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된 열정! 2018평창동계올림픽 성공개최 축하공연
이상현 작가, 비슬 무용단원들과 콜라보레이션 공연 선보여2018평창동계올림픽 성공개최를 위한 축하행사가 지난 19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렸다. 식전공연과 2018 평창동계올림픽 Opening Ceremony가 메인 행사장에서 펼쳐졌다.퍼포먼스 중인 이상현 작가의 모습2018 평창동계올림픽대회 및 동계패럴림픽대회 조직위원회, 서울특별시 및 강원도가 공동으로 개최하는 대국민 행사의 개막식에 캘리그라퍼 이상현 작가는 비슬 무용단원들과 콜라보레이션으로 공연을 선보였다. 비슬 무용단과 이상현 작가의 모습비슬 무용단과 이상현 작가의 모습‘하나 된 열정!’이라는 문구를 표현한 퍼포먼스의 마지막을 이상현 작가와 이희범 조직위원장, 최문순 강원도지사가 함께 완성하는 모습을 선보였다. 글씨21 편집실
KBS 1TV \'진품명품‘에 사도세자 친필 공개
세 살배기 사도세자 王, 世子 뜻 구분하고 직접 쓰기도 해 사도세자가 3세 때 쓴 글씨 ‘임오화변(1762년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인 일)’을 모티브로 한 영화 ‘사도’가 2년 전 큰 파장을 일으켰다. 영특함이 대단했던 사도세자는 영조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지만, 너무 과도한 기대와 집착 그리고 정치로 인해 부자사이가 어긋나 비극을 맞는내용이다. 영화 ‘사도’ 포스터 (2015) 바로 이 영화의 주인공이자 비운의 주인공인 사도세자가 3세 때 쓴 글씨가 공개되어 화재다. 어환 교수(성균관대 의대, 의무부총장)는 가문에 대대로 전해지던 서첩을 최근 동아일보에 공개했으며, KBS1TV‘진품명품’에도 소개되었다. 영화 ‘사도’ 中 사도세자 모습 (2015)사도세자는 만2세 때부터 글자를 알았다. ‘왕’이라는 글자를 보고는 영조를 가리키고, ‘세자’라는 글자를 보고는 자리를 가리켰으며, ‘팔괘(八卦) 떡’을 주자 “팔괘를 어떻게 먹느냐”며 먹지 않았다. 사도세자가 3세 때인 1738년의 어느 날 경종의 장인 어유구(魚有龜·1675∼1740)가 입궐했다. 어유구 앞에서 세자가 붓을 잡고 ‘石’, ‘下’, ‘春’, ‘王’ … 썼고 신하들이 앞 다퉈 글씨를 하사해 달라고 청했다. 글씨가 쓰인 서첩 표지와 후기 영조는 사도세자가 이렇게 쓴 글씨를 어유구에게 줬다. 어유구의 아들 어석정(魚錫定·1731∼1793)이 글씨를 표구하고, 후기와 함께 서첩으로 만들어 집안 대대로 간직하도록 했다. 사도세자가 7세 때 쓴 서첩 ‘동국보묵’등이 전해지지만 이렇게 어릴 적 글씨는 이 서첩이 유일하다고 알려진다. 어유구의 8대 후손인 어환 교수는 한국고전번역원장을 지낸 이명학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 등의 도움을 받아 최근 서첩의 내용과 사연을 알게 됐다. 한편 KBS1TV ‘TV쇼! 진품명품’에서는 의뢰된 글씨의 감정가를 맞추려는 논의 중에 서첩 표지에 쓰인 ‘장헌세자친필’을 두고 장헌세자가 누구인지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이어 출연한 박슬기는 사도세자 친필 감정가인 500만 원을 맞추게 됐다. 2017. 8. 28글씨21 편집실
성인근의 글씨를 읽다
전쟁의 상처와 예술의 치유- 오창석(吳昌碩)의 명월전신(明月前身) -몇 년 전 지인에게 오창석이란 사람을 아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는 엉뚱하게도 아침드라마에 나온 주인공 아니냐며 내게 되물었다. 오창석이란 이름의 배우가 있다는 사실을 모른 나는 인터넷을 찾아 말끔하게 잘 생긴 그를 확인하고 적잖은 이질감을 느껴야 했다. 내가 아는 오창석은 사실 잘생김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똑같은 이름을 이야기해도 전혀 다른 이미지를 떠올리는 일은 잦으며 간혹 당혹스럽다. 같은 시간과 공간에서 숨을 내쉬고 있어도 한 사람이 살아온 경험의 축적은 이승과 저승만큼이나 멀다. 오창석, 60세의 초상과 자찬(自讚)돌이켜 보면 아마도 내가 처음으로 사랑한 중국인이 바로 오창석이 아닌가 싶다. 서예를 배우던 초기에 그의 전서를 보고 한눈에 매료되었고, 글씨, 그림, 전각으로 확장하면서 일관된 정신의 흐름에 인간적인 매력으로까지 빠져들게 되었다. 나보다 한 세기 이상나 먼저 사람이고 국적도 다르지만 그를 느끼고 애호할 수 있다는 일은 즐거운 행운 이상이라 하겠다. 지금도 나는 한가할 때면 다락에 숨긴 단지처럼 그의 인보(印譜)를 꺼내보곤 한다. 『오창석인보』그가 남긴 인영(印影) 가운데 눈길을 끄는 한 방의 전각이 있다. 그의 나이 66세 때인 1909년 작 ‘명월전신(明月前身)’이다. 인문은 전(田)자형 계선(界線) 안에 소전풍 양각으로 4글자를 새겼는데, 획 안에 쌓인 밀도가 매우 높고 탄탄하다. 특히 직선과 곡선, 글자와 변(邊), 매끄러움과 거침의 조화가 절묘하다. ‘明月前身’ 인영그는 인면을 새기고 난 후 인신(印身)의 상단에 기유년 2월 오(吳)에서 66세에 새겼다(己酉春仲 客吳下 老缶年六十有六)는 간략한 기록을 남겼다. ‘明月前身’ 관지또한 인신의 한 측면에는 음각으로 도려낸 공간에 한 여인이 서 있는 모습을 새겼다. 마치 감실(龕室) 속의 부처를 연상케 한다. 또 다른 한 측면에는 세로 6자, 가로 3자로 총 18자의 글자를 양각으로 새겼는데, 마치 북위(北魏) 때의 조상기(造像記)를 대하는 듯 금석기(金石氣)가 짙다. 여기에 그는 이런 내용을 남겼다. “元配章夫人夢中示形 刻此作造像觀 老缶記”“원부인 장씨가 꿈속에 나왔길래 이 돌에 조상(造像)을 새겨 만들고 기록하다.” ‘明月前身’의 조상(造像)과 조상기(造像記)이 전각의 배경은 그의 나이 16세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1850년부터 1864년까지 중국 대륙에서는 ‘태평천국의 난’이라는 대규모 내전이 일어났다. 교전은 만주족 황실의 청나라 조정과 기독교의 구세주 사상을 기반으로 한 종교국가 ‘태평천국’ 사이에 일어났다. 전란의 주요 무대는 강소성, 절강성, 안휘성, 호북성이었으나, 14년간의 긴 전쟁 동안 북서쪽 끝의 감숙성을 제외한 모든 중국의 성을 최소한 한 번 이상 태평천국군이 지나갔다. 이 내전으로 적어도 2천만~7천만 명이 사망했고, 난민 신세가 된 사람도 수백만 명에 달한다. 오창석이 살던 절강의 안길현(安吉縣)도 이 전쟁을 피해가지 못했다. 그의 나이 16세 되던 1860년, 태평천국군과 청군은 이곳에서 참렬한 전란을 치렀다. 오창석은 당시 집안 어른의 주선으로 안길현 과산촌(過山村)에 살던 장씨(章氏)의 딸과 약혼을 한 상태였다. 늘 그렇듯 전쟁이 났을 때 가장 취약한 사람들은 여성과 아이들이다. 전쟁의 속성은 예상치도 못한 광기를 수반할 때가 많으며, 특히 다 큰 처자들은 적군의 위험에 노출되기 십상이다. 장씨는 그의 딸을 예비 사위집으로 보내 급박한 형국을 피하고자 하였다. 교전이 심해지자 당시 오창석 일가는 피난을 갈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였다. 그런데 약혼녀가 다리를 다치는 바람에 오창석의 모친이 장씨의 딸을 보호하며 집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오창석과 그의 부친은 호북성과 안휘성 등을 전전하며 난을 피해 유망하였다. 그러나 전쟁이 진정되어 돌아온 고향은 폐허가 되어 있었고, 오창석의 자매들은 죽거나 흩어져 생사조차 확인할 길이 없었다. 약혼녀 장씨 또한 병고와 기근으로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살아남은 모친의 말로는 그녀의 시신을 뜰 안의 계수나무 아래에 묻었다고 한다. 오창석은 죽은 장씨를 위해 제대로 된 무덤이라도 만들 생각으로 계수나무 아래를 파보니 이미 유골조차 찾을 수 없었다. 살아남은 자로서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던 그는 참담한 마음으로 부인을 가슴에 묻을 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50년이 지나 66세 되던 해에 장씨가 꿈에 나타나 주었다. 그는 마음속에 참담한 생각이 일어 그녀를 위해 이 작은 인장을 새겼다. 인문에 보이는 ‘명월전신(明月前身)’은 사공도(司空圖)의 《이십사시품(二十四詩品)》․〈세련(洗練)〉에 나오는 한 구절로 ‘유수금일(流水今日) 명월전신(明月前身)’의 부분이다. 문학에서 가장 정결하고 순수한 경계를 나타내는 언어이다. 그는 50년 전 잃은 아내의 모습을 꿈속에서나마 보고 정결과 순수의 상징어인 ‘명월전신’에 그녀를 비유했다. 또한 무덤조차 만들 수 없었던 처참한 현실에서 전각의 형식을 빌어 조상(造像)과 조상기를 제작하여 불교적 장례를 치렀다. 그는 50년 동안 가슴에 묻어두었던 원부인에 대한 처참한 마음의 상처를 이렇게 스스로 치유한 것이 아니었을까. 성인근(본지 편집주간)
