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가의 思생활, 백영일
“끊임없는 연구와 집념 끝에 한 줄기 희망을 보았다.”한국 전각의 돌파구를 ‘한글’에서 찾아낸 송하 백영일 매서운 한파가 한 걸음 물러나고 봄볕이 비치기 시작할 무렵 서예에 대한 순정이 넘쳐나는 백영일 선생을 만났다. 그의 2015년 개인전 도록 서문에서 박기섭 시인은 “송하는 필묵에 온전히 자신을 투영함으로써 글씨의 자기화를 꾀한다. 그가 쓴 글씨에서 그를 보고, 그 글씨의 체세에서 그의 정신을 만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라고 평하였다. 서예, 전각, 문인화까지 광폭의 작업을 하고 있는 그는 현재 한글 전각에 매료되어 있다. 백영일 선생의 전각에 대해 집중하여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Q. 호는 한 개인의 철학과 정서, 학문세계 등을 담고 있는 키워드라는 생각이 듭니다. 松下(송하), 聽溜軒(청류헌), 흰솔, 믐빛 등을 쓰고 계신데요, 담고 있는 의미와 쓰시게 된 계기, 얽힌 이야기 등이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오.대학시절 죽농 서동균 선생님 댁에서 한동안 선생님을 보필하여 공부 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선생님께서 송하(松下)라는 호를 지어주셔서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습니다. 보시다시피 여기가 청류헌(聽溜軒)인데 천정에서 떨어지는 낙숫물소리 듣는다는 꽤 유명한(?) 당호이지요. 처음 입주하던 해 여름부터 천정에서 비가 샜는데 그냥 물동이 몇 개를 받쳐놓고 간혹 한 번씩 낙숫물 소리를 들으며 그냥저냥 지냈지요. 이 사실을 접한 이종문 시인이 어느 날 청류헌이라는 멋진 이름표를 붙이고 기문까지 써주셨지요최근 몇 년 전부터 한글서예에 관심을 쏟으면서 제 생각을 담은 썩 괜찮은 한글 아호를 하나 가져야 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2015대구 개인전을 앞두고 딴은 고심 끝에 흰솔과 믐빛 두 개의 아호를 지었지요. 흰솔은 성 白(흰)과 송하의 松(솔)을 합친 것이고 믐빛은 그믐달빛인데, 사실 그믐에는 달이 사위어져 거의 달빛을 볼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새 빛을 잉태하고 있다는 사실이지요 믐빛은 빛없는 빛이며 신생의 기운을 머금은 빛입니다. Q. 본격적으로 전각에 대한 얘기를 해볼까 합니다. 오래전이지만 오창석(吳昌碩)의 전각을 주제로 석사논문을 쓰셨는데요. 오창석 전각을 논문 주제로 택한 이유와, 오창석 전각의 형성 배경과 특징에 대해서 여쭙고자 합니다. 80년대초 대만과의 교류가 빈번해지면서 오창석의 서.화.전각 자료집을 많이 접할 수 있었어요 당시 전각공부에 푹 빠졌던 저에게는 오창석 전각은 절대적인 흠모대상이었지요 ‘오창석 전각연구’로 석사논문의 방향을 정하고 차제에 전각전반에 대해 체계적인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오창석은 12살 때부터 각을 시작하여 평생 동안 전각에서 손을 뗀 적이 없었다고 해요. 처음에 절파(浙派), 등파(鄧派), 제가의 법을 본받는 모방기를 거쳐 30代 후반에 탈피번혁기 그리고 41세 이후 독창기로 나눌 수 있지요그의 자법은 많은 금석유물에서 고전문자자료의 의취를 흡취하고 있는데요 한인(漢印)과 그가 평생 임서 대상으로 삼아온 석고문의 영향 속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그의 도법은 둥근 자루의 둔한 칼, 경입(硬入)의 방법을 취하여 인품은 마치 진흙위에 새긴 듯한 고졸혼목(古拙渾穆)의 독특한 묵취구현으로 특징지을 수 있겠습니다. Q. 19세기 말에서 20세기에 들어 한국에서도 전각을 예술의 한 장르로 인식하였고 우수한 작가들도 등장하였다고 봅니다. 물론 그 이전 김상헌, 허목 같은 분들도 문자학이나 고학, 혹은 취미로 전각에 손을 댔다는 흔적이 있지만, 한국에서 전각을 본격적인 예술장르로 실행한 시기는 적어도 추사 일파가 등장한 시기로 내려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조선시대 전각을 보는 선생님의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조선시대 전각은 청대금석학과 고증학의 영향을 도입하기 이전인 18세기 중엽까지는 대체로 사회통념상 전각을 할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되지 못했습니다. 전통적인 유교문화에서 문사들이 직접 칼을 잡고 돌에 문자를 새기는 행위는 조충소기(彫蟲小技)의 쟁이로 치부하여 감히 상상조차하기 어려운 일 이었지요. 그러나 몇몇 선각자들이 전각을 애호하여 직접 새겼는데 견문이 부족할뿐더러 자법, 장법이 너무 기교적이고 격이 떨어져 크게 볼만한 것이 없지요19세기 후기 추사선생이 연행하여 청조전각가들과 교류하면서부터 전각에 대한 견식을 넓히게 되고 따라서 우리나라 전각 발전에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됩니다.Q. 최근 동아시아 전각예술을 보는 선생님의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현재 전각을 예술의 한 장르로 이해하고 실행하는 나라는 크게 한국, 중국, 일본 등을 들 수 있겠는데, 각 나라 전각예술의 특질을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중국은 서예와 전각의 역사가 궤를 거의 같이 하지만 오늘날 예술 성취도 면에서 보면 전각이 서예보다 훨씬 우위에 있다고 봅니다. 전각 인구의 저변이 두터워 한마디로 특징을 말하기 어렵지만 전통적 인풍지향. 유파인장지향 그리고 거칠고 또 웃음을 자아 내게하는 현대적 유행인풍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합니다. 그들은 철저한 독창적인 개성중시 시대를 열고 있습니다.일본 전각은 방촌(方寸)을 넘어 거인(巨印을 선호하는 경향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문자조각의 느낌이 강하여 인위적인 조탁을 가하여 의도적으로 칼의 흔적을 남기는 것이 특징의 하나로 볼 수 있지요우리나라 전각은 인구가 부족하고 질적. 양적으로도 미약하지요 뚜렷한 특징이라고 내세울 만한 것이 없을 정도로 평범하다고 봅니다. 이 모두가 극복의 과제입니다만 우리는 한글인장에도 더욱 힘을 기울여 이런데서도 주체성을 찾아 고유색을 띤 인장예술의 특징적인 면모를 드러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Q. 예술의 한 장르가 흥하고 망하는 주기가 있다손 치더라도 한국 전각의 체질은 애초부터 너무 허약 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한국에서 전각이 예술의 한 장르로 다시 자리매김 하기 위해 서예가나 전각가들이 갖춰야할 자질이 있다면 무엇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한국 전각이 중국. 일본에 비해 많이 뒤쳐져있지요 그 이유는 전각의 가치와 중요성에 대한 인식부재에 있다고 봐요 인식의 전환이 절실히 요구되는 상황입니다. 전각인구도 숫적으로 너무 열악하고 공부도 절대적으로 부족합니다. 서예에 제대로 뜻을 둔 사람이면 마땅히 이서치인(肄書治印)하여 우리서단에도 ‘전각/만방’을 입에 쉽게 오르내릴 수 있어야 합니다.전각학습은 생각보다 아주 간단하게 요약 할 수 있어요 다 아는바와 같이 기본이 한인(漢印)공부지요 한인은 그냥 평정하고 무미하게 보이지만 성실히 접해보면 거대한 힘과 대단한 변화가 있습니다. 한인의 깊이를 가히 측량 할 수 가 없어요.요체는 한인에서 선조(線條)를 얻고 전국 고새에서 결구 조형을 취한다면 그것이 공부의 핵심이라 생각해요 그 외 여러 유파인장 그리고 근·현대 인품은 그냥 힌트삼아 참용하면 효과적인 전각학습이 된다고 봅니다. Q. 선생님께서는 최근 한글 전각에 대한 다양한 실험을 하고 계신데요, 한글전각에 관심을 갖게 된 배경과, 추구하시는 방향이 있으면 말씀 부탁드립니다.