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공간 ‘나라씨앤디’
감성적인 음악과 커피향이 가득한 우리의 아지트감성공간 ‘나라씨앤디’ 추위가 주춤해진 겨울의 끝자락에, 대구 중구 명륜로23길 52에 위치하고 있는 감성아지트, 나라씨앤디연구소(NARAC&D연구소)를 방문하여 날씨만큼이나 따뜻한 하루를 가졌다. 성연화 작가님의 작업실인 나라씨앤디연구소는 어릴 적 그녀가 항상 꿈꿔왔던 ‘나만의 아지트’라는 컨셉을 가진 감성 공간이다. 줄 맞춰 있는 책상과 서적이 가득한 서실의 느낌보다 감성적인 음악과 커피향이 가득한, 가끔은 맥주 한 잔씩 하며 수다를 떨 수 있는, 누구나 편하게 글씨로 소통할 수 있는 공간, 여기에 차별점이 있다. 그 탓에 10대부터 70대까지의 다양한 연령대의 수강생들과 짧게는 1년, 길게는 3년 동안 함께 글씨공부를 하고 있다. (아날로그 감성이 물씬 풍기는 나라씨앤디연구소) 성작가님은 현장수업 뿐만 아니라 동영상강의도 병행하여 캘리그라피를 알리는데 더욱 힘썼다. 카메라 앞에서 오직 지식만을 전달하며 질문이 아닌 답만으로 가르쳐야 하는 소통의 어려움이 있음에도 그녀는 진실된 지식과 신뢰를 주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녀는 수업을 진행할 때, 현재 느끼는 감정을 글씨에 담아내는 것을 첫 번째라 보았다. 물론 기초도 중요하지만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지는 말자는 것이 성작가님의 교육철학이다. 따라서, 그날 쓰고 싶은 글귀를 고르는 시간은 수업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시간이다. (틈틈히 캘리작업을 하고 계시는 성연화작가님) 한편, 지금의 나라씨앤디연구소의 로고는 나무젓가락으로 작업한 것이다. 성작가님은 한 때 나무젓가락, 아크릴물감을 주로 사용하는 기법을 선호하였으며, 특히 나무젓가락을 통해 아날로그적이면서 순수한 느낌의 작업을 선호하였다. 또한, 아크릴 물감으로 다양한 색채와 폭 넓은 느낌의 작업도 진행하였다. 그러나 본연의 재료가 가장 좋은 법, 현재는 돌고 돌아 다시 붓과 먹 작업을 주로 하고 있다. 먹의 농도의 재미에 빠져, 우유와 다양한 약초를 끓여 물대신 먹물과 섞어 작업하는 등 새로운 시도를 여럿 하고 있다. (나라씨앤디연구소 로고) 감성적인 공간에 걸맞은 재즈 풍 음악, 달달한 쿠키와 따뜻한 커피와 함께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인연’ 머그컵 제작) 캘리그라피 수업을 활발히 진행하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일반인들이 캘리그라피를 꼭 배워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초등학생부터 70대 이상 노인 분들까지 다양하게 수업을 진행해 왔습니다. 제가 연령대 상관없이 느낀 점은, 글씨는 언제나 진실 된다는 것이었어요. 캘리그라피의 가장 큰 장점은 심리적 안정을 찾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 누구도 글씨 앞에서는 솔직해 지고, 편안해 지거든요. 저는 캘리그라피라는 예술이 많은 사람들에게 요즘 인기가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서 온다고 생각합니다. 무언가를 배워서 꼭 그 결과물을 위해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 지쳐있는 심리적인 마음의 치료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더 많은 분들이 캘리그라피에 대해 관심을 가져다주신다면, 예술의 문화의 깊이가 좀 더 풍만해질 수 있지 않을 까 생각됩니다.캘리그라피의 단순한 붐이 아닌 서예의 한 부분으로서 자리매김 할 수 있는 방안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처음 이 질문을 받고 많이 어려웠습니다. 이해를 어떻게 시키느냐에 따라서 대답이 달라지기 때문에 제 스스로 확고한 신념이 필요했거든요. 개인적인 제 생각은 서예변화가 가장 중요하다 생각해요. 2015년 대구 북비산초등학교 서예&한국화 담당 예술 강사로 활동을 하면서 느낀 점이 많았습니다. 서예교육을 하면서 판본체, 궁서체의 임서를 통한 학습이 아닌 캘리그라피 접목을 통해 아이들의 이야기를 붓으로 표현하게 수업진행을 했었습니다. 다만 재료는 ‘문방사우’ 그리고, 한국화 물감을 통해 다양한 색으로 아이들 눈높이에 맞추고, 즐거운 이야기를 통해 글씨로 담아낼 수 있는 수업이었어요. 캘리그라피가 단순한 붐이 아닌 서예의 한 부분으로 자리매김 할 수 있는 방안을 여기서 답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가끔은 말로 표현하기 창피한 내용이 손글씨로 담아내면 마치 예술이 되는 듯 한 느낌이 있거든요.본연의 본질은 그렇게 시작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캘리그라피도 이야기를 담아내는 예술이 되어준다면 서예도 그렇게 출발한다면, 이 두 가지가 함께 어우러질 수 있는 때가 오지 않을 까 생각해요. (성연화 작가님과의 인터뷰 장면)서예와 캘리그라피의 발전을 위한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합니다. 혹은 선생님께서 꼭 성취하고자 하는 목표가 있으시다면 무엇이 있을까요?저의 개인적 바람이 있다면, 아날로그적 감성이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심리적으로 위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중에 글씨가 들어가겠죠. 캘리그라피는 손으로 써내려가는 노래와 같다고 생각해요. 지금 느낀 이 감정을 손으로 써내려간다면 마음이 한층 깊어지고, 즐거운 소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 또한 그런 작품을 하고 싶고, 저의 이야기로 공감하고 글씨로 위안을 받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 같습니다. 나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담아낼 수 있는 작가가 되고 싶어요. 항상 글씨를 통해 나의 삶을 표현하고 싶고, 내가 느끼는 희로애락을 표현하고 싶고, 이것이 전통을 놓지 않고 가는 길이기를 늘 꿈꾸고 살고 있어요. 한국뿐만이 아니라 중국, 일본 더 나아가 세계적으로 문자예술의 다양함과 깊이를 알리고 싶어요. 이것이 전통 서예의 기본 본질에서 시작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것이 저의 바람이기도 합니다. 캘리그라피를 하면서 다양한 디자인도 해왔지만, 결국은 표현이 좀 더 자유로운 저를 찾고 싶은 것 같아요. 앞으로 저의 열정과 노력만이 답을 내릴 수 있겠지요. 그래서 계속 도전하며 열심히 하려고 해요. 많은 사람들이 저의 글씨로 소통이 되는 그날이 언젠가는 오리라 믿습니다. 그녀의 글씨를 통해 많은 이들과 소통할 수 있는 그날까지, 성연화 작가의 캘리그라피는 앞으로도 묵묵(墨墨)히 계속될 것이다. 취재 이자민 기자 꾀/ 2008년 현묵인전 출품作 시우(時雨)/ 2008년 계명대학교 서예과 졸업작품作
함께라서 좋은 공간, 다자란소년[다락글방]
꽃 피는 사월, 대한민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 제주도는 벌써부터 봄이 한창이다. 눈코뜰새 없이 바쁜 일상 속 모든 것을 훌훌 털어버리고 떠나는 낭만적인 상상이 현실이 되는 곳 제주도, 바로 이곳에 내 집처럼 언제와도 편안한 공간 ‘다락글방’이 있다. 몸은 이미 다 자랐지만 평생 소년처럼 철들고 싶지 않다는 ‘다자란 소년’ 신동욱 작가의 작업실은 빨간색, 하얀색 목마등대로 유명한 이호테우해변 근처에 자리하고 있다. 제주바다의 빛깔만큼이나 반짝이고 여유로운 다락글방에서 다자란 소년을 만나보았다.작가님, ‘다락글방’은 어떠한 곳인지요? 다른 아카데미와의 차별점이 있나요? - 사람들마다 작업실을 운영하는 다양한 방식이 있겠지만, 저에게 작업실이란 집과 같은 공간입니다. 일을 하러 나오는 직장의 개념이 아닌, 집처럼 언제 와도 편안한 느낌을 갖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글씨는 몸과 마음이 함께 집중 되어야 하는 시간이 많아서 심리적 안정감이 많이 필요한데 저는 되도록 주변을 정리 하고 시각적으로 안정된 공간 위에 종이를 펼쳐 놓는 편입니다. 딱히 운영 방침이라고 할 것은 없지만, 저에게 작업실은 일을 하는 공간이기도 하고 공부를 하는 공간이기도 하고 또 사람들을 만나는 작은 광장이 되기도 합니다. 아카데미라고 질문을 하셨지만, 사실 제 수업은 학원의 성격을 가졌다고 하기 보다는 제 글씨와 철학에 공감 하시는 분들이 시간을 정하고 모여 함께 공부를 하는 것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뭐가 다르냐고 하실지 모르겠지만, 학원을 ‘운영’하는 것과 글씨를 ‘공유’하는 것은 그 출발과 끝이 다르다고 봅니다.사실 작가 ‘신동욱’ 보다는 필명이신 ‘다자란 소년’으로 더 유명하신데요, 다자란 소년, 무슨 의미를 갖고 있나요?- 많이 듣는 질문입니다. 쉽게 설명 하자면 ‘철들고 싶지 않은 어른’ 이라는 것과 비슷합니다. 우리가 어린 시절에는 상상도 많이 하고 질문도 많이 하고 그랬는데 점점 나이가 들수록 감정이 단순화 되는 것 같아서요. 이 필명을 지을 때쯤에는 나이를 먹는 것이 너무 싫었던 것 같습니다. 몸이 늙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니 괜찮은데 마음이 늙어서 딱딱해 지고 건조해 지는 건 참 안타까운 것 같아요. 몸은 이미 다 자랐지만 평생 소년처럼 순수하게 글 쓰고 글씨 쓰고 싶은 마음으로 지은 이름입니다.캘리그라피 작업은 붓, 화선지 이외에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혹시 작가님께서 요즘 관심을 갖고 작업하시는 재료가 있으신지요? - 저는 요즘은 거의 대부분을 붓만 가지고 작업을 하는 편입니다. 오히려 예전에는 저도 흔히들 많이 쓰는 나뭇가지나 젓가락, 이쑤시개, 면봉 같은 재료들을 종종 썼는데 시간이 갈수록 우연의 효과에서 나오는 느낌 보다 붓을 통해 나오는 의도된 다양함을 더 찾고 즐기는 것 같아요. 아마 다른 분들도 자신에게 길들여진 붓이 있을 텐데 저도 마음에 드는 붓이 생기면 편식이 꽤 심한 편이지만 요즘은 전혀 길들여 지지 않은 다양한 붓을 써보는 재미에 빠져 있습니다. 그 외에는 오래전부터 친했던 딥펜을 좋아합니다. 미끄러지지 않아서 의도대로 쓰기에 참 좋거든요.캘리그라피의 단순한 붐이 아닌 서예의 한 부분으로서 자리매김 할 수 있는 방안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 이 질문에는 우선, 캘리그라피가 아직은 서예의 한 부분으로 자리매김 되지 않았다는 전제가 있는 것 같은데요, 캘리그라피와 서예를 어떻게 구분 하느냐를 놓고 갑론을박이 참 많습니다. 용어의 모호함도 한 몫을 하는 것 같고요. 이 얘기를 하자면 사실 캘리그라피가 도대체 무엇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캘리그라피를 정의하는 말 중에 가장 많이 쓰이는 것이 ‘감성을 담은 글씨’입니다. 일정 부분 동의하고 일정 부분은 동의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보편적 감성은 주로 ‘사랑, 희망, 위로’ 같은 것들입니다. 하지만 ‘감성’이라는 단어 속에는 ‘분노, 공포, 두려움, 떨림…’등 광범위한 인간의 감정이 담겨 있습니다. 후자를 고려하지 않는 흐름 때문에 캘리그라피는 소위 말랑말랑한 감정의 예쁜 손글씨 정도로 확산 된 측면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비슷한 글씨들이 너무 많고요. 이것이 캘리그라피다 라는 주장은 많지만 사회적 합의는 아직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쉽지 않을 것이라 생각 됩니다. 캘리그라피가 서예의 한 부분으로 역사를 함께 하려면 융합이 필요합니다. 즉, 비전공자들은 전통서예의 맥락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이해하고 공부하고 이어 가려는 노력과 함께 시대에 부합하는 새로운 시도들이 더해져야 할 테고, 원래 전통서예를 하시던 분들은 대중의 눈과 마음에 조금 더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는 시도가 더해져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지금 캘리그라피를 한다고 하는 모든 사람이 그렇게 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생활 속 취미로써의 글씨와 학문적, 예술적 측면에서의 글씨는 구분이 필요한 시기가 아닌가 생각하고 있습니다.서예, 캘리그라피 수업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부분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 이 답변은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의 입장을 나눠서 해야 될 것 같은데요, 우선 가르치는 사람은 책임감이 필요합니다. 배우는 입장에서는 가르치는 사람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와 시필 할 때 보여주는 선 하나 하나를 모두 답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늘 준비 되어 있어야 하고, 누군가를 가르치기 위해서는 더 많은 공부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과 경험을 아낌없이 쏟아 붓고 배우는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방법과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글씨를 구성하는 원리들을 가르쳐야 추후에 혼자서도 자신의 세계를 열 수 있습니다. 또 배우는 사람들은 기본기를 튼튼히 익히면서 꾸준히 연습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수업 시간에만 글씨를 쓰면서 왜 나는 발전이 없지? 라고 생각 한다면 심각한 문제입니다. 수업 시간에는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은 꾸준한 연습뿐입니다. 배운 것을 연습하고 다시 수업 시간에 질문하고 상의하고, 이것이 선순환입니다.작가님은 광화문 교보문고 글씨, 세월호 글씨 등 다양한 작업을 하고 계신 것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작가님께서 특별히 애정이 갔던 작업은 무엇인지요? - 그동안 썼던 모든 글씨들이 다 자식 같고 애착이 가지만, 조금 더 특별하게 느껴지는 글씨는 아무래도 ‘세월호’ 관련 글씨들 입니다.‘잊지말라 0416’, ‘잊지 않겠습니다, 행동하겠습니다’ 외에도 꽤 많은 글씨들을 썼는데, 참사 직후에 많은 분들이 그러했겠지만 너무 이해할 수 없는 충격과 슬픔, 그리고 분노까지 섞여서 다급한 심정으로 정신없이 썼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부족한 글씨들 이지만 이 글씨들을 가지고 세월호를 잊지 않고 함께 행동 하는 많은 분들이 깃발, 현수막도 만들고 때론 옷과 손수건, 핀버튼까지 만들어 그 마음들을 이어 나가는데 조금이나마 함께할 수 있어서 아마 평생 잊지 못 할 것입니다.서예와 캘리그라피의 발전을 위한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합니다. 혹은 작가님께서 꼭 성취하고자 하는 목표가 있으시다면 무엇이 있을까요? - 아직 역사가 길지 않은 캘리그라피가 장대한 역사의 서예와 조화롭게 융합이 되도록 하는 것이 큰 꿈입니다. 가끔 지인들에게 하는 말이지만, 한 100년이나 200년 쯤 흘러서 누군가가 21세기 한글 서예를 다루는 책을 쓴다면 그 안에 제 이름 석 자라도 담길 수 있도록 노력 해야지요. ‘그 시절에 그 사람이 이러 이러한 활동을 하면서 이런 영향을 끼쳤다.’ 하는 것이죠. 디자인의 요소로 사용 되는 글씨는 그 브랜드와 서비스에 최대한의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고, 순수 예술로써의 글씨는 ‘캘리그라피’라는 장르가 보다 더 가치 있고 아름다운 예술이라는 것을 알리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작가는 작품으로 말해야 하니 부단한 노력이 선행 되어야겠지요.평생 소년처럼 순수하게 글을 쓰고 싶다는 작가 ‘다자란소년’ 자신의 목소리를 내야 할 곳을 알고 끊임없는 노력으로 대중의 마음에 감동이라는 열매를 맺고 있는 신동욱작가의 다음 행보가 기대된다.취재 성은하기자자료제공 다자란소년2017 봄, 광화문 글판_새로운 길세월호 참사 시민행동 촉구 이미지풍경달다_2015
이 작가의 思생활, 이일구