대학교탐방 경기대학교편 - 1부 흔한 서예학도의 하루
글씨21 기획‘서예’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무엇일까? 진품명품 혹은 조상님의 유품을 떠올리는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서예가 어르신들의 취미, 오래되고 낡은 지루한 것이라는 편견이 많다. 이러한 편견을 깨기 위해, 옛 것의 훌륭함을 지키되 새로운 시도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순간에도 부단히 노력하고 있는 젊은 서예학도들이 바로 그들이다. 장차 우리나라 서예의 미래를 이끌어 나가야하는 대학생들에게서 볼 수 있는 밝고 경쾌한 모습, 또 그 안에서 나름의 고민을 하며 이에 대한 해결점을 찾는 모습을 진솔하게 담고자 하였다. 이를 통해 젊은 서예인들의 서예에 대한 애정과 자긍심, 현대인들에게 잊혀가는 서예를 수호하기 위한 노력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또한 학생들을 뒤에서 지켜보며 때로는 말없이, 때로는 강한 어조로 응원하는 교수진들의 모습도 보여주고자 한다. 서예의 기본에 충실하되, 보다 다채롭고 현대적인 표현 방법을 연구하고 훈련하는 이들의 삶을 바라보며, 그들의 피와 땀을 응원한다.젊은 서예 프로젝트! 대학교탐방 1탄경기대학교 서예·문자예술학과의 문을 두드리다!- 1부 흔한 서예학도의 하루미쳐 미쳐 미쳐! 불광불급(不狂不及), 미치지(狂) 않으면 미치지(及) 못한다는 각오를 구호로 외치는 경기대학교 서예·문자예술학과를 찾아갔다.1부에서는 경기대학교 학생들의 학교생활을 엿보고, 각 학년마다의 서로 다른 분위기를 느껴본다. 이 영상에 등장하는 세 명의 교수와 아홉 명의 학생들을 통해 강의 진행 모습과 과제, 개인이 하고 있는 작업, 재료 준비 방법 등을 소개한다. 서예를 하는 사람이면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을 인터뷰로 다루고, 서예를 하지 않는 사람들이 궁금할 법한 실기 위주의 수업을 밀착 카메라 형식으로 담았다.글씨21 편집실
사랑과 행복의 기운이 넘치는 공간 캘리그라피 "소예 “
순 우리말, 소담스럽고 예쁘다는 뜻을 가진 ‘소예’를 만나보았다. ‘캘리그라피 소예’는 한국캘리그라피디자인 협회 소속인 강지혜 작가와 캘리그라피, 수묵일러스트레이션 분야에서 활동 중인 최미작가가 함께 운영하는 작업실이다. 홍대입구역 바로 앞에 위치한 ‘소예 캘리그라피’의 작업실에 들어선 순간 깔끔하게 정돈된 소품들이 눈에 띄었다. 소품들을 지나 큰 창문 너머로 시원하게 펼쳐진 경치는 그들이 작업실을 그곳으로 선정하게 된 이유를 보여주는 듯 했다. 말끔히 정돈된 작업실만큼이나 아름다운 미모를 가진 두 작가의 이야기를 들어보자.“소예”의 뜻은? 강지혜 & 최 미/ 소담스럽고 예쁘다라는 순우리말로 ‘소예’라고 합니다. ‘소예’에 관한 저희만의 또 다른 의미는 [웃을 소, 재주 예]입니다. ‘캘리그라피 소예’는 캘리그라피, 수묵일러스트레이션, 전각, 서예 등 강의와 디자인 작업을 함께 운영하고 있습니다. 함께 운영하는 작업실이지만, 스타일은 조금씩 다를 것 같은데,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강지혜 /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은 저는 디자인 전공, 최 미 작가님은 서예전공인 것 입니다. 최 미 작가가 가진 고전미와 제가 가지고 있는 현대미가 한 대 어우러져 더욱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 그것이 저희의 차이점이자 장점이라고 생각해요.강지혜 作기업/제품의 이미지를 시각적으로 체계화하는 BI, CI, 서체개발, 슬로건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는데, 처음 시작하게 된 계기와 작업할 때 가장 중점을 두는 부분은?최 미 / 캘리그라피 디자인 회사에 입사하면서 실무를 배우고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캘리그라피는 아름답게만 표현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름다움을 넘어 무엇을 담고자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닮아가고자 하는지를 고민하고 디자인해야 합니다. 또한 조화를 어떻게 잘 이뤄내는지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다양한 감성을 지닌 여러 스타일의 사람들과 함께 맞춰 살아가는 것처럼 디자인도 컨셉, 분위기, 조화를 잘 이루도록 맞춰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상품성, 광고성, 홍보성에 모두 밀리게 되죠. 어떤 분야에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먼저 파악하고, 제품에 대한 이해, 특징, 장점을 파악하여 컨셉을 잡고 서체를 분석합니다. 그리고 여러 해석으로 캘리그라피 디자인을 진행합니다. 최 미 作 캘리그라피 작가로 활동하면서 영향을 가장 많이 준 멘토가 있다면?강지혜 / ‘모노디’라는 캘리그라피 전문교육기관에서 처음 캘리그라피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그때 모노디에서 함께 근무했던 여러 작가들이 저에게는 많은 영향을 주셨던 것 같아요. 다양한 작가님들의 스타일을 보면서 저의 개성 또한 찾기 위해 노력을 많이 했었죠. 최 미 / 원광대 서예학과 수업과정 중에 캘리그라피 수업이 있었어요, 그때 지도해 주신 교수님이 ‘필묵’의 김종건 대표님이셨습니다. 캘리그라피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고, 필묵에 입사하게 되었지요. 저에게는 캘리그라피 뿐만 아니라, 인생에 새로운 시작점을 주신 선생님이십니다. 현대적인 사회 속에 한국만의 독창적인 멋을 잘 스며들 수 있게 흐름을 바꾸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제품들이 감성적인 캘리그라피 디자인으로 다시 재창조되고, 우리 일상 속에서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흐름에 김종건 선생님과의 만남은 저에게 큰 행운이었습니다. 강지혜 作요즘 최고의 관심사가 있다면?강지혜 / 몇 년 전부터 영문 캘리그라피를 조금씩 배우기 시작 했는데 영문캘리그라피가 가지고 있는 형태나 작품을 표현하는 기법 등을 연구하고 연습하고 있습니다. 꾸준히 연습하지 못해 아직 많이 부족하긴 하지만, 늘 관심 두고 연습하고 있습니다. 최 미 / 음악입니다, 캘리그라피 작가다 보니 결과물이 시각에 집중이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음악은 청각으로 표현을 하죠. 저는 작업할 때 음악을 자주 듣곤 합니다. 여러 음악을 듣다보면 글씨에 감정이입 하는데 큰 도움을 줍니다. 표현 방식이 다를 뿐, 다양한 감성을 말하는 것 같아서 요즘 더욱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최 미 作 캘리그라피 강의를 하면서 가장 큰 난관에 부딪힌 경험은?강지혜 /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수화인들을 대상으로 캘리그라피 수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 수업을 처음 시작한 작년, 수업 대상이 수화인이라고 들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을 하고 수업준비를 했습니다. 그리고 첫 수업, 저는 큰 난관에 봉착했습니다. 수화인들 옆에 수화통역사가 있었지만 소통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대화 자체가 되지 않으니 수업의 진행이 굉장히 어려웠습니다. 