우선 한글전각이라는 말은 한글에는 좀 맞지 않은 것 같아요 제 생각으로는 한글인장 또는 한글각이라고 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생각합니다.오래도록 한문서예와 한문전각을 하면서도 마음 한 편에는 우리글에 대한 관심이 늘 붙어 다녔지요 앞으로 좀 더 의미 있는 작업이 무엇일까를 고민하다가 문득 한글 인장에 생각이 미치자 ‘아, 이거다!’라고 크게 외쳤어요.2004년의 일이었습니다. 한글각이라면 ‘이게 진짜 전각창작이 될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름다운 우리말을 찾고 또 마음속으로 상정 해보는데 꽤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절망과 좌절의 순간이 한 두 번이 아니었지요. 어렵기 때문에 진짜 한 번 도전에 보는 거지요.한글 자법은 정음자를 기본으로 삼지만 그것에 국한하지 않고 어떻게 의미 있게 창조적 변용을 하느냐가 관건이지요. 조형요소의 가변성을 최대한 활용하되 때에 따라 제자원리도 뛰어넘는 그 외, 그 이상의 시도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봅니다. Q. 서예에서도 한국 고유의 자료에서 우리민족의 미감을 찾아보고자 하는 시도가 있어왔던 것으로 아는데, 전각에서도 우리 자료를 통한 전각의 계승도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선생님의 근작 ‘아리랑’을 보고 문뜩 고려의 동인과 맥이 닿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이런 질문을 드려봅니다.고려인의 미감이 고려인의 후예인 우리에게도 의식 속에 잠재 되어 있다가 은연중에 슬그머니 나타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아리랑의 경우 반듯한 정방형의 자체로 차려놓으면 보는 재미도 없을뿐더러 아리랑의 느낌이 덜 와 닿지요 보다 아리랑답게 표현 할 수 없을까를 고민하다가 아예 아리랑 세 글자를 모두 구부려 이어서 일획서로 포치하여 새겼습니다. ‘ㄹ’은 혀 구르는 소리, 즉 유성음이라는 점에 착안하여 ‘ㄹ’을 한두 번 더 구부려 역동성 있게 표현 한 것이지요.한, 중, 일 전각을 두고 뚜렷한 특질 없이 이어져온 우리 인장의 돌파구는 ‘한글인장’에 있다고 본 백영일 선생은 수없는 좌절과 절망 속에서도 칼을 놓지 않고 한글인장 연구에 매진해왔다. 그 노고가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작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상상 아리랑수수께끼 이응 얼말글 有心無心 理會尋究 文字氣金石遐壽 鏤骨雕心 Q. 한국에서 전각을 주제로 한 단체들이 소소히 있지만, 그 중에 가장 큰 단위인 전각협회가 있습니다. 전각예술의 계승과 발전을 위해 전각협회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있다면 무엇을 들 수 있겠습니까?열악한 우리전각 환경에 대해 우선 성찰적 태도를 가져야 된다고 보고요. 아울러 협회차원에서 전각인구의 저변을 넓히고 또 질적 향상을 위한 계도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회원 스스로의 문제인데요, 전각예술이 중요한 자기표현인 만큼 전각은 순전히 자신을 키우는 일이지요.서예인 스스로 전각에 대해 자치를 높게 두고 실천하고 적용한다면 자신이 빛나고, 작품이 빛나고, 우리 서단이 풍후하고 윤택해집니다. Q. 전각예술의 한 측면으로 현대 대중들에게 ‘수제도장’이 유행하고 있는 듯합니다. 전각을 하는 인력들의 비중이 수입을 위해 이쪽으로 쏠려 있고, 대중들도 값싸고 간편하게 자신의 도장을 가질 수 있는 장점이 서로 만난 접합점이 아닌가 합니다. 전각가로서 이러한 현상을 보는 관점이 궁금합니다.요즈음 수제도장의 유행은 우선 생산적인 활동이라는 점에서 관심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합니다.예술적 차원이기보다는 전각의 상품화에 비중을 두고 것이지요. 현시점에서 우리 전각의 지형을 살펴볼 수 있는 하나의 현상으로 보고 싶습니다.이러한 노력들이 우리나라 전각의 활성화에도 일정 긍정적 기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Q. 마지막으로 새로 창간하는 ‘글씨21’에 당부하고자 하는 말씀이 있다면 해주시기 바랍니다.열정과 패기에 찬 젊은 작가들이 용기와 희망으로 서업에 매진할 수 있도록 길잡이 역할을 해주기 바랍니다.참신하고 역동적인 프로그램을 제공하여 서단이 긴장과 감동으로 술렁거리고, 그래서 자극과 분발의 계기가 될 수 있도록 기대합니다.이번 인터뷰를 통해 백영일 선생을 만나보고는 크게 자각하였다. 그가 한국 전각의 위기를 근심하며 지내온 나날들이 굉장함을 보았기에, 그의 전각예술성이 손끝에서만 이루어 진 것이 아니었음을 보았기에, 필자 스스로가 전각에 대해 얕게도 깊게도 생각지 않았던 지난날을 반성하게 된 것이다. 바로 이 부분이 이번 인터뷰의 핵심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전각가로서의 당당하고도 자신에 찬 그의 눈빛에서 전각예술의 고귀함을 비춰 볼 수 있었고, 그것을 소중히 아로새기고 싶다.<약력> 학력- 계명대학교 경제학 학사- 계명대학교 대학원 회화 석사 논문- 「漢印(한인) 연구」 서학논집 제1집, 1991- 「邊款小考(변관소고)」 서학논집 제2집, 1993- 「漢碑 篆額(한비 전액)」 연구 서학논집 제5집, 1999- 「崔致遠 ‘眞鑑禪師碑’ 篆額攷(최치원 ‘진감선사비’ 전액고)」 대구서학회, 2002 경력- 대한민국 미술대전 초대작가동 심사위원, 운영위원, 심사위원장- 동아미술제 동우회, 동아미술제 심사위원- 대구서학회 초대회장- 한국전각학회 부회장- 대구예술대 서예과 교수역임 작품활동2016 한글 書: 라틴 타이포그래피 전 예술의 전당2015 우리글씨명적재해석전 태광그룹 일주·선화갤러리, 서울 한국서예일품전 갤러리H, 서울2014 한국현대서예초대전 주 인도네시아한국문화원2010 한국서예관 개관기념 원로중진서예가초대전 한국서예관, 서울2009 대한민국미술대전 서예초대작가전 예술의 전당, 서울 서예박물관2008 한·일국제서예전 주일한국대사관문화원, 일본 동경2007 부산서예비엔날레 부산문화회관2005 서울서예비엔날레 동아시아 현대전각전 공화랑, 서울2003 서령인사100주년기념 국제인학사단정품박람 중국 항주2002 전임 대통령 및 현대서예가 100인 초대전 세종문화회관, 서울
성인근의 글씨를 읽다
“할 말은 많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랴”- 김정희의 《자화상》- 한 노인이 종이 앞에 앉았다가 자신의 모습을 화폭에 옮겨놓았다. 누군가의 주문에 의해 그린 그림은 아닐 터이다. 나는 지금 160년도 더 된 그의 자화상 앞에 앉아 그의 붓끝 하나하나를 따라가 본다. 김정희, 《자제소조(自題小照)》 32×23.5㎝. 선문대학교박물관 의관과 격식을 갖춘 조선의 여타 초상화와 달리 평상복 차림의 소박한 모습이다. 왼쪽 어깨가 기우뚱하게 올라간 주인공의 상반신이 중앙 하단에 위치해 있다. 그림은 가는 먹선 위주로, 특히 주름과 수염을 꼼꼼하게 그렸다. 화면 속 노인은 얼핏 보아 육십은 훌쩍 넘어 보이며, 마른 체구에 초췌한 모습으로 화면 밖을 응시하고 있다. 머리카락과 구레나룻, 수염조차 정돈이 안 되었고, 주름은 살아온 세월만큼 움푹 움푹 파였다. 야무지게 닫은 입술엔 ‘할 말은 많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이냐’며 쉽게 열 것 같지 않다.화면 속 주인공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누구도 알지 못한다’는 추사 김정희(1786~1856, 정조 10~철종 7)다. 그는 경사(經史)는 물론 불교, 금석․고증, 서예, 회화 등 전방위의 영역에서 독보적 자취를 남긴 조선 말기의 문인이다. 조선시대에 초상화를 남긴 사람은 국왕으로부터 문무관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많으며, 주인공의 신분과 공로를 한껏 드러내기 위한 장치들도 여럿 구사했다. 