닿을 때까지, 닿고 싶어서한국 캘리그라피의 선구자 담운 이일구 이일구는 사람들이 ‘캘리그라피’라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던 시절부터 이 분야의 작업을 시작했다. 그는 캘리그라피의 불모지였던 한국에 캘리그라피라는 뿌리를 내리게 하고 그 시장을 개척한 창시자이자 선구자라고 말할 수 있다. 구름이라는 저 높은 이상향에 다다르기 위해 이 땅에 단단히 두 발을 붙이고 오늘도 한발 한발 잰걸음을 늦추지 않는 담운(覃雲) 이일구를 만나보았다. Q. 우선 본격적인 얘기에 앞서 선생님께서 사용하시는 호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담운(覃雲)이라는 호(號)를 사용하고 계신데요, 담고 있는 의미와 쓰시게 된 계기, 얽힌 이야기 등이 있나요?담(覃)은 미치다, 다다른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구름에 다다른다는 뜻인데 제일 높은 것이 구름이기 때문에 최고에 다다르라는 뜻으로 선생님께서 지어주셨습니다. 용산인(龍山人)과 덕숭산인(德崇山人)이라는 호도 함께 쓰고 있습니다. 충남 예산의 추사 고택이 자리한 바로 뒷산 이름이 용산(龍山)인데, 추사 선생님의 정기를 받든다는 의미로 ‘용산인’이라고 지었습니다. ‘덕숭산인’은 제 고향에 유명한 고찰(古刹)인 수덕사(修德寺)가 있는데 그 산이 덕숭산(德崇山)입니다. 서예인들이 주로 고향의 산의 이름을 따서 호를 짓는 것과 같이 한 것입니다. Q. 그럼 본격적으로 캘리그라피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자 합니다. 선생님께서 ‘캘리그라피’를 개척하기 이전에 시작단계에는 단연 ‘서예’가 있었을 것입니다. 처음 서예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충남 예산에서 태어났습니다. 추사 선생님의 고향에서 태어난 것이 저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렸을 때 환경이 좋지 않았지만 부모님께서 공부를 할 수 있게 힘이 되어주셔서 서당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글씨, 그림에 관심이 많았었는데 한학을 하면서 신문지에 사자성어, 맹자 등의 글씨를 써보곤 했었습니다. 초등학교 때 추사선생님 후손이신 담임선생님께서 제 글씨를 보시고 서예를 권유하셨습니다. 또한 학교 주변에 추사 선생님 고택이 있었는데 그쪽으로 소풍을 자주 가게 되며 자연스럽게 서화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 시골에 부모님께서는 다른 많은 부모님들처럼 면서기라고 하는 일반 행정직 공무원을 바라셨습니다. 그러던 중 시골에서 서예를 가르쳐주시는 선생님께서 종종 대회에 나갈 수 있게 도와주시면서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Q. 어릴 적 추사선생님의 후손이신 담임선생님께서 선생님의 글씨를 본 것은 운명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선생님의 ‘캘리그라피’의 시작은 추사 선생님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네 그렇습니다. 어릴 적 추사 선생님 고택에 소풍을 자주 갔는데 이때 자연스럽게 서화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추사 선생님이 공부하면서 성장하셨던 곳과 가까이 접하면서 영향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도 추사 선생님이 걸었던 길 쪽으로 공부를 해볼까 많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어렸을 때 부모님께서는 면서기가 되길 바라셨지만 크면서 습자대회(서예) 등에 나갔고 지도해주시는 선생님을 만나 꿈을 이어나갈 수 있었습니다. 현재는 추사기념사업에 회장을 맡고 있습니다. 추사 선생님께서는 누구보다 창의성과 조형성이 뛰어나신 분이셨고 이에 집중을 하셨습니다. 이런 점은 존경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입니다. Q. 현재 한국에 캘리그라피를 열풍이 불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이 시대에서 캘리그라피를 이끈 1세대이신데요, 막 시작되던 그 당시 배경과 앞으로 추구하는 방향에 대해 말씀 부탁드립니다.제가 처음에 방송사의 그래픽디자인 쪽으로 입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픽디자이너가 20~30명 정도가 있었는데 거의 대부분 미술대학을 나왔기 때문에 서예 관련자는 없었습니다. 그 와중에 프로그램 타이틀을 감각으로 쓰시는 분들을 봤는데 예전엔 몰랐지만 어느 정도 캘리그라피를 이해하고 나서 보니 그때의 타이틀 작품이 굉장히 감각적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방송에서는 일본이 그때 당시에 20년 정도 앞서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에 갔을 때 머리가 하얀 백발 신사분이 글씨를 쓰는 것을 보고 감명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일본이 서예 분야를 굉장히 높게 평가하고 있다는 면에서 앞서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당시 회사에서 저에게 캘리그라피를 활용해서 작업이 가능한지 물어,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캘리그라피의 1세대로서 이 분야를 활성화시키기 위한 방안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고 서예의 인접 학문을 공부하며 모두 섭렵하기 위하여 노력해왔습니다. Q. KBS에 입사하신 후에 다양한 그래픽디자인을 공부하시면서 캘리그라피도 함께 발전한 것 같습니다. 근무하시면서 방송이나 매체에 타이틀로 쓰인 경험은 어떤 것이 있나요?KBS에서 미술제작 국장에서 임원이 되기 전에는 실무자 역할을 하면서 방송 타이틀은 거의 대부분이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극장>, <아침마당>, <역사스페셜>, <환경스페셜>, <개그콘서트>, <이소라의 프로포즈> 등 열거하기 어려울 만큼 많습니다. 낯익은 글씨는 대부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외에도 여성화장품인 <수려한>, 지난 번 <개천절> 캘리그라피 등 다수가 있습니다. Q. 캘리그라피가 한 예술의 측면으로 현재 대중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캘리그라피에서 결국 추구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드라마도 멜로, 액션, 퓨전사극, 역사사극, 스릴러 등등 여러 장르로 나뉘게 되는데 타이틀 하나만으로 어떤 장르의 드라마인지 알 수 있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을 표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꼭 글씨를 잘 쓰는 달필이 좋은 것이 아니라 표현하려는 대상의 특징을 잡아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거기에 맞는 글씨체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죠. 요즘 캘리그라피를 쓰는 사람들을 보면 대체로 한 글씨체로 내용만 다른 느낌이 많은데 캘리그라피의 서체 그 자체에서도 개성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KBS 재직 당시 캘리그라피 작업물) 지금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프로그램인 <인간극장>, <아침마당>, <역사스페셜>, <개그콘서트> 등 우리에게 익숙한 방송 타이틀이 모두 그의 손에서 탄생했다. 그는 캘리그라피의 1세대로서 지금도 여전히 이 분야를 활성화시키기 위한 방안을 고민하고 있다. Q. 선생님께서는 캘리그라피에 선구자 일 뿐만 아니라 사대부들이 자신들의 심중을 표현하였다는 문인화에도 조예가 깊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문인화에 대한 선생님의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사실 문인화를 전공으로 삼았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그림, 디자인, 글까지 섭렵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왔지만 문인화를 공부 할 때에는 직접적으로 와 닿았습니다. 원래 문인화는 선비들이 추구하는 예술적인 것이라 하지만 지금은 전문적인 직업화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인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작가의 느낌을 표현할 수 있는 화제, 내용이 들어갑니다. 즉 문인화는 시, 서, 화가 모두 들어가야 가능한 예술 세계이기 때문에 특히 좋아하는 분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인화에도 사군자, 십군자를 많이 표현하는데 자연 속의 모든 것이 문인화로 표현이 가능합니다. 이런 점이 매우 매력적이기 때문에 제 전공으로 삼고 전시도 많이 하는 등 애착을 가지고 있습니다. Q. 선생님께서는 KBS 그래픽 디자이너로 입사 후 많은 작업들을 해오셨습니다. 이러한 작품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이나 관련된 일화가 있으신가요?KBS에서 일할 때 드라마 <용의 눈물> 타이틀을 쓴 것을 보고 시청자들에게 오자(誤字)에 대한 항의가 많이 들어왔던 적이 있습니다. <용의 눈물>의 ‘용(龍)’자를 한자로 쓴 것인데 이때 ‘龍’이라는 글자를 교육적으로 전달하기보다 ‘龍’의 이미지를 표현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행초서로 글씨를 썼는데, 시청자들은 이를 오자라고 보고 항의를 한 것이었습니다. 예술적으로 획을 생략한 것을 가지고 오자라고 항의가 들어온 것입니다. 나는 작가이기 때문에 조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작품이 다 끝나고 그동안에 있었던 일에 대해 인터뷰와 이야기를 나누는 방송을 한 적이 있었는데 제가 직접 방송에 나가서 이 일에 대한 해명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때의 일이 타이틀을 디자인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홍보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제게 있었던 그런 에피소드가 캘리그라피가 직업으로 자리 매김할 수 있었던 시초가 될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Q. 선생님께서 작품에 담아내고자 했던 예술세계와 결부하여 젊은 작가들에게 당부하고자 하는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작가들(서예가, 화가)이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노력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혼(魂)이라고 생각합니다. 작가정신 즉 혼이 있어야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재주만 믿고 노력하지 않으면 이룰 수 없다고 봅니다. 또한 예술가로서의 창조 정신이 매우 중요한데, 남들이 하지 않는 것을 시도하고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Q. 작품 전시를 통해 재능기부를 한 이력이 있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좀 더 자세히 이야기 해주실 수 있을까요?예산고등학교 기숙사 증축기금마련 전시회를 예산고등학교와 함께 협의하여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충남 예산에 위치한 예산고등학교는 제가 졸업한 고등학교입니다. 시골 학교다 보니 좋은 환경 속에서 공부를 할 수 없게 되자 하나 둘 학교를 떠나 도시로 가는 일이 많아지자, 학교에서 학생들을 유치할 수 있게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고자 일을 기획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기숙사증축기금 마련을 위해 60점의 작품을 출품하여 모든 작품이 판매가 되어 많은 수익을 낼 수 있었습니다. 학교 측에서는 작품 재료비를 지원하고자 하였지만, 제 뜻에 대한 오해가 생길 수 있어 정중히 거절하였습니다. 또한 이 전시회를 성황리에 마칠 수 있도록 예산고등학교 동문회에서도 큰 도움이 있었습니다. 이 전시를 통해 제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단순히 전시회에 열었다는 것이 아니라, 재능기부를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말하고 싶었습니다. 작가로서 작품을 통해서 기부를 할 수 있다는 것이 굉장히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생각되어 많은 사람들이 참여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Q. 지금까지 선생님의 캘리그라피 역사에 관하여 들을 수 있는 값진 시간이었습니다. 여전히 많은 작품 활동을 하고 계신데, 앞으로 새로운 계획이 있으신지요?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작년에 회사를 그만두게 되면서 생각한 것인데, 바로 캘리그라피의 지침서라고 할 수 있는 것을 만들고 싶습니다. 캘리그라피는 단순히 글쓰기가 아닌 디자인의 하나로 무수한 표현이 가능한 종합예술입니다. 그동안 방송과 일상생활에서 해왔던 많은 캘리그라피 작업의 자료들을 젊은 작가들이 공부 할 수 있도록 자료 준비를 준비하고 싶습니다. 또 하나는 직업화가로서의 전향을 위한 개인전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완벽주의는 아니지만 굉장히 꼼꼼한 성격이기 때문에 평소에도 전시나 도록 잡지에 들어가게 되면 제가 직접 다 디자인까지 참여하려고 합니다.Q. 마지막으로 새로 창간하는 [글씨21]에 당부하고자 하는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글씨21] 창간호 인터뷰에 참여하게 되어 영광스럽습니다. 타 매체에 비해 많은 발전을 이룰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미 지나간 정보들이나 형태가 지루한 편집 말고 고민한 흔적이 많이 있었으면 좋겠고 새로운 서예가(좋은 정보, 작가)를 발굴하는 잡지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서예뿐만 아니라 글씨를 매개로하는 다양한 분야를 소개할 수 있는 정보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공부하는 분들에게 많은 참고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그가 작품 속에서 구현하고 싶었던 것은 자신의 ‘혼(魂)’이었다. 혼을 담아내지 못하는 작품은 예술작품이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창조정신 또한 이끌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작가의 ‘혼’은 작가 자신의 정신과 노력을 온전히 모두 기울일 때만이 작품 속에서 오롯이 드러난다고 그는 보았다. 인터뷰 김지수 기자 略歷 - 충남 예산 출생- 생년월일 : 1956년 02월 02일 사사- 매정 민경찬 선생 동양화 사사- 천석 박근술 선생 문인화 사사- 함산 정제도 선생 서예 사사- 석헌 임재우 선생 전각 사사 학력- 동국대학교 대학원 미술학과(동양화전공) 졸업(석사) 수상- 제24회 원곡서예문화상 수상(원곡문화재단)- 제1회 로또서예문화상 대상 수상- 제15회 서예문화상 수상(월간서예) 경력- (사)한국캘리그래피디자인협회 회장- (사)추사기념사업회 회장- KBS 아트비전 상임이사 - KBS 아트비전 경영기획국장, 미술제작국장 - (사)한국미술협회 초대작가, 이사 - (사)한국문인화협회 초대작가- 동지묵연회 회장 - 창매회 회장- 한국미술협회, 일월서단 회원 등 ------------------------------------------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시인 도종환 님의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라는 시에는 마치 개선장군과도 같은 ‘담쟁이’가 등장한다. 결코 오를 수 없는 벽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모두 함께’ 그 길을 기필코 내고야 마는 이가 있다. 개인의 이해에서 벗어나 ‘함께 가기’를 선택한 담쟁이는 그래서 여느 나뭇잎과는 다른 모습에서 묵직한 감동을 안겨준다. ‘캘리그라피’ 작가로 살아온 18년 동안 소중한 인연이 참 많았다. 그 중에서도 담운 이일구 선생님(전 KBS 부장, 현 사단법인 캘리그라피디자인협회장)은 마치 이런 ‘담쟁이’를 떠올리게 만드는 이다.1999년 전통서예를 넘어 대중서예의 길을 걸으며 홀로서기에 노력하고 있을 때 선생님은 늘 많은 조언과 격려를 해주셨다. 나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전통서예를 시작해 대학과 대학원에서 서예학을 전공했다. 그러는 사이에 우리 전통서예와 문화를 아끼고 사랑하게 되었다. 하지만 사회에 나와 오롯이 전통의 길을 걷는다는 일은 쉽지만은 않았다. 그토록 자랑스럽게 여겼던 전통서예가 현대적 감각을 원하는 현시대에서는 인정받지 못한 채 소외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전통서예에 디자인을 접목해 현대적 감각으로 바꾸어내는 또 다른 ‘캘리그라피 문화와 시장’을 개척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이런 열망으로 도전하고 또 도전했지만 처음 가는 길이기에 어느 방향으로 가야할지 막막해 헤맬 수밖에 없었다. 1999년 캘리그라피를 시작할 때만해도 ‘캘리그라피’라는 용어조차 낯설기만 하던 때였다. 이런 벽에 부딪힌 이유는 한국에서는 글씨를 통해 대중과 소통하는 선례를 찾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해외자료를 찾기 위해 무작정 일본으로 떠났다. 일본의 편의점에서 본 일상용품엔 ‘캘리그라피’가 다채롭게 쓰이고 있었다. 편의점 라면용기, 술병 등에 쓰여 있는 글씨를 보고 너무나 맘에 들었다. 부족한 여비로 떠나왔기 때문에 ‘자료조사비’도 넉넉지 않았던 터라 ‘캘리그라피’가 접목된 일상용품 포장지를 모으기 위해 편의점 쓰레기통을 뒤지기도 했다. 한글 캘리그라피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하던 당시 방송타이틀 로고의 선두주자로 알려진 이일구 선생님(당시 KBS 부장)을 알게 되었고, 이후 인사를 드리러 찾아뵙게 되었다. 지면으로만 뵈었던 선생님과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선생님은 검은색 종이에 흰 글씨로 쓴 여러 장의 작품을 보여주었다. 대중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던 수많은 드라마, 다큐멘터리, 예능프로그램의 타이틀을 보았다. 전통의 맛을 살린 글씨와 대중들에게 감성을 전해줄 수 있는 현대적인 미감의 글씨... 전통서예를 벗어나 흔하게 볼 수 없었던 감성의 캘리그라피를 보게 되었다. 인상 깊었던 점은 예전의 방송타이틀 로고는 컴퓨터 작업이 아닌 수작업이었다는 사실이다. 전통서예 스타일을 벗어나지 못했던 나에게 귀한 작품들을 보여주고 작업 노하우를 알려주었다. 마냥 홀로서기를 하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당시 선생님이 건네준 복사물을 교과서 삼아 공부하며 한발 한발 더 나아갈 힘을 얻을 수 있었다.당시 ‘캘리그라피’라는 장르는 전통을 망친다는 이유로 한국서단에서 따가운 시선을 받았다. 캘리그라피라는 장르를 새롭게 만들어가는 길에는 수많은 걸림돌이 있었고, 때로는 거대한 장벽 때문에 넘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다행히 선배와 스승이 없었던 캘리그라피라는 길 위에서 만났던 장애물마다 선생님의 조언을 디딤돌 삼아 뚜벅뚜벅 걸어 올라갈 수 있었다. 서울 관훈동 인사아트센터에서 열렸던 이일구 선생님의 개인전 ‘댓잎에 바람일어’(인사아트센터, 2009)는 지금도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기존 전통문인화의 구도와 기법을 넘어 현대적 미감으로 표현된 선생님의 작품을 보고 정신적인 충격을 받았다. 선생님은 어린 시절 마을곳곳 초가집 뒤뜰에 심어진 대나무 숲을 좋아했다고 한다. 바라만 보고 있어도 마음이 편안하고 휴식을 느낄 수 있는 그런 공간이던 것이다. ‘유년시절 함께 성장하면서 보고 느꼈던 대나무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회상하며 그리셨다’고 했다. 전시된 다수 작품이 대나무 그림으로 채워진 것도 이런 연유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전시된 작품 중에 유난히 눈에 띄는 작품이 있었는데 대나무 숲을 위에서 내려다 본 작품이었다. 어린 시절에는 분명히 올려다보기만 했을 것이다. 하지만 대나무 숲을 ‘위에서 내려다 본다’는 것. 