교육내용 하나를 전달하고 이해하는 데에 일반인들에 비해 훨씬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했죠. 또한 수강생의 연령대가 높아서 한글 교육을 받지 못한 수강생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글씨를 표현하는 것 자체가 어려웠습니다. 그때 정말 큰 경험을 하게 되었죠, 누군가에게는 당연하고 평범한 일상이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정말 많은 노력을 해야 이뤄진다는 것을 말이죠. 저는 바로 모든 커리큘럼을 수정하였고, 그 이후 어떤 수업이든 그 대상에 맞춰 연구를 하고 눈높이에 맞출 수 있도록 철저한 준비를 하게 되었습니다. 최 미 / 저의 역할은 캘리그라피를 보다 편하게 접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작업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언가를 배운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도전이죠. 캘리그라피를 쉽게 생각하는 분들이 있지만, 절대 쉽지 않습니다. 간혹 쉽게 접했다고 해서 충분한 준비 없이 상업적 캘리그라피 프로젝트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조언을 해도 잘 이해하지 못하시더라고요. 그런 모습을 볼 때 참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몇 차례 프로젝트를 더 경험하고는 본인의 부족함을 알아차리곤 다시 돌아옵니다. 다이어트만 해도 수개월에서 수년을 운동과 식이요법으로 땀을 흘리고,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않는데, 실무적 활동을 하는 것에는 더 큰 열정과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캘리그라피에 대해 얕게 생각하는 수강생을 만나게 되면, 힘들 때가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더 마음이 가게 되죠. 그래서 제가 강의나, 작품으로 더욱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여드리려고 노력합니다. 그 분들이 올바른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제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최 미 作 ‘소예’가 지향하는 최종 목표는?강지혜 & 최 미 / ‘소예’만의 짙은 색을 가진 작품을 하고 싶습니다. ‘마크 로스코’가 초창기 작품에서 자신이 원하는 자기만의 색을 찾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했고, 그 후 온전히 자신만의 작품을 만들어 냈죠. 이처럼 저희 또한 지금은 여러 가지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순수하게 또는 상업적인 시점에서의 해석 등을 표현하고자 하며 캘리그라피, 수묵일러스트레이션, 전각, 서예 등 다양한 강의와 디자인을 창작해 내고 있습니다. 관심 있으신 분들은 언제나 마음을 열고 다가와 주세요. 저희 ‘소예’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웃는 일이 많아졌으면 합니다. 강지혜 作 인터뷰 내내 웃음이 떠나지 않는 ‘소예’는 서로에게 다정한 모습을 아끼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이 작업실의 유지 비결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작업과 강의를 병행하며 지금 이 순간에도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한껏 움츠린 토끼처럼 ‘소예’만의 색을 내기 위해 발돋움하는 두 작가였다. 한 분야에 머무르지 않고 쉼 없이 시도하고 발전하기 위해 뭉친 두 여자의 시원한 도약을 기대한다. 인터뷰 김지수 기자
도심 속의 아름 다운 글씨 탐방 1
[특집]도심 속의 아름다운 글씨 탐방1 - 성균관을 찾아서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 데이트나 여행에서 맛집을 찾아다니는 맛집탐방 코스가 선풍적이다. 삶의 질이 개선되면서 이제는 어디에 가서든 시장한 배를 채우기 위해 아무데나 들어가서 먹으려 하지 않는다. 기왕이면 소문난 집에서 맛을 즐기길 원한다. 이에 인터넷을 샅샅이 뒤져 ‘맛집’을 찾는다. 유명 맛집은 무더위에도 1시간씩 대기하며 문전성시를 이룬다. 맛집에 목을 매는 이유는 무엇일까? 맛집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음식의 향과 비쥬얼, 맛은 물론이고 그 집에 대한 내력과 소소한 평가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먹거리 만큼이나 우리의 볼거리는 없을까 하고 글씨21에서 찾아 나섰다. 마침 ‘맛집 탐방’ 만큼이나 흥미롭게 ‘글씨 탐방’을 풀어낸 대학의 강의가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벚꽃이 흩날리는 봄날, 경기도 수원에 위치한 경기대학교의 한 수업에서 아주 재미난 과제가 공지되었다. 경기대학교 예술체육대학 한국화·서예학과 전공수업인 장지훈 교수의 ‘서예학개론’이다. <도심 속의 아름다운 글씨를 찾아서>라는 주제의 과제는 학생들이 도심 곳곳에 퍼져있는 아름다운 글씨를 직접 찾으러 떠난다. 책, 인터넷, SNS 등을 통해 자료를 미리 조사하고 글씨가 있는 곳을 현장 탐방한다. 그 곳에서 글씨를 직접 감상하고 평가하고 분석하여 자기만의 유익한 정보를 만들어낸다. 장지훈 교수는 “예전에 건축학개론이라는 영화를 보고 착안했다. 서예학개론이 원래 딱딱한 이론수업이라 텍스트로 가르친들 학생들이 수업 때만 잠시 익힐 뿐 크게 활용되지 않더라. 이론으로 배운 글씨의 세계를 직접 찾아다니는 것만큼 좋은 것이 없다는 판단에서 몇 년 전부터 이 수업에 아름다운 글씨탐방을 주문했다.”며 수업을 통해 서예를 전공하는 학생들이 생활 속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품격있는 글씨를 하나씩 하나씩 발견하고 인식하는 기회를 갖도록 하고 있다. 글씨21은 이 점에 주목하여 학생들이 직접 방문하고 조사한 보고서를 특집기사로 다룬다.조선 최고의 교육기관에는 어떤 글씨가 있을까- 성균관의 아름다운 현판을 찾아서 - 경기대 서예학과 2학년 송유나 · 이다혜 벚꽃이 만개해 나들이하기 좋은 계절이 왔다. 예쁜 사진을 찍으려 서울 도심을 누비다 보면, 심심치 않게 꽃들과 어우러진 고궁(古宮)들을 볼 수 있다. 우리는 그 고궁의 모습을 보고 이름이 무엇인지, 어떠한 곳이었는지를 알고 싶어 하는데, 그럴 때 제일 먼저 보게 되는 것이 ‘현판’이다. 옛 건축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판은 그 건축물의 시간과 성격을 그대로 담고 있으며, 보는 이로 하여금 건축물이 어떤 기관이었는지를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더욱이 현판에 쓰인 글씨는 해당 건축물이 지어진 시대에 살고 있던 최고의 학자, 명필가, 혹은 임금님이 하사한 글씨로 제작된 것이어서 역사적 의의가 더욱 크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수많은 고궁 중에서도 조선 당대 최고의 교육기관이었던 성균관을 찾아가 현판의 글씨를 감상해 보았다. 성균관의 현판은 전(殿)마다 모두 쓴 이가 달랐으며 현판 문구의 의미, 서체의 선정, 현판의 배치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빼놓을 수 없을 정도로 선현들의 고심이 담겨있었다. 성균관에는 수많은 현판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유교사회인 조선의 최고 교육 기관이 성균관이었다는 점을 감안하여 가장 의미가 깊은 대성전(大成殿)과 명륜당(明倫堂)의 현판을 중심으로 조사해 보았다. 처음으로 소개할 현판은 ‘대성전(大成殿)’이다.<그림1> 성균관 대성전(大成殿)의 현판성균관에서 대성전은 공자를 모시는 사당의 역할을 하는데, 공자를 비롯하여 선현(先賢) 39명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곳이다. 