그러나 조선의 초상화 가운데서도 이토록 담박하면서도 전신사조(傳神寫照)의 화론을 내밀화한 작품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그중 자화상을 남긴 인물로 공재 윤두서, 표암 강세황 등이 떠오르지만 그들과 다른 추사만의 체취가 감지된다.화면의 우측 상단에는 다른 종이에 써서 삐딱하게 오려 붙인 그의 화상찬(畵像讚)이 적혀 있다. 이 글에는 화면 속의 자신이 왜 그렇게 입을 야무지게 닫고 있는지에 대한 입장이 적혀 있다. 자제부분(自題部分) 謂是我亦可, 謂非我亦可. 是我亦我, 非我亦我. 是非之間, 無以謂我. 帝珠重重, 誰能執相於大摩尼中. 呵. 果老自題. (이 사람을 나라고 해도 좋고, 내가 아니라고 해도 좋다. 나라고 해도 나이고, 내가 아니라 해도 역시 나다. 시비를 가리는 사이에 나라고 할 수 없게 된다. 제석천의 구슬이 주렁주렁한데, 뉘라서 큰 여의주 속에서 실상을 잡아낼까? 껄껄껄... 과노(果老) 스스로 쓰다.) 문장 끝의 ‘과노(果老)’는 ‘과천(果川) 노인’이란 의미의 자호(自號)로, 그가 북청 유배에서 풀려나 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과천에 은거할 때인 1852년(철종 3), 즉 67세 이후의 초상임을 암시한다. 이 화상찬은 그의 문집 『완당선생전집』에 「자제소조(自題小照)」의 제목으로 실려 있는데, 생략한 글자와 일부 다른 글자가 있으나 전체적 맥락 차이는 없다.김정희는 화상찬에서 자신의 초상에 담겨진 내면의 실상을 보아야지, 겉모습이 닮았는지의 시비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비유적으로 설파했다. 닮고 닮지 않고의 시비를 벗어난 존재의 실상(實相)이 무엇인지 아는 까닭에 ‘나라고 해도 좋고, 내가 아니라고 해도 좋다.’며 껄껄껄 웃는 여유까지 보였다.그렇다면 그가 남긴 실상이 아닌, 어쩌면 종이쪼가리에 불과한 이 자화상의 실체는 무엇인가? 여기서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끝을 따라가다 보면 그것이 향하는 저쪽의 달이 있다. 그러나 달을 보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자신이 직접 보고 체험한 것이 아니면 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누가 큰 여의주 속에서 실상을 잡아낼까?’라며 껄껄껄 웃는 선종풍(禪宗風)의 문자로 깨우침을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실상은 문자에 의해 온전히 표현할 수 없지만, 문자를 쓰지 않고서 남에게 전할수도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성인근 본지 편집주간
이 작가의 思생활, 김영삼
“세월을 담을 수 있는자연의 모습을 보고 나의 붓질로 표현한다.”문인화라는 시를 그리는 화가 우송헌 김영삼 현시대의 문인화는 더 이상 옛날의 그것과 같을 수는 없다. 옛날의 것은 그저 옛날의 문인화 일뿐, 현대에는 현시대성을 반영한 작품을 해야 한다. 또한 예술이라는 것은 함께 이해하고, 공감해야한다. 늘 현시대에 맞는 작업을 모색하고 끊임없이 창작하는 우송헌 김영삼을 만나보았다. Q. 아호는 한 개인을 나타내는 키워드라 생각합니다. 우송헌(愚松軒)이라는 호를 쓰고 계신데 무슨 뜻을 가지고 있나요?처음에는 송헌(松軒)이었습니다. 제 선생님께서 소나무를 연상하시고 소나무 송(松), 집 헌(軒)자로 지어주신 것입니다. 그 후 대학원 석사논문을 쓰기 위해 금산사에 들어갔었는데 거기에 계시던 노장스님께서 호를 보더니 ‘태조 이성계의 호다. 무장의 호를 쓰냐.’ 고 하시며. 어리석을 우(愚)를 앞에 붙이는 것이 더 멋있겠다고 하여 선생님께서 주신 호(松軒)와 어리석을 우(愚)를 합쳐 우송헌(愚松軒) 이라고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당호 겸, 저의 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Q. 선생님께서 처음 문인화를 시작하게 되신 계기가 있으신가요? 나의 고향이 진도이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늘 시·서·화에 동화되어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늘 보았던 것이 나의 삶에 큰 흐름으로 작용한 것 같습니다. 어렸을 때의 동기가 오늘의 나를 있게 하지 않았나 생각을 합니다. Q. 선생님께서는 남종화풍의 맥을 잇는 대표문인화가이신데 남종화풍이란 무엇인지 간단한 설명 부탁드립니다.역사적으로 보면 동국 동기창의 남북종론에서 나오는 것으로, 세분화해서 동양화 중 가장 간일한 필치로 함축미를 느끼게 하는 그림을 ‘남종문인화’ 라고 통칭해서 이야기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호남 쪽에 소치선생님의 영향을 받은 운림산방, 의재 허백련 선생님께서 남도 쪽의 화단에 큰 작용을 했습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그런 것에 배움을 고하고 하다 보니 오늘에 이르게 된 것 입니다. 우리끼리 남종문인화를 이야기할 때, ‘회화는 소설이고 문인화는 시다.’ 라고 표현합니다. Q. 문인화의 개념은 ‘그림을 직업으로 하지 않는 선비나 사대부들이 여흥으로 자신들의 심중을 표현하여 그린 그림’ 인데.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오늘날의 문인화는 어떠한 것인지 궁금합니다.흉중성죽(胸中成竹)이라고 하여 중국에서부터 내려오는 동양화의 맥을 보면, 사대부들이 즐겨 그리고 선비계층들이 문인화를 좋아 했던 것은 그 속에 사상과 철학이 많이 녹아있기 때문입니다. 요즘 세대에 옛날 것을 이입시켜 볼 수 있는 상황은 아닌 듯합니다. 양반과 평민의 계층이 있었던 옛날과 달리 요즘은 대부분이 대학을 나오고, 또 그런 것(계층)으로 세분화할 수 없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문인화가 갖고 있는 가장 큰 특질, 유가나 도가에서 느끼게 해주는 사상이 교훈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고 봅니다. 우리가 즐겨 그리고 있는 매·난·국·죽이나 십군자라고 할 수 있는 종류의 화목들이 가지고 있는 상징성을 선비와 비교했을 때, ‘아, 나도 저렇게 살아야 되겠다.’ 라고 생각을 하곤 하는데, 예를 들어 난초를 그린다고 했을 때, 난초가 갖고 있는 가장 큰 상징성은 아주 깊은 산골이든 우리의 집이나 어수룩한 집이든, 어디에 가 있던지 그 맑은 향기를 절대 바꾸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에 비견하면, 참 선비에 비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연꽃을 보면 연꽃에서 느껴지는 것은 진흙 속에서 늘 물들지 않고 맑음을 자랑할 수 있는, 그 향기는 멀리 있을수록 더 짙게 풍겨 오는 것에서 정말로 인간이 내재해야 할 덕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제가 그리는 요즘의 문인화가 그 집안의 교훈, 가훈을 대체할 수 있는 것으로도 손색이 없다고 하여 가장 간단한 필치로 가장 맑음을 중요시하면서 지고지순한 선비의, 군자의 삶을 느끼고 자기를 유추해 볼 수 있는 그런 그림을 그리려고 노력을 합니다.Q. 문인화를 할 때 추구해야하는 것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요즘 문인화의 인구가 비약적으로 많아지고 있는 것에 비해 격을 갖추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보이는 것에 치중하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세계, 선의 세계로 보면 그 선 속 에서는 무한한 운율들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쉬지 않고 연찬했을 때 무언가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저는 하나의 작품 속에, 문장으로 보자면 시의 기승전결이 보여야 하며, 노래로 보면 도레미파솔라시도, 궁상각치우가 들어있어야 사람들의 심금을 울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선들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무한한 반복의 학습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소년문장은 있어도 명필은 없다는 것이 해보지 않고는 할 수 없는 것 입니다. 