그 점은 기존의 관습과 틀을 깨는 ‘철학’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대나무보다 한참 작았을 소년이 대나무보다 훨씬 큰마음과 상상력을 지니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문인화는 회화, 서예, 문학, 전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내용들이 어우러진 일종의 종합예술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다양성을 아우르며 오늘에 이르기 위해서는 특정한 양식적 전형을 견지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다. 선생님의 작품은 시대적 변화에 따라 가치관과 상황을 반영한 결과로 틀에 갇히지 않는 자유로움이 빛났다. 더불어 ‘그림과 글씨는 같다’는 ‘서화동원(書畫同源)’을 느끼게 해준 선생님의 필력은 종합예술이 어우러져야 하는 문인화 작가로서의 가치를 실감케 했다. 이 전시를 통해 나는 전통의 서예를 현대적 미감으로 재해석하는 캘리그라피 작가의 입장에서 또다시 새로운 틀을 깨는 계기가 되었다.혼자만 올라가는 담쟁이를 본적이 있는가. 담쟁이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빈 캔버스를 채우는 그림이나 글씨처럼 함께 어우러져 형상을 만들어 낸다. 한번은 선생님이 오픈식 행사 사회를 맡아보라고 권한 적이 있었다. 선생님 주변엔 워낙 유명한 아나운서와 저명한 지인이 많을 텐데 왜 내게 사회를 맡으라하시는지 의아해서 이유를 여쭤보지 않을 수 없었다. “유명한 사람들이야 많지만 젊은 자네가 꼭 사회를 봐주었으면 좋겠네. 지인들도 그런 자네를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고..... 더 열심히 해서 좋은 사람들과 인연을 열어갔으면 좋겠네.” 라고 답했다. 선생님은 후학에게 길을 열어주려고 자신의 길까지 다 내어준다는 걸 직접 피부로 느끼는 순간이었다. 제자와 후학들에게 조건 없이 많은 사랑과 가르침을 주는 선생님의 모습을 보고, 나 역시 앞으로 더욱 성장하게 되면 꼭 선생님처럼 제자와 후학들에게 그렇게 하겠노라 다짐했었다.21세기는 ‘디자인의 시대’다. 우리의 존재방식, 삶의 형태, 문화는 디자인을 통해 드러나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시대적 흐름에 발맞추어 한국 최로 사)캘리그라피디자인협회가 탄생되었다. 협회는 전통을 바탕으로 한국적 디자인의 기술적, 학문적 뼈대를 만들어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KBS라는 큰 조직의 이사를 지낸 경험을 갖고 있는 이일구 선생님이 회장으로 취임하면서 협회는 체계적인 구성을 갖추고 성장을 이루어 가게 되었다. 이일구 선생님은 회장으로써 만만치 않은 거대한 담벼락을 많은 회원들과 함께 오르고 있다. 마치 손을 잡고 있는 담쟁이 잎처럼. 나 역시 상임이사로써 회장님을 잘 보필하여 캘리그라피디자인이라는 푸른 잎들, 그 꿈들이 담벼락을 넘어 푸른 숲길을 이룰 때까지 함께 만들어 가고 싶다. 선생님은 사단법인 캘리그라피디자인협회 회장, 추사기념사업회 회장, 문인화가, 서예가, 봉사활동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사회에 에너지를 나누고 있다. 선생님은 여전히 지난 18여년 가까이 나에게 정신적 스승이 되어주었고, 새로운 길을 걸을 수 있도록 기꺼이 디딤돌이 되어 주었다. 선생님께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도종환 시인의 ‘담쟁이’라는 시를 들려드리고 싶다. 더불어 이 지면을 빌어 이일구 선생님께 다시금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아래는 ‘담쟁이(도종환)’ 전문이다. 저것은 벽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그때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톨 살아남을 수 없는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결국 그 벽을 넘는다. 조용히 읊다보면 대나무처럼 곧게 서 계신 선생님이 떠오른다.각주 /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도종환의 시 글 이상현(캘리그라피 작가) (예산고 장학기금 및 기숙사증축기금마련 “담운 이일구 초대전”/예산군문예회관)
이 작가의 思생활, 강병인
전통서예에 디자인을 입히다.한글의 의미적 상형성을 찾는 글씨 예술가 강병인국가 산업 발전에 기여한 공로가 뚜렷한 자에게 수여하는 산업훈장은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가문의 영광으로 여긴다. 여기 오로지 글씨 하나로 2012년 디자인 코리아 은탑산업훈장을 받은 작가가 있다. 글씨에 생명과 표정을 담아내는 글씨예술가 캘리그라퍼 강병인 작가를 만나보았다.Q. 한글에 아름다운 글꽃을 피우고 있는 작가, 강병인 작가님의 글씨 스토리가 궁금합니다. 어떻게 글씨를 쓰게 되신 건가요?어린 시절 시골이라 군것질은 거의 못했으며 집안은 원체 가난하였죠. 그런데 특활시간에 배운 서예수업이 끝나고 나면 양봉을 하셨던 선생님께서 꿀을 실컷 먹게 해주셨습니다. 달콤한 꿀의 유혹에 서예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의 제 성격이 활발하기보다 내성적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먹을 갈고 글씨를 쓰는 시간이 왠지 좋았습니다. 내세울 것 없는 시골아이가 또래 중에 대표로 뽑혀 대회에 나가기도 하고, 나름의 존재감을 아이들과 선생님에게 보여주는 시간이었습니다. 중학교 때 교과서에서 추사 김정희 선생님의 작품세계와 조선시대 최고의 예술가·서예가라는 설명들을 보고 다시 한 번 ‘나중에 크면 서예가가 되어야 겠다’는 꿈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사실 독학이나 마찬가지 인데, 초등학교 때 1년 정도 궁체를 배웠고, 그 이후로는 선생님이 안계셨습니다. Q. 서예가 강병인 보다 캘리그라피 디자이너 강병인으로 먼저 대중에 알려지셨습니다. 전통서예라는 콘텐츠로 디자인과 접목하게 된 계기가 있으신지요?글씨를 독학하면서 디자이너로도 활동을 했었는데 자연스럽게 서예와 디자인, 디자인과 서예의 관계를 생각했습니다. 디자인의 한 분야로 제품의 로고를 만든다던지, 책의 타이틀을 쓴다던지, 대부분이 그 당시에는 활자를 이용해서 제호를 활용했기 때문에 제품의 로고마저도 붓글씨를 쓰는 것은 극히 드물었습니다. 그런데 90년대 초 일본여행을 하면서 지하철이나 백화점, 서점, 길거리의 간판을 보면 붓글씨가 굉장히 많았습니다. 우리나라는 대부분이 컴퓨터로 만든 인위적인 글자인 반면에 일본간판의 글씨는 대부분이 붓글씨로 쓰여져 자연스럽게 가게의 정체성을 드러냈습니다. 붓글씨가 생활 속에 디자인 적인 쓰임이 굉장히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조금씩 분석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나라도 일본과 같은 서예문화를 가지고 있지만 이것이 생활 속에서나 디자인적으로 광고카피, 제품의 로고, 영화·드라마에 부분적으로만 사용하고 있을 뿐 활발하게 사용되고 있지는 않았죠. 그래서 조금씩 실험을 해보고 적용한 결과, 디자인적으로 쓰이는 붓글씨는 기존의 서예 방식을 적용하는 것은 어렵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원래 디자인은 발상이며, 어떤 광고가 만들어지는 데에는 기업의 이념과 정체성을 광고에 표현해야 하고, 제품의 광고 패키지라면 제품의 속성, 제품을 누구에게 팔 것인가에 대한 소비자층을 분석하지 않으면 패키지나 제품의 로고가 잘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단순히 서예가의 서풍. 본인이 잘 쓰는 서체로 글씨를 쓴다는 것은 상업적으로 활용도가 매우 떨어질 것입니다. a라는 제품이 주(酒)류라면, 기업마다 자기의 이념이 다르고 만드는 과정이 다르고 제품의 속성이 다른 것인데 a제품,b제품,c제품의 글씨가 똑같다면 변별력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존의 서예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표현방식과 하나의 디자인을 만들기 위해서 많은 분석과 연구가 필요합니다. 컨셉이 만들어지면 그 컨셉에 따라 로고, 패키지, 광고전략이 하나로 흐르듯 서예와 디자인적인 과정도 서로 접목하면 새로운 서예, 새로운 손글씨 분야가 만들어 질 것이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붓글씨가 생활이나 디자인 속에서의 활발한 쓰이는 일본을 알아봤더니 그들은 이를 캘리그라피라고 하며 순수 서도와 상업서도를 구분해서 쓰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서예와 디자인을 접목한 것도 캘리그라피라고 말할 수 있겠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지속적인 실험을 하고, 광고회사에서 디자인을 하며 실제로 적용해볼 수 있었죠. 2000년대 ‘따자마자축제’나 99년도 <다비전>이라는 일러스트 그룹의 로고를 붓글씨로 쓴 경험이 있습니다. 일반적인 서체나 활자를 적용한 글씨를 보여줬을 때와 붓글씨로 서체를 다양하게 보여줬을 때의 반응은 너무 달랐습니다. 붓글씨를 보며, 활자와는 차별화 되어있고 독특하며 우리의 정체성(한국인의 정체성, 단체, 개인의 정체성)이 잘 드러나며, 기업의 입장에서는 그들의 이념이나 제품의 속성이 잘 표현되었다는 평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90년대 말부터 본격적으로 붓글씨를 하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2000년 초에 광고회사에서 많은 실험을 거친 끝에 다시 글씨를 쓰는 일을 전문적으로 해보자는 생각을 가지고 2002년 초, 본격적으로 전업 작가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Q. 글씨 쓰는 사람은 보통 호를 갖고 있습니다. 작가님의 호 ‘영묵(永墨)’에 얽힌 이야기가 궁금합니다.중학교 때 추사 김정희 선생님을 보며 나중에 크면 닮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도 저렇게 훌륭한 서예가가 되어보자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당시 어렸지만 막연하게 한자서예시대를 겪으신 추사선생님의 작품 중 특히 예서를 보면 글이 가지고 있는 내용, 거기에 들어있는 무수한 삶의 경험들, 희로애락喜怒哀樂이 표현되어있습니다. 한글로 시작한 저는 ‘한자로는 도저히 추사를 따라 갈 수 없겠구나’ 하여 ‘한글로 이름을 날려보자’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서예를 하다보니 친구들이 글씨를 써달라고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작품 마지막에 낙관을 찍어야 하는데 호가 없어 호를 지어야겠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내가 앞으로 추사선생님 같은 글씨를 쓰려면 영원히 먹과 함께 해야한다고 생각하여 호를 영묵永墨이라 짓게 됩니다. 그 당시에 글씨를 잘 쓰지도 못하고 전각이라는 것도 자세히 알지 못했지만 친구들이 부탁하면 고무지우개에 새겨 찍어주곤 했지요. 제가 만약에 중학교 때 영묵이라는 호를 짓지 않았다면 지금의 제가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Q. 작가님은 2004년부터 블로그를 통해 대중들과 소통하고 계십니다. 다양한 작품과 작가님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작업노트와 같이 여겨지는데요. 글 중 ‘캘리그라피는 잠시 유행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작가님이 생각하시는 캘리그라피란 어떤 것인지요?그 당시 캘리그라피를 두가지 관점에서 접근하였습니다. 하나는 전통서예의 현대적인 재해석, 재창조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한자서예는 추사선생님의 예서나 많은 서예가들이 모여 표현되는 서예작품은 굉장히 작가의 개성이나 정신이 표출되거나 형태적으로 구도적으로 작품이 굉장히 다양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당시에 80년대 90년대 초만 해도 한글서예는 판본체, 궁체 위주의 창작표현방식에 가두어져있지 않냐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왜 한글은 한자처럼 쓸 수 없는가에 대해 질문을 계속했습니다. 그 답은 사실 추사선생님을 통해 얻었습니다. 추사선생님의 예서에서 지금의 제 작업을 보았습니다. 법고창신. 옛 것을 제대로 공부해야 하며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다라는 뜻으로 한글서예에 있어서 법고는 당연히 판본체나 궁체, 정자 흘림정도가 있습니다. 이것을 익히지 않고서는 당연히 한글서예, 한글캘리그라피, 한글디자인도 저는 어렵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한글서예의 창신을 해보자고 생각했습니다. 한자는 꽃花 , 돌石, 용龍 등 힘있게 쓸 수 있는데 한글도 돌을 돌처럼 쓰면 안될까? 한글도 꽃이라는 글자를 가만히 보면 꽃이 피고 가지가 있으며 뿌리가 있는데, 그것을 표현할 수 없을까? 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봄’을 가만히 보면 종성‘ㅁ’은 땅이고 초성은 하늘이고 중성의 모음은 사람으로 표현할 수 있는데, 그것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뿌리가 있고 가지가 있고 또 가지 위에 우리가 봄이 오면 무수하게 상상할 수 있는 무언가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종성‘ㅁ’은 땅에서 싹이 나는 모습으로, ‘ㅗ’는 싹이 자라 가지가 되는 모습으로, 초성 ‘ㅂ’은 꽃봉 우리로 표현하면 안되는 것인가. 라는 실험을 시작하게 되었죠. 이는 봄이 와 즐겁게 춤추는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훈민정음 해례본을 보면 ‘보이지 않는 소리를 보이게끔 상형화 하였다’라고 나옵니다. 봄_2007_30x16.5cm그래서 한글이 ‘표음문자이지만 적극적인 상형문자는 아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보이지 않는 소리를 보이게끔 합니다. 이기불이理旣不二, 소리와 문자는 다르지 않다고 뜻으로 우리 인간의 감정, 자연이 가지고 있는 형상을 보면 다 소리로 드러납니다. 보이는 그대로 형상을 만드는 것은 한자고, 한글은 그 소리를 통해 모든 형상들을 드러 낸다 라고 나름대로 제자원리에서 밝혀 놓은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칼 이라는 문자, 소리에서 칼을 볼 수 있지만 활자에서는 그것을 볼 수 없지요. 그런데 캘리그라피는 얼마든지 칼의 모습, 칼을 쓰는 사람, 칼을 쓰는 역동성을 ㄹ을 통해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러한 작업을 통해서 한글이 가지고 있는 꼴의 다양성, 그안에 들어있는 철학, 봄·여름·가을·겨울의 변화, 음과 양을 가지고 있는 한글의 제자원리 창제원리를 바탕으로 새로운 한글서예를 보여주고자 하였습니다, 결국, 한글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꼴의 다양성을 생각해 볼 수 있게 하고 싶었습니다.두 번째는 사실 먹고 사는 문제였습니다. imf 당시 디자인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imf 로 인해 신용불량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계속 꿈꿔오고 생각하고 실험하였던 서예의 디자인적인 응용. 다시 말해 일본에서 보았던 캘리그라피를 한번 열어보자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늘 쓰던 서체가 아니라 a라는 도둑에 대한 이야기를 쓴 책이라면 도둑이 ‘왔다갔다’ 하는 모습을 담기 위해 많은 공부를 하였습니다. ‘엄마가 뿔났다’를 표현한다면 ‘뿔’ 자에서 엄마가 뿔난 모습을 표현하고자 하였습니다. 단순히 뿔이라고해서 뿔처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다 나름의 이유를 가지고 ‘뿔’ 자를 표현하여야 합니다. 어렸을 때 소에 먹이를 주는 했던 아르바이트를 했었습니다. 그런데 어렸을 때 보았던 그 소가 늘 가족을 위해 희생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가족을 위해 밭을 갈고, 새끼를 낳아 팔면 그것으로 아들,딸 들의 학비를 마련해주는 소를 보며 늘 가족을 위해서 희생을 강요받는 어머니상을 내용으로 하는 ‘엄마가 뿔났다’를 떠올렸습니다. 만약에 단순히 ‘뿔’ 이라고 생각하여 뿔처럼 표현해야지 라고 한다면 아마 캘리그라피의 생명력은 없었을 것입니다. 경험, 이유를 그 안에 응축시켜 엄마가 뿔났다가 만들어 진 것입니다. 그 결과 드라마를 만드는 감독, 시청자 모두를 만족하는 글씨가 나온 것입니다. 저는 이런 작업을 통해 캘리그라피를 디자인의 분야로 발전시켜 보고자 하였습니다. 그와 더불어 이 분야를 하나의 직업군처럼 만들어 보자라는 생각하게 됩니다. 교육을 통해. 지금은 나름의 직업분야로 발전하였지만 한글이 디자인 분야에서 새롭게 적용될 수 있도록 서예인, 디자이너, 일반 사람 모두 이 분야를 배워, 먹고 살 수 있기를 바랬습니다.200802_KBS2_엄마가뿔났다 영상타이틀Q. 매년 입춘이 다가오면 SNS에 강병인 작가님이 보내 온 입춘대길 글씨를 인증하는 인증대란이 일어나고 있는데요^^ 입춘 글씨를 선물하시는데 특별한 계기나 의미가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제가 봄을 유난히 좋아합니다. 봄이 오면 모든 얼었던 대지가 기지개를 핍니다. 사실은 한글에 계절을 담고 보면, 훈민정음 해례본에 나와있는 참모습은 겨울과 같습니다. 아무 움직임이 없는 상태, 네모나고 아주 정적인 겨울의 모습을 닮아있습니다. 겨울은 사실 어마어마하게 중요합니다. 모든 땅속에 영양분을 빨아들여 새로운 생명을 잉태시켜 그 생명을 자라게하는 순환의 원리를 가진 계절입니다. 예를들면 ‘봄’이라는 글자는 땅에서 겨울내내 영양분을 머금고 있다가 봄이 오면 싹이 자라고 꽃이피는, 여름이 되면 절정을 이루었다가 가을이 되면 겨울을 준비합니다. 꽃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떨어지면 땅으로. 겨울의 영양분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한글은 그런 원리를 가지고 있으므로 굉장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겨울도 너무 소중하지만 봄이 되면 많은 생명을 잉태시키고 누구나 평등하게 똑같이 햇살을 주기에 봄을 좋아합니다. 옛날에는 봄을 즐기는 방법이 집에 봄을 끌어들이는 방법으로 입춘대길을 문 앞에 써서 붙였습니다. 과거에는 모든 사람들이 글씨를 썼기에 본인들이 입춘대길을 써서 붙였는데 지금은 서예문화가 글씨를 쓰는 문화가 사라졌기 때문에 직접글씨를 써서 붙이기에는 어렵지요. 