대성전의 ‘대성(大成)’은 공자의 시호(諡號)인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을 두 글자로 축약한 것인데, 처음부터 시호가 이렇게 길었던 것은 아니었다. 739년 당나라 현종 때에 ‘문선왕(文宣王)’이라는 시호를 시작으로, 송나라 진종 때에는 ‘지성문선왕(至聖文宣王)’이었고, 원나라 무종 때에 이르러서야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이라는 시호를 갖추게 되었다. ‘대성전’의 글씨는 당대 최고의 명필가로 통하였던 석봉(石峯) 한호(韓濩, 1543~1605)의 글씨로 전해지며, 서체는 해서(楷書)체로 쓰여졌다. 서체가 단정하고 획이 굵은 편이어서 골법을 잃은 것이 아니냐는 비평을 받기도 하였으나, 개인적으로는 공적 기관인 성균관에 걸리는 글씨인 만큼 정갈한 느낌을 주기 위한 의도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두 번째로 소개할 현판은 ‘명륜당(明倫堂)’이다.<그림2> 성균관 명륜당(明倫堂)의 현판 1명륜당은 대성전 문묘 뒤에 지어져 조선의 유생들이 문과(文科)를 준비하며 유교경전을 강학하던 장소이다. ‘명륜(明倫)’이라는 단어를 해석해보면 윤리, 그 중에서도 인륜을 밝힌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도리와 명분을 중요시했던 유학의 가르침을 그대로 배우고 익히게 하는 공간이었던 것이다. 명륜당의 글씨는 명나라의 사신 주지번(朱之蕃, 1565~?)이 썼으며, 대성전의 현판과 마찬가지로 해서체로 쓰여졌다. 주지번이 조선에 사신으로 와 있으면서 써준 현판 중 해서로 된 현판은 4점이 있는데, 그 중 명륜당의 서체는 다른 현판의 서체에 비해 획의 굵기가 얇고 정갈한 느낌을 준다. 어질게, 하지만 강직한 심성의 수련을 강조하는 유교의 가르침과 부드럽지만 무르지 않은 굳셈이 느껴지는 현판 서체가 상호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림3> 성균관 명륜당(明倫堂)의 현판 2이 현판 역시 명륜당의 현판이며, 명륜당 안쪽에 걸려있는 것으로 우리에게는 ‘주자(朱子)’로 알려져 있는 주희(朱熹)의 글씨이다. 이 글씨의 진위여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았으나, 오랜 설전과 연구 끝에 주희의 글씨로 밝혀졌다. 위에서 언급한 주지번이 쓴 명륜당의 현판과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점이 있다. 즉, 해서체라는 점, 느낌이 점잖고 단정하다는 점은 비슷하나, 이 글씨는 주지번의 글씨와 비교했을 때 육(肉)이 좀더 많으며 기필, 수필 부분이 상대적으로 더 감춰져 있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또한 하얀 바탕에 검은 글씨가 아닌, 나무의 색 그대로에 바래져 있는 금빛의 글씨를 보고 있자면 주지번이 쓴 현판보다 건물과 더욱 어울리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그림4> 성균관 명륜당 경내의 은행나무어느 정도 조사를 마치고 명륜당 앞 돌계단에 앉아 쉬고 있었는데, 눈 앞에 커다란 나무가 보였다. 제법 긴 역사를 가지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알아본 결과, 4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성균관을 지키고 있는 은행나무였다. 천연기념물 제 59호로 지정되었으며 실제로 보면 나무라는 생명체가 주는 생기, 또한 뿌리를 내린 지 400년이 넘은 고목(古木)이 주는 위엄과 푸근한 느낌을 동시에 받을 수 있다. 과거 이 곳에 머물렀던 성균관 유생들은 아마 은행나무처럼 건전하게 자라 바른 사람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따스한 봄날 성균관을 둘러보며 꽃도 보고 옛 글씨들도 둘러보니 과제를 위하여 왔다는 사실은 잊고 성균관의 정취에 빠지게 되었다. 평소에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던 현판 글씨가 이렇게 많은 의미와 정성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 우리나라의 현판을 외국인 사신이 써주었다는 사실도 신선하게 다가왔다. 대성전과 명륜당의 서체는 모두 해서체였지만 전부 다른 느낌을 주고 있었다. 하나의 필적 안에는 서체와 내용만 담긴 것이 아니라 수백 년의 시간과 글씨를 쓴 이의 정신도 담겨있다. 우리 역시 글씨를 쓰는 사람으로서 언젠간 필적을 남기게 될 것이고, 그것이 시간을 담은 뒤에 어떠한 평가를 받게 될지 모른다. 때문에 그 어떤 필적을 남기더라도 붓을 잡는 순간만큼은 부끄럽지 않게 정성과 혼을 쏟아 먼 훗날 세상에 아름다운 묵향으로 기억되는 글씨를 남겨야 하지 않을까 한다.좌) 이다혜 학생 / 우) 송유나 학생글씨21 편집실
이 작가의 思생활, 황석봉
전통서예와 현대서예의 경계를 넘나드는 서예가 시몽 황석봉“그저 서예가 생각나고, 또 생각났다. 너무나 좋고 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서예가 시몽 황석봉 선생에게는 물질적 사회에 부딪혀 몇 차례 붓과의 관계가 소홀 할 수밖에 없었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그저 서예가 생각나고, 또 생각나서 좋고 계속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서예계의 극한 위기의식을 느낀 그는 서예인들 뿐 아니라 일반인들까지도 공감 할 수 있는 작품들을 시도하게 된다. 시몽 선생과의 인터뷰를 앞두고 그에 대해 많은 자료를 찾아보았다. 이미 서예계나 매스컴에서도 노출이 되었던 분에 대해 조사를 해 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다만 다양한 활동들 안에서 그가 진정 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인지, 추구하는 것은 무엇인지가 궁금했다. Q. 선생님의 서예입문에 대해 궁금합니다. 초등학교 3학년 한문공부를 배우기 시작한 것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생각되는데요, 자세한 이야기 부탁드립니다.서산에서 태어난 저는 초등학교 3학년 때 다리에 병이 생기게 됩니다. 골수염이라는 병을 앓게 되었는데, 이 병 때문에 학교 다니는 것을 중단하게 되고 집에서만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때 동네 아이들 몇 명과 함께 서당 선생님들 집으로 모셔 한문공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대학(大學), 논어(論語), 맹자(孟子), 중용(中庸), 시경(詩經), 서경(書痙), 주역(周易) 등 사서삼경(四書三經)을 전부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3년간 병을 앓게 되고, 이후 서울로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대학교에 입학 하면서 서지학 전공을 선택하게 되었는데, 대학생활을 하던 중 문득 마음속에 무언가에 대한 불꽃같은 열정이 막연히 솟구쳤습니다. ‘그것이 바로 서예다.’ 라는 것을 깨우치고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서예가가 누구인지 수소문을 하여 학남 정환섭 선생님을 찾아뵙게 되었지요, 그 후 10년 뒤에 학남 선생님과 친구분이셨던 산정 서세옥 선생님에게 서예뿐아니라 전각, 그림까지 배웠습니다. Q. 포헌(浦軒), 시몽(是夢)이라는 두 개의 호를 사용하고 계십니다. 90년대 이전에 포헌이라는 호를 사용하시다가 90년대 이후부터 시몽이라는 호를 사용하시는데 담고 있는 뜻이 궁금합니다.우선 ‘포헌(浦軒)’은 물가라는 뜻을 가진 포(浦)와 집이라는 뜻의 헌(軒)을 썼는데, 고향인 서산이 바닷가와 가까워서 첫 번째 호를 포헌이라 짓게 되었습니다. 1990년대에 들어서 특별한 분야를 공부하게 되는데 그곳에서 꿈에 대한 깨달은 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이 다 꿈이다.’ ‘꿈도 꿈이고, 생시도 꿈이다.’라는 뜻으로 시몽(是夢)이라 짓게 되었고 사용하고 있습니다. 황석봉 作 - 나와함께 / 80x53cm Q. 선생님께서는 젊은 나이에 국전입선, 미술대전, 개인전 등 경력이 화려하십니다. 