쌓여지는 예술이기 때문에 정말로 열심히 붓을 하루도 쉬지 않고 연찬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랬을 때 그 속에 붓을 잡고 있는 자신의 마음이 성숙되어 좋은 화면들로 나타는 것이지, 아무리 머리로 멋있게 그리려고 해도 거기에서 의미 있는 선 질이 나오기는 어렵습니다. 의미 있는 선 질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열심히 붓을 가지고 작업을 해야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Q. 선생님께서는 동아미술상 수상당시 보통 문인화의 소재가 사군자(四君子)인데, 야자수 문인화를 그리셨습니다. 또한 최근 작품에서 보이는 야광안료가 주는 별빛의 표현처럼 다양하면서도 실험적인 작품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작품 안에 담고자 하셨던 선생님의 작품세계가 궁금합니다.야자수를 그려 동아미술상을 받았을 때는 문인화의 영역을 확대해보고 싶다.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늘 사군자에만 얽매여 있는 것이 조금 답답했고, 야자가 가지고 있는 시원함이 전통 문인화에 이입을 시켜도 손색이 없을 것 같아 표현을 한 것인데 뜻밖의 좋은 상을 받았었습니다. 요즘에 제가 하는 야광의 작업이나 매화에 거울을 이어서 하는 작업들은 시대성이라고 봅니다. 옛날에 했던 방법 그대로 가져오면 저것은 그저 문인화구나 하고 사람들은 지나가 버립니다. 제가 아트페어에 상당히 많은 기간 참여를 해보았는데, 일반인들은 잘 그리고 못 그리고를 구분하기가 어려운 듯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관심을 유도하려면 또 다른 느낌들을 주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숨어 있는 재미를 주고 싶어 야광안료를 사용한 것 입니다. 요즘에 작업하고 있는 것은, 매화 속에 거울을 뒤편에 이어, 선으로 창살 같은 것을 만드는 것인데, 이는 매화가 갖고 있는 그 상징성을 더 돋보이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를테면 그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봄은 오고야 마는구나 하는 것을 보면서 그 곳에 비친 내 얼굴을 보며 나는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자기 자신을 한번 비춰보라는 의미에서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제 생각과 의도대로 읽어주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신기하게 봐주는데 사람의 눈을 우선 끌어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예술이라는 것은 함께 했을 때 의미가 있는 것이지 혼자 명작이라고 한들 알아주지 않습니다. 같이 상생하고 같이 함께하려고 하는 마음속에서 늘 새로움을 추구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요즘 하는 작업은 그런 맥락에서 하고 있습니다.Q. 지금까지 수많은 전시회를 하셨는데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전시나 작품이 있으신지요? 아무래도 제일 처음에 했던 전시가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저는 첫 전시를 뉴욕 한국문화원에서 했습니다. 그 때 당시에 영어를 잘 못하지만 관중과 관객들이 나의 그림을 보며 굉장히 시적이다, 여운이 있다. 라고 해주는 것을 듣기도 했습니다. 화제를 한문으로 한 작품이 대부분이고, 한글은 3, 4점정도 뿐이었습니다. 그것을 보며 중국 관람객 분들이 전부 자기 나라의 글씨라고 했던 것이 굉장히 부끄러웠습니다. 그래서 그 후 한국에 들어와서는 한글 화제를 열심히 쓰려고 노력 했었습니다. 그때의 전시가 한글에 애착을 갖고 작업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줘 굉장히 좋았습니다. 또한 지난 매화전(2014년 11월)은 단일 화목을 가지고 전시했다는 의미에서 저에게는 굉장히 뜻 깊은 전시였습니다. Q. 문인화 작품에서 화제를 빼 놓을 수 없는데요. 선생님께서는 작품의 화제를 위해 따로 서예공부도 하셨는지 궁금합니다.물론, 그림이 먼저나오고 글씨가 탄생했지만 글씨의 선 질에서 그림이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서화동원이라고 하는 말이 있듯이 같은 맥락에서 봤을 때 글씨가 문인화에 미치는 영향은 지대하다고 봅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도 글씨의 중요성을 항상 강조합니다. 물론 글씨를 쓸 때의 필법과 그림을 그릴 때의 필법이 다를 수 있지만, 그것이 같이 맥을 만들어 갑니다. 글씨를 쓰는 사람이 그림을 잘 그릴 것 같지만 또 그것은 아닙니다. 많은 세월을 그림과 글씨. 이 두 가지를 합작하며 해왔을 때 언젠가는 만나는 지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랬을 때 투필성자라고 하여 붓을 던져도 자연스러움이 우러나는 것입니다. 서예의 중요성은 누구보다도 중요하게 생각하고, 저 역시도 날이면 날마다 한 점씩 꼭 하려고 노력합니다.Q. 선생님께서는 작업 하실 때 주로 어디서 영감을 얻으시는지요?옛날에 체본에 의해서 모든 공부를 하던 시절에는 어딘가 채워지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연꽃을 그릴 때, 연 밭에 가서 보니 거의 다 똑같아 그릴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앉아서 도대체 무엇이 있는지 보니 지나가는 바람결에 연잎이 살짝 덮어지며 선이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이 좋아 일주일 이상을 연 밭에 도시락 싸서 앉아 있으면 어느 순간 정말 마음에 드는 연의 모습이 딱 하나 나옵니다. 그런 것들을 보고 돌아와 그렸을 때의 느낌은 선생님의 체본 하고는 또 다른 느낌입니다. 그래서 제가 십여 년 이상 탐매행을 다닌 것도, 매화가 가지고 있는 선 질이 붓에서 느끼는 조형성보다 살아 있는, 생기 있는 봉우리에서 훨씬 더 많은 영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보며 정말 고생했구나, 저런 세월이 쌓였구나 라고 생각합니다. 일필휘지는 순간으로 지나가는 것이기에 쌓여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월을 담을 수 있는 모습을 보고, 그것을 보고난 후에 나의 붓질로 표현하려 노력하니 다른 사람과는 다른 선 질의 느낌이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자연과 나와 옛것을 합일시키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Q. 작업하면서 어려운 점은 없으셨는지요. 매일 연마를 해야 한다고 하셨지만 사실 테크닉 면에서는 거의 끝에 달하셨기 때문에 작가로서 무언가 답답함, 메너리즘을 느끼시거나 새로운 것에 대한 것을 리프레쉬는 어디서 찾으시나요?옛날에 너무 안 풀렸을 때에는, 황당무계하시겠지만 무협지를 많이 봤습니다. 그 오므라들었던 마음이 펴지면서 아 이런 세상도 있을 수 있겠구나 하고 내 마음을 다잡았던 젊은 날이 있었습니다. 요즘 제자들에게 늘 하는 얘기지만 한 계단, 한 계단을 올라갈 때마다 그에 따르는 고통을 동반하는 것이고, 그렇기에 안 될수록 더 열심히 해라 더 열심히 하면 거기에서 남모르게 조금 더 올라가는 부분이 있다고 말합니다. 