그래서 글씨를 쓰는 사람으로서 내가 글씨를 써서 주변의 지인들에게 선물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처음에는 5~60장 써서 시작했는데 해가 지날수록 장수가 늘어났습니다. 3년까지는 한자로, 매년 다른 서체 전서, 행서 등으로 바꿔가며 썼습니다. 그러다 2015년부터는 한글도 써보면 어떨까 하여 한자 밑에 한글로 ‘새봄 오시는 날’ 이라는 풀이를 써 보내드렸더니 너무 좋아하셨습니다. 한자로만 되는 것보다 한글이 섞여 있는 것을 더 선호하셨습니다. 저는 오히려 한글을 크게 쓰고 한자는 작게 써드기도 하였습니다. 올해는 한글을 한자로 비유하면 행서로 쓰고 입춘대길은 낙관을 만들어서 찍어 보내드렸습니다. 한자로만 쓰는 입춘대길을 한글로 받았을 때, ‘입춘대길이 가지고 있는 뜻을 한글에서 느낀다’라는 반응이 왔을 때 그 기분 때문에 힘들더라도 즐거운 것 같습니다.서울시 슬로건 Q. 작가님의 강연을 듣고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라면 세종대왕 광팬이시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스승의 날에 대한 이야기는 대한민국 국민들이 알아야 할 스토리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글씨21 독자들에게도 이야기 부탁드립니다.제가 2년전만 해도 홍대앞에 작업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제가 이쪽 종로 인왕산 아래로 옮긴 이유는 세종께서 여기서 태어나셨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한글은 스마트시대에 가장 적합한 문자로 입력과 출력도 용이합니다. 이토록 쉽고 편리한 한글을 쓰는 이상 세종께 큰 빚을 지고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한글 글씨를 쓰면서 제 자신을 세상에 알릴 수 있었고, 더불어 먹고 사는 문제도 해결하였으니 세종대왕을 어찌 잘 안 모실 수 가 없습니다. 세종의 한글정신을 지키고 알리고 이 큰 한글을 어떻게 가꾸어 나갈 것인지 고민하며 즐겁게 한글을 더 아끼고 사랑하고 지키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이 곳으로 옮기면서 생각한 제 나름대로의 슬로건이 있습니다. 세종대왕의 한글창제 정신을 이들이 꿈꾸는 덕을 잇는 것입니다. 잘 아시겠지만 한글은 글자를 모르는 일반 백성들을 위해 만들어 진 것으로 굉장히 쉽고 과학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문자를 독점한다는 것은 지식을 독점한다는 것, 양반에게 독점되어 있는 지식을 백성들에게 골고루 나눠주겠다는 세종의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것은 시대로 보면 나눔이라는 민주주의, 인본주의, 홍익정신이 모두 깃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정신을 ‘오늘날에 잇자, 어떻게 이어갈것인가’ 이것은 저 혼자만으로 힘으로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이 곳은 세종의 한글창제 정신을 잇고자 하는 이들과 이 공간에서 함께하고 활동하는 다짐의 공간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세종이 태어난 이곳에 그를 위한 생각터, 기념관 하나 없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다행인 것은 마을 주민분들도 생각터복원사업에 관심이 많으시며, 추진위원회도 만들었습니다. 생각터복원에 관심이 많은 분들과 한글학자들, 한글디자이너들, 서예가분들과 함께 세종께서 나신 곳, 한글을 만든 공간에 역사성, 공간성을 알리고 외부에서 누군가 왔을 때, 세종이 태어나신 것 과 위대한 문자 한글이 만들어진 공간임을 새기고 알릴 수 있도록 나름의 노력을 합니다.세종이 태어나신 날이 5월 15일은 스승의 날과 같습니다. 겨레의 스승이 바로 세종대왕입니다. 5월15일이면 세종이 태어나신 곳에서 무언가 행사나 축하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행사가 없습니다. 모두 세종이 잠들어 계신 여주로 가 세종이 태어나신 날을 기념하는데 저는 이것이 모순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보통 일반 분들은 생신날에 묘소를 찾아가 참배하지만 위대한 인물들은 생가에서 행사를 합니다. 그래서 제가 국립한국박물관후원회 이사이기도 하여 한국박물관후원회의 이름으로 2년동안 꽃다발 행사를 하고 있습니다. 올해도 이 행사를 할 계획입니다. 많은 분들이 이곳에서 세종이 태어나셨고, 그 날짜가 5월15일이며, 왜 스승의 날이 5월15일인지를 알려야겠다고 생각을 합니다. 200801_KBS2_대왕세종 영상타이틀Q. 캘리그라피는 보통 붓으로 작업을 한다고 알고 있는데 작가님의 작품 중 ‘공주의 남자’ 같은 경우 붓으로 작업을 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초보 작가들을 위하여 재료에 대한 이야기와 작업 과정을 알 수 있을까요?캘리그라피는 서예를 바탕으로 하는 글씨입니다. 글씨를 아름답게 쓰든, 슬프게 쓰든, 기쁘게 쓰든, 못나게 써도 모두 글씨입니다. 전통서예와는 조금 다른 현대적인 재해석이기 때문에 순수작품이더라도 때로는 도구를 다르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나 디자인적인 쓰임의 글씨는 드라마, 책, 그 내용이 가지고 있는 성격에 따라 도구도 달리할 수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저는 붓을 사용하지만 때로는 다른 인공적인 도구를 사용합니다. 처음 캘리그라피를 하시는 분들은, 서예하면 바닥에 깔판이 있어야 되고, 종이, 붓, 벼루 먹, 문진 등 문방사우가 있어야 하는 등 굉장히 많은 것이 필요하여 사용이 어렵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인공적으로 나온 펜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인간의 희노애락을 가장 극대화시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동양의 모필입니다. 서양의 개념과는 완전히 다르다고 봐야합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캘리그라피는 동양의 서예 도구인 모필을 잘 다뤄야 하며, 필법을 하지 않고서는 좋은 글씨를 쓸 수 없습니다. 개_2014_30x55cm다만 디자인적인 서예의 글씨는 필요에 따라 도구를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습니다. 예를들면 공주의 남자 같은 경우, 드라마 방향을 시점은 조선시대지만 한복을 벗고 현대의 옷으로 갈아 입으면 현대물이라고 해석했습니다. 로미오와 줄리엣과 같은 드라마의 줄거리다 라고 생각하여 사극이기도 하지만 현대물이기도 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글씨는 모던하게 쓰는 것이 어울리므로 도구도 바꿔본 것입니다. 물론 붓으로도 쓰기도 했습니다. 아무래도 도구의 차이에서 시대도 드러나며, 공간, 시간, 역사 모든 것들이 표현됩니다. 드라마가 가지고 있는 현대성이 담아내기에는 현대적인 도구의 느낌이 더 좋았고 드라마 측에서도 이것을 채택하였습니다. 미생도 마찬가지로 작업된 것입니다. 한가지 고민이 있다면, 시청자에게 이 드라마가 얼마나 사랑받을까 하는 마음과, 드라마의 얼굴이자 주인공 못지 않게 중요한 타이틀 글씨가 얼마만큼 소통될까 하는 고민도 있었습니다.201107_KBS2_공주의 남자 영상타이틀Q. 상업글씨는 가독성이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너무 가독성만을 따지면 폰트와 크게 차이가 없어 질 듯합니다. 가독성이나 예술성이나, 작가님의 생각이 궁금합니다.상업적인 글씨는 기본적으로 사실 쓰임에 가장 충실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예술성은 나중의 문제가 되겠죠. 기본적으로 가독성이라는 것은 작가나 제품을 만드는 사람에게도 중요하지만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소비자입니다. 기업의 입장에서는 기업에서 만든 제품이 빨리 소비자에게 노출이 되거나 각인이 되길 원합니다. 노출되는 것이 곧 가독성입니다. 그 뒤 각인되어 기억나게 하는 것입니다. 기억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는 글씨,로고가 기업의 마케팅 차원에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저같은 경우에는 가독성이 높으면서도 제품의 성격을 글씨에 담아내는, 거기에서 소비자가 쉽게 잊지 않고 오래도록 기억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제 나름대로 ‘의미적 상형성’입니다. 글이 가지고 있는 뜻, 소리, 형상을 자연스럽게 글씨에 드러냄으로써, 보다 쉽게 소통하고 기억하게 합니다. 기억하게 한다는 것은 마케팅 측면에서 보면 재구매할 수 있다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글씨여야 좀 더 상업적인 글씨에 충실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상업적, 디자인적인 글씨를 쓰면서도 놓치지 않고, 줄곧 나름대로 연지해온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기업의 어떤 마케팅 전략, 소비자, 타겟이 누구인지에 충실하고, 디자인 방향에 충실하면서도 로고를 통해 한글의 새로운 꼴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입체시각시_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_2011두 번째는 그 속에서도 강병인의 생각, 예를들면 ‘작가의 정신철학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 경우 기업과 작가와의 상충되는 부분이 생길 수 있는데 상대방을 설득하는 문제는 저에게 늘 공부해야 하는 부분입니다. 캘리그라퍼가 상업적인 글씨를 쓸 때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기본적으로 디자인은 사용자의 입장에 만들어야 된다는 것 입니다. 좋은 글씨를 위해서는 소비자하고 직접 만날 수 없으므로 디자이너, 기업, 작가와의 끊임없는 소통과 대화가 필요합니다. 반면에 기업이나 디자이너 분들에게 부탁을 드리고 싶은 것은 하나의 제품이 나오기까지 기업에서 많은 정성과 공을 들이며 연구, 개발, 생산되기까지는 많게는 몇 개월에서 3년 정도 걸리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끔 당황스러운 것은 글씨는 그저 쓰기만 하면 나오는 것이라 생각하여 쉽게 부탁하실 때도 있고, 글씨를 보여주며 유사하게 써달라고 하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에 저는 ‘그 제품도 유사하게 만드셨나요?’ 라고 질문을 한적도 있습니다. 유사하게 써달라고 하는 것은 카피가 될 수 있으며 a라는 제품에 맞게 글씨 또한 새롭게 창작이 되어야 합니다. 제품이 정성들여 만들어지듯이 글씨 또한 소비자와 만나는 첫 얼굴이기에 너무도 중요하다고 전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캘리그라퍼들도 충분히 대화할 수 있는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계속적인 소통을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참이슬 3종Q. 작가님은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은 글씨 작업을 하시고 쉬는 시간에는 임서를 하며 보낸다는 것이 사실인지요? 캘리그라피 작가들이 임서를 할 때 추천하는 서체는 무엇인지요?크게 한글은 고딕서체에 바탕이 되는 판본체, 명조체의 바탕이 되는 궁체 두 가지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두 서체를 늘 임서를 합니다. 궁체는 이미경 선생님의 정자와 흘림을 주로 하며, 제 글씨를 배우는 분들에게 지도도 합니다. 한글고체에는 정자와 진흘림이 있는데 두루두루 하고 있습니다. 한글을 주로 발표하지만 한문·한자서예 역시 임서를 하고 있으며 주로 왕희지의 행서를 많이 합니다. 사실은 새로운 것을 창작해 낸다는 것은 고통스러우나 좋은 글씨를 임서하는 것만큼 행복한 시간이 어디있겠습니까. 평상심을 찾는데에는 좋은 글씨를 임서하는 것 만큼 더 좋은 것이 없는 듯 합니다. 임서라는 것은 추사선생님께서도 말씀하셨지만 70평생에 벼루10개를 갈아 닳게 하고 붓 일천자루, 만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어도 모자르다고 하셨으니 획 공부는 평생해야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좋은 글씨를 볼 줄 알고 임서하는 것은 좋은 글씨를 쓰기 위한 큰 바탕입니다. 글씨를 오래 쓰려면 임서를 많이 해야되지 않을까 하는 측면에서 늘 하고 있습니다. Q. 캘리그라피작가 강병인, 앞으로의 목표가 궁금합니다. 또 이제 막 걸음을 떼기 시작한 캘리그라피 디자이너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해주시기를 바랍니다.거창한 계획은 없습니다. 다만 세종께서 나신 이곳에 새로운 둥지를 틀며 나름 정리한 것이 있습니다. 어느 정도 캘리그라피나 먹글씨 분야가 각광을 받고 있지만 한 시대의 어떤 역할을 했는지. 곧 있으면 20년 정도 되어가는 캘리그라피가 가지고 있는 역사성, 앞으로의 역할, 뿐만아니라 문제점과 단순히 기교로서 글씨를 보여주는데 그치는가 아니면 이론적인 부분도 계속 하고 있는가에 대한 것을 살펴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작가로서 새로운 한글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의미적 상형성을 넘어서 한글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한 고민을 많이 하는 요즘입니다. 아시는 것처럼 한글은 전환이 무궁무진합니다. 실제로 한글의 확장성이라는 것은 개인이 어떻게 표현하는가의 문제이므로 끊임없이 고민할 것입니다. 캘리그라피, 다시말해 먹글씨를 좋아하시고 이 분야에 계시는 분들에게 말씀을 드린다면 먼저 자신에게 다시 한번 질문을 하라고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정말 나는 글씨를 좋아하는지, 글씨를 돈으로 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진심으로 좋아한다면 저는 그것으로 끝난 것이라고 봅니다. 좋아하면 즐길 것이고 즐기면 잘하게 될 것입니다. 다만 돈으로만 보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저 역시 이 분야를 들어설 때 디자인으로서는 실패작이었습니다. 그 때 제 자신의 문제를 돌아 봤을 때 실제로 디자인의 능력이 모자라면서도 돈을 쫓고 있었습니다. 가장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글씨를 돈으로 보지말자, 내가 좋은 글씨를 쓰다 보면 돈도 따라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글씨를 정말 좋아한다면 자연스럽게 누구에게나 좋은 글씨가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글씨21 힘내세요! 얼씨구! 생각과 마음, 붓이 하나일 때 담고자 하는 감정이 드러난다고 말하는 작가 강병인.거침없는 붓놀림, 팔딱팔딱 살아 움직이는 듯 한 획의 표현으로 21세기 서예의 명작을 만들어 가고 있는 글씨예술가 강병인의 오색찬란한 글꽃들이 대한민국을 넘어 전 세계에 흐드러지게 피어나길 소망한다.인터뷰 성은하기자영묵永墨 강병인 Kang Byung In-강병인글씨연구소 술통 대표-홍익대학교 산업미술대학원 광고디자인과 졸업-문화체육관광부 국립한글박물관 후원회 이사-문화체육관광부 문화예술 명예교사-교보문고 손글씨문화확산위원회 위원-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 서예스승-개인전 14회(2016년 기준)[수상]-2014. 문화체육관광부장관 표창-2012. 대한민국디자인대상 은탑산업훈장-2009. 한국출판인회의 올해의 출판디자이너상[저서]-글씨 하나 피었네_2016, 글꽃출판사 [언론소개]-2016 KBS 1라디오 <문화공감>-2015 SBS <컬쳐클럽>-2014 프랑스,독일공영합작채널 ARTE <기적의 나라, 한국>-2013 EBS <지식채널e> ‘봄봄봄’-2011 KBS 1TV <한국 한국인>-2010 KBS 2TV <생방송 오늘>-2007 MBC <뉴스데스크> 정이 담긴 손 글씨 ------------------------------------------------------------------------------------------------------------------------------------그가 쓴 글씨 안에는 꼭 다문 꽃봉오리와 활짝 핀 꽃의 모습이 함께 있다- 류시화(시인)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나는 글씨 쓰는 사람 강병인에게 감사드린다. 그는 우리가 쓰는 한글이 단순히 자음과 모음을 결합시켜 대상을 가리키는 약속된 글자가 아니라 그 자체로 대상을 안에 담고 있음을 일깨워 준다. ‘꽃’은 ‘ㄲ’과 ‘ㅗ’와 ‘ㅊ’이 합쳐져 꽃을 의미할 뿐 아니라 그 글자 자체가 ‘꽃’의 모습이다. ‘길’은 그 글자 안에 ‘길’을 담고 있고, ‘봄’은 글자 그대로 모든 생명을 다시금 깨우는 ‘봄’의 모습인 것이다. 우리가 단순히 물을 상징하는 글자라고 여겼던 ‘물’이 그 안에 물의 흐름과 물의 소리까지 담고 있다! 상징적인 의미뿐 아니라 실질적인 모습까지 표현하는 것이 한글인 것이다. 내가 꽃에 대해 시를 쓰는 이 사랑하는 글자들이 단순한 소리 글자가 아니라 ‘꽃’ 그 자체임을, 무심히 써 온 ‘숲’이라는 글자 안에 깊은 산과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이 있음을 그는 보여 준다. 오랜 세월 우리가 써 온 글자들 안에 이 땅의 모든 생명과 삶이 담겨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그가 쓴 손글씨 안에는 꼭 다문 꽃봉오리와 활짝 핀 꽃의 모습이 함께 있다. 그의 글자는 발명이 아니라 놀라운 발견이다. 그래서 나는 그를 ‘글씨의 시인’이라 부른다. 발견하는 눈을 가진 이는 누구나 시인이다. 더구나 내가 개인적으로 아는 그는 그리움과 사무침을 많이 겪어 온 사람이다. 모든 외형적 기대들과 좌절과 실패를 경험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글씨에는 절실함이 있다. 자기 안의 부딪침과 자기 밖의 부딪침이 담겨 있다. 그리워하지 않고 절실하지 않음은 죽은 것이다. 우리의 마음속에 꽃이 피어야 우리가 만드는 작품에도 꽃이 핀다. 단순히 손재주로 피운 꽃은 향기가 없다. 글을 쓰는 사람이든 글씨를 쓰는 사람이든 부단한 자기 공부가 따라야 하는 것이다. ‘글씨와 삶이 하나여야 한다’는 그의 생각이 그가 쓰는 글자들 안에서 빛을 발한다. 그의 글씨를 그림이 아니라 ‘글꽃’이라고 우리가 느끼는 이유이다.
