 지금에 돌이켜보면 정말 큰 공부였다고 한다. 단단한 기초를 다지며 국전에 4번을 입선한 뒤, 특선을 목표로 했지만 5번을 낙선하며 힘든 시기도 있었지만 멈춰 서지 않고 끊임없는 도전으로 입선의 고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후 1982년 제1회 대한민국미술대전이 열리게 되고, 규당 선생은 그동안 한문서예를 공부해 온 필력으로 한글서예에 대담하게 전향한다. 공모전 출품을 통해 한글서예의 기본기를 연마하였고, 초대 작가가 된 후에는 규당 조종숙 선생만의 한글서예 길을 걷게 된다. 대부분의 작품에서 원숙한 점과 획이 드러나며 고전 연구에 대한 깊이를 볼 수 있었다. 밝은 표정만큼이나 따뜻하고 맑은 마음씨를 지닌 규당 선생께서는 “반세기가 넘도록 붓과 함께 해왔건만 첫 번째 개인전 때나 지금이나 부족함에 대한 두려움은 변함이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라고 말했다. 늘 연구하고 공부를 했음에도 부족함에 대한 갈증으로 지금의 서예 일가를 이룬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아버지의 명필 내력을 이어받아 펜 글씨를 곧잘 쓰던 소녀에서 결혼 후 서예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많은 노력으로 고군분투해 온 지난 세월을 조금은 가늠해볼 수 있는 인터뷰였다. 2019. 12. 11글씨21 편집실 규당 조종숙圭堂 趙琮淑 아호 : 규당, 솔빛 경력 제3회 신인미술전람회 장려상 수상(1964년)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 6회 입선(1968-1980, 한문)제1회 대한민국미술대전 우수상 수상(1982, 한글)제2회 대한민국미술대전 특선(1983, 한글)국립현대미술관 초대전 초대작가한국미술협회 분과위원, 이사, 부이사장 역임(현, 고문)세종한글큰뜻모임 1,2대 회장 역임추사기념사업회 이사장 역임한국예문회 1,2,3대 회장 역임(현, 명예회장)세종대왕기념사업회 이사국제서법예술연합회 부이사장국제서예가협회 고문기독교미술인인선교회 회장 역임주부클럽연합회 회장 역임민주평통 자문위원 역임원로서예문인화 총연합회 부회장동방연서회 이사 역임(현, 여초기념사업회 고문)일중기념사업회 이사 역임(현, 고문)제주한글사랑연합회 고문서예서예문인화총연합회 고문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장 및 운영위원장 역임동아미술제 심사위원장 역임단원미술제 심사위원 및 운영위원 역임남농미술대전 심사위원장 및 운영위원 역임베,세,토(베이징,서울,도쿄)한국전 운영위원장 역임서울시 미술장식 심의위원 역임경희대 교육대학원, 서울교육대, 성균관대 유림회, 중앙문화센터, 주부클럽연합회 서예강사 역임미술협회 미술인의 날 조직위원 역임규당미술관 운영규연회회원 지도 수상신사임당상 추대(1990)외솔상(최현배) 수상(2003)미술문화상 수상(미술문화사 2006)예총예술문화대상 수상(2007)올림픽봉사상(1988) 전시예술의전당 개관기념 초대출품예술의전당 100인전 초대출품서울시립미술관 개관기념전 초대출품한중건교기념 서화초대전 초대출품경향신문사 주관 ‘고뇌하는 서예가’ 초대출품국제서법전(중국, 일본, 싱가폴, 대만 등)순회전 출품미국(샌프란시스코) 초대출품항주 서령인사 초대전출품중국 왕희지탄신기념전 초대출품일본 每日신문60주년기념전 초대출품전국세계서예비엔날레 초대출품(전주)한일월드켬기념 필묵정신전(예술의전당)서울서예비엔날레 초대출품(서울시립미술관)하이서울 세계서예축제 초대출품(서울)한국여성원로서예5인전(물파공간)북경서예포럼전(주석으로 참가)북경태묵국제전(한국 대표)북경국제서법비엔날레(북경 고궁미술관)북경올림픽기념세계전 초대출품세종한글큰뜻모임 전국순회전 개최(광주, 전주, 대전, 대구, 제주)세종한글큰뜻모임국제전 개최(미국, 중국)제주학술세미나 초청강사(주제,추사선생의 예술과 생애)제1회 개인전(2000년, 백악미술관)삼인전(현병찬, 민이식, 조종숙) 제주전제주 규당미술관 개관 기념전 개최 저서우리글 서체를 찾아서 楷書千字文(龍眞卿)한글서체 다정체 제자한글글꼴개발 다정체 폰트 제작
<특집>
대륙을 이끈 서법가들引领大陆的书法家们 - 상해 · 항주지난 <대륙을 이끈 서법가들(북경)>에서 중국의 수도이자 전통서법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북경을 찾아가 뚜렷한 자기 색깔을 지닌 네 분의 중견작가(석개(石開)/후캉메이(胡抗美)/증래덕(曾來德)/이강전(李刚田)들을 만나 그들이 걸어온 길과 예술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이 일궈낸 현대서법계의 역정과 진화의 모습을 육성을 통해 들어볼 수 있는 시간이었고, 우리는 이 기획인터뷰를 통해 우리 서예계에 반추해보고자 한다.이번 <대륙을 이끈 서법가들(상해•항주)>은 중국 남방의 서화예술에서 큰 줄기를 이루는 상해와 항주를 찾았다. 서예 전방의 영역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3인의 서법가들을 만나 그들의 예술세계에 대해 들어보았다. 그 세 번째 순서로 진진렴 선생을 찾았다.인터뷰는 글씨21의 성인근 편집주간이 이어갔으며, 통역은 절강대학 임여 교수가 맡아주었다. 2020. 1. 29글씨21 편집실Q. 서법의 길에 몸을 담게 된 이유어릴 적 학교에 다닐 때 가장 먼저 배운 것들은 회화와 전각이었습니다. 서예는 그저 스스로 좋아하며 공부하였는데 중국미술학원에 입학하고부터는 매우 전문적으로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시작한 기점을 얘기하라고 한다면, 미술학원의 여러 유명하신 예를 들면 루웨이자오(陸維釗)선생, 사멍하이(沙孟海)선생, 쭈러산(諸樂三)선생 같은 명사들을 만나면서부터 그저 모필로 쓰는 글씨를 떠나 전문적인 서예공부를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Q. 서법의 실기와 이론을 함께 실천하게 된 계기가장 이른 기회는 당연히 미술학원에 들어가서 전문적 서예공부를 하면서부터입니다. 전문적 서예공부라면 당연히 이론이 있기 마련이며 이론은 창작과 병행하는 것이지요. 따라서 우리도 창작실천에서부터 자연스럽게 학술연구 쪽으로 점점 옮겨가게 됩니다. 대학이므로 학술적 연구를 하게 마련이죠.. 그러면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 이론연구는 창작에 매우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론연구는 예를 들면 서법의 정의라든가 관념, 그리고 미래서법의 선택, 다시 말해 서법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가 등 아주 많은데, 여기서 느낀 것은 이론적 수준을 가진 예술가와 그저 글씨를 쓰기만 하는 예술가 사이에는 매우 뚜렷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Q. 『中國書法發展史(중국서법발전사)』를 쓰게 된 계기와 이 책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이 책은 제가 수업할 때 강의한 내용을 녹음했다가 학생이 다시 정리한 책입니다. 이 때 제가 강의했던 내용은 일반적인 서법사의 강의와 현저히 다릅니다. 그때 당시에는 보통 서법사의 책들이 인물의 소개나 또는 매우 간단한 지식들의 소개였습니다. 그러나 대학에서 하는 강의가 이런 간단한 지식들만 소개한다면 학생들은 불만이 많겠죠..선생님도 만족하지 못할 것입니다. ---중략--- 이론은 각 시대에 맞는 그 시대의 정의를 내려야 합니다. 한나라부터 수당, 송원명청의 시대적 정의가 각각 다릅니다. 이 정의는 당시 저에게 서법사에 관하여 어떤 관념 또는 학술적 시각을 갖게 하였습니다. 즉 특별한 시각으로 서법사를 보자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책은 연구자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원래부터 있었던 지식류나 상식류의 서법사 책보다 더 재미가 있습니다. 이는 나중 저의 서법사 연구의 특징으로 형성되어 가는데 반드시 역사의 지식, 현상, 인물속에서 그 의의를 찾아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순수하게 자료만을 소개하려면 그 의의를 명확히 해석해야할 필요가 없겠지만, 저희들의 서법사 연구 방법에서는 이 의의의 중요성을 특별히 강조합니다. Q. 1999년, 예술과학성과상으로 중국서법최고상인 ‘兰亭奖(난정장)·理论奖(이론장)’을 수상했는데, 당시 연구 주제와 수상의 감회에 대해이론상은 문화부의 상이 아닙니다. 이 이론상은 중국문련(文聯)이 수여한 상이죠. 그리고 다른 하나가 바로 문화부의 상인데 예술학과(藝術學科)상입니다. 두 개는 서로 다른 상이지만 저로서는 다 성공한 셈입니다. 왜냐면 당시에 서른 남짓, 마흔이 안 될 나이였는데, 당시 저보다 연령이 많이 높은 전문가들도 저와 마찬가지로 연구를 하였지요.. 저도 연구를 했고요, 그러나 저의 연구 방법은 남들과 달랐습니다. 저의 연구 방법은 방금 말씀드렸듯이 특히 그 의의를 찾는데 치중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서법 이론계에서는 대부분 지식의 전파, 고증이나 진위들을 연구하였고 저희처럼 학문적이며 사변적 이론의 연구자들은 매우 적었습니다. 