저도 수없이 붓을 짓이겨보고 어떤 때에는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아 벼루를 마룻바닥에 내동댕이 쳐보기도 하고, 소질이 없음에 한탄도 많이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극복하는 길은 내가 열심히 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대안으로 붓을 잡고 마음을 추스르다보면 성숙해가는 자기 자신을 보는 듯합니다. 여행도 굉장히 좋아하고, 영화도 굉장히 좋아해서 가만히 차 마시는 시간과 그림 그리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하루에 만보이상을 걷습니다. 걷다보면 생각이 쌓여지고 결론도 나오게 됩니다. 저는 그런 곳으로부터 많이 찾습니다.Q. 작업 하시다가 굉장히 마음에 드는 그림이 나왔다든지, 순간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표현되었을 때의 카타르시스. 어떨 때 이를 느끼셨는지요.그런 경우는 왕왕 있습니다. 작업을 해두고 집에 들어가면 그 작업이 생각나서 밤중에 화실을 다시 나왔던 기억이 있습니다. 기억을 떨치지 못하고 그것이 보고 싶어 다시 나와 보고, 들어가고 했던 적이 많지는 않지만 몇 번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기억에 남는 작품이 대나무 죽순을 그렸던 그림입니다. 술 한 잔 먹고 그린 것인데 굉장히 좋았습니다. 지금도 그 작품을 좋아합니다. 경희대 교수가 그 그림에 반해, 다른 곳에 가서 강의 할 때도 이에 대해 평을 해 주시곤 했습니다. 자주 있지는 않지만 이럴 때 보람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그 그림을 다시 그려보려고 하면 될 듯, 하면서도 똑같은 표현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동아미술상에서 받았던 작품은 딱 2점 그린 것입니다. 보통 옛날에 미술대전 준비를 할 때는 화엄사에 들어갈 때 종이 천장을 가지고 들어가서 그것을 다 쓰고도, 다시나와 또 종이를 사서 올라가 그림을 그리곤 했는데 어딘가 모르게 자연스러움이 결여가 되어있었습니다. 지나가며 쌓인 흔적이 더 잘될 때도 있지만 처음 먹었던 자연스러움을 뛰어 넘을 수가 없을 때도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Q. 선생님에게 영향을 준 작가가 있다면 소개해 주실 수 있을까요?저의 청년 시절에는 의재 허백련 선생님의 화풍을 무척 좋아했습니다. 또한 우리나라 문인화가들이 다 그러하듯이 중국의 작가들 오창석, 제백석, 팔대산인 등을 떠올릴 것 입니다. 그 중에서도 저는 팔대산인의 작업을 특히 좋아합니다. 팔대산인의 작업에는 생기 있는 발랄함이 숨어있습니다. 그 선 질을 보면 어떻게 이리 자유분방하게 나올까 하는 난만함을 보고 저의 그림 속에 투영하려고 노력을 합니다. 운필을 단련함과 더불어 많은 책을 탐독함으로 인해 쌓여지는 예술, 그것이 문인화입니다. 직접경험도 중요하지만 간접경험을 많이 축적함으로써 자기를 좀 더 표현할 수 있는 여력이 생기기 때문에 화가는 어떤 면으로 보면 종교를 앞서는 것이다. 라고 표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만큼 어렵다는 표현인 것 같습니다. Q. 선생님 문하의 제자 분들은 서예과 출신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한 젊은 작가들에게 인기가 굉장히 많으신데 제자들을 가르치실 때 가장 강조하는 부분이 어떤 부분인지 궁금합니다.저는 누구보다 젊은 작가들을 사랑합니다. 누구보다도 열심히 키워주고 싶고, 제가 가지고 있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고 저에게 온 사람들이 하루 빨리 나의 필을 배워 자기의 필법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을 기대해서 제가 아는 것을 최대한 주려고 노력합니다. 그래서 작가를 지향하는 친구들, 그런 친구들이 저를 보고 희망을 느꼈으면 하는 바램으로 살고 있습니다. 또한 아침에 제자를 만나러 갈 때는 항상 기도를 합니다. 누구에게나 공평한 내가 될 수 있도록. 편애하는 것을 제자들에게 보여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누구에게나 똑같은 마음으로 똑같이 대하려고 노력합니다. 또, 저는 젊은 친구들이 나를 볼 때, 선생님이 자기들보다 열심히 하는 구나를 느끼게 합니다. 나보다 더 열심히 해야 나를 넘어설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을 본인들이 알기에 제가 열심히 하지 않고 열심히 하라고 한다면 그들은 열심히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하는 것에 자신이 있습니다. 게다가 저는 소질이 없어서 다른 소질 있는 사람들이 3시간이면 할 것을 3일이 걸려도 못합니다. 6일, 10일, 한 달을 걸려서라도 하면 언젠가는 그것을 따라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할 수 있는 마음가짐, 행동을 우리 후학들에게 보여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또 그것을 보면서 정말 좋은 작가로 성장해서 발전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Q. 선생님의 앞으로의 작품도 정말 기대가 많이 됩니다. 앞으로 작품의 방향, 계획이 궁금합니다. 또한 이 시대에 어떠한 작가로 기억되고 싶으신지요.저는 작품의 단초를 개인전을 하고 나면 또 다른 세상이 보였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살려고 노력하며 개인전 작업을 2년마다 하는데, 2년 동안 했던 작업을 3개월 전 정도에 거의 다 불사릅니다. 그때부터 열심히 시작해서 다시 무언가를 나타내게 하려고 하는데 그 3개월이라는 기간은 2년 동안 살아왔던 기간보다 더 열심히 하는 계기가 됩니다. 그래서 제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작업 환경을 만들려고 노력을 하면 또 다른 느낌들이 나타납니다. 지나가다가 무언가를 보며 ‘이렇게 표현하면 참 재밌겠다.’ 하는 느낌들이 왔을 때 늘 스케치를 해놓고 집에 와서 작업해보면 또 다른 형상이 나타나게 되어 그 쪽에 심취해 더 열심히 하게 됩니다. 그러한 경영으로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고 전시를 해오면서 같은 류(類)의 전시를 해보지 않았습니다. 새롭다는 것은 다른 방향을 보이는 것이지 새로울 수 없다고 봅니다. 저는 열심히 작업하는 사람이고 평을 해주는 것은 후학들이기 때문에 이러한 것에 연연하지 않고 열심히 살아가려고 합니다. 저의 아이들 3명이 그림을 그리고 있어서 인지는 모르지만, 또 좋아하는 후학들이 있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행동이나 마음가짐을 잘 하려고 노력을 많이 합니다.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려고 항상 노력을 하는 편입니다.Q. 마지막으로 새로이 창간하는 글씨21에 격려사 한마디 부탁드립니다.우선 축하를 드립니다. 기존에 있던 잡지의 성격이 아니라 온라인의 성격이어서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한층 빨리 전달될 수 있는 장점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요즘 세상이 서예·문인화 계통의 환경이 열악한데 그러한 환경을 극복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가교의 역할을 잘 해주시길 바랍니다. ‘글씨21’에 들어가면 열심히 작업하는 좋은 작가들의 생생한 소식이 있더라 하는 살아 숨 쉬는 잡지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인터뷰는 양평에 있는 김영삼 선생의 작업실에서 진행이 되었다. 새가 지저귀고 사방이 산으로 둘러 쌓여있는 자연과 하나가 되는 곳이었다. 선생이 얼마나 자연을 벗 삼고 가까이 하려는지 느껴졌다. 