봄을 닮은 공간 “늘봄캘리그라피”
봄을 닮은 작가,답답한 도심을 떠나 남양주로 발걸음을 옮기면 그녀만큼이나 맑고 고운 풍경이 펼쳐진다. 촉촉하게 내리는 봄비를 맞으며 싱그러운 봄빛으로 글씨와 그림을 물들이는 ‘늘봄’ 고은영 작가를 글씨21이 만나보았다.화사하고 따뜻한 느낌의 공간이네요. 작업실 컨셉이 어떻게 되시는지요?-제가 꽃을 좋아하고 자연 풍경을 보는 것을 좋아해요. 밖으로 나가면 뒤뜰이 있어서 산책할 수 있어요. 작업하면서 떠오르지 않거나 힘들 때, 사색하고 싶을 때 걷곤해요. 꽃을 보면 생각이 많이 떠오르고 날씨나 햇빛을 보면서 작품의 영향을 받곤하죠. 원래 제 작업실은 서울에 있었는데 홍대의 북적한 곳에 있다가 이쪽으로 오니 조용하고 작업에 몰두하기 좋아요. 저만의 공간으로 꽃으로 가득 채우고 싶어요. 원래 자연에 대한 로망이 있어요. 작업의 소재나 영감을 받을 수 있는 것들이 풍부한 곳으로 가고 싶었어요. 또 미래에 저만의 아트샵을 갖고 싶은 꿈이 있어요. 그래서 연습해본다는 생각으로 상품을 진열하면서 미래의 모습을 상상하곤해요.아스팔트나 건물, 사람이 많고 북적거리는 것도 좋지만 전원생활을 해보고 싶어서 1년 반 전에 이곳으로 이사를 왔어요. 이곳의 생활이 외롭진 않아요. 세련된 자료, 전시들과 거리가 멀어지기는 했지만 대신 공기 좋고 볼 수 있는 풍경들이 많고 계절의 변화를 직접적으로 많이 느낄 수 있어서 제 작품이 좀 더 풍요로워 지는 것 같아요. 그릴 것이 많고 보는 것들이 달라졌어요. 필명이신 ‘늘봄’은 작가님과 참 닮았다고 생각되네요. 늘봄은 어떤 뜻인지요?‘언제나 봄’이란 뜻으로 꽃을 좋아해서 지은 이름이에요. 언제나 봄처럼 사람들에게 그림으로, 글씨로 따뜻하게 마음을 전하고 싶어요. 제가 워낙 꽃을 좋아해서 꽃도 배웠고 플로리스트가 되는 상상을 하곤 해요. 작가님의 작품은 글씨만 있지 않고 항상 그림이 함께하네요. ‘늘봄’ 작가를 떠올리면 캘리그라퍼이기도 때로는 일러스트 작가라고 생각하는 분도 있죠. 작가님의 정체는 무엇입니까?그 부분에서 많이 고민해요. 저는 원래 캘리그라피 작가에요. 프로필에는 캘리그라피 작가로 소개가 되어있죠. 제가 그림을 하게 된 이유는 캘리그라피를 좀 더 돋보이게 하고 싶고 캘리그라피에서 못다한 이야기를 그림으로 풀어보고 싶어서에요.저는 ‘캘리를 위한 그림을 그립니다’ 어떤 분들은 일러스트레이터로 보기도 해요. 실제로 캘리그라퍼로서 작업하는 경우가 있고 일러스트레이터의 신분으로 작업을 하죠. 어찌보면 직업이 두 개인 것 같기도 하네요. 두 영역을 왔다갔다 하면서 저만의 세계를 충분히 즐기고 있어요.우연히 커피숍에 갔다가 작가님의 캘리그라피 작품을 본 기억이 나네요. 작가님의 작업 중 대표적인 작품을 소개해주세요.저는 365일 봄을 기다려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작품은 벚꽃을 수채화로 그리고 캘리그라피를 쓴 것이구요. 제가 이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는 앞서 말씀드렸듯이 제가 워낙 꽃을 좋아하기도 하고 항상 봄이 되면 주변 사람들이 저를 떠올리고 찾아주세요. 그래서 이 작품에 큰 애착을 느껴요. 작가님 작품 중에는 디자인 상품으로 나온 것이 많던데 어떻게 처음 글씨로 상품개발을 해야 겠다는 생각을 하셨는지요?제가 원래는 디자이너로 5년 정도 회사생활을 했어요. 그 후 프리랜서로 7년 정도 일을 했구요. 막연히 팬시회사에 입사하고 싶은 꿈만 꾸다가 어느 날 제 작품을 엽서로 만들기 시작했는데 사람들이 좋아해줬어요. 처음에는 정확히 엽서 8장으로 시작했죠. 그 후 여기저기서 판매를 해보는 것이 어떠냐는 권유를 받았어요. 소문이 나서 홍대, 인사동의 큰 샵들에서 판매가 시작되고 그 후 카드도 만들기 시작하고 점점 스케일이 커졌어요. 처음에는 저와 제 주변사람들을 위한 저만의 취미활동으로 소소하게 만들었는데 어느새 비중이 너무 커져버려서 지금은 입점되어있는 곳이 많아요. 본격적으로 팬시상품을 만들게 된 취지는 제가 여행을 다니면서 느낀 것인데 우리나라에 관광 상품이 많이 없더라구요 그래서 가볍게 살 수 있는, 저도 제작하기에 부담이 되지 않는 상품을 만들고 싶어서 하나씩 만들기 시작했지요. 그래서 지금 제 상품들은 관광지 위주로 많이 배치되어 있어요. 여행가면 기념할 수 있는 것을 찾다보니 여기까지 왔네요. 글씨인 캘리그라피와 그림인 일러스트를 조화롭게 작업하는 작가님만의 작업 방식이 있는지요?저는 작품을 한꺼번에 하지 않아요. 그림을 그려놓고 놔둬요. 글씨는 시간이 지난 후 작업을 하죠. 작품을 하루 안에 다 하지 않고 여러 시간에 걸쳐서 생각을 많이 하는 스타일이에요. 이런 방식으로 작업을 하는 이유는 한번 그림과 글씨가 만나게 되면 그게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된다는 결론이 주어지지만 저는 그렇게 글씨와 그림이 짝이 되는 것이 신중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정말 그 그림과 어울리는 글씨가 무엇인지 생각이 자주 바뀌기 때문에 여러날 에 걸쳐서 작업을 하는 편이에요. 그림과 글씨가 만날 때 ‘그때’ 행복하고 둘이 짝이 이루어진 것처럼 생각이 들곤해요.방금 이야기 해주신 노하우가 캘리그라피와 그림을 어울리게 작업하고 싶어하시는 분들에게 중요한 팁인 것 같네요. 그림을 그리고 바로 글씨를 얹는 것에 시간을 두지 않고 급하게 진행하게 되면 그만큼 완성도가 떨어지는 결과물이 나올 수도 있으니까요.저는 항상 시간을 두고 쉼표처럼 그림과 어울리는 글씨가 무엇인가 고민해요. 시간을 두고 깊게 생각하면 최적화 된 결과물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상품으로서의 결과물과 수강생들에게 글씨를 가르칠 때에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부분은 어떻게 다른가요?초기에는 상업적인 작업을 할 때 제가 하고 싶은 부분을 클라이언트에게 많이 어필했어요. 작업의 색깔과 글씨의 변형등에 대한 저의 의견을 이야기 했죠. 제 글씨를 마음대로 클라이언트가 수정하는 것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했어요. 돌이켜 지금 생각해보면 상업적인 작업을 하는 것이지 저의 개인 작업을 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이제는 어떤 수정요청이 들어와도 요구에 맞게끔 해주는 것이 좋은 글씨이고 그림이지 않나 생각해요. 작업실 수업은 저에게 또 하나의 고민이에요. 저는 외주 작업 뿐만아니라 팬시도 작업하고 그 외 진행하는 일들이 많기 때문에 수업을 하고 싶은데 하지 못하고 있어요. 그래서 주로 원데이 클래스를 진행하는 편이에요. 사실 시간의 여유가 있다면 정규 수업을 진행하고 싶죠. 수업은 사람을 만나서 소통하고 작업을 하는데 많은 영감을 주거든요. 캘리그라피를 하면서 고민했던 부분도 알려드리고 싶어요. 제가 캘리그라피를 하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어요. 3개월~6개월 하면 금방 될 줄 알았는데 생각처럼 쉽지 않았죠. 어떻게하면 글씨를 잘 쓸 수 있을까? 얼마만큼 공부를 해야 할까? 라는 고민을 많이했어요. 요즘 독학하시는 분들도 많으신데 제가 고민한 부분에 대한 노하우도 알려 드리고 싶어요. 그래서 지금은 여유가 생기는대로 원데이클래스 위주로 수업을 진행하고 있어요. 작가님께 원데이클래스를 받으신 분들은 정규수업을 계속 받고 싶어 하실 것 같아요.네. 그래서 제가 고민이에요. 제가 팬시상품 작업을 하는 게 생각보다 비중이 커져서 시간 할애를 많이해요. 팬시는 지속적으로 신제품이 나와야 하죠. 아직까지도 수업은 제가 많은 고민이 되네요. 좀 더 무르익었을 때 정규 수업을 진행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도 하고 있어요. 좋은 소식이 들려왔어요. 드디어 많은 독자들이 기다리던 ‘늘봄’작가의 캘리그라피 책이 나왔네요. 집필하시면서 힘드신 부분은 없으셨나요?카피 문구를 정하는데 이틀이 걸렸어요.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 마땅한 게 떠오르지 않아 뒤뜰을 산책했어요. 봄이 슬슬 오기 시작할 때 카피가 정해졌어요. 거창하진 않지만 캘리그라퍼들에게 요구되는 한 가지가 자신의 글을 써야된다는 것이지요. 다른 사람의 시나 좋아하는 문구, 노래가사를 쓰는 것도 물론 좋지만 자신이 직접 글도 함께 쓰는 것이 좋다는 생각을 해서 요즘에는 책을 좀 읽고 시를 써볼까하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책의 타깃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이 책의 타깃은 20대 초반입니다. 1일 1캘리라는 것은 하루에 하나씩 따라써보고 그려보는 것인가요?네. 1일 1캘리구요. ‘늘봄의 하루’에요. 하루에 하나씩 365일 매일매일 캘리그라피를 쓰고 봄을 느끼셨으면해서 ‘너에게 보내는 봄빛 손글씨’라고 부제를 정했어요.책이 처음 나오자마자 저의 스승님이신 강병인작가님께 책을 전해드렸어요. 그 부분에서 감성적으로 왈칵했어요. 감사하게도 추천사를 적어주셨어요. 두 번째 추천사를 적어준 분은 캘리그라피 작업을 하는 신동욱 작가님이에요. 저와 캘리그라피에 대해 이야기 많이 하고 변화하는 흐름에 대해 고민을 나누는 사이에요. 추천사 써주신 두 분께 너무 감사드립니다.늘봄캘리그라피 공간, 작가님을 떠올렸을 때 어떤 느낌으로 다가왔으면 하나요?제 소개를 할 때 ‘언제나 봄, 당신의 봄’이라고 말해요. 봄이 오면 저를 떠올려 주시는 분들이 많아요. 저는 추운 겨울도 더운 여름도 항상 봄을 꿈꾸고 있어요. 비록 추운겨울이고 앙상한 가지만 남아있더라도 그 안에서 꽃을 보셨으면 해요. 저로 인해 꽃필 날을 느끼고 그리셨으면 하는 마음입니다.캘리그라피 뿐만 아니라 서예와 문인화도 깊이감 있게 공부하고 있다는 늘봄작가. 그녀는 10년 이상 캘리그라피 작업을 해오면서 시대가 변한 것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10년 전, 5년 전, 그리고 요즘의 캘리그라피가 다른 것을 실감하여 자연스러운 흐름을 지켜보며 적응을 하는 과도기에 있다고 말하는 그녀. 단지 보기에 예쁜 것만을 추구 하지 않고 작업에 신중을 기하는 작가의 고민과 열정에 대해 이야기 나누며 미래의 캘리그라퍼를 꿈을 꾸는 이들이 그녀를 닮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언제나 돌아오는 봄날의 꽃처럼.취재 성은하기자세타필 콜라보레이션_더샘 화장품_늘봄해피바스, 할리스 콜라보레이션_늘봄헤라, 메이크업헬퍼, 조선왕비간택사건, 신세계 SSG마켓_늘봄
꽃과 패션, 그리고 캘리그라피의 만남
fffim 테이프 컷팅식디자인리프는 지난 27일 그랜드하얏트서울 그랜드볼룸에서 ‘핌(fffim 2017)’을 개최했다. fffim은 ‘Flower Fashion Festival Imagination(꽃 패션 축제 상상)’의 약자로 올해 첫 출발을 했으며, ‘Soul of Green(푸르름의 영혼)’이 주제였다. 이는 화예와 캘리그라피, 패션과의 협업이라는 도전을 통한 새로운 형태의 축제다. 꽃과 글씨 의상, 전혀 다른 세 장르의 예술이 만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큰절로 감사를 인사를 하는 송민숙 대표이번 축제를 기획한 사람은 다름 아닌 \'꽃집딸\'이라는 친숙한 별명을 지닌 송민숙 대표다. 그는 화예를 수호하고 대중에게 알리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화예전문 계간지 leaf(리프)의 편집장인 동시에 캘리그라피 디자인 그룹 \'어울림\' 감사이기도 하다. 그는 꽃꽂이로 치부되는 화예에 꽃은 물론 다른 분야의 예술도 접목 시켜 화예에 독창성과 화합성 두 가지 모습 모두를 보여주는 파격적인 시도를 했다.fffim 전시회장 전경1부는 화예 100인전으로, 화예 작가 100인과 국내 유명 캘리그라피 작가 20명이 초대되어 참여하는 콜라보 전시였고, 2부는 <화예철학> 출판기념회, 3부는 인터내셔널 플로랄 패션 갈라쇼로 진행되었으며, 부대행사로 ‘테이블 플라워 콘테스트’도 함께 했다. 화예와 캘리그라피 협업 작품fffim 2017을 총 기획한 디자인리프는 “생명의 원천인 자연을 테마로 다양한 분야를 이울러 새로운 창작의 방향을 찾고자 한다”며 “새로운 문화를 향한 시발점이자 화예의 다음 단계를 준비하는 과정이라는 데에 의미를 두고, 다양한 예술의 융합과 창작 세계을 보여줄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화예와 캘리그라피 협업 작품윤경희 작가는 \"작가들에 대해 잘 모르고 화예의 특성상 작품을 미리 볼 수 없어, 문구와 규격만 가지고 상상력으로 작업을 했다.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의외로 잘 어울려서 놀랐다. 작가들의 작품 철학과 해석, 그리고 성격의 방향이 같다보니 표현이 비슷하게 되었다.\"며 전시 소감을 말했다. 조용연 작가도 \"꽃과 함께 전시를 꼭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는데, 이런 제의를 받고 기꺼이 참여했다. 꽃과 글씨가 만나서 새로운 모습을 만들고 또 어우러져 좋은 경험이었다.\"라고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화예와 캘리그라피 협업 작품이일구 한국캘리그라피디자인협회 회장은 \"화예와 캘리그라피는 비교적 대중에게 친근한 분야인데, 이 두 예술을 함께 보니 신선하다. 앞으로도 서로 다른 예술과 협업이 진행되면 좋을 것 같다. 꽃은 금방 시들기 때문에 전시 기간을 오래 잡을 수 없다는 점이 아쉽다. 화예가 김영란법 때문에 피해를 많이 보고 있는데, 이러한 기획전을 통해 다른 방향으로의 발전을 기대해본다.\"라는 의견으로 예술의 융합과 발전을 염원했다.fffim2017의 갈라쇼 무대캘리그라피의 열풍이 불고, 글씨가 당당히 예술의 독자적인 분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요즘이다. 글씨가 그림과 사진 또 화예와의 협업을 통한 새로운 융합예술을 선보임에 이어, 차후 다른 예술 분야와도 따로 또 같이, 발전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기대해본다. 취재 윤누리 기자참여 캘리그라피작가 20인김성태 김정호 김진경 김현중 박명호박선영 신철우 안병국 여태명 오민준윤경희 이상현 이승환 이 완 이일구정병례 조용연 조정욱 최 미 최일섭
박선영의 <캘리그래피 천일야화>03