지금도 청춘이시지만, 지금보다 더 젊은 나이였던 시절에 서예는 어떤 의미였습니까?1972년 처음 국전 입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당시 최연소 입선이라는 말도 듣곤 했죠, 대학 생활을 하면서부터 서예에 입문했지만, 지금까지 서예에 대한 생각이 변함없습니다.서예가 제 인생에 전부였고, 서예 말고는 다른 것이 제 인생에 끼어들 틈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제 전공은 서지학이라고 말씀드렸었는데, 전공은 거의 제쳐놓다 시피 할 정도로 서예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좋아서 뛰어들었고, 미쳐서 하다 보니 서예를 할 때 가장 행복합니다. Q. 공직과 대기업에 근무했던 시절이 있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직장생활에서 예술가의 길로 들어서게 되셨는데, 어떠한 계기가 있었습니까?제 인생에 있어 굉장히 극적인 대목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대학시절 창경궁 안에 장서각에 구분 없이 보관하고 있던 책들을 구분하고 정리하는 프로젝트에 교수님과 함께 참여했었습니다. 거의 제 손은 안 거친 고문서가 없을 정도로 모두 보고, 또 정리하게 되었는데, 당시 학생신분이었던 저는 졸업 후 문화재관리국 장서각 사무소에 정식 사서직 특채로 입사를 하여 근무를 하게 되었습니다. 3년 정도 근무를 하며 일에만 열중하다보니 또 서예공부를 더욱 많이 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서예에 올인 해야겠다는 욕심에 사표를 내던지고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 후 1년 반 정도를 서예만 하면서 생활하다보니 시간이 많아졌는데, 시간이 많다고 해서 서예공부가 더욱 잘 되는 것도 아니고 별다른 돈벌이가 없어 춥고 배고픈 시절을 보낼 수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할 수 없이 다시 직장을 구하게 된 것이 기아자동차에 인사과였습니다. 대기업이라는 것이 아무래도 밤샘이 많고 시간 낼 수 있는 여건이 전혀 되지 않아서 이어지는 갈등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갈등 속에서 몇 년 근무를 하다가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결혼 후 3개월 만에 사표를 내게 되었지요. 그래서 지금까지도 우스갯소리로 사기 결혼했다고 이야기하곤 합니다. 내일이 보장되지 않는 삶을 살아야 했던 지난 시간들이 비록 불안했고, 집사람도 많은 고생과 희생이 있었지요. 뒤돌아보면 낭떠러지 같지만 다 살아지더라구요,, 힘들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두 번의 사표는 제 인생에서 최고로 잘한 것 같습니다.Q. 현대서예에 많은 애정을 쏟아 오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서예와 전각 뿐 아니라 문인화, 유화에 이어 입체의 장르까지 모두 섭렵하신 후 그것들을 선생님만의 것으로 표현해 내십니다. 여러 장르가 있겠지만 근래에 가장 관심 있는 작업은 어떤 것이 있는지 소개 부탁드립니다.저는 한 가지를 오래하는 성격은 아닙니다. 이러한 부분이 장점이 될 수도 있고 단점이 될 수도 있겠지만, 보통 작가들을 보면 한 가지 아이템을 정하면 평생을 하는 작가가 있고 또 많은 변신을 하는 작가가 있는데 두 가지를 놓고 어떤 것이 좋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한 가지에만 몰두하는 것은 안주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어서 매번 채찍질한다는 느낌으로 변신을 시도하고 또 변화를 추구합니다. 또 지금 어떤 작업을 하고 있다고 설명 드리기 어려운 것은, 저는 모든 작업을 즉흥적으로 하려고 합니다. 다양한 생활과 관찰을 통해 새로운 소재를 발견하게 되면 느닷없이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내곤 합니다. Q. 대한민국 서예의 발전에 있어 현대서예를 빼놓고 말할 순 없을 것 같습니다. 현대서예가 걸어온 길과 동향에 대해 선생님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전통서예로 국전의 초대작가가 된 다음, 문득 든 생각이 서예에 대한 위기의식입니다. “서예가 이러다가는 박물관으로 들어가고 말겠구나, 뭔가 서예가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겠다.” 생각했습니다.많은 고뇌 끝에 ‘현대서예’라는 장르를 시도하였습니다. 90년도에 뜻을 함께 하는 사람 몇 명을 모아서 함께 전시를 하게 되었습니다. “서화의 동행”이라는 타이틀로 ‘전통을 넘어 현대성 있는 전시를 해보자’라는 것이 시발점이 되어, 91년도에 더욱 변화하고자 하는 작가들을 찾아내어 ‘현대서예협회’를 창립하였습니다. 초대, 2대 이사장을 역임하면서 당시 3가지 캐치프레이즈가 있었는데, 1. 서예의 현대화 2. 서예의 대중화 3. 서예의 세계화였습니다. ‘서예의 현대화’는 서예가 지금같이 한자교육이 끊긴 시대에 작품에 한자만 수십자를 써놓으면 젊은 사람들이 어떻게 읽을 것이며, 접근해 올 수 있겠는가 생각하여 현대적으로 작품을 풀어놓지 않으면 젊은 세대들과는 단절이 되겠다 싶어서 현대화를 추구했습니다. ‘서예의 대중화’는 서예를 어려워하는 대중이 많다는 것을 우리가 인식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를 들자면, 글을 너무 길게 쓰지 말고 4글자를 쓴다거나, 컬러를 사용하거나, 종이재료를 화선지에만 국한되지 않는 등의 다양한 변화를 통해 대중에게 다가갈 것을 이야기했고, 마지막 ‘서예의 세계화’는 동양에서만 통하는 예술이 아니라 그 문턱을 낮춰서 세계미술시장으로까지 나아가는 목표를 정하자는 것입니다. 이렇게 나름의 노력을 들여 91년도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여 지금까지 거의 30년 가까이 이어져 왔습니다. 처음 시작했을 당시에는 새 바람을 일으키며 많은 서예가들의 기대와 응원을 받았지만, 지금까지도 현대서예를 하는 작가들이 큰 빛을 보지 못한 상황이라서 아쉬움이 많이 남았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다시 한 번 환기를 시켜 제2의 부흥을 꾀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황석봉 作 - 실중삼관 / 133x166cm Q. 그렇다면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현대서예’와 ‘전통서예’가 가진 매력은 무엇입니까?‘전통서예’는 신언서판(身言書判), 사람이 갖춰야할 4가지 중에 하나인 글씨, 문자향서권기(文字香書卷氣), 단순히 글씨를 잘 쓰는 것을 떠나 학문적 깊이는 인간의 내면세계가 묻어나오는 것이라 여기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예부터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또한 아름다운 시, 문장, 언어 등을 가독성 있게 표현하는 것이 장점이자 매력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만, 이것을 시각예술로서의 욕구를 충족하기가 부족합니다. ‘현대서예’는 현대성의 장점으로 요즘 시대의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으며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매력이 아닐까요. 황석봉 作 - 판치생모 / 133x166cm Q. 현대인들이 서예를 어려워하기 때문에 비교적 접근이 쉬운 캘리그라피가 각광을 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서 현대인들에게 ‘현대서예’의 감상법을 알려주신다면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글쎄요, 작품 감상이라는 것은 현대서예뿐 아니라 다른 예술도 마찬가지로 관람객이 해석하여 보는 재미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작가가 의도하고 작품을 하겠지만, 그 의도한 데로 설명을 하고 보면 오히려 관람객이 더 재미가 없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상상할 수 있는 여지를 줘야 하는데 상상의 재미를 뺏어버리게 되는 것 같습니다. 