도시락을 들고 연 밭에서 일주일간 바람에 날리는 연잎의 움직임이 주는 선을 관찰하고, 십여 년 이상 탐매행을 다니며 생기 있는 봉우리에서 그림의 영감을 얻는다고 말한다. 또한 그림에 일반인들도 재미있게 느낄 수 있는 요소들을 넣는 등 다양한 시도들을 한다. 이러한 사생의 과정과 파격적인 시도들이 지금의 우송헌 김영삼 선생을 있게 한 게 아닌가라는 생각을 한다. “자연과 나와 옛것을 합일시키려 노력하고 있다.”라고 말하는 선생의 앞으로의 작업들이 더 기대되는 시간이었다.인터뷰 이신영 기자<약력>-1958 전남 진도 출생-1988 동국대학교 교육대학원 졸업 수상-1978~95 국전 특선3회, 입선 5회(국립현대미술관)-1991 동아미술상 수상(동아일보사, 국립현대미술관)-1983~85 목우회 부문 우수상, 특선2회(국립현대미술관)-2006 서예 문화상 수상(미술문화원)-2012 한국예술총연합회 예술문화상, 미술부문 대상수상 교육경력-1989~ 우송헌 먹그림집-1991 뉴욕 주립대학교 객원교수-1995~97 호남대학교 외래교수-1996~97 동국대학교 외래교수-1999~ 대전대학교 겸임교수-2005~ 예술의전당 서예아카데미 외래교수-2005~06 경희대학교 교육대학원 외래교수-2011~13 삼성그룹 성우회 외래교수-2012~13 한국예술원 교수-2013~ 동방대학원대학교 2년강의 개인전-2014 가나 인사아트센타(서울)-2012 Fei 갤러리(중국 광저우)-2012 인사아트프라자(서울)-2011 로터스갤러리(광주)-2010 이형아트센타(서울)-2007 학고재(서울)-2003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서울)-2002 나인 갤러리(광주)-2001 문화 갤러리(광주시청)-2000 신세계 갤러리(광주)-1998 백악예원(서울)-1995 소나무가 있는 그림전(진화랑, 광주)-1991 한국문화원 초대전(뉴욕) MBC드라마 작품협찬-2014 엄마의 정원, 왔다 장보리-2013 구가의서, 스캔들, 사랑해서 남주나, 빛나는 로맨스, 제황의딸 수백향-2012 빛과 그림자, 해를품은 달, 위험한 여자-2011 불굴의 며느리, 로얄페밀리-2010 황금물고기 현재-대한민국 미술대전 초대작가 도 운영, 심사위원장 역임-목우미술대전, 문인화대전등 운영, 심사위원 120여회 참여-광주, 전남 문인화협회 고문-한국미술협회, 목우회, 예문회, 58포럼, 문인화연구회회원-전북 서예 비엔날레 조직위원-한국미술협회 문인화 분과위원장 역임탐매행(探梅行)과 우송매(愚松梅)의 의미최병식 미술평론가, 경희대 교수‘탐매행(探梅行)’ 최근 10여년 우송헌 김영삼의 작업을 함축한 단어이다. 그가 찾아 헤맨 매화들은 그의 고향 전넘 진도와 가까운 곳에 위치하지만 전국적으로 유명한 곳을 망라한다. 진도의 소치매(小癡梅)와 운림매(雲林梅), 연동마을 고산매(孤山梅). 화엄사 길상암의 야매(野梅), 대흥사 두륜매(頭輪梅), 백양사 고불매(古佛梅), 선암사의 백매와 홍매, 담양 지실마을의 아룡매(臥龍梅), 계당매(溪堂梅). 독수정 주변의 독수매(獨守梅), 환벽당의 담장매, 백매를 비롯하여 순천 송광사의 송광매, 야매, 350~650년이 된 50여 그루의 매화가 있는 선암사의 선암매(仙巖梅)와 섬진강 줄기인 ‘수류화개(水流花開)’를 이루는 남방지역의 대부분을 섭렵하였다.매화심취의 동기는 우연히 일간지 기사에서 발견하고 밤을 새워 찾아간 산청 남사마을 분양매(汾陽梅)와의 인연이다. 분양매는 수령 650년에 달하는 분양고가의 명매이다. 우송헌은 어렵게 찾아간 분양고가에서 매화 한 송이가 수백 년이 된 고목나무에 피어있는 장면을 보는 순간 벅찬 감동과 전율을 느끼게 된다. 이 고매는 수령이 다하여 안타깝게도 2006년 고사했고 새가지가 자라고 있다.물론 우송헌은 청년시절부터 호남 문인화의 거봉 금봉 박행보 선생에게 사사하면서 사군자를 즐겨했다. 그러나 사군자의 실물에 대한 학습이기 보다는 대부분 화법이나 선배들의 작품을 근간으로 하는 연구가 주를 이루었다. 50대 초반, 작가로서 변화가 절실히 요구되던 시기에 분양매의 발견은 그의 예술세계에 결정적인 변화의 계기가 되었다.1990년대 초부터 뉴욕의 전시에도 참가하고 대학에서 강의를 진행하면서 우송헌은 표현하기 어려운 충격을 받게 된다. 광주화단의 전통적 관습에 머물렀던 그의 시각은 당대미술의 명멸하는 실험사조와 작가정신의 본질적인 문제에 많은 의문을 던지기 시작하였고 작품에서도 추상작업이나 원색을 색면으로 도입하는 작업들을 선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진정한 본질, 자신의 관점과 작업방식으로 가능한 대안을 모색하면서 우연히 산청의 분양매를 만나게 된 것이다.사군자 그 중에서도 화보에 의하여 정형화된 소재가 아니라 실체로서 다가온 매화의 매력에 도취된 우송헌은 이후 매화를 찾아 ‘탐매행(探梅行)’작가로 변신한다. 2002년 나인갤러리, 2004년 한가람미술관, 2007년 학고재 전시에서만 해도 「터」, 「분매도」등 소수에 그치고 있는 묵매작업은 2011년 로터스갤러리전에서 과반수이상의 작업이 묵매화로 구성된다. 중국의 페이갤러리에서는 대부분 작업을 ‘새벽매화’시리즈로 선보이게 되면서 그간 탐매여행에 대한 보고를 시작한다.그가 오랜 동안 시도해온 매화 찾기와 읽기, 시각언어화를 거친 심상적 해석과 표현과정은 몇 가지 의미를 지닌다. 우선은 그가 당대미술계, 특히 문인화단에서 찾아보기 힘든 철저한 실제 사생과 현장작업을 병행하는 과정을 통해 지극히 관념적인 인식이나 개자원화전(芥子園 畵傳) 이후 정형화된 구도, 필세, 선배작가들의 전범으로 형식화된 스타일로부터 일탈했다는 평가이다.작업은 사생 성격과 ‘새벽매화’와 같이 자신의 시각으로 유형화되어지는 스타일로 나뉜다. 자유로운 선묘, 순지의 독특한 감각이 반영된 모필과 농담의 변화, 속도와 깊이의 맛을 머금은 필선과 먹의 쓰임 등은 그의 특징이다. 필선에서는 낭만적인 멋의 결구가 있다. ‘묵매유희’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어울릴 듯한 그의 매화필은 명쾌하면서도 과감하다. 필선의 감각과 가지의 결구가 서예의 맛을 연상케 하면서 파격이 있지만 세필의 끝은 감성적이다. ‘한향춘몽(寒香春夢)’에 비하여 ‘새벽매화’는 여러 번에 걸쳐 담묵으로 배색을 처리하고 백매와 홍매가 어우러지는 새로운 시각의 작업이다. 새벽에 여명을 배경으로 동이트기를 기다린다는 의미에서 눈과 추위를 견뎌낸 매화의 상징적인 의미가 오버랩 된다. 여기에 전통적으로 여백을 중시해온 전통 문인화의 사상과 형식으로부터 새로운 시각의 배경처리는 한글화제와 함께 그만이 갖는 묵매의 특징을 형성한다.어릴 적 동네의 냇가나 호수에서 놀다 강변으로 다시 망망대해의 바다로 나가게 되는데 마지막에는 다시 동네의 냇가나 호수로 돌아오게 되는 ‘회귀’를 생각할 수 있다. 매화를 찾게 된 계기가 바로 이런 비유와도 연계되는 것 같다. 우송헌의 ‘탐매행’은 자신의 작업노트에서 말하고 있듯이 ‘회귀’라는 말로도 쉽게 해석된다. 그 역시 한동안 당대미술의 다양한 트랜드나 이슈에 대하여 많은 고심을 거친 적이 있다. 추상성, 기학적인 화면구성과 소재의 확장, 다양한 재료의 텍스츄어 등을 구사하면서 실험을 거쳤지만 결과적으로 그의 최근 관심은 진정한 ‘법고창신(法古創新 )’의 실현을 통한 당대성의 획득이었다.‘우송매(愚松梅)’는 일정기간 그의 다양한 실험을 거치면서 도출하게 된 전통적 방식의 터득을 통한 새로운 도전이다. 그의 ‘묵매회귀’는 한국 미술계에서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즉 박물관학적인 가치로 밀폐되고 굳어져온 몽상적 사군자형식을 일탈하면서 자연의 실체, 그 실체로부터 진행되는 응물상형(應物象形)의 심상적 경지를 터득해가려는 노력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최근 전통화단, 서예계의 매너리즘이 수없이 비판되어왔지만 그 화답은 미미했다. 특히 시각예술분야와는 전혀 다른 코드로 형성되어온 문인화단의 독자적 행보는 더욱 우려를 금치 못하고 있다. 우송헌의 탐매에 대한 열정과 새로운 시도는 물론 아직 사생과 형상, 감성의 작업들이 관념과 의경(意境)의 아우라를 내품은 단계에 이르기까지는 아직도 많은 변화가 필요하다. 그러나 적어도 당대 문인화의 가장 큰 과제인 관념적 타성과 정형화를 과감히 일탈하면서 원천적인 매화의 실체탐구와 그 본질적인 재해석으로 ‘당대성(當代性)’에 대한 접목과 대안모색에 몰입하고 있다는 점에서 상당한 평가를 기대할 수 있다.