최종 저희들이 내놓은 연구 성과를 가지고 문화부, 문련, 서법가협회의 상을 받게 된 데는 사실 저희들도 매우 의외였습니다. 당시의 이론연구들 속에 이 연구는 매우 개별적이었으며 매우 희소하였습니다. 대부분은 이런 연구에 대해서 이해를 하지 못했지요. 이것은 어떻게 보면 중국의 개혁개방이 당시의 저희들에게 좋은 기회를 준 것입니다. 모두에게 별로 이해되지도 않으며 익숙하지도 않은 이런 연구가 최종 높은 상을 받게 된 것은 사실 매우 쉽지 않은 일입니다. Q. 학원파를 설립하게 된 계기와 성과 학원파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습니다. 많은 서법가들로부터 이러한 구상이야말로 매우 전망이 있는 발전방향이라 느끼고 있기 때문이죠..그러나 당시에는 사람들이 별로 이해를 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반대하는 소리도 많았습니다. 사실 우리가 당시 학원파를 제창할 때는 많은 다른 서법가들의 입장과 달랐습니다. 왜냐면 당시 대부분의 서법가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들은 서법은 \'과연 무엇인가\', \'역사상 무엇들이 있었던가\', \'고대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그것은 또 무엇인가\' 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당시 학원파의 방식을 통하여 연구한 것은 \'왜 이런가?\', \'이후에 이것은 또 어떻게 되어가는가?\' 하는 것들인데 이는 각도가 완전히 다르지요. 하나는 즉, \'이미 있는데 이것은 무엇이며 무엇들이 있는가?\'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이미 하나가 있는 이것은 왜 이런가?\', \'다른 모습이 되어서는 안 되는가?\', \'그리고 또 앞으로는 어떻게 되어 갈 것인가?\' 하는 것이지요. 이는 연구의 각도에서 보자면 매우 큰 차이가 있습니다. 만약 20년이 흐른 뒤 다시 돌아와 오늘을 보았을 때, 마침 이러한 각도로 연구할 수 있는 오늘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이 바로 이 이십 년간을 인도하는 위치에 있을 수 있게 됩니다. 결국 모두가 이 방식대로 해나갈 것이라 생각합니다. 당시 우리들이 이 학원파를 연구할 때 우리는 고대서법의 유형 이외에 오늘날의 새로운 서법유형이 찾아지기를 크게 희망했습니다. 고대서법은 이미 오천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미 이는 하나의 유형입니다. 오늘날 서법은 다른 유형을 가질 수 없는가...이에 당시 학원파는 세 가지 원칙을 가지고 있었는데 첫째는 \'주제선행(主題先行)\', 둘째는 \'형식지상(形式至上)\', 셋째는 \'기술본위(技術本位)\'였습니다. 이 세 가지 원칙을 가지고 오늘의 서법예술창작을 한 단계 더 끌어올려 과거 고전서법의 붓글씨와 분명이 구별되도록 하고자 하였습니다.이는 오늘날 이 시대 서법이 마땅히 가져야 할 원소들입니다. 다시 보충을 하나 하자면 저의 40년간 서법 연구속에서 사람들은 저의 서법연구에 관한 성과를 여러 가지 얘기하겠지만 저 개인적인 견해로는 학원파 서법의 탐색이 제 일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공헌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학원파는 사상적으로 사실상 이 시대 서법의 프레임을 새로 설립해 놓은 것입니다. 이런 프레임이 있음으로 인해서 사상관념과 방법론상 개척의 능력이 생기게 되며, 이런 사유를 사용하여 다시 고전을 보았을 때, 즉 원래 우리가 이해했던 고전에서 학원파의 입장으로 다시 본 고전은 변화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는 새로운 해독방식이며 이로써 신첩학(新帖學)이나 신비학(新碑學)에 대해서도 저희들은 많은 새로운 관념들을 제기하였습니다. 예를 들자면 첩학에 관하여 우리들이 특별히 주의했던 것은, 원래 알고 있던 조맹부의 원명청시대 서사법에서 위진남북조때의 즉, 왕희지 당시의 법을 써야한다는 신첩학을 제창하였습니다. 신비학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청대의 서법가들을 포함하여 당시의 많은 서법가들 중 특히 조지겸이나 포세신등처럼 첩의 필법으로 비를 썼는데, 신비학에서는 반드시 석각의 방법으로 비를 써야한다고 매우 분명하게 제기하고 있습니다.즉 행초서를 쓰는 법으로 비를 쓰거나 모필의 방법으로 비를 써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뒤에 \'초성추종(草聖追踵)\'으로 위비, 당해, 해서 등에 모두 이러한 새로운 해석방법들을 제창하여 오늘날 창신의 새로운 틀을 만드는 사상적 운동이 되고 있습니다. Q. 2009년 북경 중국미술관에서 ‘意义追寻(의미를 찾아서)’전시를 개최하였는데, 일반적인 서예전과 달리 세부주제로 나누어 진행한 이유는?2009년은 제게 있어서 전환점이 되는 한해입니다. 과 우리들이 서법작품을 볼 때는 숙련이 잘 된 아름다운 모필 글씨를 보는 것이지요. 당연 이 역시 서법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는 그것을 서법예술이라 하기는 많은 부분들에 예술성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다 그랬지요..비교적 많이 보이는 것은 개인의 똑같은 자기의 서법풍격으로 모든 시문들을 적은 것들이었습니다. 당시, 송사, 한부 혹은 위진의 문장 등을 썼었지요. 그런데 대부분 이런 현상들에 대하여 크게 해괴하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서법은 마땅히 이래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전시를 통해 저는 스스로 추궁한 것이 하나 있는데 이 추궁의 뜻은 먼저 첫 번째 네 가지로 \'방서(榜書)\', \'간독(簡牘)\', \'초성(草聖)\', \'고예(古隸)\'였습니다. 이 네 가지는 한 서법가의 풍격이 하나의 유형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려는 것이었습니다. 만일 백여 점 작품이 전시중인데 모두가 하나의 풍격이라면 이 전시는 전혀 볼거리가 없습니다. 관중도 좋아할 리 없을 테지요. 따라서 작가는 어떤 장소에서든 각각 다른 풍격 즉 고예, 간독, 초성, 방서 등을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두 번째 부분은 \'열독서법(閱讀書法)\'인데, 이 부분은 관상의 목적에서가 아니라 문사를 전달한다는 의미로 ‘비첩고증록(碑帖考證錄)’, \'금석제식록(金石題識錄)’, ‘서령독사록(西泠讀史錄)’, \'명사방학록(名師訪學錄)’ 으로 나누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전시에서는 크게 중시를 받지 못했습니다. 대부분의 서법가들이 쓴 내용은 잘 아는 시문, 예를 들면 이백의 시나 두보 시 또는 백거이의 시이지요. 관객은 또 무엇을 썼는가에 관심이 별로 없습니다. 관심이 있는 것은 쓴 것이 잘 썼느냐 못썼느냐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저는 당시 전시를 하면서 관중들이 저의 전시를 반드시 읽도록 하였습니다.따라서 \'열독서법\'이라 하였고 이에 관한 각종 내용들을 만들었지요. 이것은 당시 매우 개혁적인 것이라 대부분 사람들이 익숙지 않아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다시 돌이켜보면 오늘날 이 시대와 매우 적합한 일이 되었습니다. 2009년부터 지금까지 꼭 십년이 지났는데 지금 중국서법계에서는 이미 이 열독과 문사내용에 관해 매우 큰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십 년 이전에는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지요...09년에 가졌던 \'의의추심(意義追尋)\'의 전시는 제 개인적으로 전시를 통하여 관상에 관한 것을 가장 극치로 만드는 동시에 열독도 가장 극치로 만들어야겠다고 희망했었습니다. 하나의 전시 속에 말이죠... 그때 전시는 바로 그런 목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목적의 전시는 많은 서법가들로서 생각조차 하지도 못한 일이었을 겁니다.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말이죠. 당시 이 전시는 매우 관심을 끌었던 전시였습니다. 만약 하나 보충하라면 당시 2009년 전시는 주제가 \'의의추심\'이었는데 내용과 문사를 중히 여긴다는 것이었고, 이러한 방식을 통하여 당시 서법전람의 습관적 패턴을 개조하고자 하는 시도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Q. 서예전시가 대중에게 다가서고 함께 호흡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야한다고 생각하는지?사실 아까 말한 2009년 중국미술관에서 \'의의추심\' 의 주제 속 여덟 개 부제로 열린 전시는 관객들로 하여금 오랜 시간동안 전시장 안에서 끊임없이 음미하고 감상하고 끊임없이 열독하라는 뜻이었습니다. 