캘리그라피나 현대서예를 감상할 때 저는 전통서예를 공부한 후 현대서예를 했기 때문에 기본기를 강조하는 편인데, 현대서예를 기본기가 없이 하게 되면 펜글씨나 다름이 없어서 그것은 서예라고 할 수 없다고 봅니다. 기본기가 있는 상태에서 현대서예나 캘리그라피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그리고 감상법을 말하기 전에 우선 현대서예작가들이 작품을 할 때 관람자의 입장에서 관람자가 쉽게 이해할 수 있게 작품을 하는 것이 먼저 인 것 같아요. 현대서예는 어떻게 보면 전통서예보다도 감상법이 더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일반인들이 봤을 때 못 알아보더라도 “보고 즐길 수 있는, 호감이 가는 작품을 하는 것이 먼저다.” 라고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Q. ‘시몽 황석봉’이라고 하면 <서산창작예술촌>에 대한 이야기가 빠질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서산창작예술촌>이 생기게 된 계기와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이 궁금합니다. 또 이런 노력들은 일반인들에게 어떠한 메시지를 남기기 위함인가요?卷氣), 서산창작예술촌은 2011년 개관을 했습니다. 서산시에서 운영하는 문화예술공간으로 원래는 분교자리인데 폐교가 되면서 폐교를 매입하여 창작예술촌으로 만들었습니다. 서산시에서 출향 작가중 저를 초빙하여 입주작가 겸 운영자로 와있게 되었습니다. 고향에서 불러주셔서 기분 좋은 마음으로 오게 되었고, 이완섭 서산시장님의 배려로 창작작업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었습니다. 창작품은 상설전으로 운영하고, 초대전과 기획전을 열어 서산시민들에게 문화향수권을 줄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또한 남녀노소 모두 즐길 수 있는 도자, 서예체험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황석봉 作 - 마조원상 / 133x166cm Q. 굉장히 독보적인 작품을 하시는 것으로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그 때문인지 앞으로의 작업 활동도 더욱 기대가 되는데요, 계획하고 있는 작업이 있다면 살짝 들려(보여)주실 수 있을까요?앞서 관심 있는 장르에 대해 질문에서도 답했지만 저는 항상 새로운 작업을 하고 싶습니다. 굉장히 즉흥적인 편이에요. 여담을 말씀드리자면, 여기는 서산시에 소속된 공간이기 때문에 서산시 공무원 분들이 항상 작품이나 전시를 할 때 미리 계획하고 정보를 알려달라고 귀가 닳도록 말씀하시는데, 그러겠다고 대답도 하고 그러려고 해도 늘 즉흥적으로 일을 벌이게 돼서 저를 많이 힘들어 하시죠,^^ 계획도 중요하겠지만 작가는 즉흥적으로 작업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Q. 개개인마다 자신만의 작업 스타일이 다 있을 텐데요, 선생님만의 작업스타일 또는 작업에 집중할 수 있는 방법이 있으신지 궁금합니다.주로 전각 작품을 할 때는 고요한 밤에 작업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붓 작업 같은 경우는 끌릴 때 하게 되는데, 보통 글씨를 쓸 때 주변에 사람이 많으면 좀 부담스러워 할 수도 있는데 저는 오히려 관객이 많으면 단번에 끝내는 작업을 잘합니다. 작년 연말에 방송국에서 요청이 와서 퍼포먼스를 하게 되었는데 단번에 끝낸 작업들이 의외로 좋은 작품들이 많습니다.황석봉 作 - 無(무) / 133x166cm Q. 앞으로 함께 서예를 이끌어 나아갈 젊은 청년들에게 전할 당부의 말씀이나 응원의 메시지를 남겨주세요.제가 당부하면 따라할까요? ^^ 굳이 한마디 한다면 동양 고유의 예술 양식인 서예를 어떻게 재해석하여 표현해 내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새롭게 재창출하려는 실험정신이 필요 됩니다. 마지막으로 서예를 하는 젊은 청년들에게 “즐기고 미쳐라”라는 한마디를 하고 싶습니다. 미치고 즐기는 사람은 못 따라오는 거니까요. 황석봉 作 - 서산창작예술촌 상설전시작품 소통(疏通), 대한민국을 들썩이게 했던 불통(不通)의 아이콘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 뇌리 속에 소통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새겼을 것이다. 이미 전통서예에서 인정받은 실력 있는 서예가인 시몽 선생은 관객과의 소통을 가장 우선시 했다. 다소 진부한 관객과의 소통이라는 표현은 어쩌면 도태(淘汰)되고 있는 서예계에서 간과해서는 안 될 부분 중 하나일 것이다. 현대서예를 통한 서예의 재도약을 꿈꾸는 ‘시몽 황석봉’ 의 ‘思’에 대해 깊이 들여다 볼 수 있었다.인터뷰 김지수 기자 황석봉 作 - 臥禪(와선) / 62x35cm 시몽 황석봉<약력> -대한민국미술대전 연3회 특선등 초대작가-국립현대미술관 초대작가-제1회 광주비엔날레-문인화와 동양정신전-개인전30회이상(서울,파리,학고재,초대전 등)-現 서산창작예술촌 디렉터 작품소장서울시립미술관,예술의전당,경기도미술관,광주시립미술관,독일 베링거 잉겔하임 컬렉션(2012)개인전 ⦁ 2012 제14회 초대전(MULPA SPACE,서울)⦁ 2008 제13회 초대전(서산문화회관)⦁ 2007 제12회 초대전(MULPA SPACE,서울)⦁ 2006 제11회 초대전(청담미술제,청화랑)⦁ 2003 제10회 초대전(학고재)⦁ 2002 제9회 초대전(서산문화회관)⦁ 2001 제8회 초대전(청화랑)⦁ 1998 제7회 개인전(서초갤러리)⦁ 1994 제6회 개인전(금호문화재단) 개인전(갤러리 홍)⦁ 1988 제4호 개인전(파리 한국문화원)⦁ 1987 제3회 개인전(신세계백화점 신세계화랑)⦁ 1984 제2회 개인전(경인미술관/동경문화원초대전)⦁ 1978 제1회 개인전(학산도서관) 단체전⦁ 2016 Made in Asia Festival(프랑스뚤루즈까노페)⦁ 2016 KOREAN Passion Meets India Korean Cultural Centre India⦁ 2016 한글서書X라틴타이포그라피(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2015 전통이 미래다(태광그룹 선화갤러리)⦁ 2015 수상작가 특별전(대한민국미술대전 회고 한국서예박물관)⦁ 2015 항주국제현대서예법예술전(중국미숙학원전시장)⦁ 2014 문자문명전(창원성산아트홀)⦁ 2014 서로書로 서예박물관 기금마련 아트옥션⦁ 2013 세계서예 전북비엔날레(한국소리문화의전당)⦁ 1996 한글서예의 오늘과 내일전(예술의전당 기획)⦁ 1995 세계의 문자전(예술의전당 기획)⦁ 1995 ARTE CONTEMPORANED 90 EXPOSICION/Galeria Neptuno(스페인 마드리드)⦁ 1995 제1회 국제현대서법 비엔날레(중국 항주)⦁ 1992 \"92 서울국제현대서예전(현대서예협회기획 예술의전당)⦁ 1991 한국서예40대작가전(예술의전당 기획)⦁ 1991 한국현대서예협회 창립전(예술의전당/초대이사장)⦁ 1989 서울국제회화제(동덕미술관)⦁ 1987 현대미술초대전(국립현대미술관)⦁ 1985 미국Licolin Center 전시 Workshop(문공부 주관)법고창신(法古創新) - 서예, 그 전통과 현대화의 사이에서 황석봉의 작업을 중심으로 정준모 / 미술행정, 미술사새로운 미술로서의 서예와 황석봉오늘 날의 서예는 21세기라는 새로운 시간에 적응하고 관객과 독자들과 소통하기 위해서도 고매한 인품을 지녔으나 고루하지 않고 신선하고 창조적 비전을 가졌으되 경망되지 않은 그런 모습을 갖춘 선비 같은 서예가, 즉 “법고창신”하는 자세를 갖춘 서예인을 기다리는지도 모른다. 황석봉의 현대서예를 위한 간단없는 실험이나 행위가 주를 이루는 퍼포먼스들은 서예의 현대화 또는 현대서예를 위한 그의 몸짓이자 행동이었고 실천이자 실현이었다.그는 1949년 충청남도 서산시 성연면 예덕리 357에서 태어났다. 