성인근의 글씨를 읽다 ㆍ 팔대산인 - 1
그곳의 소나무는 나처럼 기괴하고 늙었다.명말청초(明末淸初)를 살다 간 한 남자가 있다. 그는 왕족이었다는 소문도 있고, 어떤 사람은 승려, 혹은 도사였다고도 한다. 또 어떤 이들은 벙어리였다고 하고, 심지어 미치광이였다는 풍문도 있다. 그가 남긴 글씨와 그림이 많으므로 서화가였음은 분명한데, 남겨진 작품의 전반에선 철저한 저항감과 고독감이 묻어난다. 그는 자신의 서화에 ‘팔대산인(八大山人)’이라 썼는데, 사람들은 ‘곡지(哭之)’ 혹은 ‘소지(笑之)’처럼 보인다고 한다. 혹자는 마음 놓고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는 자신의 처지를 나타낸 장치라고 이야기한다. 그는 만년에 입버릇처럼 이런 얘기를 하고 다녔다고 하는데, “나는 허공에 우뚝 솟은 산과 절벽으로 가고 싶다. 그곳의 소나무는 나처럼 기괴하고 늙었다.” 朱耷, 소나무이야기의 주인공은 17세기 중국 예원(藝苑)의 개성파 서화가를 대표하는 주답(朱耷; 1627~1705)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팔대산인’이란 호는 60세 이후 『팔대인각경(八大人覺經)』이란 경전을 늘 소지하고 있다는 의미로 지은 그의 자호(自號)이다.한 사람의 생을 몇 줄의 글로써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마는, 여기서는 그를 둘러싼 여러 소문들을 풀어보며 삶의 괘적을 따라가 보기로 하자. 우선 왕족이었다는 소문에 대해서, 기록에 의하면 그는 명나라를 개국한 명태조(明太祖) 주원장(朱元璋)의 16번째 아들 영헌왕(寧獻王) 주권(朱權)의 9대손이다. 주권은 명태조에 의해 남창(南昌)에 왕으로 봉해졌는데, 그의 후손들은 대대로 이곳에 자리 잡고 살았으며, 주답 또한 이곳에서 태어나 자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이른바 ‘태어나 보니 입에 금수저를 물고 있었다’는 왕족이었다. 유년기의 그는 매우 똑똑했고, 특히 서화에 재능이 많았다고 한다. 朱耷의 서명과 인장둘째, 승려였다는 소문에 대해서, 1645년 그의 나이 스무 살이 되던 해에 명나라가 망하고 대대로 살아온 남창이 점령되었다. 명나라의 왕족이었던 그에게는 불행의 신호탄이었다. 또한 같은 해 부친이 사망하는 불운을 겪으면서 평탄했던 삶은 고난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는 무력이나 완력으로 적군에 대항할 수 없는 처지에 이르자 명나라 종실의 후손들이 그랬듯이 신분을 숨기고 산속에 은거했고, 1648년 삭발하여 승려가 되었다. 소장형(邵長蘅)이 쓴 「팔대산인전(八大山人傳)」에는 “약관(弱冠)에 변(變)을 만나 집을 버리고 봉신산중(奉新山中)으로 피하여 머리를 깎고 승(僧)이 되었다. 몇 년이 되지 않아 종사(宗師)라 칭해졌고 산에서 거주한지 20년 후 학문을 따르는 문인(文人)이 이미 백여 명이었다.”고 적었다. 그는 스무 살부터 대략 마흔 이전까지 승려 신분이었음이 확인된다.셋째, 도사였다는 소문에 대해, 그는 약 20년 동안의 승려생활 이후 환속하여 도교(道敎)로 개종했다. 부인을 얻고 아이도 낳고 살았는데, 이 무렵의 생활은 주로 그림을 팔아 연명하였다고 한다. 고향 남창에 청운보도원(靑雲譜道院)을 건립하여 도가사상에 심취하기도 했는데 이 무렵부터 본격적인 서화가로서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왕족이었다거나 승려, 혹은 도사였다는 소문은 모두 소문이 아닌 사실인 셈이다.넷째, 벙어리, 혹은 미치광이였다는 소문에 대해, 1679년 54세의 그는 임천(臨川)의 현령(縣令) 호역당(胡亦堂)의 초청으로 1년간 임천에 머무른 적이 있었다. 이때 청나라 조정에서는 『명사(明史)』를 편찬하고자 국내의 저명한 학자와 선비들을 불러 임용하고 각지에 흩어져 있던 명나라 유민 사대부들을 동참시키고자 하였다. 이는 청나라의 조정이 한족 문인들에게 취한 일종의 회유책이었다. 호역당은 본래 명나라 문인이었으나 청나라 조정을 위해 사대부들을 동참시키는 일에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朱耷, 하(荷)이때 주답은 호역당의 주선으로 임천 관사에 모인 벗들과 함께 시도 짓고 술도 마시고 노래를 부르는 등 흥을 즐겼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호의가 호역당이 꾸며낸 술수의 함정에 빠져든 사실을 깨닫고 참을 수 없는 치욕과 모욕감을 느꼈다. 그는 입고 있던 자신의 옷을 발기발기 찢어 불에 던져버린 이후 임천을 떠나 남창으로 돌아왔다. 창랑의 물이 탁하면 발이나 씻으면 될 일이지만 그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미치광이였다는 소문은 당시부터 심해진 광기 짙은 정신병세 때문이었다. 그는 이후 함구하고 사람들과 대화를 끊어버렸다. 누군가 그에게 말을 건네도 ‘벙어리아(啞)’자를 써서 보여주곤 했다. 벙어리였다는 소문은 여기에서 기인한 듯하다. 朱耷, 조석(鳥石)그는 노년기에 남창의 몇몇 한림을 중심으로 활동했으며, 가난과 병마로 고독한 삶을 살다가 1705년 10월 15일 향년 80으로 남창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시대가 안겨준 침통한 고뇌를 은일(隱逸)의 삶으로 저항하였고, 스스로 가시밭길을 걷는 체험을 통해 창조적 예술가로서 이름을 남겼다. 성인근(본지 편집주간)
이상현의 캘리톡톡 1
붓을 잡은 연기자 캘리그라퍼 이상현 작가 ‘이상현의 캘리톡톡’은 대한민국 대표 캘리그라퍼 이상현 작가와의 대담으로 총 3회 진행됩니다. 순수미술에서의 글씨, 상업디자인에서의 캘리그라피, 퍼포먼스까지 이상현작가의 솔직담백한 캘리그라피 이야기 많은 기대 부탁드립니다.
이상현의 캘리톡톡 2
붓을 잡은 연기자 캘리그라퍼 이상현 작가‘이상현의 캘리톡톡’은 대한민국 대표 캘리그라퍼 이상현 작가와의 대담으로 총 3회 진행됩니다. 순수미술에서의 글씨, 상업디자인에서의 캘리그라피, 퍼포먼스까지 이상현작가의 솔직담백한 캘리그라피 이야기 많은 기대 부탁드립니다.