왜냐면 예전의 우리들의 전람은 대부분 전시장 안에서 한 바퀴 휙 돌고 가버립니다. 대동소이하고 잘 알아볼 수 없는 글자들하며...어떤 것들은 잘 알고 있는 당시, 송사들이라 이 시들을 굳이 다시 읽어볼 필요도 없지요. 따라서 별로 볼게 없다 생각하고 그저 이 양반 글씨 잘 썼네... 하고 가버립니다. 별로 큰 흥미가 없는 것이지요. 저는 여덟 가지 부제를 달았지만 네 개는 관상 부분이며 네 개는 열독부분입니다. 즉 관중을 오래 머물도록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명제 속 몇 가지 문제에 대해서는 사실 토론이 필요한 게 있습니다. 지금의 서법이 봉착한 문제는 대중화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죠. 오늘날 서법을 중시하지 않는 것 중에 주요한 것으로 꼽는 관중이 볼 줄을 모른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오히려 전시하는 서법가들의 상상력이 부족한 것이며, 개척의 공간이 없으며, 관객을 두 시간 동안 머무르게 할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이 모순의 초점은 대중화이든 무엇이든 관중들로 하여금 와서 보도록 연구한 것이 아니라, 보라고 제작한 작품들이 너무 간단하거나 너무 서툴거나 너무 빈번하다는 것입니다. 이렇다면 목전의 가장 시급히 개조해야할 것은 대중이 아니라 바로 전시를 개최하는 서법가입니다.---중략--- 제 생각으로는 대중들에게 작고 간단한 전시를 보여주는 것은 큰 문제가 안 됩니다.그러나 전문가에게 작고 간단한 전시를 와서 보라면 기분이 좋지 않을 겁니다. 너무 과소평가한 것이 아닌가, 나의 취미를 이정도로 생각했는가 할 것입니다.즉 앞으로의 전시가 도전해야 할 것은, 전문가를 마주하여 그로 하여금 능히 오래 머무를 수 있도록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 정도로 이해하시면 될 듯합니다. Q. 기획자나 큐레이터가 해야 할 역할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지?방금 제기하신 문제는 사실 중국 일본 한국의 서법가들 모두가 가지고 있는 문제들입니다. 한 개인의 서사의 습관이 형성된 뒤에는 모든 작품들의 풍격을 변화시키는 일은 매우 어려우며 피치 못할 문제인 것 같습니다. 따라서 한국도 이 문제를 피해가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면 한국 친구들이 제게 작품집을 보내오기도 하는데 앞 몇 장을 보면 뒤에는 전부가 대동소이합니다. 그저 써놓은 내용만 다를 뿐이죠.. 따라서 만약 그저 모필로 쓴 글씨라는 각도에서 본다면 이는 어떻게 보면 도저히 극복할 방법이 없다는 뜻과도 같습니다. 이는 마치 도저히 풀 수 없는 매듭 같지만 만약 이를 예술표현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는 서법가의 기술보다 전시를 기획하고 추진하는 사람의 사상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이 기획자의 시야가 얼마나 광활하냐에 따라 그가 추진하는 내용도 얼마나 풍부하냐가 되겠지요. 즉 관중들이 전시를 보면서 얻은 느낌과 감상의 유쾌함이 훨씬 풍부해진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특히 서법전시의 기획이 회화나 조각 등 당대예술 어떤 것보다도 더 중요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원래 서법은 기술상 큰 상상력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만약 기획자가 중간에서 어떠한 중간교량작용을 해주지 않는다면 이런 서법 전시는 기본적으로 별로 볼게 없습니다. 좋은 기획자가 있으면 앞으로 전시는 점점 더 보기가 좋아질 것입니다. Q. 행초서의 창작 측면에서 가장 주안점을 두는 부분이 무엇인지? 그리고 선생님의 현재 행초서가 있기까지의 과정에 대해저는 가장 먼저 서법을 공부할 때 시작한 것은 송대(宋代)의 행초서입니다. 임첩을 한 것이 비교적 정통이었고 이것이 기초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행초서의 미불 황정견을 공부하면서부터는 점점 흡수한 부분이 다원화 되어 갔습니다. 이 다원화속에는 민국시기의 조지겸, 포작영, 오창석 그리고 위로는 왕희지와 왕순의 백원첩등이 그 안에 있었죠. 그러나 그러한 것들은 모두 행초서의 울타리 안이었고 나중에는 광초를 연구하게 되는데 즉, 저의 전시항목 중 하나인 \'초성추종(草聖追踵)\'으로 모든 경전적인 광초를 분석하였습니다. 그 가운데에서 깨달은 바가 매우 큽니다. 또 \'위비추구(魏碑追究)\'에서 위비 석각의 도끼나 끌로 다듬은듯한 획들은 마침 행초서에서 볼 수 없는 것들이며 완전히 새로운 것들입니다. 위의 두 가지를 결합하여 보태고 최근에는 청동기의 명문 즉 \'금문대전(金文大篆)\'을 공부합니다. 이런 것들을 많이 보고나면 자기의 붓끝에서 나오는 것들이 우리가 습관적으로 보아왔던 조맹부나 동기창의 행초서들, 심지어 송대의 행초서들이 가지고 있는 그런 유창함과는 완전히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면 모필안에서 나타나는 풍부함의 정도에서 송원이후의 행초서 서가들보다 변화와 언어가 더 많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석각의 내용이 있으며, 광초의 내용이 있으며, 청동기의 명문을 주조한 획들의 방식이 있기 때문이죠. 따라서 \'이 행초서는 매우 보기가 좋다\'는 얘기들을 하는데 이 보기가 좋다는 말속에는 학습한 내용이 정통이라는 것이고, 둘째는 위의 내용을 겸용하여 여러 가지 필세로 전이시켰음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다면 모두가 제가 느꼈던 것처럼 체득할 수 있을 것입니다. 31:08 따라서 지금 우리들이 쓰는 이 획들을 가지고 되돌아 다른 서법가들의 글씨를 비추어보면 글씨는 잘 썼는데 선의 질은 합격하지 못한 예가 많이 있습니다. Q. 학생들에게 행초서를 입문하게 하는 지도법은?입문은 역시 경전적 작품으로 출발하지만 저희들이 지도하는 과정에서 관심을 가지고 보는 것은 학생들이 어떻게 쓰느냐가 아니고 어떻게 보느냐 입니다. 즉 학생들의 경전적 작품에 대한 분석능력인데 만약 이것을 이해하고 안다면 언젠가는 표현해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이것을 모른다면 그 학생은 영원히 표현해 낼 수가 없겠지요...따라서 제가 학생을 가르칠 때 대부분 그가 고대의 법첩이나 탁본을 볼 때 어떻게 보는가에 많은 주의를 기울입니다. 학생이 그걸 보며 이해하고 안다면 그는 반드시 희망이 있습니다. Q. 예서작품에서 漢隷(한예)에 국한하지 않고, 篆書(전서)와 簡牘(간독)의 字體(자체)와 章法的(장법적) 특징까지 융합하는 양상을 보이는데, 추구하는 방향에 대해원래 예서를 쓸 때 대부분 한대 석각의 탁본이었지만 저는 비교적 고예(古隸)를 좋아합니다. 09년 전시회 때 \'고예신운(古隸新韻)\'이란 항목이 있었는데 고대의 예서, 고박한 예서를 새로운 운치로 표현하였지요. 이 고예를 일정 동안 쓴 뒤에는 간독(簡牘)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간독은 좋은 것 나쁜 것이 같이 섞여 있고 그 우열의 차이가 매우 큽니다.이 간독을 쓰는 방식이 마침 제가 가장 즐겨 쓰는 행초의 방법과 비교적 부합합니다. 간독의 격동스런 필세가 예서 곳곳에 풍신이 깃들게 하는 매우 큰 표현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다 나중에는 아주 긴 시간에 걸쳐 간독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연구한 것은 한대의 간독인데 진 이전의 전국시대 간독은 필세의 격동이 그다지 강하지 않다고 보았습니다. 한대의 무위한간(武威漢簡)이나 마권만간독(馬圈灣簡牘), 거연한간(居延漢簡) 등은 매우 훌륭한 것들입니다.그것들은 위진시대의 이왕 필법을 가지고 예서의 특징을 해독한 것입니다. 당시 모두가 손으로 쓴 것들이지요...예서는 두 가지 길로 나누어져 있는데, 하나는 고대 석각의 예서로 예를 들면 제가 비교적 중시하는 형방비(衡方碑), 서협송(西狹頌), 장천비(張遷碑) 등이 이러한 작품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는 간독인데 한대의 간독이 주요하며 매우 수준 있는 것들이라 생각합니다. 지금은 이 두 방면으로 연구하고 있습니다. 예서의 입장에서 보면 석각예서는 반드시 후중하고 고박해야 하며, 간독은 반드시 민첩하며 활발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 두 가지는 한 사람의 서법가로 보았을 때 두 개의 극단이지만 절대 한쪽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Q. 전통의 올바른 계승과 이를 통합 현대화의 문제에 대해오늘날 이 사회는 매우 다원화되어있으며 현대화의 정도가 매우 빠릅니다. 따라서 서법은 당면해 있는 예술의 합법적 신분을 빨리 얻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자면 반드시 과거의 학술적 입장에서 보다 더 많은 예술과의 접근이 필요합니다. 하나의 예술 형식이 되어가는 것이지요. 