부유하지는 않지만 어려울 것 없었던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불행하게도 몹쓸 병을 얻어 평생을 불편한 다리로 살아갈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역경을 이겨내고 오늘날 서예가, 예술가로서 나름의 몫을 다하는 서단의 중견으로 그리고 새로운 서법의 전통을 세워나갈 재목으로 각광을 한 몸에 받는 위치에 이르고 있다.이후 전통문화에 대한 애정과 적지 않은 한문 실력으로 내공을 다져가던 그는 1969년 학남(鶴南) 정환섭(鄭桓燮)을 사사하기 시작하면서 서예의 아름다움에 빠져들기보다는 삶의 원리와 자연의 이치를 담고 있는 서예의 본령을 공부하면서 그는 더욱 더 서예의 깊은 맛에 빠져들 수 있었고 성균관대학교에서 서지학을 전공하면서 보다 깊은 한학의 세계로 빠져들게 되었다. 그 계기는 학부시절 녹록찮은 한문 실력을 눈여겨본 지도교수의 추천으로 30만권의 고서가 있는 창경궁 장서각에서 고서들을 활자와 연도별로 분류하는 작업을 하면서 말로만 듣던 책을 직접 읽어 보게 되면서부터다. 이때의 경험으로 그는 필사본에 나타나는 서예와 활자본에서 주는 정통활자체의 변화 그리고 연대에 따른 각각의 특성을 구분하는 안목을 얻을 수 있었다.사실 그는 학남을 사사하면서 전통서예의 새로운 가능성을 고민하기 시작한 듯하다. 왜냐하면 학남은 바로 한국근대서단의 거목인 소전(小田 또는 小筌) 손재형(孫在馨, 1903~1981)의 애제자로 소전이 행하고자 했던 전통과 현대의 접목과 전통을 바탕으로한 서예의 현대화라는 명제를 실천했던 이다. 이러한 학남의 예술관은 포헌 황석봉에게 이어진다. 따라서 포헌은 전통필법을 제대로 이해하고 습득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새로운 실험의 바탕에는 언제나 전통이라는 기초가 튼실한 오행서체를 익힌 후의 일이다. 따라서 그의 스승과 스승의 스승인 소전의 맥을 잇는 동시에 지금껏 새로운 서예, 현대적인 서예를 구현하고 실천하는 일에 몰두하게 하였다. 그의 초기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서예부문에 출품하여 예닐곱번 입상하는 작품들은 이런 전통서체를 습득하기 위한 연습과정이었다면 1982년 대한민국미술대전으로 개칭한 후 출품하여 연 3회 계속해서 특선의 영예를 안게 되는 작품들은 갑골문이었다. 그는 수련과정을 통해서 서예의 원류이자 모본은 갑골문이라는 것을 깨달았으며 그 갑골문은 절대불변의 동양예술의 이상이자 원형인 동시에 현대서예의 파격에도 불구하고 원칙이라는 사실을 인식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1981년부터는 마지막 문인화가라고 불리는 산정(山丁) 서세옥(徐世鈺)을 사사하면서 끝없는 문인화의 깊이와 절제미를 공부할 수 있었다. 이렇게 당대를 풍미한 두 걸출한 스승을 모실 수 있었던 포헌의 행운은 그를 더욱더 현대서예의 정립과 발전이라는 명제로 자신을 몰아가는 동력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스승을 넘어서야한다는 강박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사실 수묵화나 서예는 모두 애초에 추상적이다. 자연이나 대상의 색체를 거부하고 먹색하나에 의존해서 삼라만상의 내면을 그려낸다는 것이 그러하거니와 한편으로는 작가의 심오한 사상이나 자연관을 그대로 담아낸다는 점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리고 서예의 최고 원형은 갑골문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한자의 원리를 알지 못하면 갑골문의 해독은 거의 불가하다. 따라서 서체의 원형서에도 불구하고 가장 추상적인 것이다. 따라서 소전이후 학남을 잇는 포헌에게는 전통적인 ‘읽는 서예’에서 ‘보는 서예’로 전환하는 토대를 갑골문에서 찾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갑골에서 회화성을 그리고 초서에서는 음악성과 신체성을 구현하는 폭넓은 관심을 보여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새로운 재료 즉 서예에서는 금기시하는 재료들을 과감하게 도입해서 새로운 서예의 가능성을 실험하기도 한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커다란 화폭에 몸을 던져 그 궤적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퍼포먼스를 갖기도 한다. 그의 이러한 열정은 서예의 현대화와 현대인들과의 교통하는 서예를 꿈꾸기 때문이다. 그의 이러한 열정은 한편으로는 뜻을 같이 하는 서단의 선후배들을 규합해서 그룹활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물파’나 ‘한국현대서예협회’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런 집단적인 운동을 주도할 뿐 어느 사이엔가 슬그머니 ‘혼자’로 돌아와 스스로를 갈고 닦는데 여념이 없는 ‘나 홀로’형의 작가이기도 하다. 아마도 이는 자신의 내부로 파고들어가는 스스로의 공부 방법 때문이다.그간의 그의 작업을 살펴보면서 느끼는 것은 많은 방황과 실험에도 불구하고 ‘이거다’라고 누구도 답을 줄 수 없는 화두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렇게 집요하게 답을 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현대서예란 무엇일까라는 실체를 얻고자 하는 몸부림의 결과이다. 그는 그 원형을 전서에서 찾고자 했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초서의 행위성을 간파하면서 그림이면서 서예인 추상 충동적 작품을 완성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류의 작품들은 현대라는 의미를 추상이라는 의미와 행위라는 추상충동으로 이해함으로써 나타난 작품들이다. 따라서 외형적으로는 먹으로 그린 서양의 추상 표현주의 작품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러나 그들의 추상표현주의는 사실적인 묘사위주의 그림경향이나 개념적인 작품들에 대한 반발과 실존주의 등에 경도되어 나타난 화풍으로 서체추상의 포헌서예와는 외형상 흡사하나 그 출발이 다르다. 그리고 재료에서도 서양회화의 억센 붓과 캔버스라는 굵은 표현은 동양 재료들이 갖는 섬세하고 고운 표면과는 질적으로 달라 둘을 비교해 보면 매우 심약해 보이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의 이러한 실험은 다시 재료의 탐구로 이어졌으며 전통적인 재료들을 버리고 글자의 지지체인 종이를 버리고 다양한 질감을 갖는 마분지나 포장지, 골판지 등을 이용하면서 새로운 가능성을 실험한다. 재료의 물성을 극대화하면서 행위에 실린 몸짓의 크기와 무게는 보는 이들을 압도한다. 또 퍼포먼스의 경우도 그 스케일이나 관객들의 관심에는 매우 근접하게 접근할 수 있었지만 일회성과 현장이라는 한계로 인한 작업이 끝나고 나면 한바탕 춤을 추고난 무용가의 허탈함 같은 것이 밀어 닥치기도 하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었다.그것은 다름 아닌 현대미술이라는 움직이는 물체를 붙잡아 매려는 시도 때문이다. 오늘은 내일의 과거일 뿐이다. 오늘에 최선을 다하는 것만이 해답일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해법을 생각해 본다면 포헌의 지금까지의 작업을 정리하는 일이다. 즉 새로운 포헌의 예술을 정립시켜야 할 때가 온 것이다. 그 해답으로 많은 실험의 성과들을 스스로가 정리하고 다듬어 이제는 버리는 것이다.그 버림을 통해 얻는 여백과 정갈함은 마치 조선시대의 선비들이 거처했던 사랑방처럼 간결하고 정갈한 허허로운 여유를 담아 낼 것을 권하고 싶다. 행위가 많아질수록 화면은 복잡해지고 산만해지기 십상이다. 특히 매재의 실험에서 얻은 선염이나 발묵을 거부하는 재료에 대한 실질적인 접근과 함께 전통문인화의 정신을 이어 필획 한둘만으로 화면을 비움으로서 채워진, 꾸미지 않고 덧대지 않은 작품들로 현대서예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볼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리하여 그의 작품에서 ‘말은 마음의 소리이며 글씨는 마음의 그림이다(言心聲也書心畵也)라는 법언의 말씀을 볼 수 있었으면 한다.