이 캘리그래피는 어디에서 왔는가?오늘은 놓치기 쉬운 캘리그래피의 저작권 인식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온라인에 게시물을 작성할 때 흔히 하는 실수 중의 하나가 출처를 빠뜨리거나 부정확하게 쓰는 것이다. 저작권자에게 허락을 받고 사용한다고 해도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창작자의 성명을 넣어줘야 하는데 이를 저작권자(창작자)의 성명표시권이라고 한다. 성명표시권은 저작자 자신이 그 저작물의 창작자임을 주장할 수 있는 권리로 우리가 현재 온라인 공간에서 볼 수 있는 캘리그래피 작품들은 저작권자의 성명표시권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은 경우가 많다.온라인상의 재인용과 성명표시권뿐 아니라 더욱 심각한 것은 캘리그래피의 저작권이 보호받지 못한 채 불법적 사용과 도용이 심심치 않게 발생하고 있는 현상일 것이다. 일부 캘리그래퍼들은 불법 도용을 우려해 자신의 블로그나 홈페이지에 고해상도의 대용량 파일은 올리지 않거나, 워터마크를 표시해 올리기도 한다. 이런 방책이 나온 것은 그들의 피해 경험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저작권은 저작물의 창작과 동시에 발생하며, 온라인을 포함해서 발표 시점을 증명할 수만 있다면 원작자가 저작권을 가진다. 작가뿐 아니라 어린아이가 그린 그림이라 하더라도 저작권에 의해 보호받을 수 있다. 그것은 창작물에 대해 창작자가 취할 수 있는 당연한 권리다. 하물며 전문 작가의 노고가 담긴 작품이 합당한 저작권을 통해 보호받아야 함은 물론이다.필자는 캘리그래피 뿐만 아니라 창작물에 대한 사회 전반의 인식 변화가 필요하다고 본다. 캘리그래피는 작가의 고뇌가 담긴 엄연한 개인의 창작물이고, 디자인의 부요소가 아닌 회화나 문학, 음악 작품처럼 하나의 독립된 예술 장르라는 인식의 변화가 필요하다. 아울러, 작가도 저작권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여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할 것이다.+우리나라 최초의 글자꼴 저작권 소송은? 1)영화 <축제>(1996) 포스터 _캘리그래피 여태명2) 여태명 작 \'춘향전\' 일부(동아일보 1997) 1996년 개봉작인 영화 <축제> 포스터는 글자꼴 도용의 대표적인 사례이며 최초의 글자꼴 저작권 소송을 일으키기도 했다. 개인의 글자꼴에 대한 지적 재산권을 처음으로 인정받은 판례로 사법연수원 판례집에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당시 영화 <축제>의 제작사인 태흥영화사가 여태명 교수의 작품을 포스터 제목에 무단으로 도용했는데, 결국 법원으로부터 무단 도용한 글자당 1천만 원씩, 총 2천만 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받았다. 또 법원은 소설책 <축제>의 제목에 여태명 교수의 서체를 도용한 출판사에도 500만 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문제의 서체는 여태명 교수가 1994년 5월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한국청년작가초대전에 출품한 ‘춘향가’ 속에 들어 있던 창작 서체 중 일부였다.사건의 시초가 된 연원은 이렇다. 태흥영화사 측이 영화 <축제>의 포스터 제작을 디자인 회사에 의뢰했고, 이 디자인 회사는 한국청년작가초대전 도록에 실린 여태명 교수의 서체를 무단 도용해 포스터의 타이틀을 제작한 것이다. 지적 재산권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일이라 할 수 있겠다. 여태명 교수는 도용 사실을 확인한 뒤, 영화사에 시정을 요구했음에도 조치가 취해지지 않자 소송을 냈다고 한다. 당시 법원 판결을 살펴보면, 글씨체는 작가의 독창적 노력의 산물로 지적 재산권을 가지는 엄연한 창작물이며 영화사 측이 이를 무단 도용함으로써 작가의 저작인격권을 침해했다고 밝히고 있다.+2002 한일 월드컵, 붉은악마, 그리고 캘리그래퍼3-1) 붉은악마 티셔츠 \'Be the Reds\'(2002) _캘리그래피 박용철 “대~한민국!” 짝짝짝~짝짝!우리나라 국민이라면 누구나 2002년 월드컵의 함성을 기억할 것이다. 당시 유행했던 붉은색 티셔츠 역시 저작권 분쟁에 휘말렸다. 티셔츠에 새겨진 ‘Be the Reds’라는 문구 때문이다. 응원 열기와 더불어 우리나라 축구팀 응원단 붉은악마가 제작한 ‘Be the Reds’ 티셔츠는 월드컵 기간 동안 2,500만 장이 판매되며 그해 최대 히트 상품이 되었다. 일명 ‘짝퉁’ 티셔츠도 길거리 좌판에서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월드컵 막바지에는 이 옷을 입지 않고 응원하는 것이 어색하게 보일 정도였다. 티셔츠 판매가 절정으로 치솟았던 2002년 6월, ‘Be the Reds’ 문구를 쓴 디자이너 박용철은 한국저작권위원회에 이 문구의 글씨체 디자인을 등록했다. 이와 함께 붉은악마의 광고 대행사였던 (주)토피안을 저작권법 위반 혐의로 고소했다.3-2) 2002년 붉은악마의 ‘Be the Reds’ 로고 _캘리그래피 박용철(주)토피안은 시안료 200만 원으로 저작권을 샀다고 주장했으나, 법원은 이 돈이 양도의 대가로 판단할 만한 증거가 없다며 박용철의 손을 들어주었다. 붉은악마가 비상업적 단체이기에 상표권 출원자를 자신들이 아닌 (주)토피안으로 했음에도, 디자인의 저작권은 디자이너 본인에게 있다고 판결한 것이다. 당시 법원은 “문구의 글자 중 ‘R’은 ‘12번째 선수가 되자’는 뜻에서 숫자 12를 본 떠 만들었고 첫 글자인 ‘R’자와 마지막 글자인 ‘S’의 끝이 만나도록 디자인한 것도 성적과 상관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응원하자는 뜻으로 했다”는 박용철의 주장을 받아들여 글씨체나 색상 등에 저작권이 인정된다고 판결했다. 이 사례에서 보듯이 저작권을 양도한다는 계약이 없는 한, 소액의 시안료를 받았다 할지라도 디자인에 대한 권리는 창작자에게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은 월드컵이 폐막하고 한참 뒤에 나온 판결이다. 공식 제작업체인 붉은악마 못지않게 짭짤한 수입을 거뒀던 짝퉁 제작업체와 길거리 좌판은 자취를 감춘 이후였다. 이들로부터 보상을 받을 길은 요원해진 것이다. +거침없는 캘리그래피 짜깁기4) 영화 <각설탕>(2006) _제작 싸이더스FNH5) 드라마 <뉴하트>(2007) _제작 JS픽쳐스, 편성 MBC영화 <각설탕>과 의학 드라마 <뉴하트>의 제목을 비교해보면 어딘가 닮았다는 걸 알 수 있다. <뉴하트>의 제목이 <각설탕>의 제목에 사용된 캘리그래피를 이용하여 짜깁기한 것으로 보인다. 제작연도도 <각설탕>이 앞서고, <뉴하트>에서 \'뉴\'의 ‘ㅠ’ 와 \'트\'의 ‘ㅡ’ 가로선은 같은 선으로 두 번 반복되어 나오니 짜깁기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 두 작품의 디자이너가 전혀 다른 사람일 수도 있으나, 동일 디자이너가 이전의 자료를 가지고 다시 작업한 것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자신이 썼다면 다시 쓸 일이지 짜깁기를 하지는 않았을 터이고, 답은 <뉴하트>의 드라마타이틀을 만든 사람이 쥐고 있을 것이다.더 자세히 살펴보자. <각설탕>의 ‘ㄱ’은 <뉴하트>의 ‘ㄴ’으로 바뀌었고,‘각’의 ‘ㅏ’는 ‘하’의 ‘ㅏ’ 로, ‘설’의 ‘ㅓ’는 ‘뉴’의 ‘ㅠ’ 일부로,‘설’의 ‘ㅓ’는 ‘트’의 ‘ㅡ’로, ‘탕’의 ‘ㅌ’은 ‘트’의 ‘ㅌ’으로,‘탕’의 ‘ㅏ’는 ‘하’의 ‘ㅎ’일부로, ‘탕’의 ‘ㅇ’은 ‘하’의 ‘ㅎ’ 일부로 쓰였다. <각설탕>의 제목 글꼴이 지닌 입에 닿으면 금방 녹아버릴 듯한 질감 표현과 자연스러운 공간 배분은 영화의 내용과 제목을 고려해 디자인된 것이다. 말과 기수의 따뜻한 사랑 이야기인 <각설탕>의 글씨를, 압도적 긴장감을 유발하는 의학 드라마의 타이틀로 조합해 쓴다는 것은 원작이 가진 감성과 목적에 맞지도 않는다. 이처럼 원작과 무관하게 짜깁기된 <뉴하트>의 네모꼴 글자를 보고 있자니 씁쓸한 생각이 든다. 사실 <뉴하트>의 짜깁기 타이틀은 일견 이상해 보이지도 않는다. 캘리그래피의 자소를 분해하고 조합해서 쓰는 일은 드물지 않게 벌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르바이트 직원을 고용해 캘리그래피 파일을 모아 일러스트 파일로 전환하도록 시킨다는 회사도 있다고 하니 참으로 위험하고 심각한 행동이 아닐 수 없다.6)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2006) _제작 초록뱀미디어, 편성 MBC7) \'거침없이 갈아타자!\'(2007) _수도권 통합 환승할인제 표어2007년부터 시행된 수도권 통합 환승할인제의 표어는 ‘거침없이 갈아타자!’이다. 누가 봐도 당시 인기 시트콤이었던 MBC <거침없이 하이킥!>의 타이틀을 패러디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과연 원작자에게 허락을 받았는지는 궁금할 따름이다. 공공성을 내세워 은근슬쩍 넘어가지 않았기를 바란다. 사실 대놓고 따라 했으니, 이것은 차라리 귀엽다고 해야 할까?연속성을 중요시하는 TV 시리즈물에서는 똑같은 글꼴을 약간만 수정해 ‘하이킥’ 시리즈의 제목에 사용할 수도 있다고 본다. 하지만 문제는 ‘거침없이 갈아타자!’의 경우처럼 전혀 상관없는 곳에서 불법으로 자소를 분리해 쓰는 상황일 것이다. ‘거침없이 갈아타자!’의 ‘갈’자에서는 ‘ㄹ’의 획이 완벽하지 않아 ‘ㅈ’으로 보이는 문제를 안고 있다. 애초에 없는 자소를 만들다 생기는, 짜깁기의 여파라 할 수 있겠다. 짜깁기의 흔적은 ‘ㄱ’과 ‘ㅈ’, ‘ㅏ’의 반복에서도 계속 나타난다.위의 두 사례는 작가의 저작인격권 중 하나인 동일성유지권을 위반한 것이다. 동일성유지권은 저작물의 내용 및 형식을 그대로 유지하고, 허락 없이 변경과 삭제 등에 의해서 손상되지 않도록 할 권리를 의미한다. 물론 저작권자의 특별한 의사표시가 있다면 변경할 수 있다.8) 드라마 <태양의 후예>(2016) _캘리그래피 전은선9) 드라마 <태양의 후예>(2016) _드라마 타이틀 패러디 모음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의 패러디처럼 작년에 방영했던 드라마 ‘태양의 후예’의 숱한 패러디물의 양산은 원작자의 승낙 여부와 상관없이 유행에 편승해 온라인에서의 유희로 항상 벌어지고 있는 일이기도 하다. ‘태양의 후예’의 경우에는 주인공의 말투, 군복, 영상 이미지, 드라마 타이틀 등 드라마의 인기에 힘입어 다양한 분야에서 패러디와 무단사용이 있었다. 때마침 있었던 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군복 이미지와 주인공의 말투, 드라마 타이틀 등이 군과 의사 출신 국회의원 후보자의 안보이슈와 홍보 이미지로 패러디되어 활용되었다. 어쩌면 인기나 매출에 나쁜 영향을 미치지 않는 한도 내에서는 방송의 인기 확산을 위해 패러디와 복제를 묵인하거나 권장했는지도 모르겠다.-지금까지 살펴본 저작권 위반 사례들은, 한번 당기면 계속 나오는 칡넝쿨처럼 무궁무진할 것이다. 인터넷을 통해 확산되는 대량복제로 인한 원본의 불확실성과 표절의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웹을 떠다니는 출처 불분명의 이미지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런 현상은 통제가 거의 불가능하다. 미리 대처하려 해도 방도를 모르고 손해를 봐도 명확한 근거를 찾기 난해하다. 그러므로 어떤 법적인 규제나 제도적 장치 마련을 기다리기에 앞서 디자이너가 자발적으로 자기 작품의 저작권을 지키려는 노력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저작권에 대한 사회 일반 사용자들의 의식과 자정 노력은 아직 부족한 상태이기 때문에 더 현실적인 도움을 얻고자 한다면 한국저작권위원회의 문을 두드려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캘리그래피는 디자이너에 의해 전혀 새로운 작품으로 탄생할 수도 있고 망가질 수도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일차적 소비자이자 재생산자인 디자이너들이 파트너쉽을 가지고 관심과 이해를 가질 때 캘리그래피와 디자인이 함께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계약 시 캘리그래피를 한 매체에만 사용하겠다고 했다가 나중에 여러 매체에 게재하는 경우도 왕왕 있다. 작품을 도용하거나 변형하는 것뿐만 아니라 애초 계약서에 명시되지 않은 용도로 쓰는 것도 모두 저작권에 어긋나는 것이니 꼼꼼하게 확인해야 한다. 캘리그래피도 사진이나 일러스트처럼 용도에 맞는 계약을 따로 해야 하기 때문이다.복제와 전송, 배포, 2차적 저작물 작성권이 있는 저작재산권은 직접적인 부가가치가 높은 권리이기 때문에 저작재산권의 일부 또는 전부를 양도하는 경우에는 주의가 필요하다. 계약 대상의 전체적인 디자인 범위에 포함된 금액이 아니라, 캘리그래피만을 따로 분리한 별도 항목이 책정되어야 하고, 매체와 규모에 따라 용도를 정확히 지켜야 한다. 이 부분은 일차적 소비자인 디자이너뿐 아니라 최종 클라이언트의 이해와 관심이 필요한 문제이기도 하다.아무쪼록 캘리그래피와 창작물의 저작권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확산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박선영(야림) 그래픽디자이너, 캘리그래퍼현 996크리에이티브랩 소장, 사) 한국캘리그라피디자인협회 이사, 전 한국시각정보디자인협회 이사로 활동했다. 동양적인 문화요소와 조형을 현대적인 디자인 언어로 융화시키는 작업에 관심이 많은 그는 독립적인 프로젝트 활동 및 출판과 한글 관련 프로젝트와 전시에 참여하고 있으며, 서울예술대학교에서 우리 문자의 조형을 강의한다. 논문 <캘리그래피(손멋글씨)의 조형적 표현과 활용에 관한 연구>(2005)를 발표했고, 이탈리아 Utilita Manifesta/ Design for Social 2010에서 작품이 선정된 바 있다.http://yarim.blog.me/
전통과 현대의 조화가 적절히 이뤄진 공간 <담원서예>