그러나 지금 상황아래에서는 물론 지금 전통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이 있긴 하지만, 제 생각에는 지금 저희가 일하고 있는 것들이 모두 고대의 경전과 전통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반드시 굳게 지켜야 할 입각점입니다. 흔들려서 안 됩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이런 경전을 보면서 이를 해독하는 방식은 고대, 근대와 다를 수 있습니다. 고대에나 근대에 요즘같이 빠른 속도의 사회적 변화가 없었습니다. 고대에 어떻게 요즘 펜글씨나 컴퓨터의 자판 인터넷 및 인공지능 등을 생각할 수 있었겠습니까? 고대에는 없었습니다. 만약 고대의 방식으로 경전을 해독한다면 창조력이 없습니다. 또 고전을 완전히 포기해서는 서법이 변질되고 맙니다.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게 되지요.. 이것이 바로 전통의 가장 어려운 부분인데 \'수갑을 차고 춤을 추는\'것으로 형용할 수 있습니다. 매우 부자연스럽지요. 저기도 여기도 수갑을 채워 모든 곳이 묶여있지만 그래도 아름다운 춤을 춰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들이 바로 오늘날 서법가들의 재화를 검증하는 곳이 되며 가장 중요한 곳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전통은 반드시 굳게 지켜나가야 합니다. 경전은 반드시 존중해야 합니다. 그러나 해독하는 방법은 변해야 합니다. Q. 선생님의 작품이나 책을 보고 영감을 받는 작가와 후학들에게제 인상속의 한국서법은 매우 책임감과 역사의식을 가지고 어떻게든 잘 해서 발전시키고자 노력한 걸로 압니다. 저희는 지난 몇 년간 예술의 전당을 비롯하여 한국의 적지 않은 모임과 활동에 참가하였습니다. 심지어 저희들의 학원파도 가서 전시를 하였지요. 그때는 한국 서법이 매우 왕성하였습니다. 그러나 요즘 몇 년간 조금 쇠퇴해 간 느낌이 듭니다. 활약의 정도가 부족하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전반적인 한국과 관련이 있으리라 보지만 예를 들면 대학에서 서예과가 없어졌는데 혹시 인재공급이 단절된 것은 아닌가... 물론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저의 생각에 한국이 만약 서법의 발전을 바란다면 한국이나 일본이나 마찬가지로 지금 많은 열정을 보이는 중국과 함께 이 시대의 서법, 즉 21세기 서법의 유형과 어떻게 개척해 나가야할 것인가를 연구해야 합니다. 따라서 옛날의 활력을 되찾고 동시에 서법이 앞으로의 예술 속에 발전해 나갈 가능성을 탐색해야 합니다. 한 개인이 기술적으로 글씨를 잘 쓰느냐 못쓰느냐 저는 이에 별 관심이 없습니다. 누가 저의 서법에 존경심을 표시해도 저는 기본적으로 별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시종 우리들이 가져야 할 것은 사명감으로 이 시대의 서법은 과연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 후대 사람들은 또 지금 오늘의 서법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것처럼 우리들은 이에 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물려준 것들이 좋지 못하다면 후대 사람들은 비평을 할 것이고 물려준 것이 좋다면 그 사람들은 우리들을 찬성하고 받들 것입니다. 따라서 이 책임이란 한자문화권속 중국, 한국, 일본이 공동으로 최소한 일부의 사람들이라도 반드시 이 일을 맡아서 해나가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陈振濂(진진렴 chénzhènlián)1956년생(64세). 上海 출생. 호 颐斋. 서법창작,이론가, 학자형예술가. 출신학교: 浙江美術學院(現中國美術學院) 약력: 中國文聯副主席,中國書法家協會副主席,中國文藝評論家協會副主席,浙江省文聯副主席、浙江大學人文學院院長,西泠印社副社長 등. 현재: 浙江大學藝術學院院長 출판: 《中國畫形式美探究》、《書法學》、《書法美學》、《書法教育學》、《現代中國書法史》、《線條的世界—中國書法文化史》、《空間詩學導論》、《宋詞流派的美學研究》、《中國書畫篆刻品鑒》、《近代中日繪畫交流史比較研究》、《現代日本書法大典》 등 약 40종.
원로에게 길을 묻다
우산 송하경1942년, 전라북도 김제 출생인 우산 송하경 선생은 서예가이자 한학자인 강암 송성용(1913~1999) 선생의 자녀 4남 2녀 중 차남이다. 그는 서예와 전각, 이론과 비평, 교육 등에서 철두철미한 철학으로 임하며 후학들에게 큰 교감이 되어왔다. 이번 글씨21의 ‘원로에게 길을 묻다’에서는 송하경 선생이 평생을 몸담아온 서예인생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었다. 아버지 강암 송성용 선생, 어머니 이도남 부인과송하경 선생과 형제들1964년 명륜당 앞에서 (맨좌측 송하경 선생)송하경 선생께서 주장하신 ‘신속미주의’가 추구하는 서예에 대해, 또 개인전시회에 대한 개인적인 소견, 선생의 철학에세이 『내 생각이 고루한가』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누구보다 민족의식이 강하셨고, 허투루 생각과 행동을 하지 않으셨던 아버지 강암 송성용 선생에 대한 추억을 들어볼 수 있었다. “서예작품 속에는 스토리텔링이 들어있어야 한다.” 빼곡이 진열된 그의 서재에 책만큼이나 송하경 선생의 몸과 마음속에는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그 철학은 그의 손과 붓을 통해 한 자 한 자 서예작품으로 전해지며, 그것은 우리에게 울림으로 다가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2020. 3. 6글씨21 편집실 송하경(宋河璟 Song Ha kyung / 友山) 출생 | 1942-10-14, 전라북도 김제분야 | 서예/전각/서각, 비평/이론, 교육 학력사항1980 ~ 1986국립대만사범대 국문연구소 문학박사1968 ~ 1971국립대만대 철학연구소 문학석사1961 ~ 1965성균관대학교 문과대학 동양철학과 문학사1957 ~ 1960남성고등학교 경력사항2017.03 ~ 0000.00(재) 강암서예학술재단 이사장 (현직)2011.04 ~ 2013.04문화재청 문화재위원2008.03 ~ 0000.00성균관대학교 유학대학 명예교수 (현직)2006.02 ~ 2016.01한국 서예비평학회 제1~4대 회장1999.10 ~ 2003.09한국 동양예술학회 제1·2대 회장1998.08 ~ 2007.07동아시아 문화포럼 대표, 『동아시아 문화와 사상』 편집인 겸 주간1998.02 ~ 2005.05한국서예학회 제1대 회장1998.02 ~ 2003.01성균관대학교 박물관장1996.08 ~ 2002.09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 제1·2·3대 조직위원장1995.04 ~ 1999.03한국양명학회 제1·2대 회장1991.02 ~ 1993.01성균관대학교 유학대학장 겸 유학대학원장1986.02 ~ 1989.01(사)한국미술협회 이사 (서예분과)1985.03 ~ 2008.03성균관대학교 유학대학 유학과 부교수,교수1974.04 ~ 1985.02전북대학교 교양학부, 문과대학 철학과 전임강사,조교수,부교수 전시이력개인전2008 ~ 0000개인전, 갤러리 라메르2003 ~ 0000개인전, 갤러리 라메르1996 ~ 0000개인전, 동아일보 일민문화관1987 ~ 0000개인전, 미국 로스앤젤레스 시몬슨 화랑(구 삼일당)1983 ~ 0000개인전, 전북예술회관1979 ~ 0000개인전, 전북여성회관 단체전2018 ~ 0000한·일·중 서예술 2018 평화 메세지전, 한국미술관 / 강암연묵회 창립 50주년 기념전, 전주소리문화의전당2017 ~ 0000오늘의 한국 서예전, 예술의 전당 서예박물관 / 제11회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 전주소리문화의전당2016 ~ 0000성균서도회 100회 기념전, 한국미술관 / 제32회 국제난정필회 경주전, 경주예술의전당2015 ~ 0000남·북코리아 미술대전, 한국미술관2013 ~ 0000중·한서화 명가전, 주한중국문화원2012 ~ 0000한·중수교 20주년 기념 한·중명가전, 한국미술관 수상내역1989 ~ 0000대한민국 서예대전 초대작가1982 ~ 0000대한민국 미술대전 초대작가1965 ~ 1981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 8회 입선(1965,1971,1974,1975,1977,1978,1980,1981), 1회 특선(1979) 저서2015『내 생각이 고루한가』, 도서출판 다운샘2009『세계화바람 앞의 동아시아 정신』, 도서출판 다운샘2003『서예미학과 신서예정신』, 도서출판 다운샘2001『조선조 성리철학의 구조적 탐구』, 성균관대 출판부 (공저)1996『신서예시대』, 도서출판 불이1984『중국철학사』, 일지사 논문/기고2014\"김용옥의 『석도화론 료법장』번역에 대한 비판적 신역\",서예비평 13호, 한국서예비평학회2013\"『석도화론 일획장 제1』 번역상의 몇가지 의견\", 서예비평 12호2012\"걸레 중광은 무엇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는가\", 서예비평 10호2008\"소전 손재형의 서예세계\", 서예비평 3호2008\"추사의 원교 『서결』 비평에 대한 비평\", 서예비평 2호2007\"동강 조수호의 접의 용필미학과 속미적 예술세계\", 서예비평 1호2007\"한국 현대 서예의 비판적 회고\", 서예와 문화 2호,