책으로 하나 되는 곳, 경의선 책거리
경의선 책거리 1주년 기념 <저자 데이 책축제> 개최독서의 계절 가을, 경의선 책거리에서는 ‘책으로 하나 되는 곳, 경의선 책거리’라는 슬로건으로 ‘저자데이 책 축제’가 열렸다. 이번 축제는 경의선 책거리 개장 1주년을 맞아 열리는 기념 행사로 지난 1년간의 발자취를 돌아보고, 시민들과 함께 책 문화예술을 통한 축제를 만들어 갈 계획이다. 이번 축제에서는 ‘윤동주, 한글을 만나다.’ 타이포그래피+캘리그라피 야외특별전시, 20명의 시민과 함께하는 ‘윤동주와 소통하다’야외 배너전시가 이뤄졌다. 경의선 책거리 250m 전체가 윤동주의 시와 글자로 뒤덮였다. 5인의 전문가들이 재해석한 캘리그라피 및 타이포그라피는 경의선 책거리 건물 일부, 야외계단, 와우교에 표현되었다. 또한 축제를 찾은 시민들은 윤동주 시인의 작품을 직접 캘리그라피로 작품을 만들어 경의선 책거리 야외에 전시하여, 일반 관람만이 아닌 글을 감상하고 직접 글을 캘리그라피로 옮겨 체험하고 작품을 만들어 전시하여 또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박홍섭 마포구청장은 “책과 독서는 부모의 학력과 대물림을 끊을 수 있는 대안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축제로 책과 좀 더 친해지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라고 전하며, 도쿄에 있는 간다(神田)고서점거리를 가보면 150여개 서점이 모여 있는 세계 최고의 독서거리가 있는데 ‘경의선 책거리’가 이를 뛰어넘어 세계최고라는 말을 들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이날 개막 행사에는 개회사와 축사에 이어 ‘경의선 책거리와 함께하는 윤동주 감상문/UCC공모전’의 시상식과 말로의 재즈공연 등이 이어졌으며, 지역 주민들과 관광객들이 다수 참여한 가운데 성황리에 마무리됐다. ‘저자 데이 책축제’는 10월 17~19일 2일간 진행되었다. 2017. 11. 1글씨21 편집실
제6회 한국캘리그라피디자인협회 정기세미나
“캘리그라피 + 오늘 Today” (사)한국캘리그라피디자인협회(이하 KCDIA)는 지난 11월 19일 충무아트센터 컨벤션홀에서 ‘캘리그라피+오늘’이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개최했다. 오늘날 캘리그라피를 대중과 호흡하는 문화, 예술의 세계로 이끌어온 ‘KCDIA’는 캘리그라피의 역량을 강화하고 대중과 전문가들에게 이해의 폭을 넓히는 기회의 장을 만들기 위해 매년 국내외 전문가들을 초빙하여 세미나를 개최하고 있다.여섯번째를 맞이한 이번 세미나는 ‘캘리그라피+오늘’이라는 주제로 캘리그라피의 현주소를 조명하였다. 발표는 여태명(원광대 서예문화예술학과) 교수와 영화 포스터(암살, 아가씨) 등을 제작해 온 김혜진 대표와 한태상(서울교육대학교 미술과) 명예교수가 참가하여 진행했다. 오후2시에 시작된 세미나는 6시까지 총 3강으로 이루어졌다. 1강에서는 한국캘리그라피디자인 협회 명예회장인 여태명 교수의 캘리그라피 작품의 가독성과 한글의 정체원리에 대해 이야기했다. 현재 캘리그라피에 다양한 표현이 이뤄지고 있는데, 보다 읽기가 쉽고 아름다운 글씨로 표현 될 수 있는 문화가 형성 되길 희망했다.여태명 교수의 발표 이어 2강에서는 다수의 영화 포스터를 제작한 (주)꽃피는봄이오면의 김혜진 대표의 발표가 이어졌다. 김혜진 대표는 캘리그라피와 디자인이 만나는 영역의 경계점에 대해 사례를 통해 세부적으로 발표했다. 또한 가독성과 영화 시나리오와의 이미지가 종합적으로 고려된 ‘조화’가 최우선시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전했다.김혜진 대표의 발표 3강에서는 한태상 명예교수는 문자예술과 서예, 추상서예로의 전환에 대한 생각을 작품을 통해 참여자들과 함께 소통했다. 또한 지,필,묵만이 존재했던 전통서예의 글씨와 현재 다양한 용구, 재료의 사용으로 변화·확장되고 있음을 명시했다.한태상 명예교수의 발표 캘리그라피의 올바른 문화 형성의 방향과 디자인 속에서 이야기되는 캘리그라피의 예술적 가치, 그리고 서예예술 문화의 고민을 깊이 있게 이야기하였으며, 캘리그라피의 대중성이 날로 확장되고 있는 시점, 이번 세미나는 전문가, 관련 전공학생과 일반인들에게 까지도 많은 관심이 집중되었다. 2017. 11. 27 김지수 기자
대학교탐방 경기대학교편 - 2부 우리 과에 왜 왔니
글씨21 기획 젊은 서예 프로젝트! 대학교탐방 1탄경기대학교 서예·문자예술학과의 문을 두드리다!- 2부 우리 과에 왜 왔니2부에서는 서예가 꿈나무들의 과거, 현재, 미래를 엿본다. 학생들에게 서예·문자예술학과에 입학한 이유와 서예를 시작한 후 기억에 남는 일, 서예를 지키기 위한 방안과 자신의 롤모델, 졸업 후의 목표 등을 들어본다. 재학생들이 느끼는 서예학도로서의 즐거움과 어려움을 인터뷰를 통해 간접체험해 볼 수 있으며, 교육 차원으로의 서예가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도록 한다. 다섯 학생 개개인의 개인적인 이야기와 각자의 개성을 느낄 수 있고, 더불어 새내기의 거침없는 의지와 언변, 고학년으로 갈수록 차분하고 조심스러워지는 것을 볼 수 있다.글씨21 편집실