캘리그라피 X Collaboration 3rd
캘리그라퍼와 여러 영역의 아티스트가 만나 다양한 예술 세계를 공유하고 벽을 허무는 글씨21의 Collaboration 3rd는 캘리그라피와 힙합의 만남이다.힙합은 1970년대 후반 뉴욕 할렘가에서 시작된 대중음악의 한 장르로 자유롭고 즉흥적이며 패션, 음악, 댄스, 노래 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각이나 삶을 이야기하는 자전적인 랩 가사로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우리나라 힙합계의 슈퍼루키로 급 부상하고 있는 래퍼 ‘매이스원더’와 캘리그라퍼 ‘이시엽’이 함께 작업한 영상물로 젊은 두 남자의 솔직 담백한 글씨와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21세기 글씨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 모색해보자.글씨21 편집실인터뷰 영상뮤직비디오 캘리그라퍼 이시엽15 ‘ 원광대학교 미술대학 서예문화예술학과 졸업16 ‘ 허밋레코즈 소속 아티스트14 ‘ 캘리그라피 디자인그룹 <어울림> 기획위원17 ‘ 한국 캘리그라피협회 정회원 16’ ‘경의선 책거리‘ 개장기념 [한글 멋 글씨전] (경의선책거리)16’ 계절의 소리를 담은 ‘한글일일달력전‘ (세종문화회관 세종이야기)16’ 2016 한글 문화 큰잔치 ‘한글 멋 글씨전’ ( 광화문 광장)16’ 한글 어울림 전 (메가박스 코엑스점 씨네아트갤러리)17’ ‘한량전‘ (역삼동 유나이티드 갤러리) 17’ ‘2017 덕담 전’ (근현대디자인박물관 갤러리모디움)17’ ‘2017 한국캘리그라피디자인협회 정기회원전 (갤러리 이앙) 15’ 가수 ‘이바다‘ <춤추는 소녀>앨범 자켓 타이틀 제작 참여16’ 가수 ‘리썬‘ <지켜줄게> 앨범 티져영상 타이틀 제작 참여16’ 랩퍼 masewonder <굿럭> 뮤비 메이킹필름 캘리그라피 참여16’ 가수 ‘천석만,파랑망또 <맘에 안들어> 앨범 자켓 타이틀 제작 참여17’ 가수 ‘서린‘ <내곁에> 앨범 자켓 타이틀 제작 참여17’ 가수 a-tone 앨범 자켓 타이틀 제작 참여17’ ‘랩퍼 masewonder 뮤직비디오 타이틀 및 제작참여17’ ‘랩퍼 YunB <윤비> 앨범 타이틀 제작참여 16’ 메가박스 코엑스점 ‘예쁜 글씨써주기’ 행사 참여16’ 한글날 ‘예쁜 엽서공모전’ 캘리그라피 행사 참여16’ 마포구청 ‘자원봉사의 날’ 캘리그라피 행사 참여16’ 추사추모휘호대회 캘리그라피 부분 입선17’ IBK기업은행 캘리그라피 행사 참여17’ 전국 주민자치전진대회 캘리그라피 행사 참여래퍼 MaseWonder2017. 06 미니앨범 발매 Feat. YunB(Hi-lite Recrods)2017. 05 미니앨범 선공개곡 ‘Earphone’ 발매 2017. 03 ‘Nujabas Homage’콘서트 참여2017. 02 Yun.B – ‘YAYO’ Feat. MaseWonder 2017. 02 팔로알토(Hi-Lite Records) 뉴욕 공연 2016. 12 일본 HW&W Japan Tour 공연2016. 01 웹진 Kpop Stars 올해의 주목받는 아티스트 선정2016. 08. Singel Album ‘Feel so good’2015. 10. Singel Album ‘Summer Night’ 데뷔
해풍 머금고 스며든 글씨예술. 해민 박영도 현대서예 초대전 열어
서예, 캘리그라피를 다루는 매거진 글씨21 기획으로 해민 박영도의 초대개인전이 열렸다.글씨21 어플리케이션 내에 설치된 갤러리21 부스 안에서 가상의 현실 공간을 꾸며 실제 전시회를 보는 듯한 느낌으로 표현된 또 다른 전시형태다. 이번 첫 개인전에 초대된 박영도는 목포에서 활동하는 서예가이다. 원광대학교 미술대학에서 서예를 전공한 작가는 일찍부터 탈 서예를 표방하여 현대적인 서예를 꾸준히 발표해 왔다. 또한 여러 개인전을 통해 작품의 다양성 전개와 서예의 현대적 미감을 화폭에 끌어 심는 특출한 작가이기도 하다. 글씨21은 그러한 작가의 성향에 주목하여 그 첫 번째 주인공으로 작가 해민 박영도씨를 초대하게 되었다고 한다.이번 초대전의 기획을 책임진 석태진 대표는 현대 서예전의 열악함을 파악하고 21세기의 서예전이 어떻게 다뤄져야 할 것인가에 대해 냉철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서예인 스스로 서예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어떻게 전시를 다뤄야 하는지, 어떤 요소들을 끌어내야 하는지에 대해 이번 초대전으로 대안의 장을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한편, 본 전시는 6월 28일부터 한 달간 갤러리21에서 열린다.출처. MBN 뉴스 - 해풍 머금고 스며든 글씨예술, 해민 박영도 현대서예 초대전 열어<갤러리 21> 바로가기
한국-이란 1300년의 인연, 비단길展
1300년의 인연을 문화로 담아내다한국-이란 1300년의 인연, 비단길展 2017년 한국과 이란의 수교 55주년을 맞이하여 고대 페르시아 시절부터 신라와의 역사적 교류가 남아있는 이란에서 한국 전통 문화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리고 양국 간 문화적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 1300년 동안 이어진 양국의 인연을 문화로 담아내는 특별한 행사가 이란 현지에서 개최되었다.한국-이란 비단길전_포스터이번 비단길전은 ‘2017 한국-이란 문화교류의 해’를 기념한 행사로 총괄기획을 맡은 (주)정아트엔터테인먼트 대표는 캘리그라피와 한국 전통 공예를 통해 우리 한글의 아름다움과 전통 규방공예의 멋스러움을 선보이고 현지 주민들이 직접 체험해볼 수 있는 살아있는 전시를 기획하였다고 밝히며 한국과 이란캘리그라피협회의 협업으로 글씨예술의 무한한 소통과 발전을 보여준다.한국-이란 비단길전_현장사진특히 이번 전시는 페르시아어 캘리그라피 작품 28점을 포함하여 총 51점의 작품이 전시되며 이상현 작가와 이란 캘리그라피협회 작가의 퍼포먼스도 이어졌다. 뿐만 아니라 무궁화 책갈피 만들기, 민화병풍 만들기, 캘리그라피 초 만들기 등의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 및 한국전통공예전시와 국립국악관현악단의 공연 등 한국의 전통문화예술을 선보이며 양국 간의 진정한 문화교류의 의미를 더하는 시간을 가졌다.Elahe_KHATAMI문화체육관광부 정책 담당자는 ‘양국의 문화적 만남을 통해 우리 문화가 이란 국민들의 생활 속에 한층 더 가까이 다가가길 바란다.’ 라며, ‘나아가 이번 행사가 2017년 한국과 이란 문화교류의 해를 의미 있게 장식하고, 향후 양국 간 문화교류를 더욱 활성화하는 원동력이 되기를 희망한다,’라고 밝혔다.김정호_쿠쉬나메의 페르시아 왕자와 신라공주의 사랑대한민국 외교부와 이란이슬람공화국 문화이슬람지도부가 체결한 한국문화주간 행사를 통해 대한민국 캘리그라피의 위상을 드높인 이번 비단길 전을 통해 글씨로 이어지는 진정한 문화교류의 의미를 되새겨보자. 글씨21 편집실자료제공 문화체육관광부 <전시 정보> 2017 Korea Culture Week한국-이란 1300년의 인연 [비단길]展기간: 2017.07.03(월) ~ 2017.07.07(금)장소: 테헤란 밀라드타워 전시실주최: 문화체육관광부주관: 정아트엔터테인먼트 오프닝 퍼포먼스_이상현 설은향전시기획 및 디자인_박희경캘리그라피 현지 체험행사_박희경 설은향 전시 참여 작가:곽민선 김정호 김태희 명현경 박희경 반달림 설은향 육종원 이광호 이유아 조서현 최금곤 최선관 최일섭 최혜진 한재길 황갑남
채널a "서민갑부"원광대 서예과 1기생 장운식 출연
원광대학교에서 서예를 전공하고 일찌감치 캘리그라피, 수제도장 등으로 상업서예를 시작했던 장운식이 종편방송 채널a “서민갑부” (7월20일 135회) 코너에 50분간 집중 조명을 받았다. 아울러 본 프로그램은 28일 시청자마당 코너에서 시청자들로부터 “참신하고 획기적이다.”라는 평가를 받으면서 재조명을 받기도 했다. 종편방송 채널a “서민갑부” (7월20일 135회) / 장운식대학졸업 후 청주에서 활동했던 장운식은 서예학원 운영과 대학 강사 생활로는 생계를 극복하기 어려워 그 동안 해왔던 학원 경영과 대학 강의 등을 과감히 정리하고 인사동 쌈지길에 입점했다. 전각이라는 예술장르에 새김 그 자체의 아름다운 요소와, 돌 도장의 표면에 일반 대중들이 좋아 할 만 한 디자인적인 문양을 새겨 수제도장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여 현재는 연매출 10억 이상이라는 놀라운 상업적 성공을 거둔 서예계의 좋은 사례이다. 종편방송 채널a “서민갑부” (7월20일 135회)그의 영향으로 인해 현재 수많은 서예과 졸업생과 디자인 전공자들이 이 분야에 뛰어들어 일자리 창출 또한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현재 그가 만들어낸 신조어 “수제도장” 이라는 단어는 이미 고유명사가 되어버린 것처럼 도장하면 수제도장이 떠오를 정도이다. 퇴출되어 버릴 것만 같았던 도장문화, 전각문화, 전통전각가들은 이를 무시하고 업신여겨볼 지는 모르지만 이들의 노력과 창의적인 도전은 서예와 전각을 몰랐던 이들에게 칼로 새기는 도장문화를 다시금 인식시키고 향수를 자극하게 하는 놀라운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이다. 종편방송 채널a “서민갑부” (7월20일 135회) / 장운식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한국의 서예계가 대중 속으로 깊숙이 침투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서예계와 마찬가지로 대중과 함께 호흡하는 상업적 융화가 필요한 때이다. 서예, 전각가 장운식의 경우 전통의 뿌리에서 출발해 현대의 상업예술로 재 창출해낸 성공적인 사례로 기억 될 것임이 분명해 보인다. 글씨21 편집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