(사)한국서가협회 제 9대 신임이사장 백농白農 한태상 선생을 만나다
새 시작을 알리는 희망의 계절 봄의 시작과 함께 새로운 변화를 기대하는 회원들의 기대에부응하여 (사)한국서가협회의 제 9대 이사장으로 선임된 백농白農 한태상 선생을 만나 보았다. 백농白農 한태상선생은 1952년 충청남도 청양 출생의 서예가로 다양한 창작활동과 후학 양성에 노력하며, 서예술의 아름다움을 계승하고 알리기 위해 주력해 왔다.이번 한태상 선생의 인터뷰에서는 신임 이사장으로서 선생이 가진 포부와 협회가 나아가야할 방향, 작가로서 그가 지닌 서예 철학등에 대한 이야기들을 자세히 들어볼 수 있었다.寒竹樓 / Mixed media on canvas, 60X25cm(3EA), 2004선생은 \'한글 추상\'이라는 독특한 구상의 평면 회화의 길을 개척하고 있다.‘한자’가 아닌 ‘한글’을 바탕으로 작품세계를 추구하는 선생의 작품들은 문자 요소들이 해체되어 다시 자음과 모음이 결합하여 이루어지는 독특한 형태를 띄고 있다. 선과 점의 결합으로 모음이 형성되는 기본 원리를 가진 한글이야말로 선생이 추구하는 서예의 현대화, 추상서예에 가장 적합한 문자라고 할 수 있다. 자·모음series08-08-08 / Mixed media on canvas, 17.5X25cm, 2008자·모음Series16-08-07 / Mixed media on canvas, 120X20cm, 2016올해로 서른살을 맞이한 젊은 (사)한국서가협회가 한태상 신임 이사장과 더불어 안정과 화합 원칙이 공존하는 상생을 바탕으로 21세기 한국서단의 새로운 지각변동을 가져올 震源地가 되기를 기대한다. 2020. 4. 13글씨21 편집실 백농(白農) 한태상(韓泰相, HAN TAI-SANG) 출생 : 1952년 학력사항 :서울교육대학교 졸업홍익대학교 교육대학원 미술교육과 졸업북경사범대학교 영상미디어대학원 박사과정 경력사항:1988년 제7회 대한민국 미술대전 특선1987년 제6회 대한민국 미술대전 특선1973년, 1976년, 1977년, 1978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 4회 입선2008 서울서예비엔날레2010 일본 동경 Kyu kyo Do Gallery2011 KARLSRUHE2011 KCAF2012 제주현대미술관2013-17 전주세계비엔날레2013 베이징비엔날레2013 성도중국서법국제대전2014 원곡서예상 수상2015 북경 중국국제서예교류전2015 중국남창국제아트페어2015 Hong Kong Art Fair2016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 개인전 2017 미술세계상 평면부분 수상작가300여회 국내외 초대전 참여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초대작가한국서가협회 초대작가전) 4대 한국서가협회 부회장한국서가협회 창립 등기이사한국국제서법연맹 공동회장현) 서울교육대학교 명예교수서울교육대학교 미술과 교수역임, 옥조근정 훈장 수훈현) 9대 한국서가협회 이사장
국립현대미술관 [미술관에 書: 한국 근현대 서예전] 기획자 배원정 학예사 단독 인터뷰
《미술관에 書: 한국 근현대 서예전》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전관(2,3층)배원정 학예사 인터뷰 ‘미술관에 書’ 제목이 참 요상하다. 마치 미술이 아닌 것이 미술관에 들어선 것처럼 말이다. 서예가 미술인가 하는 논란은 어제오늘만의 현상은 아니다. 서양에서 얘기하는 미술의 논리로는 납득이 어려운 서예만의 독특한 미술성, 문文과 필筆이 어울려 표현되는 그 어떤 접점. 그것이 서예인데 말이다. 그래서 서예는 어렵다. 하는 자도 어렵고 보는 자도 어렵다. 한자 세대가 아닌 대중은 더더욱 어렵다. 정직한 문자로 형식을 표현하면 미술이 아닌 것 같고 내면의 그 무엇으로 문자성을 가진 회화적 조형감각으로 처리하면 아트가 된 것으로 우리는 미술의 정의를 내리곤 한다. 어쩌면 서가 미술이냐 아니냐의 논쟁을 따위를 떠나 서예는 이 바닥에서 어떻게 살아날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논쟁이 더 필요해 보인다. 더 솔직히 말하면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서예는 오늘날 한국의 미술시장에서 절박한 상황에 위치해 있다. 따라서 현대미술관에서의 서예 특별전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이번 기획전에서 서예인의 자세는 좋은 작품을 보고 감상한다 라는 보편적 시점을 넘어 서예, ‘어떻게 해야 하나’ 라는 반성의 시점에서 바라봐야 할 것이다. 이 미술관엔 전통도 있고, 전위도 있고, 타이포그라피도 있고 캘리그라피도 영상도 있기 때문이다. 전통의 서예를 품위 있게 품고 가는 자세도 중요하지만 더 넓게 안고 가는 포용의 자세도 필요해 보인다. 이에 글씨21에서는 유투브 온라인 개막을 시작으로 하여 5월 6일 ~ 7월 26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전관(2, 3층)에서 50년 만에 열리는 서예 단독 기획전 《‘미술관에 書: 한국 근현대 서예전》의 기획자인 배원정 학예사를 만나 전시기획의 배경과 서예를 바라보는 솔직한 얘기들을 들어 보았다. * 본 기획전은 5월 6일부터 현장 관람이 시작되었고 온라인 신청을 우선하되 현장접수도 가능하게 됨을 공지합니다. Q.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서예전을 기획하게 된 배경과 준비과정 중 어려웠던 점이 있다면?->첫 번째 서예 기획전이다 보니까 어떤 부분들을 조명할 것인가에 대한 것이 고민이 참 많았었고 그 가운데에서도 무엇보다 50년 만에 서예가 조명이 된 것에 대한 명분과타당성 그것을 구현하는 것에서 과연 서예가 미술인가, 그런 부분들을 해결해 나가야할 숙제도 있었고 미술관에서 서예를 조명하는 것이 응당 서예가 우리 미술의 조형의 원리이고 동아시아 회화사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그런 한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조명되지 못했던 것들에 대해서 관람객들에게 설득력 있게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 첫 번째 숙제였습니다. 그래서 그 부분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에 대한 고민, 작품선정에 대한 문제가 개인적으로 어려웠습니다. 두 번째로는 작가와 작품을 선정하는데 있어 개인의 단독적인 생각으로만 진행했던 것이 아니라 작품 선정위원회등 견해를 참고하여 진행하였는데, 그 과정에 있어 장소와 공간의 한계가 있다 보니 중요한 분들임에도 불구하고 피치 못하게 모시지 못한 분들이 계셨는데 그분들이 가지실법한 서운함을 어떻게 해결해 나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부분도 개인적으로 어려운 부분이었습니다. 이번이 현대미술관에서 서예가 첫 번째 전시라는 부분을 좀 감안해주셨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이번전시는 첫 번째 서예에 관한 모색전이며 이번 전시가 단초가 되어 향후 더 좋은 원로, 현대 작가들이 점진적으로 조명될 계기가 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기대해 봅니다.Q. 이번전시를 통해 한국서예계와 관객들에게 바라는 점이 있다면?->워낙 서예계에서 오랫동안 깊은 애정을 가지고 활동했던 분들이 많아 말씀드리기 조심스러우나 이번 전시를 준비하며 느꼈던 부분들 중 일반 대중들에게 서예 전시와 관련한 계획이나 의견을 물었을 때 굉장히 거리감이 큰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서예라고 한다면 어렵고 한문의 경우 한자 세대가 아니라 읽을 수 없는데 어떻게 감상을 해야 할지, 감상법부터 시작해서 관람객들에게 서예를 어떻게 한층 더 친숙하게 느낄 수 있게끔 할 수 있을지, 그리고 이곳은 미술관이기 때문에 이것이 해설적이거나 설명적이기 보다 감상적인 측면에서 전달을 해야 될 텐데 하는 부분에서 많은 어려움을 느꼈습니다.김기승, 애국가, 종이에 먹, 36.1x131cm, 원곡문화재단 소장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문이라는 특성이 가지고 있는 문자적인 특성상 조형성 이라는 부분에 착안을 했을 때 글자를 읽지 못한다 하더라도 문자 안에 가지고 있는 조형미의 부분, 장법, 결구법 등을 한 번 두 번 전시가 시도됨으로서 관람객들에게 서예는 내용을 모른다 하더라도 이런 방법으로 감상하면 되겠구나라는 감상법부터 전달하는 것이 첫 단추를 끼우는 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비단 일반인 뿐 아니라 어린 학생들에게도 우리 서예의 아름다움, 바라보는 관점, 방법론들을 차근차근 개진해 나갔으면 좋겠습니다.석재 서병오(1862-1935), 이백李白 독좌경정산獨坐敬亭山Q. 첫 서예전을 기획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앞으로 풀어나갈 숙제가 있다면?