예술을 애호하는 사람들을 위한 사랑방전통과 현대의 조화가 적절히 이뤄진 공간 \'담원서예\' 예술을 애호하는 사람들을 위한 사랑(舍廊)방, 김대일 작가님의 ‘담원서예’를 방문하여 사랑(愛)으로 가득 찬 마음을 안고 돌아왔다. 대구 달성군에 위치하고 있는 이곳은 문화예술사랑방의 컨셉으로, 전통과 현대의 조화가 적절히 이뤄져 있다. 예술에 대한 담론은 물론 일상적인 대화를 통해 서로 소통하고 공감하면서, ‘삶이 곧 예술’ 이라는 생각을 얻어가길 바라는 그의 마음이 잘 묻어나 있는 공간이다. 그 덕에 회원들은 부담 없이 차를 마시거나 독서를 하며 편히 쉬어갈 수 있는 듯하다.(사랑방 분위기를 풍기는 담원서예)김작가님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그들로 하여금 지혜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교육가적인 마음가짐을 안고서 서예와 캘리그라피를 가르치는데 몰두하고 있다. 학습대상에 알맞은 교육과정, 방법, 평가를 적절히 적용한 그 만의 수업 방식이다. 또한, 작업실의 회원님들과 함께 담원묵향회라는 서예 비영리단체를 만들어 지역의 문화예술교육에 힘쓰고 있다. 주로 전시회와 교육사업, 그리고 교육 컨텐츠개발을 하고 있다. 예술역량강화를 위해 시민들을 대상으로 무상 교육을 하기도 하며, 교육 후 문화 예술을 함께 향유하며 예술가치의 창출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붓만들기 프로그램 체험하기) 인터뷰를 진행하는 동안에도 수강생들은 스스로 글을 쓰고 서로의 글을 논하며, 편하게 공부하는 모습을 통해 아늑한 사랑채 분위기를 물씬 느낄 수 있었다.(전통과 현대의 조화가 적절히 이루어진 담원서예 내부)서예와 캘리그라피 수업을 활발히 진행하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일반인들이 서예와 캘리그라피를 꼭 배워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서예과를 졸업하던 2002년부터 서실을 운영하기 시작해 학생, 성인들을 대상으로 서예 교육을 하다가 2005년부터 캘리그라피를 시작해 현재까지 두 분야 교육을 진행하고 있네요. 우리나라 전통예술 중에서도 서예는 문자를 소재로 하면서 시각적으로 문자가 내포하고 있는 조형요소를 다양한 조형원리를 적용해 자신의 내면을 표출하는 예술입니다. 과거에 문자를 발명하고 일상에서 사용하면서부터 벌써 서예는 사람들의 삶속에 자연스럽게 예술로 스며들어 있었죠. 현대는 모든 분야가 세분화되다 보니 예술 속에 미술, 미술 속에 서예 그리고 캘리그라피로 분류를 합니다. 서예나 캘리그라피가 타 미술 분야와는 다른 특수성은 문자를 버리고선 안된다는 것은 누구나 공감할 것입니다. 서예와 캘리그라피의 조형요소 중 가장 특징적인 것은 점과 선이라고 볼 수가 있겠습니다. 인간이 태어나 영유아기에 크레파스나 색연필 등을 들고 무의식적인 선을 긋고 찍는 행위들은 무언가를 표현하고 싶은 욕망 때문이겠지요. 그렇게 재미있게 낙서하던 아이가 초등학생이 되면 왜 부모들은 서예를 가르치질 않을까요? 서예는 고리타분한 전통예술로만 인식해서 일까요? 아니면 서예는 너무 어렵다고 생각해서 일까요? 우리는 서예를 어린 학생 때부터 성인까지 평생교육을 해야 합니다. 서예는 단순히 미술의 범주에 있는 예술로써 창의적 표현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서예는 글자 한 글자 한 글자의 뜻도 있지만 교훈이 되는 좋은 문장을 서사하기 때문에 정서적 안정에 큰 도움이 됩니다. 그리고 뇌과학연구소에서는 전 세계 모든 문자를 단순히 서사하면서 뇌파활동을 분석했는데 한자를 쓸 때 치매예방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고 과학적으로 검증이 되기도 했지요. 어릴 적에 올바른 인성을 함양하고 성인이 되어 삶에서 예술을 즐기면서 하다보면 노후에 치매예방까지 하는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기 때문에 서예를 하는 이유가 될 수 있겠네요. 현재 우리나라 캘리그라피는 문자에 자신의 감성을 담아 다양한 표현이 가능하기 때문에 남들과는 다른 창의적인 사고 활동에 도움이 됩니다. 그리고 단어가 가지고 있는 내용을 생각해 다양한 도구로 표현하기 때문에 그 글자의 선만 보고도 그 내용을 짐작할 수 있는 시각예술이라고 볼 수가 있지요. (김대일 작가님과의 인터뷰 장면)캘리그라피의 단순한 붐이 아닌 서예의 한 부분으로서 자리매김 할 수 있는 방안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저는 캘리그라피가 서예라고는 생각지 않고 디자인이라고 인식을 합니다. 서예와 마찬가지로 문자를 소재로 하는 동일성은 있지만 표현영역에서는 차이가 있지요. 한국의 캘리그라피는 한글 서예가 시대의 변화에 발맞추지 못하고 수 백년 전의 전통적인 궁체에만 집착을 했기 때문에 나타나지 않았나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 주변에선 한글 분야 서예가들이 캘리그라피를 배우려고 애쓰는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있는 실정입니다. 오랜 세월 한글 서예 연구에 매진한 사람들이 지금에 와서 캘리그라피를 배우려고 하다니 참 아이러니한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계에서 과학적이고 독창적인 한글을 붓으로 베껴 쓰기만 하다가 옆 동네에 신제품이 출시되어 구경가보니 문자를 쓰는 재료는 비슷한 것 같은데 효용성에서 차이가 있다고 인식하기 때문에 배우는 게 아닐까 생각을 해봅니다. 캘리그라피가 한국에서는 단순한 붐을 넘어 문화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고 여겨집니다. 요즈음 학교나 여타 기업, 기관에서도 캘리그라피 교육 등은 활발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서예를 희망하는 곳은 극히 드문 실정이라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캘리그라피가 시각예술의 중심에서 큰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수 천년의 역사와 함께 하나의 학문으로 자리한 서예와는 비교가 안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현재 한국의 캘리그라피는 본질적인 정신은 망각한 채 형식적인 시각적 즐거움만을 추구하는 것 같아 사상누각처럼 위태로워 보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서예 분야가 본질은 갖추고 시대의 요구에 부응해 형식적인 변화를 시도하고 교육컨텐츠 개발에 힘쓴다면 캘리그라피가 한국서예의 한 부분으로 자리매김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서적이 가득한 김대일 작가님의 작업공간) 서예와 캘리그라피의 발전을 위한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합니다. 혹은 선생님께서 꼭 성취하고자 하는 목표가 있으시다면 무엇이 있을까요? 모든 것은 정체되어 있으면 발전은커녕 도태되기 마련입니다. ‘흐르는 물은 썩지 않듯이 항상 유동적이라야 발전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 · 사 · 철을 바탕으로 전통의 계승과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는 다양한 교육 컨텐츠 개발, 연구, 그리고 학교나 사회에서 교육을 통해 서예와 캘리그라피 분야의 발전에 일조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至於至善(지어지선)’을 보통 ‘최선을 다하다, 완전무결하다’ 등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서예와 캘리그라피의 발전을 위해 지어지선 하는 그의 모습은 누구보다 눈부셨다. 취재 이자민 기자 竹簡 論語全文20卷/대나무에 먹/25×2,055㎝꿈/나무에 먹/103×104㎝ 꿈/한지에 혼합재료/40×59㎝
현충일 추념 특별기획전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 바친 이들의 말현충일 추념 특별기획전 1919년 오라니장터 등 김포지역에서 일어났던 3.1독립만세운동 정신을 계승하고 선열들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김포독립운동기념관에서 제62회 현충일을 맞이하여 캘리그라피 특별 기획전이 열린다.김포독립운동기념관 전경이번 추념 특별기획전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독립운동가의 어록을 25점의 글씨로 풀어낸다. 도마 안중근 의사를 비롯해 유관순 열사, 도산 안창호 의사, 윤동주 시인, 만해 한용운 선생 등의 귀중한 말을 글씨로 옮겨 쓰면서 독립운동의 역사와 정신을 느낄 수 있다. 현충일추념 특별기획전_1우리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바친 모든 선열들의 넋을 기리는 귀중한 현충일을 맞이하여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을 추모하는 캘리그라피 전시를 통해 경건한 마음으로 의미있는 6월을 맞이하길 바란다.글씨21 편집실자료제공 김포독립운동기념관 김포독립운동기념관[현충일 추념 특별기획전] 전시기간 : 2017.6.1~6.15위치 : 경기도 김포시 양촌읍 양곡2로30번길 46 김포시독립운동기념관 전화 : (031)996-6270홈페이지 : http://1931gimpo.fgy.or.kr
이 작가의 思생활, 박원규
한국서단의 크리에이티브 아티스트 하석 박원규- 먹 냄새 맡기를 샤넬 향수보다좋아해야 하고 화선지를 펴면 가슴이 뛰어야 한다. 서예는 손가락 아래에서 만물을 집약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최상위 예술의 경지이다. 막힘없는 붓놀림으로 예스러우면서도 세련된 기량을 선보이며 자신의 뜻을 획에 발현시켜 살아 움직이는 작품세계를 보여주는 하석 박원규를 만나보았다. Q. 선생님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한학과 서론을 공부하시고 매년 서첩을 발행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활발한 작품 활동으로 서예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하석 박원규’를 들어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입니다. 한국에 몇 없는 학자이면서 예술가란 호칭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학자라는 말은 과분하고 어울리지 않습니다. 매년 작품집을 발간하려고 계획을 세운 것은 서울에 자리를 잡을 당시 한국 서단에 내 이름 석 자를 어떻게 각인시킬 것인가를 고민하다 나온 목표이지요. 1988년도부터 2008년까지 25권의 작품집을 발간하였고 5년에 한번 씩 유료전시를 했습니다. 이것은 제 자신을 채찍질 할 수 있는 방편이었습니다. Q. 매년 첫 휘호를 자전을 열어 눈에 들어오는 글자를 뽑아 작품을 하신다던데 올해는 어떤 글자가 선정되었는지 궁급합니다.금년에는 ‘급할, 급(急)’ 자가 있는 페이지를 골랐습니다. 그 페이지에는 ‘급할, 급(急)’자 외에도 ‘부끄러울,작(怍)’, ‘바쁠,총(悤)’ 등이 있지요. 이 글자들을 보며 내 스스로를 경계하자. 매사 서두르지 말고 부끄러운 행동을 하지 않도록 자신을 더욱 경계해야 겠다는 다짐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급경(急繕)’ 이라는 올해 첫 작품을 하게 되었지요. 저는 해가 바뀌면 작품 12점을 실은 실년 캘린더를 같이 공부한 학생들에게 선물을 주곤 합니다. 하석표 ‘리미티드 스페셜 에디션’인 셈이지요. 급경急繕 46×50㎝ 2017년 첫날《예기禮記·곡례曲禮》에 있는 말이다, ‘정현鄭玄’의 주注에 ‘급急’은 ‘견堅’과 같고 ‘선繕’은 ‘경勁’으로 읽어야 하니 ‘급경急繕’은 ‘견경堅勁(단단하고 굳셈)’과 같다. Q. 선생님의 이력을 보면 대학에서는 법학과 국문학을 전공하셨는데 어떻게 서예에 입문하게 되었는지, 평생 붓과 함께 하겠다는 다짐내지는 확신을 하게 된 계기나 영향을 주신 분이 있으신지 여쭙고자 합니다.집안에 서예하시는 어르신이 계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나는 자연발생적으로 서예에 입문했다고 볼 수 있어요. 고등학교 시절, 법 쪽에 종사하신 형님 댁에서 지냈는데 그 집에 좋은 서화작품이 여럿 있었어요. 특히 현관에는 참는 것이 덕이라는 뜻의 ‘인지위덕(忍之爲德)’ 이라는 현판이 있었어요. 또한 ‘청풍과 명월은 아무리 써도 다함이 없고 높은 산과 흐르는 물은 서로 정을 주고받는다’라는 대련 작품도 있었지요. 이러한 작품이 좋아서 신문지에 임서, 흉내내곤 했어요. 이것이 내 글씨의 시작이지요. 당시 형님에게 영향을 받아 법학과를 가긴 했지만 법을 전공하다보면 매일 죄 짓는 사람들, 매일 듣게 되는 울음소리에 법조인의 길을 가긴 어렵겠다 여겨 군대 복학 후 전과를 하려했어요. 그런데 그만 시기를 놓쳐버려 교수님께 나는 법과 맞지 않으니 나의 길일 가겠다는 이해를 구하고 한문과 글씨를 배우러 다녔습니다. 글씨를 쓰다 보니 한문을 배우지 않고서는 글씨를 쓸 수 없겠다 싶어 대학 때부터 한문을 본격적으로 공부하였습니다. Q. 또 하나의 독특한 이력이 있으십니다. ‘월간까마’의 발행인이셨어요. 당시 다른 잡지와의 차별 점은 불필요한 광고는 과감하게 생략하시고 까마의 눈, 서예 전반의 다양한 이야기들을 실은 잡지로 기억합니다. 당시 까마를 만든 이유와 서예인 들에게 꼭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무엇이었는지 궁금합니다.특별히 ‘꼭 잡지를 발행해야겠다.’라는 생각자체가 없었습니다. 어느 날 같이 공부하던 학생들로부터 잡지를 함께 하자는 권유와 제안을 받았습니다. 선생으로서의 책임감으로 함께 시작하였습니다. 시작한 이상 하석이 무엇을 하려면 작품뿐만 아니라 잡지도 달라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까마를 할 당시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두 가지는첫째, ‘특집’이 없으면 잡지가 아니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까마는 총 72권이 발행되었고 매달 특집이 있었습니다.두 번째, ‘까마의 눈’은 누구에게도 맡기지 않고 제가 생각하는 좋은 전시 및 작품들을 다루었습니다. 유명하건 유명하지 않건 당시 전시와 작품 중 괜찮은 것들을 선별해 다루었습니다.마지막 발행이 아쉽진 않아요. 왜냐하면 6년 동안 다루고 싶었던 것을 모두 다루었기 때문이지요. 까마를 발행하는 동안 처음에 세웠던 창간의 뜻을 단 한 번도 왜곡한 적 없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에게도 대견하고 고마운 부분으로 남아있습니다. Q. 서예를 하는 사람이라면 호(號) 이야기가 빠질 수 없는데요. 선생님의 호인 ‘하석(何石)’이 담고 있는 의미와 얽힌 이야기가 궁금합니다.호(號)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호(號)와 자(字)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겠지요. 박원규라는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것은 봉건 왕조시대 고종까지 올라가보면 왕과 부모뿐입니다. 남자는 23세가 되면 집안의 어른이 이름이 갖는 의미에 모자라는 것과 넘치는 것을 상호보완한 자, 호를 내립니다. 이는 모두가 부를 수 있는 것이지요.제 호인 하석은 고향 김제 부용에 연꽃이 많았습니다. 대학교 다닐 적 한문선생님이시자 큰 형님의 벗인 유재식 선생님께서 ‘연꽃, 하(荷)’‘돌,석(石)’자로 호를 지어주셨습니다. 어린 나이에 연꽃과 돌의 연관성에 의문이 들었고 선생님으로부터 의미를 들었으나 가슴 속에 와 닿지 않은 채 3년을 보냈어요. 어느 날 조용히 초두를 때어냈어요.(荷→何) 그러자 호가 힘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지요. 선생님이 지어주시고 도중에 내 스스로 초두를 떼어 냈으니 선생님과 나의 합작 호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하하하! Q. 선생님의 저서인 ‘박원규, 서예를 말하다.’ 중‘서예는 점과 선의 예술이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추상예술인 셈이다. 서예에는 자신의 마음과 정신세계가 모두 투영된다.’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서여기인(書如其人)’글씨는 그 사람과 같습니다. 얼굴이 비슷한 형제는 있으나 똑같을 순 없지요.글씨는 내가 공부한 만큼, 뜻만큼, 스스로의 미감만큼 드려납니다. 그 ‘사람’ 나름이지요. 자기를 쓰는 것일 뿐입니다. 한 스승 밑에서 100명이 배워도 다 다른 것처럼 글씨만큼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Q. 또 ‘나는 일필휘지 않는다.’는 말씀을 하셨는데요.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일필휘지와 획의 기운생동에 대한 의견을 여쭙고자 합니다.나는 글씨를 쓸 때 내 마음에 들 때까지 씁니다. 쓰는 매 과정은 일필휘지이지요. 그러나 예술의 ‘예(藝)’는 많은 의미가 있겠지만 ‘계속해서 닦는다.’라는 의미가 있어요. 