->미흡하지만 제가 느끼기에는 서예가 가지고 있는 잠재력이 무궁무진한 것 같습니다. 읽는 서예에서 보는 서예로 현대서예가 변해가고 있고 그 가운데에서 설사 글자를 모른다 하더라도 분명히 필선이나 획의 힘에서 가슴을 울리는 감상의 묘미가 존재하는 것처럼 여러 가지 접근방법이 가능합니다. 지금 현대미술이 어느 특정한 장르를 형성하는데 있어서 형식과 내용 모두 중요한데 그 부분들에 대한 고민들을 각개전투 하고 계신 현대 서예가분들도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철농 이기우(1921-1993), 학수천세鶴壽千歲, 종이에 먹98.5X65cm, 황창배미술관 소장그 일련의 작가 분들을 모셔놓고 경향의 분석을 통해 갈래를 타다보면 그 안에서 한국 현대서단만의 특징과 성격이 분명히 도출될 것이라 믿어요. 일본이나 중국에 비할 수 없는 한국 서예만의 가능성, 비전이 충분하다고 봅니다. 그런 부분들을 잘 이끌어내어 보여주는 것이 우리 미술관이 가진 숙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학정 이돈흥(1947-2020), 한만해선생시韓萬海先生詩, 2019 종이에 먹, 203.3x69cm, 학정서예연구원 소장초정 권창륜(1943-), 처화, 2016, 종이에 먹143x69cm, 개인소장Q. 이번 전시에 캘리그라피를 포함하게 된 배경과 전통서, 현대서, 캘리그라피의 상관관계에 대한 견해는?->서예하시는 분들 중에 캘리그라피에 대해서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계신 분들이 많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부터도 사실은 이제 한국 근현대 서예 전시를 준비하면서 첫 번째 섹션에서 프롤로그전의 성격으로 회화하고 서예의 관련성에 대해 언급을 했고요. 사실 그 섹션 안에서도 우리가 이 어떤 그동안 서예와 미술의 분계에 있어서 외부의 영역이라고 하죠. 프랑스 앵포르멜, 미국의 추상표현주의, 일본의 전위서 하고의 관련성 속에서 진짜 우리 서예와 회화, 조각, 미술의 각 제 분야하고의 관련성이 좀 더 깊이 있게 논의가 됐어야 됐는데 그게 적극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했었어요. 그랬을 때 그 안에서 갖고 있는 어떤 담론들, 이 얘기들이 상당히 많이 있고 해결해야 될 숙제들이 많은데, 마찬가지로 캘리그라피와 타이포그라피도 지금 이미 대표님께서 방금 언급해주셨던 것처럼 일반 대중들이 캘리그라피에 환호를 하고, 굉장히 심취해있고, 또 그것을 서예보다는 친숙하게 생각하는 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랬을 때에 캘리그라피와 서예의 경계, 그 구분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제가 오히려 역으로 여쭈고 싶어요.최민렬, 유산가, 2007, 종이에 먹, 196x106cm, 개인소장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제 국립미술관에서 이것을 서예라는 어떤 영역 안에서 포함을 시켜서 조명을 하는 데에는 일단은 역사적으로 규명이 되지 않은 사실에 대해서 저희가 함부로 어떻게 IN하고, OUT하는 거는 기획자인 저에게도 리스크가 큰 부분이에요. 하지만, 이 어떤 붓이라는 공통된 소재를 가지고 하는 작업이라는 것. 그리고 ‘캘리그라피’라는 용어가 90년대 후반에 이제 나오게 돼서, 그 캘리그라피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이제 사용하게 된 계기가 이제 서예학과에 정식, 4년제 대학에서 정규 제도권 안에서 서예를 하셨던 분들도 캘리그라피를 하시고 또 이것을 대중성을 획득하는 데에 있어서는 객관적으로 평가 받는데에 있어서는 시간이 걸린다고 하더라도 이거는 분명히 벌여진 현실이거든요. 비단 어떤 한국적 포스트 모더니즘, 이런 것들이 서예에 적용되지 말라는 법이 없잖아요. 그것도 캘리그라피는 일종의 정말 서예의 팝아트라고도 볼 수도 있는 거고요.이상현, 다양한 재료로 쓴 캘리그라피, 2020화선지, 나뭇가지, 칫솔, 수세미, 파뿌리, 골판지 등대중성이라는 측면에서. 디자인이라는 건 결국에 일상성, 대중성을 담보하고 있기 때문에 그 안에서 소비하고 있는 글씨, 그 경계가 점점 모아지듯 아니면 혼용이 된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있어서 어떤 치고 나가야 할 부분을 전통서예 하시는 분들이 계몽적으로 어떤 지침을, 어떤 기준을 세워서 먼저 치고 나가주실 수도 있는 부분이고. 아니면 한편으로는 계속 그 경계나 이런 것들을 깨 부시려고 하는 움직임도 저는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그랬을 때에 캘리그라피라는 용어의 사용의 문제부터 저는 다시 점검해야 되는 문제라고 생각해요. 말로 표현하는 것은 정말 중요한 부분이고 중요한 것은 외국에서는 서예를 캘리그라피라고 번역을 하고 있잖아요. 그런데 마치 서예가 캘리그라피랑은 구분돼서 지금 쓰게 되는 현실에 지금 우리 한국은 처해져 있다는 것이죠. 근데 이런 일련의 흐름을 무시한다고 될 일도 아니고요. 치열하게 한번 정말 토론을 통해서 이 경계와 어떤 각자의 나름의 의미 이것을 외면하고 서로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접점을 계속 찾아나가면서 서로에게 득이 되는 그래서 정말 한글 서예의 어떤 새로운 그 무언가를 치고 나가는 그런 것도 저는 좀 기대를 해보게 돼요.김종건, 봄날, 2020, 인쇄용지에 붓펜, 노래 : 방탄소년단각고의 노력으로 이 전시를 준비하셨는데 코로나19 사태로 전시 오픈식을 하지 못하고, 문이 닫힌 상태로 온라인 전시를 먼저 하게 됐어요. 곧 이제 문을 활짝 열고 관객들이 몰려들텐데, 많은 관객들이 와서 이 아름다운 전시를 보고 “아 서예가 이런 것이구나..“ ”서예에 이런 아름다움이 있구나.“ 이런 큰 반향들이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2020. 5. 13글씨21 편집실 >> [미술관에 書: 한국 근현대 서예전] 리뷰기사 보러가기(클릭) <<
글씨21 (사)아시아예술경영협회 박철희 대표 인터뷰
글씨21 (사)아시아예술경영협회 박철희 대표 인터뷰박철희 대표2003년 결혼과 함께 학업의 연장을 위해 중국으로 훌쩍 떠났던 박철희 대표, 전공이 서예였고 더 큰 그림을 그리기 위해 떠난 유학의 길은 그리 만만치 않았다. 유학 생활 중 통역 아르바이트를 통해 알게 된 미술계 관련 인사들과 미술 시장을 흐름을 읽게 되었고 직접 화랑을 경영하고 작가를 키워내기도 했다.현재는 제주와 북경, 상해를 오가며 디렉트, 미술전문 경영인로 성장하게 되었다. 그가 얘기하는 미술은 아주 간단하다. 아트와 경제는 다르지 않다는 거다. 한국서예가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로 서예가는 서예를 상품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 유교적 풍토에서 배우고 성장한 서예인들은 작품이 상품 취급 받는다는 게 어색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오늘날 서예는 밀실에서 거래되곤 한다. 시작은 어색하더라도 어쩌면 이 과정을 겪어야만 한국서예가 조금은 변하지 않을까 하는 고민을 해 봤다.이에 글씨21에서는 현재 \'제주 아시아를 그리다\' 기획전으로 분주한 박철희 대표를 만나 아시아의 미술시장과 서예의 가능성에 대해 진솔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2020. 5. 13글씨21 편집실
이 작가의 思생활_삼농 김구해
夢之龜 · 游於海꿈꾸는 거북이 바다에 노닐다- 글밭 · 삼농 김구해제주에 가면 무엇이 있을까? 제주의 바람과, 제주의 하늘 그리고 제주의 사람… 제주에 갈 때마다 나도 그곳에 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진다. 그때마다 아내에게 “우리 제주서 살까?” 라고 묻지만 아내는 시큰둥하다.“우리 그냥 가끔 놀러오자.” 그래, 그게 현실적이지. 직장이 가장 큰 문제이고, 익숙한 서울 생활을 바꾸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제주는 참 아름다운 도시다. 그리고 예술가들이 구석구석 숨어있는 곳이기도 하다.삼농(三農) 김구해(金龜海) 선생을 아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아마도 80년대 이후 세대들에게는 어쩌면 낯선 이름일지도 모른다. 당시 서단을 호령 했던 그가 제주에 터를 잡고부턴 작품을 거의 세상에 내 보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더욱 낯설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의 몇몇 작품을 보는 순간 우리는 “아~하!” 하며 무릎을 칠 것이다.세련된 필획과 조형감각은 대학시절 내 눈을 한참 머물게 했던 기억들로 가득하다. 그런 작가를 제주서 만날 수 있다는 것은 나에게 크나큰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작가는 작품으로 이야기한다. 하지만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선 그 사람을 알아야 한다. 오늘 삼농선생의 이야기를 들음으로 우리는 더욱 삼농선생의 작품에 더욱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리고 다시, 그가 꿈꾸는 작품들을 머지않아 다시 만나보기를 기대한다.안로雁路 · 어룡魚龍 60x130cmQ. 호는 그 사람의 인생관, 예술관을 담는데 三農(삼농)이란 号(호)에 담은 뜻이 무엇인가?- 号(호)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아요. 왜 三農(삼농)이냐? ‘1’이란 숫자는 출발(出發)이면서 가장 크다는 뜻도 있고 많은 무리 중에 우뚝하다는 뜻이 있고요. ‘2’란 숫자는 상생적(相生的) 의미의 음(陰)과 양(陽)을 뜻함이요. ‘3’이란 많은 것을 의미하고 또 생산적(生産的)인 뜻이 있는데 서양문화에서는 7(럭키 세븐Lucky seven)이란 숫자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우리 동양문화에는 ‘3’이란 수를 널리 사용하고 있어요. 예컨대 천·지·인(天·地·人) 삼의(三儀) 또는 삼재(三才)를 비롯해서 삼광(三光 日·月·星), 불가(佛家)에서는 불·법·승 (佛·法·僧 三寶) 기독교에서는 성부·성자·성령 삼위일체 등 삼신(三神), 삼황(三皇), 삼다(三多), 삼무(三無) 그 밖에도 많이 있죠.우리가 예전부터 사용하는 화로나 향로를 보면 다리가 세 개죠. 삼족정(三足鼎)을 축소한 것인데 참 묘하죠. 네 다리일 경우 평지에 놓으면 뒤뚱거리고 불안정한데 삼족정은 약간 경사진 곳에 놓아도 중심만 잡아 놓으면 안정을 유지하죠. 모든 이치가 물리적 역학관계일 텐데 역시 중량과 분배로 인한 균형으로 안정을 유지한다는 거죠. 아이들 놀이터에 가보면 시소도 그런 원리죠. ‘삼(三)’에 대해 설명하다보면 끝이 없어요. 우리 삶속에 그 의미를 알고 살아가면 큰 폐단이 없을 겁니다. 어느 한쪽으로 편중되다보니 불편·불안정·불화가 발생된다고 봅니다. 한없이 올라가고 한없이 쌓으면 무너집니다. 여기서 중용(中庸)을 배워야죠.‘農(농)’자는 농사의 뜻도 있지만 옥편에 보면 “농사하다”, “힘쓰다” 즉, 노력하다는 두 가지 의미의 글자일 텐데요. 그래서 ‘논어 학이편(學而篇)’에 증자(曾子) 말씀 중 오일삼성오신(吾日三省吾身), ‘나는 매일 내 몸에 세 가지를 성찰하노니 첫째, 爲人謀而不忠乎(위인모이불충호). 사람을 위하여 어떤 일을 도모함에 있어서 진심을 다하지 못한 점은 없는가? 둘째, 與朋友交而不信乎(여붕우교이불신호). 친구와 더불어 사귐에 신의를 지키지 못한 일이 없는가? 셋째, 傳不習乎(전불습호). 성현(聖賢) 말씀 가르침을 제대로 익히고 실천하지 못한 것이 없는가? 여기에 근거를 두고 있어요.직필위본 · 130x40cm기왕에 호 얘기가 다소 장황하지만 한 가지만 더 하고 끝내죠. 어차피 농경시대 얘기겠는데, 삼여(三餘)라는 말이 있어요. 그 말은 농부가 큰 비가 올 때, 농한기(겨울), 밤에 심신(心身)의 여유를 갖는다 해서 하는 말인데 나는 남보다 뛰어난 재주도 없고 그래서 한글 호를 ‘글밭’으로 자작(自作)하여 한글작품에 써온 지 50여 년이 됐지만 ‘글밭에서 삼여(三餘)에도 노력하는 사람이 되자’ 그래서 삼여농인(三餘農人)입니다. 結繩 · 100x100cmQ. 스승이셨던 월정 정주상(月汀 鄭周相) 선생님은 어떤 분이셨나?- 선생님을 뵙게 된 과정을 생각하면 눈물 나는 사연이 꽤나 긴데요. 감히 그 어른의 제자라고 선뜻 나서기가 두렵습니다. 아직 공부도 덜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칫 선생님 일생동안 학처럼 사신 어른께 자랑스러운 제자도 못된 주제에 누가 될까 두려워서죠. 그래서 항상 선생님의 제자라고 당당히 밝힐 수도 없었죠.후학 훈도는 물론 서예술 정신세계는 타에 추종을 불허할 만큼 맑고 밝으셨어요. 전·예·해·행·초 한글까지 두루 능하셨고, 문학적 감성이 탁월하셔서 아동문학에도 등단하셨어요. 또한 문필력(文筆力)이 좋으셔서 월간서예 잡지도 국내에서 처음으로 발간하셨는데 (창간호부터 83호로 운영난으로 폐간, 지금의 월간서예 전신) 그때엔 서예인구도 많지 않고 전국에 구독자라야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이니 83호까지 버티기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겠죠.선생님의 작품세계는 엄청난 양의 임서와 자연에서 발견하신 웅혼(雄渾)하면서도 경쾌하여 감상하는 이로 하여금 감동케 하는 이유가 획마다 음악적 리듬이 배어있어 기운생동(氣韻生動)으로 표출되는 까닭이죠. 천품에 총명하심과 인문학적 소양을 고루 갖추시고 자력으로 고전을 독파(讀破)하여 대가의 경지(境地)에 이르셨어요. 60년대 초 펜글씨 교본과 국정교과서 저술로 우리들 어렸을 적 선생님 지은 초등글씨본으로 습자시간에 공부했죠.중국과 수교되기 전에부터 한·중·일 등 국제전시교류에 핵심으로 한국대표활동을 능숙하게 하심으로 각국의 명 대가들의 감탄 속에 가히 신필이라는 호평도 받으시면서 현재도 운영 중인 국제난정필회 한국대표로 노익장 활동하시다 작고하셨는데 공부에는 엄격하시지만 일배취(一盃醉)하시면 그렇게 섬세하시고 온화하신 인품으로 흥도 많으셨습니다. 작고하신지 여러 해가 지났는데도 가끔 꿈에서 모실 기회를 주시는데 너무나 감사하죠. 계실 때 잘 모시지 못해 항상 한이 되죠.글씨21 석태진 대표가 제주 서귀포를 불원천리 달려와서 선생님을 물으니 수많은 날들 선생님 사랑받았던 그날들이 어제 일처럼 느껴지는데 선생님은 안 계시고 먹먹한 가슴으로 어찌 다 말할 수 있나요. 어느 날 주석(酒席)에서 “삼농! 자네 호 나하고 바꿈세.” 하시던 그 음성을 이제 어디서 들어볼까요. 선생님 잘 모시지 못하여 죄송할 따름이죠. 결승 · 150x100cm결승 · 150x100cm달을 품은 이무기 · 90x70cm내자후각석(臨書) · 150x100cmQ. 공직생활 중에서도 서예 작업을 이어나가셨는데 직장과 예술 활동 병행에 어려움은 없으셨는지?- 애로점(隘路點)이 한두 가지겠어요. 남들은 매일 같이 먹 갈고 글 쓰고 하는데... 어떤 인연으로 잠깐 동안 관직에 몸담게 되었던 시절이 있었는데, 바로 그 시절을 말씀하시는 것 같아요. 휴일이나 근무 시간을 제외한 시간에 해야 하기 때문에 밤으로 연구하고 남들 여행갈 때 못가고, 그래서 아이들한테 늘 미안하고 “아버지는 맨날 글이나 쓰는 사람이지. 우리하고는 관계없다.” 이런 식으로 할 정도였으니까. 내조의 힘도 컸고요. 그런 걸 배려해줬으니까요… 法句經(법구경) · 40x20cm一葉(일엽)스님 시, 가을 · 40x130cm自作 詩 \'방촌세계(方寸世界)\' · 김구해作Q. 26년 전 제주도로 낙향한 걸로 알고 있다. 어떤 이유로 제주를 선택했는가?- 내 이름 거북 구(龜), 바다 해(海) ‘ 거북이는 바다로 가야 산다.’라는 그 어떤 불문율이 있지 않았나. 우연히 내려오게 됐는데 여기가 나하고 맞아요. 정서가. 그래서 과감히 다니던 곳을 떨치고, 여기서 머물게 되었죠. 여기서 살아보니까 인정이 흐르고 풍광이 좋고 내가 머무르기에 가장 적합한 곳이구나. 해서 지금도 싫증을 느끼지 않고 하루하루 지내고 있죠. 가족들은 난리입니다. 하다하다 못 말리니까. 내 고집 못 말립니다. (웃음) 모두 다 얘기하자면 길어지고, 오다보니 여기까지 와서 은거(隱居)하게 되었는데 생략하고 고시조 형식(古時調 形式)의 한 수로 대신 할까요?유배(流配)도 아니외다출가(出家)도 긔아니무릉(武陵) 찾는 길손아정처(停處)가 도원(桃園)일레취몽(醉夢)에태평성사(太平盛事)를안평(安平)만나 물으리라글밭 삼농 作아시다시피 안평대군은 세종의 3남인데 詩·書·畵에 능했고, 풍류도 좋아했는데 꿈에 무릉도원을 찾아 놀다가 깨어보니 허망하여 당시 유명 화가 안견(安堅)을 불러 꿈 설명 해주고 그리라 해서 그 유명한 걸작 몽유도원도(夢遊挑園圖)가 나왔죠. 평론가님들이 붙여준 이름 “제주로 간 서단의 야생마”는 지금 여기 몽지당(夢之堂)이 무릉도원이고, 나의 여생 도장(道場)인 줄 알고 주변에 어지신 분들 덕택에 잘 살아가고 있네요.매월당시 · 150x80cm 老蠶作繭 扇 · 40x25cm중국 서법 총 연합회 부주석 후캉메이(胡抗美) 개인전 초대기념 파티에서, 2014 서옥의 미소 · 김구해作 (연필, 스코틀랜드지)지현이의 꿈· 김구해作 (연필, 스코틀랜드지)민주의 첫돐 · 김구해作 (연필, 스코틀랜드지)농부의 유품 · 김구해作 (연필, 스코틀랜드지)Q. 삼농(三農) 김구해(金龜海)가 생각하는 서예(書藝)란?- 우선 ‘문자(文字)’라는 약속기호(約束記號)를 바탕 근간으로 하여 지·필·묵이란 도구로 심오한 정신세계, 즉 심상(心象)을 가시적(可視的)으로 아름답게 표현하는 예술적 행위로 집약할 수 있겠는데요. 조금 더 들어가 보면 서예술 만큼 콘텐츠가 폭 넓고 다양한 것이 없어요. 우리 인간의 의·식·주 생활 범주에 어디에도 관련이 없는 데가 없어요. 반드시 디자인에 선(線)이 등장하게 되는데 거기에는 유형과 무형을 내포하고 있어요. 그 선이 바로 선의 예술인 서예가 깊은 곳에 박혀있다는 것입니다. 단순한 의미에 문장을 써야 한다는 것만을 서예술로 단정 지어서는 곤란하다는 거죠. 나아가 대자연 만물을 살펴보면 발상의 전환을 하게 되는데 가령 앞뜰에서 설중매화 향기나 가지에 강인한 자태를 보고 선비정신을 생각하고 바라보면 알게 될 겁니다. 맑은 하늘에 높이 떠 하얀 배기가스를 뿜고 간 흔적도 우주에 그은 아주 짧은 선, 에어라인(air line)의 예술로 본다는 거지요.가림토 · 200x100cm가림토2 · 200x100cm모스코바 출생 바실리 칸딘스키(1866-1944)는 일찍이 깨어있는 예술가로 보는데 그는 “예술에 있어 정신적인 것”에 대해 논지를 폈고, 이어 점·선·면(点·線·面)에 대해 자기예술적 이론과 개성을 작품에 도입한 예는 아는 이는 알겁니다. 