작품을 할 때 일필휘지가 아닌 수백 번 내 마음에 들 때까지 그 전쟁을 계속하는 것이지요. 일필휘지 하는 것이 화려할 수 있으나 이것은 퍼포먼스에 불과합니다. 한번만으로 기가 막힌 글씨가 있을 수도 있지만 갈고 닦는 것에서 무엇인가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Q. 대중들이 가장 가깝게 선생님을 만날 수 있는 작품은 서울역에 전시 된 10m 대형 ‘책(冊)’ 작품이 아닐까 싶습니다. 작업 당시의 구상과 결과물에 대한 만족도가 궁금합니다.먼저 이야기 할 것은 작품을 할 때 한글만을 써서 작품을 해야만 애국인 것인가. 혹은 왜 하필 한문을 쓰느냐에 대한 인식입니다. 일본에는 히라가나, 가타카나가 존재하지만 한문을 동양의 공동문자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한자가 동북아시아의 ‘공용문자’ 라는 말에 공감합니다.글씨 요청을 받았을 때 제가 가장 먼저 하는 것은 작품이 걸릴 공간에 가서 구상을 합니다. 서울역에 있는 작품은 기차여행을 할 때 책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콘셉트를 잡았습니다. 공간과 어울려야 하지요. 철도길, 궤도와 같은 책(冊)자를 금문과 갑골문으로 쓰고 안중근 의사의 명언[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一日不讀書 口中生荊棘)]을 낙관에 한자와 한글로 썼습니다. 책 두 글자를 한문으로 빽빽이 써두면 누구도 보지 않겠지요. 책책冊冊 2m×10m Q. 선생님은 한자, 한글, 전각을 넘나들며 다양한 작품세계를 보여주고 계신데요. 특히나 갑골문, 금문 등 전서 작품에 애착이 있어 보입니다. 선생님의 최근 소식 중 광개토대왕비 서체로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을 대형 작품화 하겠다는 출정식이 열린 기사를 접했습니다. 자세한 소개 부탁드립니다.그 작품은 작년 7월 말에 작업을 끝내고 아직 공개하지 않은 작품입니다. 무려 5년 전 작품요청을 받아 시작하게 된 것이지요. 의뢰를 받았을 때 내 일생일대의 대작이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여 마음먹고 준비하였습니다. 첫 구상은 한지, 우리 먹, 우리 붓으로 작품을 하려고 하였으나 이 조건을 갖추기 위한 재료 준비만으로 4년을 보냈습니다. 시간이 지체되며 일흔이 되기 전 작품을 끝내야 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재료준비가 원활하지 않아 우리의 재료를 갖추진 못하고 종이는 중국의 것, 먹은 일본, 붓은 우리의 붓으로 세팅을 마쳤습니다.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면 어느 날 문득 백두산 천지의 물로 먹을 갈아 글씨를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작품을 부탁하신 분께 말씀드리니 순간 고민하시더니 20L의 물을 떠다 주셨습니다. 작품을 다 쓰고도 2L가 남아 잘 보관 중에 있습니다.작업기간은 한 달 정도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주제가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인 만큼 사찰에서 글씨를 쓰고 싶어 통도사를 찾았으나 공간이 여의치 않아 현재 작업실 밑에 100평 가량의 공간을 임대하여 작업하였지요. 글씨를 쓰는 동안 6명의 인력이 하루 종일 먹을 갈고 종이를 접고 잡아주는 등 많은 분들이 도움을 주셨습니다. 3126자가 되는 부모은중경을 광개토대왕비의 서체로 완성하고 보니 128M라는 대형 작품이 완성되었습니다. 전시할 공간도 쉽지는 않지만 전시장을 물색하는 중이고 책도 함께 발간 될 예정입니다. 불설대보부모은중경佛說大報父母恩重經 일부분Ⅰ 불설대보부모은중경佛說大報父母恩重經 일부분Ⅱ Q. 서예는 준비물만 갖추면 누구나 쓸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일가를 이루기까지의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포기하곤 합니다. 선생님은 평생 글씨를 써왔고 앞으로도 끊임없이 활동을 하실 텐데요. 끈기 있게 작업을 할 수 있는 선생님만의 비법을 알 수 있을까요?먹 냄새를 맡기를 샤넬 향수보다 좋아해야 하고 화선지를 펴면 가슴이 뛰어야 합니다. 스스로 즐기지 못하면 끝까지 갈 수가 없어요. 나처럼 자연발생적으로 매일 글을 쓰고 매일 해야 할 작품이 있고, 늘 재미있고, 늘 설레는 마음, 흥미진진한 뛰는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Q. 선생님은 젊은 서예인 들이 가장 닮고 싶어 하는 예술가로 손꼽힙니다. 알고 계시는지요? 이 시대에 어떤 작가로 기억되고 싶으신가요?일단 내 스스로에게 작품을 할 때 질문합니다.‘이 작품은 하석, 오로지 나만이 가능한가?’ 내리는 획과 점 하나에 50년이 있다면 믿겠냐고 묻곤 합니다. 이것은 구한자만이, 안목을 갖춘 사람만이 알아 볼 수 있는 눈을 갖춘 것이지요.훗날 나는 내가 선생소리를 듣는 한 꼭 지키고자 하는 덕목이 있습니다. 첫째, 절대 치사하면 안 된다. 치사라는 것은 격에 맞지 않는 것입니다. 스승이라면 스승에 맞는 언행을 해야 합니다. 둘째, 학생과 선생과의 거리는 늘 똑같아야 한다.선생은 학생과의 거리가 항상 일정해야 합니다. A와는 10m, B와는 20m, C와는 30m 이렇게 거리가 차이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지요. 셋째. 선생이란 학생들의 의문을 풀어주어야 한다.이 말은 학생보다 훨씬 더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이 세 가지가 내가 지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학생보다 더 열심히 책가방 메고 공부하는 선생님이라는 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Q. 마지막으로 새로이 창간하는 ‘글씨21’에 당부하고자 하는 말씀이 있다면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특히 젊은 창작자들에게 하는 조언이라면 더욱 좋겠습니다.‘글씨21’은 기존의 종이 잡지사에게 큰 위협일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영역이 서로 다르므로 나름대로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면 되겠지요. 그러나 ‘글씨21’의 창간은 ‘시의(時宜)’, 즉 때에 적합합니다. IT시대에 대중과 빠르게 소통하고 접근할 수 있는 수단이 될 것이라 예상됩니다. 제 나름의 시간으로 계산해보면 15년은 해야 자리가 잡힙니다. 가까이 보지 말고 적어도 15년은 버틴다면 ‘천천히 꾸준히’ 전 세계의 영향력 있는 웹매거진이 되리라 생각합니다.젊은 창작자들에게 이야기 해주고 싶은 것은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생각된다면 내가 준비가 덜 된 것이라 여기십시오. 세상을 원망하지 말고 모든 책임을 나에게 두십시오. 그리고 큰 꿈을 가져야합니다. 내가 추사를 극복해보겠다는 마음으로 달려들어야 합니다. 늘 역사를 의식하고 나의 현 주소를 파악하여 최선을 다할 것을 당부합니다. 서두르지 말고 꿈을 크게가지며 글씨에 내 인생을 투사해보겠다라는 마음을 먹어야 합니다. 그리고 한문 공부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합니다. 30년씩 하루에 3시간만 투자해보면 향후 내가 달라져 있을 테지요.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이 즐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자, 여러분! 큰 꿈을 가지고 긴 시간 움츠려 들지 말고 꾸준히 가십시오! 세상이 나를 알아봐 줄 것입니다! 대작(大作)을 남긴 화가라야 비로소 대가(大家)라는 말이 있다. 장대하고 살아있는 듯 한 기세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몰입과 고뇌가 있어야만 가능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석 박원규는 흔들리지 않는 집념과 특유의 성실성으로 한국서단의 기념비적인 대작을 이어나가는 중이다. 글씨를 어떻게 쓸 것인가는 지극히 자신의 선택이자 취향이다. 한 점 한 획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하는 하지 않는 작가의 정신은 궁극적으로 글씨예술이 추구하는 이상으로의 환원인 것이다. 서예의 위상이 예전만 못한 요즘이지만 품위 있으면서 이색적인 작가 하석 박원규를 서예인의 자부심으로 느끼길 바란다. 인터뷰 성은하 기자 예운대도지행야절禮運大道之行也節 2m70cm×7m20cm일지서학회(대만), 겸수회(한국) 서예연합전시 현장사진Ⅰ 일지서학회(대만), 겸수회(한국) 서예연합전시 현장사진Ⅱ 하석 박원규작가 略歷사사- 강암(剛菴) 송성용(宋成鏞) 선생 문하 입문- 독옹(獨翁) 이대목(李大木)선생 전각 사사- 긍둔(肯遯) 송창(宋昌), 월당(月堂) 홍진표(洪震豹) 선생 한학 사사- 현재는 지산(地山) 장재한(張在釬) 선생 문하 수학 학력- 전북대학교 법정대학 법학과- 배재대학교 대학원에서 국문학 석사 수상- 제1회 동아미술제에서 대상- 2013년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 그랑프리 수상- 2016년 일중서예대상 수상 개인전- 『何石 漢簡展』(백악미술관, 88. 4. 4~ 4.13)- 『何石 書展』(조선일보미술관, 93. 4. 2 ~ 4. 16 )- 『何石 書藝展』(일민미술관, 98. 4. 14 ~4. 26)- 『何石 百壽百福展」(공평아트센터, 03. 6.18~7.1),- 『何石 書藝展』(한국미술관, 09. 1. 11~1. 27)- 『字中天』(북하우스 아트스페이스 · 갤러리 한길, 2010. 12. 10 ~ 2011. 2. 28)- 『書藝三俠坡州大展』(북하우스 아트스페이스 · 갤러리 한길, 2011. 12. 9 ~ 2012. 2. 29) 기획전- 한국서예100년전 예술의전당- 국제현대서예전 예술의전당- 현대미술초대전 국립현대미술관- 한국서예40대 작가전 예술의전당 - 동아미술제 수상작가 초대전 동아일보사- 세계서예 전북비엔날레- 동아시아서예가4인전 저서-『곽점초묘죽간 상/하』 -『중국고대금문의 이해』-『서주금문십팔품』-『서주금문정선33편』-『박원규서예를말하다』 작품집-『癸亥集』 총 25권 발간-『朴元圭作品集』 한길사-『作品集字中天』 한길사-『마왕퇴백서노자임서본馬王堆帛書老子書臨書本』 현 하버드대 도서관 소장 언론소개-KBS ‘TV 명인전-OBS ‘명불허전’-아리랑 TV 외 다수 출연 -------------------------------------------------------------고독 속에 길어 올린 치열한 예술혼- 하석何石 박원규朴元奎의 작품세계장헌 김정환 자고이래로 대다수의 뛰어난 예술가들이나 서예가들은 각기 고유한 예술론과 서예론을, 그것이 이론의 형태이든 창작의 형태이든 간에, 개진하고 있다. 이러한 자의식이야말로 그들의 예술을 한 단계 진전시키고 동시에 한 사람의 예술가를 고유한 자기 세계를 지닌 예술가로 만드는 창조적 상상력의 원천이며 영혼의 창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몇 해 전 타계한 세계적인 사진가인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이 “사진은 보는 것이다”라고 말했다면, 하석何石 박원규朴元圭는 “글씨는 쓰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본디 ‘서예는 정해진 법이 없다(書無定法)’라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서예란 법보다는 오히려 다양한 운필을 통해 스스로 체득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서예술에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 운필의 요체는 결국 시비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라고 말하고 있다.창작은 예술가 개인이 표현한 개성화 행위이다. 창작해낸 작품의 아름다움은 예술가의 개성과 기법적 특성을 포함하고 있다. 석도石濤는 “나는 나의 법이 있다(我有我法)”고 하였고, 제백석齊白石도 “나는 나의 법을 행해야 하고, 붓을 댈 때는 나만의 법이 있어야 한다(要我行我道, 下筆要我有我法)”라고 하였다. 다양한 예술가들이 그들 작품에서 반영하는 정신세계, 즉 풍격은 모두 다르다. 하석 박원규가 작품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생기(生氣)’, 즉 살아 있는 기운이다. 그가 작품을 통해서 뿜어내는 기운은 감상자의 다양한 심미욕구를 만족시켜준다. 기氣란 생명력의 최소단위로서의 호흡이다. 기氣는 동양미학에서 다양한 의미를 갖는다. 첫째, 철학적 측면에서 기는 만물과 우주의 생생불식生生不息의 기를 가리킨다. 둘째, 작가가 서화를 창작할 때 붓을 움직이는 기를 가리킨다. 셋째, 작품에 존재하는 내재적인 정신의 기질을 가리킨다. 기가 이미 사물의 물질현상과 정신현상을 포함한 이상, 기는 우주와 생명의 기원일 뿐만 아니라 예술과 미의 기원이기도 한 것이다. 동양의 고대 예술은 모두 기와 정신의 관계에 매우 관심이 있었으며, 예술가는 평소에 정신과 기를 조화롭게 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마음이 평온하고 기를 온화하게 하고 정신을 상쾌하게 유지할 것을 강조하였는데, 이것은 생활을 감수하고 체험하고 창작하는 데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운韻은 동양 미학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중의 하나이며, 최고의 미적범주이다. 서화예술 가운데 운은 필획, 선의 움직임, 질삽, 마르고 습윤함 등의 변화가 시 같은 운미韻味를 가지는 것과 감상자로 하여금 끝없이 마음이 이끌리도록 하는 것을 가리킨다. 운은 느낄 수 있지만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이어서 예술적 매력을 부르는 별칭 중의 하나가 되었다. 동양 예술의 독특한 아름다움을 이해하려면 운의 의의를 분명하게 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운은 철저히 이성을 떠난 것이며, 이성은 이미 직각적 감각 가운데 융합되었기 때문에 운의 매력은 직접적인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북송대의 서예가 황정견黃庭堅은 “서화는 운을 위주로 한다(書畵以韻爲主)”고 말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기와 운은 합쳐져서 기운이 된다. 기운은 물상의 화면이 포함한 생기, 운율 등의 총체적 드러남을 가리킨다. 어떤 사람은 물상 자체의 생기•정신 등을 가리키는 것 이외에도 서화가가 대자연의 생동하는 형상에 대한 미적 감수 및 그로부터 형성된 작가 자신의 정감과 사상 등으로 발전한다고 여겼다. 이러한 이유로 사혁謝赫은 육법론六法論을 말하는 가운데 기운氣韻과 생동生動을 연결하여 하나의 척도를 마련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