이렇듯 21세기를 향하는 오늘날 양(洋)의 동서(東西)를 가릴 것 없이 인공지능 알파고 시대가 도래 하였으니 법고창신 능전지변(法古創新 能典知變)도 물론 중요하지만 배우고 가르치는 입장에 소수의 연구가를 제외한 과거 수상 심사경력을 자랑하고 또 그것이 후진들로 하여금 위력이 되고 위대하게 보여 불건전 공모전 사업에 동참하는 안타까운 해프닝이 연속된다면 타 장르 작가들은 웃지요. 이제 미래를 위해 꿈에서 깨어나야 서예술이 살아남지 않나 싶어요. 왜냐하면 중세 이전 천동설(天動說) 시대에 백가쟁명(百家爭鳴 대가들의 서법이론도 동제(同題)이론이고 보면 후학들이 공부하는데 무슨 큰 도움이 될 건가요?1532년 폴란드에 니콜라스 코페르니쿠스(1473-1543)가 주장한 지동설(地動說)은 200여년전 이탈리아 크리스토퍼 콜럼브스(1451-1506)로 하여금 미지의 신대륙을 발견하게 하는 일대 쾌거로 오늘의 남북아메리카에 뉴 프론티어 마인드 청교도 정신이 뿌리내렸음도 기억해야 하겠죠. 왜 지구는 축이 23.5도로 기울어진 채 태양계를 자전·공전하여 해와 달의 빛을 번갈아 받아 하루·한달·일년 사계절을 이루는가? 그러하여 음·양의 원리가 만물을 생육·소멸케 하는가? 그 외에도 영국 찰스다윈(1809-1882)은 왜 종의 기원 연구에서 진화론을 주장했는가? 오스트리아 프로이트(1856-1939)는 왜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고 슬피우는가? 정신분석학 연구로 세계적인 심리학 연구에 원동력이 되었다는 사실도 종합예술이라 할 수 있는 서예술 연구를 파고드는데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대목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知白守黑(연하장) · 20x15cmQ. 선생의 서예적 시각은 남달랐던 걸로 알고 있다. 26년 전이 아닌 요즘 지향하는 서예가 궁금하다.- 무계획이 유계획이에요. \"내가 뭘 해야겠다.\" 생각을 하면은 그대로 되는 게 몇 가지가 없더라고요. 내가 또 노장 철학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어요. 그걸 보면 또 자연주의 철학이잖아요. 유무상생(有無相生)이라,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서로 상생보완의 역할을 하더라. 노자 도덕경에 보면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 도를 도라고 하면 이게 벌써 도에서 떠났다는 이야기거든요. 전각을 알려면 전각을 연구해야죠? 또, 전각을 잘하려면 이 서(書)와 역사의 궤(軌)를 같이 하고 있기 때문에 소홀히 할 수 없어요. 상관관계가 있는 거죠. 뎃생도 그렇고 연필, 분필, 다 붓이에요, 철필까지도. 어느 하나 떼려야 뗄 수 없는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거든요. 한 덩어리 속에서 작가가 그 순간순간 소위 말하는 자기가 \'켕기는대로\' 좋아하는 대로 표현하면 그것이 그 사람의 진정한 작품세계가 이루어지지 않느냐. 그 자료와 생각과 여러 가지 연구를 얼마나 깊게 했느냐에 따라서 좋은 작품이 나온다고 정의를 내리고 싶어요. 綠楊 · 紅杏 대련 · 150x30cmx2임진왜란7주갑기념展 · 124.5mQ. 제주 생활에 만족하는가?- 너무 좋죠. 어쩌면 내가 육지에 있었으면 죽었을지도 몰라요. 내가 조금 기관지가 약한 편이거든. 이게 맞는 거예요. 철새도 자기 환경에 따라서 날아다니잖아요. 인간도 어떤 주어진 환경에서 \"이것이 내 복이니라.\" 하면 목숨이야 부지하면서 살겠지만 대도시의 매연 속에서 가두어진 그런환경 속에서 얼마나 이런 호방한 자연이 그리웠길래 뜻 있는 분들은 전부 다 벗어나려고 노력들 하시고 있는데 나는 우연치 않게 일찍이 벗어나 지금 이렇게나마 건강과 복을 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주변에 여러 도와주신 분들도 많이 계시고, 그 덕에 내가 삽니다.그 사람은 평생 공부밖에 모르는 사람이다. 모르지, 사실. 내가 컴퓨터를 아나, 운전을 할 줄 아나, 은행에 거래하는 절차를 아나, 보내주면 보내주는 대로 그걸로 먹고 살고. 제가 생계유지를 위해서 하는일은 아주 빵점이에요. 측은해서 주변에서 도움을 많이 받은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戰風 · 130x40cmQ. 대선배로써 글씨 공부를 하는 후학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는가?- 지난 날 대학에 서예과 설치를 위해 국회 입법청원서에 첨부할 서명운동할때 우리나라 서예인구 추산 500만 이라고 기록한 기억이 나는데 지금은 아마도 2000만도 넘을꺼예요. 서예단체도 앞다투어 사단법인 등록을 모두해서 경향각처에서 공모전도 그렇게 많이 생겨났고 그러해서 초대작가도 많이 배출하고 이젠 1개 단체 주최하는 공모전 행사에도 심사위원이 30명씩 위촉을 한다니, 웬일인가요 놀랍죠. 이젠 지방에서도 소원을 풀게 되었으니 다행입니다. 미협으로부터 서단독립개혁운동 초창기에 깊이 관여했던 일중에 머언 옛 얘기로 기억되지만 첫번 서예대전 공모추진 이사회때 지방작가 배려 방법으로 미표구 출품하도록 제안한것이 참 좋은 방안이라고 동의해서 성공적으로 치루었는데 이젠 서울에서는 대한민국 이름 앞에 놓고 지방에서는 각 시도 주최 공모대전, 무슨무슨 이름 걸고 행사를 아주 성공적으로 치룬다니 ... 다행인데 그 바람에 전통 표구사는 문닫기 일쑤, 기계 족자집에서는 개가를 울리고....옛 이야기가 생각나는데요 짚신 장수아들과 우산장수아들을 둔 어느 노파의 심경을 알만해요. 그래서 세상사 웃을일 울어야 할일이 따로 없다는 거죠.예전엔 감히 어림도 없었지만 이구동성으로 심사위원을 심사하는 미 출품자가 곳곳에서 지켜보고 있음을 알아야 하겠죠.십목소시(十目所視), 십수소지(十手所指) - 열 사람이 지켜보고, 열사람의 손으로 가리킨다는 얘기가 고전에 있지요.청허당 시 · 목간(木簡), 200x150cm노자 도덕경 · 죽간(竹簡)-1, 40x130cm 삼연회 현판 · 120x40cmQ. 오랜 시간 선생의 작품을 접할 기회가 없었다. 그동안의 작품을 정리해보는 전시회 계획은 없는가?- 벌써부터 구상은 하고 있는데 앞으로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서 센스 있는 젊은 후배 작가들은 그걸 일부 건드리고 있더라고요. 근데 그것은 타 장르에서 하는 걸 갖다가 하는 거는 조금 문제가 있는 것 같고. 서예에 관한 정체성을 잃지 않는 범위 내에서 얼마든지 영상작업도 할 수가 있거든요. 그래서 그 작업을 해야 되겠는데 기술적인 부분이 내가 또 영상미디어, 기계작동, 내지는 기술적인 부분에 몰라서 그런 분을 찾고 있어요.신심명(信心銘) · 13x4cmx4면김구해 作나는 기획하고, 제작하고, 연출하고 그 분은 기계적인 장비 이런 걸로 날 도와주시면 되는데 예술의 전당의 실험연구 전시관에 계약하러 갔다가 내가 건강에 갑작스러운 변화가 생겨서 그것도 아직 더 있다가 하라는 신호가 아닌가. 그래서 내가 잠잠히 건강관리를 하고 있어요. 요즘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전반에 걸친 어려움이 해소되어 안정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그때 마음에 담고 있는 작업풍경을 정리해서 발표를 할 예정이에요.2020. 6. 19글씨21 편집실
[글씨21 담론] 김백녕과 김건표의 서예 이야기
[글씨21 담론] 김백녕과 김건표의 서예 이야기글씨21에서 기획한 2020 창작지원 프로젝트는 김백녕展을 시작으로 한달동안 진행되었다. 김백녕전은 2020. 5. 5(화) ~ 5. 11(월)까지 아트센터 일백헌에서 개최되었으며 그의 첫 개인전이다. 전시장 전경김백녕 작가는 이번 전시의 테마를 크게 3가지로 나누었다. 1. 한국의 글씨를 찾아서, 한국글씨의 조형적 다양성을 재현한 2. 글꼴 연구, 마지막으로 한국글씨의 미감을 담은 3. 서예포스터 양식 개발이다. 작가는 ‘한국의 서예, 한국의 글씨의 특징이 무엇일까’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연구 끝에 현판에서 답을 찾았다. 현판의 서체가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3~5자로 건물의 기능을 압축적으로 대변해야하므로 굵고 강건하며, 분명하고 큰 글씨가 좋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이와 같은 외형적 특징에 머물지 않고 그 안에 담긴 지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은 절제된 중용의 미를 발견하는 데 주안을 두었다. 또한, 겸손의 예를 갖추어 작가의 성명이나 직분을 밝히지 않은 채 현판을 제작한 경우도 있었다는 걸 감안한다면 현판 글씨에는 담박한 정감이 들어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작가의 기획의도를 인지하고 작품을 마주한다면 작품을 감상하는 깊이가 달라질 것으로 기대한다.좌 김백녕 작가 / 우 김건표 작가2020. 9. 8글씨21 편집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